山房夜話 中 수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인도 땅에서 오신 달마스님의 가풍은 매우 엄격해서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알아버렸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옆길로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수행에(修行)을 해서 되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마른 고목처럼 방석에 앉아 참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선을 앉아서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선대(先代)의 종지(宗旨)에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말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료. 용담(龍潭)스님이 스승인 천황(天皇: 748∼807)스님에게 묻기를,'제기 오랫동안 스님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도 제게 심요(心要)를 보여주시지 않았읍니다'라고 하자, 천황스님은,'그대가 차를 갖고 오면 나는 차를 받아 마셨고, 그대가 문안을 드리면 나는. 머리릅 끄덕였다. 이것이 그대에게 심요를 열어 보여준 것이 아니겠는가? ' 라고 하자, 용담스님이 드디어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공안은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명쾌하고 쉬운 것인 듯하지만 우리 종문(宗門)의 입장에서 보면 옆길로 샌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위산(위山)스님이 향엄(香嚴)스님에게, 부모가 그대를 낳아주기 이전의, 그대의 참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자 향엄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도리어 위산스님이 설명해주기를 바랬는데, 위산스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향엄 스님은 평소에 공부했던 것을 모두 버리고 남양(南陽)땅으로 들어가 한 암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를 지내다가 갑자기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단박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깨달음이 있기까지는 수행한다는 티를 내지 않고 묵묵히 암자에 기거하면서 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문제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노력해서 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깨닫지는 못하고, 많은 세월을 지내고서야 깨달았지만 그가 깨달은 깊은 경지가 달마스님이 전한 경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인들처럼 진실하지 못하고, 둘째는 생사(生死)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껴 그것을 일생의 대사(大事)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랜 세월 동안 잘못 익힌 수행 방법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화두를 들기는 하지만, 방석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집니다. 이것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심신(心身)이 채 갖추어지지 않은 때문입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설사 미륵(彌勒)부처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런 폐단을 다 없앨 수 있겠습니까?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 탓하지 않고 도리어 불법(佛法)이 쇠퇴하고 총림(叢林)의 운이 다했다고 핑계를 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처지는, 훈련을 시켜주는 스승도 없고 일깨워 주는 친구도 없으며, 주거도 불편하고 음식도 먹을 수가 없으며, 법도도 없고 주위도 시끄럽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수행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나오고부터는 도(道)를 배운다는 사람치고 이것을 구실로 삼지 않는 자자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땅을 갈고 김매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제 때에 비가 오지 않는 것만 탓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게 하고서도 가을에 결실이 풍성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도를 배우는 사람이 환경의 좋고 나쁨만을 따지기만 합니다. 그러다 한 생각이 어지러워지면 환경 탓만 할 뿐입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 사람이 만겁의 생사 굴레에 얽히고 결박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탓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대는 듣지 못했습니까? 설산(雪山)의 늙은 사문〔석가모니 부처님〕이 만승(萬乘)이나 되는 존귀한 영화를 모두 버리고 6년간이나 얼음위에 누워 고행을 하며 황벽(黃蘗) 나무를 씹으면서 춥고 배고픈 가운데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수행하다가 드디어는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또한 부처님 이후 서천(西天)땅의 28조사(二十八祖師) 모두가 바위나 동굴 등에 거처하였옵니다. 혹 세상사에 섞여 있어도 진심(眞心)을 잃지 않고 참다운 수행을 어김없이 해서 모두 스스로 깨달아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했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중국으로 오고 백장(百丈)스님이 탄생하기 이전에 우두(牛頭)스님이 옆으로 한 가지 나와 남북종(南北宗) 양파로 나뉘어 졌읍니다. 그 영향으로 수행자들은, 허리에는 낫을 차고 어깨에는 삽을 걸치고는 화전(火田)으로 나가 농사를 지어 직접 밥을 짓고 절구질을 했으며, 너절한 누더기 를 걸치고 구걸을 하였읍니다. 철석같은 신심(身心))과 빙상(氷霜)같은 신념으토 불조(佛祖)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한 어깨에 걸머졌읍니다. 그래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가야할 곳을 스스로 갔기 때문에 도달한 곳이 언제나 정확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 곳에 5산10찰(五山十刹) 같이 으리으리한 거처와, 3현(三玄)이니 5위(五位)니 하는 괴이 하고 복잡한 이론과, 방(放).수(收).살(殺).활(活)의 구별 및 염(염).송(頌).판(判).별(別) 같은 복잡한 이론이 있었겠읍니까? 원래 흠집이 없는 옥(玉)은 갈고 닦지 않아도 되는데 무슨 연장이 필요하겠습니까? 안목이 처음부터 올 바랐던 것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이 총림(叢林)을 건립한 이래로 광대한 전답과 큰 집은 많아졌지만, 수행하는 자세는 퇴보하여 잘못과 허망이 도리어 늘어 났읍니다. 그 결과 쓸데없는 기강만 날로 번거로와졌고, 실제로 예의는 나날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미 수백년 전에 선풍(禪風)의 진면목을 제창하신 임제(臨濟).덕산(德山).운문(雲門).진정(眞淨:1025∼1102)같은 스님은 분하고도 분한 기상으로 노하여 마치 음란한 여인을 보듯이 꾸짖었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의 근본은 체득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입으로만 깨달으려 애써 결국은 서로들 속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또 삿된 스승이 있어 제방(諸方)을 깨우치고 선(禪)을 말한다는 것이 마치 섭공(葉公)이 용(龍)을 좋아하듯 하고, 조창(趙昌)이 화조(花鳥)를 그리듯 사이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섭공과 조창 자신이 잘못되었는데, 더우기 그들의 흉내 따위나 내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것을 진실인 양하는 잘못이 오늘날엔들 없다 하겠읍니까? 이렇게 보건대, 참답게 구하고 실제로 깨달은 인재를 만나는 것이 오늘날에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생사의 정망(情妄)과 무명(無明)의 결습(結習)이 끊임없이 일어나 조금도 쉴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열심히 생 사를 끊는 듯한 정념(正念)으로, 원수와 적을 만난 듯이 화두(話頭)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생(生) 두 생(生)을 끊임 없이 눈을 부릅뜨고 화두를 들어 깨닫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섭공과 조창 같은 부류에게 미혹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3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가, '증오와 사랑만 없다면 깨달음이 뚜렷이 명백해질 것이다'라고 한 것과, 영가대사(永嘉大師)가,'망상도 제거하지 말고 진실도 구하지 말라'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대면서 '이것이 바로 깨닫는 이치인데, 무엇 때문에 한 생(生) 두 생(生)씩 육체를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괴롭혀가면서 도를 얻으려 하는가?'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이 유행하면서 섭공, 조창같은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났고, 끌내는 이 마음을 그칠 수가 없었읍니다. 때문에 영가스님이, '범재(法財)를 손상시키고 공턱을 소멸하는 것은 바로 사량 분별〔心意識〕때문이다'라고 했읍니다. 시람들이 올바른 깨달음은 구하지 않고 헛되게 사량 분별로 따져 이해한 그럴듯한 말들을 영가스님이 통렬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을 만 사람이 진실인 양 전하였으나, 사이비는 어디까지나 사이비지 진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그 때문에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선은 성실하게 해야하고 깨달음은 진실하게 깨달아야하니, 염라대왕은 말 많은 것을 개의치 않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옳은 것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진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되지 못하지만, 결코 경솔하게 섭공과 조창의 전철을 밟지는 않습니다. 평소 다른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東語西話〕참선에 대해 비평한 것은 내 스스로 깨달은 법문(法門)일 뿐이지, 아는 것을 가장해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남들이 혹 믿어준다 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또 믿어주지 않는다교 해서 어찌 노하겠습니까? 또한 믿고 안 믿고는 모두 그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으니, 어찌 제가 기뻐하거나 노하겠습니까? 오직 같은 길을 가는 사람만이 알아줄뿐입니다. 혹 허망히 속인다고 나무란다 해도 어찌 싫어하겠옵니까?" 방편이나 점수로도 깨달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참선으로도 깨닫지 못한다면 다른 방편을 사용해서 깨달을 수 있는지요? 예를들면 점수(漸修)하여 깨닫지 못하면, 향후 세계에서라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다시 깨칠 수 있겠읍니까 !" 나는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당사자가 직접 체험해야 하는 일입니다. 남물에게 의지해서 될 수도 없는 일이고, 딲히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 때문에 미혹에 빠지는 것도 제 스스로 그렇게 만드는 것이고, 깨우침도 반드시 자신에 의해 달성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과 달마대사라 할지라도 그대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요즈은 스승들도 참선하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많이들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근기(根機)에 알맞는 방법을 쓰고, 방편을 자세하게 베풀어 후학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들은,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해야 할 큰 문제로는 삼지 않고, 선(禪)을 신속하게 머리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고작 방편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알음알이로 고금의 공안을 통하고서 관문을 뚫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사(生死)라는 기장 크고 견고한 관문은 뚫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통과한 것은 고작 언설(言說)의 관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은 수행에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본분을 스스로 해치는 짓입니다. 만약 진실하게 생사대사를 끊으려는 올바른 사람이라면 비록 달마대사가 세간에 출현해서 모든 불조의 핵심되는 도리를 가져다 8식(八識) 가운데 놓아 준다해도, 뿌리까지라도 모두 토해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반드시 본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반푼어치도 다른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없읍니다. 비록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직 정념(正念)만을 견고하게 지니고, 살아도 깨달음과 함께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태도로 절대로 알음알이를 갖고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와같이 뜻을 지킬 수 있다면 한 생 두 생이 흘렀다 해도 깨닫지 못할까 절대로 근심할 필요가 없읍니다. 개중에는 고요하고 묵묵히 죄선하다가 번뇌 망상이 쉴 때, 문득 그럴듯한 도리를 깨닫게 되면 획철대오 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여러 경전 속에서 증거를 대고, 마음속에는 그 사이비 도를 간직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에 의한 깨달음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읍니다. 생사문제를 견성(見性)하지 못했으면서도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해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깨달았다고 인가(印可)해주길 바라지만, 이것이 결국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또 어떤 무리는 6식(六識)을 자기의 주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리고는 옛 사람이 잘모르고 한말을 끌어다 증거로 삼습니다. 참선을 하더라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자는 생사의 언덕에서 꼼짝도 못할뿐 아니타, 밝은 대낮에도 눈을 부릅뜨고 혹 좋지 못한말이라도 들으면 그냥 화가 나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 다른 사람이 그를 비방이라도 하면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일어나 상대방과 다투면서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데, 이런 것은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평생 도를 배웠으나 깨닫지 못하면, 더 이상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정념(正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정념을 잃어버렸다면, 훗날에도 깨달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티끌이나 모래처럼 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수행을 해도 깨달을 수가 없읍니다, 이것은 좋은 전답을 갖고도 김을 매지 않으며, 오곡이 저절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므로, 이런 사람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읍니다." 참선했는데도 깨닫지 못하면 다른 방편을 써도 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평생동안 참선을 했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과보가 있어서 입니까?" 나는 말했다. "콩을 심은곳에서 삼이나 보리가 나는 법이 없고, 풀뿌리에서는 소나무나 대춘(大春)나무가 돋아나지 않습니다. 참선은 효과가 걸으로 나타나지 않는 공부라고는 하지만, 참구하기만하면 됩니다. 오히려 참구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영명스님이 '참선해도 깨닫지 못하고 배워서도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저 듣기만 해도 영원히 도의 종자가 된다. 그러면 어느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생생토톡 사람몸을 잃지 않는다. 그러다 깨달음이 터지기만 하면, 한 가지를 들어서 천 가지를 깨달을 것이다'고 한 것은 모두 진실한 말씀이라 하겠읍니다. 속담에는 '한 조각의 착한 일을 잠시만 닦아도 많은 이익을 얻는다'했고, 부처님 말씀에는 '다섯번만 부처님 명호를 불러도 무수한 보물로 보시한 복보다 훌륭하도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헛된 말들이겠옵니까? 최초에 발심한 동기는 생사대사의 해결 때문이었는데, 2,30년씩 참선을 해서 설사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따로 방편을 구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을 하지말고, 모든 망한 생각을 끊고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그리고는 참구하는 화두(話頭)만을 향하여 꿋꿋하게 정진하여 살아도 화두와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도록 해야 합니다. 깨닫는데 걸리는 시간이 3생(三生)이니 5생(五生)이니 10생(十生)이니 100세(百世)니 하는 말 따위에는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읍니다. 만일 확실히 깨닫지 못했다면 절대로 쉬지 마십시오. 이런 각오만 있다면 일대사(一大事)를 해결치 못할까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세의 중생이 한 순간만이라도 불퇴전할 생각을 하면, 그것이 바로 정각(正覺)이다'고하셨으니, 이 말씀은 참으로 극진하다 하겠읍니다. 요즈음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처음 발심을해도, 그발심이 온당하질 못합니다. 다만 새로운 환경에 처해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날까만 두려워합니다. 그러다가는 참된 주인공을 찾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 때문에 이리저리 생각생각하여 생사대사를 신속히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구 치닫는 생각이 오히려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생사대사를 깨닫겠다는 바른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허망한 생각이 스스로를 가리워버리고 맙니다. 그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생사대사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생각을 바꾸게 되는데 거기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읍니다. 첫째 부류는 잘난체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총명함을 여전히 자랑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니 스승과 벗이 그의 잘못된 깨달음을 꾸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오직 입으로만 깨달으려 하므로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知解〕에 빠져들어갈 뿐입니다. 사이 비 반야(般若)로써 6식(六識) 속에서만 허우적거리면서 스스로 획실히 깨달았다고 말하며,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저 입으로 지껄이고 귀로 듣는 것만 복잡하게 많아질 뿐입니다. 교화의 방편이 쇠퇴하자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둘째 부류는 총명하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양 스승에게만 의지하는데, 잘 안되면 참선은 효과가 겉으로 드러나는 공부가 아니어서 전혀 영험이 없다고 합니다. 오직 10년 20년을 계속해도 확실한 효과가 없는 것만 한탄스러워 하며, 갑자기 여태껏 해오던 수행법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염불(念佛)을 가장 빠른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염주만 세면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혹은 '일대시교(一代時敎)는 부처님 입으로 선양한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참선을했어도 깨닫질 못했으니, 비록 참선하는 것만은 못하다 해도경전을 연구하는 것이 그래도 선인(善因)을 심는 것이다'하며, 경전을 읽는 것이 힛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사람만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 싫어합니다. 그런 사람은 숨어서 더러운 얼굴로 초의(草衣)를 입고 직접 일을 하며 밥을 지으며 육신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혹은 비밀스런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죄와 허물들을 침회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바른 믿음〔正信〕을 어기고, 이단(異端)에 깊이 빠진 것입니다. 세째 부류는 원래 믿음은 없었는데, 어쩌다 인연(因緣)이 닿아 발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잠시도 좌선은 하지 않고 8식(八識)을 기반으로 해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집니다. 화두도 깨닫지 못하고 수없는 생각을 때도 없이 일으킵니다. 이들은 채 3∼4년도 참선을 계속하지 못하면서도, 경솔하게 참선으로는 깨닫지 못한다고 하며 내동댕이쳐 버립니다. 이들은 할 일 없이 생각마다 6진(六塵)에 헤매고, 마음은 몹시 산란합니다. 죽음의 문을 향해 가면서도 반성할 줄을 모롭니다. 총림(叢林)의 기풍이 시들어가고 조사의 도가 희미해진 때에 침선하는 수행자가 끝내 물러서지 않겠다는 철석같은 몸과 마음〔身心〕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위에서 지적한 3가지 오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마음의 큰 뜻을 잃었으니, 부처님과 조사들이 더욱 불쌍히 여길 것이고, 총림이 망하는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일 것입니다. 침선을 하여 신심을 내는 것은 천생에 한번 만나기 어려운 것이고, 백세에 한번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한 순 간에 진실한 해탈을 얻으려 하지 않으면, 한 생각 굴리는 사이에 번뇌의 구름이 수만 리나 덮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반야의 씨앗이 다시 마음에 들어가길 바라지만, 이것은 마치 썩은 곡식에서 싹이 움트길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데 있어 요구되는 마음자세는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옛 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참선을 할때 마음 씀씀이가 다릅니까, 같습니까?" 나는 말했다. "옛 사람이 도를 배울 때는 도를 얻을 것인가, 얻지 못할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읍니다. 다리가 문턱을 념기 전에 도적질하는 마음을 단번에 잘라서 다시는그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했읍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듣은 순전히 훔치려는 마음으로 주인을 삼습니다. 이것이 옛과 지금의 도닦는 사람의 뚜렷하게 다른 점이라 하겠읍니다. 생사란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훔치려는 이 마음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러면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훔치려는 이 마음이 완전히 없는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그대를 위해 비유를 들어보겠읍니다. 생사는 큰 병이며, 불조(佛祖)가 말씀하신 가르침은 훌륭한 약입니다. 훔치려는 마음은 약에 의해서 치료되고, 생사의 큰병은 불조의 언교(言敎)로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고금이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생시의 큰병은 치료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옛 사람들은 순수하게 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신통한 효험을 보았고,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이 약을 다 복용하지 않았는데도 계속해서 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질병까지 유발시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빼어난 의사라도 손을 댈 수 없읍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훔치려는 마음이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바로 알음알이〔識情〕가 훔치려는 마음입니다. 본래부터 갖고 있는 법재(法財)를 없애고, 공덕을 소멸시키는 것은 모두 이 압음알이〔心意識〕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가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재 (法財)를 손상 시키고 공덕을 까먹는 까닭은 모두 이 알음알이〔心意識〕때문이다'라고 했읍니다. 또 요즘에 귀감이 될 만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어 보겠읍니다. 6조(六祖)스님의 경우 황매산(黃梅山)의 5조 홍인(弘忍)스님에게 오자, 그저 방앗간에서 일하게 했을 뿐입니다. 또한위산(위山)스님은 백장(百丈)스님의 문하에서 단지 전좌(典座)의 소임을 보았을 뿐이고, 양기(楊岐: 966∼1046)스님은십여년 동안 오직 후원 일을 총괄했을 뿐입니다. 연조(演朝) 스님은 총림에서 방아찧는 일을 했고, 운봉(雲峰: 998∼1062)스님이 화주(化主) 노릇을 한 인연과, 설두(雪竇: 990∼1052)스님이 변소 청소를 했던 일, 자명(慈明: 987∼1040)스님이 선소(善昭: 947∼1024)스님께 참례하자 선소스님이 희롱하고 웃으며 꾸짖기만 했던 일, 황룡(黃龍):1002∼1069) 스님이 자명스님 에게 묻다가 욕만 들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차별적인 인연이 뒤섞여 나오고, 위.순(違.順)의 경계가 발생하였읍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막힌 곳을 분명하게 뚫어주어 훔치는 마음을 다 없애주고, 각각의 상황에 알맞게 잘못된 점을고쳐 지극한 이치로 귀결시켰던 것입니 다. 그러니 어디로 보나 도가 아닌 것이 없었읍니다. 요즘 사람들이 훔치는 마음을 곧 없애려 하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문제를 절실하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공적 (空寂)한 도량에 있지만, 마음은 취사(取捨)의 세계에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리들이 절집을 지키고 있으니, 옛사람과.우열을 비교한다면 하늘에서 쓰는 것과 땅에서 신는 신처럼 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요즈음 사람들은 타고난 약간의 자질만을 자부하면서 명성을 멀리까지 내려고주제넘게 고인의 훌륭한 말씀을 머리로만 따르고, 힘들고 소소한 일은 가까이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방아나 찧고 전좌나 하는 소임을 어찌 맡으려 하겠으며, 비록 잠자리가 편안하고 배불리 먹는다 해도 어찌 욕구가 다 채워지겠으며, 어찌 방앗간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려 하겠습니까? 손으로는 주미불자(주尾拂子)를 종횡으로 흔들고 높은 사자법상에 앉게 되면, 깨달을 수 있는 인연은 더욱 멀어지고 훔치려는 마음은 들끊기만 합니다. 후배들을 걱정하여 보살펴주고,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시원한 그늘 나무가 되고자 하지만, 어찌 가능하겠읍니까? 이렇듯 교화하는 방편의 성쇠와, 고금의 차이를 따져보면,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모두 훔치려는 마음의 유무(有無)에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꼭 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훔치는 마음에는 성인과 범부의 차이가 있읍니까?" 나는 말했다. "훔치는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여래묘명원심(如來妙明元心)"입니다. 그러나 도를 구하겠다는 뜻이 진실되고 간절하질 못하여, 허망에 가리운 것이 계속되어 훔치는 마음이 된 것뿐입니다. 이것은 벼에서 태어난 멸구가 벼를 해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나무에서 발생한 불이 그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있어서 먹고자는 일은 하루도 안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다 안할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도를 구하겠다는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다면, 하루라도 중지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천한 일을 대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하루 종일 몸이 피곤하고 괴롭다 하더라도, 마음은 조금도 꺼려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눈꼽만치라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그때마다 주인에게 매를 맞고 욕을 먹어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먹고 사느라고 받는 수치는 어찌 그리도 쉽게 잊는지.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먹고 살려는 마음이 진실하고 간절하키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독한 수치와 추악함조차도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성스러운 도를 구하려 하면서도 훔치는 마음을 없애려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범부라 해서 어찌 성인과 다르겠으며, 성인이라고 범부와 다를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오직 훔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질 뿐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특히 이 점에 조심해야 하겠읍니다." 혼침과 산란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공부를 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져서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온 힘을 다해 물리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근기와 능력이 미치지 못해 그리된 것이 아닌지요?"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정신이 흔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 그대로가 본래의 면목〔本地風光〕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본래의 면목과 혼침산란(昏沈散亂)은 본래 둘이 아닙니다. 그대가 정신이 혼미하고 산란한 것을 떨쳐버리려 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본래 자성(自性)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이어서 저절로 소멸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선하는 사람의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생기는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한 생각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하면, 곧 그런 생각을 따라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입니다. 그 다른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하면, 그 즉시 그 생각을 따라 또 다른 혼침과 산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백천의 생각 〔念〕이 모두 간절하고 진실하다편, 결국 혼침 과 산란은 들어올 곳이 없습니다. 혹 최후의 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간절하고 진실되지 못한점이 있으면, 그 즉시 그 일념을 따라 혼침과 산란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최초의 일념부터 간절하구. 진실해서 심화(心花)가 피어날 때까지 그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흔침이니 산란이니 하는 것들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도를 구하는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한 것은 탓하지 않고, 흔침과 산란이 참선에 장애가 된다고 탓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있으면서 물건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지 못한다고 자기 눈을 탓하는 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혼침과 산란을 느낀다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이 혼침과 산란을 물리치려 애쓰는 것도 잘못입니다. 또 설사 혼침과 산란을 물리쳐 눈앞이 깨끗해졌다 하더라도, 이것은 잘못된 가운데 더 잘못을 저지르는 짓입니다. 더구나 혼침과 산란이 본지풍광이라는 것을 옳다고 생각해서 하루종일 망상과 한덩이가 되어 딩굴며 지낸다면 그 잘못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읍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혼침과 산란에 빠지지 않을까요?" 나는 말했다. "만약 마음을 써야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더더욱 잘못입니다. 혼침과 산란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때는 마음을 써도, 쓰지 않아도 모두 잘못입니다." 그러자 객승이 말했다. "언어나 알음알이로 도달할 수 없는 최상의 경지에 관한 말씀〔向上語〕을 저같이 근기가 낮은 사람으로는 이해하질 못하겠읍니다." 나는 밀했다. "도를 배우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진실한 마음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자리를 이미 깨달았다면, 부처와 중생이 서로 똑같은 것입니다. 경계가 높으니 낮으니 하는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대가 혼침과 산란을 알아 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걸핏하면 그것의 미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굳이 말로 지적하여 진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이 이쯤 되었으니, 혼침과 산란의 근본을 찾아보겠읍니다. 그대는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번뇌에 오염.훈습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혼침과 번뇌의 근본입니다. 또한 그대가 지금 물질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바깔 대상 세계를 인식하고, 애증취사(愛憎取捨)의 감정이 들쑥날쑥 일어나는 것도 역시 혼침과 산란의 근본 입니다. 또한 그대가 최초의 일념에서 생사를 초월하려 한것이 흔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침선하여 도를 배우려는 것이 혼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려는 것이 혼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위없는 대보리를 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흔침과 산란의 근본입니다 나아가서는 세간 혹 출세간의 갖가지 가르침 중에 간직한 털끝만한 알음알이도 흔침과 산란이 아닌 것이 없읍니다. 가령 이러한 흔침 과 산란의 근본이 소멸되어 버렸다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어느 곳에서도 혼침과 산란은 털끝만치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흔침과 산란이 없을 뿐 아니라, 진여(眞如)인 실제 (實際)도 없읍니다. 성인은 깨닫고 범부는 미혹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가하게 알음알이로 따져서 조사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선을 어느 정도 했을 때 주의할 사항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물었다. "참선하는 사람 중에는 초발심(初發心)을 위배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말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뭔가 부족하다고 여기게 마련이고, 반면에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마음이 편안한 법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는데 흔히 있는 일로써, 천하 고금이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납자라면 마음으로는 늘 뭔가 부족하다 싶어야 하고, 마음을 편히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무언가 부족하게 여길 때, 가없는 성인의 도를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고, 무궁한 결실 또한 이때 보게 됩니다. 마음이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인연에 따라 더러워지기도 깨끗해지기도 합니다. 한 순간에도 별별 것을 다 생각할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업(業)이 되고,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미혹에 빠지니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까지 객승과의 대화가 미치자 어떤 늙은 비구가 일어나 말했다. "지난날 세속에 있을 때는 「법회경」7권 중에 네 권을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생각하기를 머리 깎고 승복을 입은 후에는 출가 전 외우지 못했던 나머지 세 권을 반드시 외우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출가한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나머지 세 권을 마저 외우기는커녕, 출가 전 외워두었던 네 권마저도 잊어버릴 줄을 누가 알았겠읍니까?" 이 말을 듣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세속을 벗어나야겠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매양 뭔가 부족힘을 느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그 생각에 4권이라도 외울수 있었읍니다. 이윽고 출가의 목적이 이루어지자, 마음이 방일해져 외워두었던 것까지 모두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근본을 살펴보면, 요즘 참선하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읍니다. 또한 세상 어디에도 자기 집이 없이 한 몸으로 만 리를 떠돌아 다닐 때는 깨달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오직 참선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눈밝은 스승이 교묘한 질문거리를 만들어 애매한 곳을 물으면, 총명한 재주를 동원해 언어와 문자로 이리저리 따집니다. 어쩌다 그렇게 해서 한 번 인가(印可)를 받으면, 거기에 안주해서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마음이 펀해져 허망한 견해가 생겨, 말할때는 깨달은 듯하나 새로운 경계가 또 나타나면 다시 미흑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 처사입니다. 옛 사람이 해탈했던 경지에도 물론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지난날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깨달음을 구하던 마음마저도 몽땅 잃고 만 것입니다. 아! 성현의 학문이 어찌 여기서 머물겠습니까?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간절하지 못하고, 스스로 도를 깨달았다고 만족하는 생각을 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깨달은 뒤에도 점수(漸修) 필요가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마음을 깨달은 뒤에도 실천 수행할 필요가 있읍니까?" 나는 말했다. "이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대는 마음을 깨닫는다고 했는데, 본래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데 어찌 마음을 깨닫는다 할 수 있습니까? '깨달음'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니 '마음'이라할 때에도 정작 마음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라 할 그 무엇이 없으므로, 유정(有情).무정(無情)을 모두 관찰한다 해도 관찰하는 주체가 그것들과 혼융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털끌만큼이라도 자타와 피차의 구별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속박도 해탈도 없으며, 취할것도 버릴 것도 없게 됩니다. 허망과 진실에서도 떠나고, 미혹과 깨달음 어느 것도 아닙니다. 일념이 평등하여 만가지 법이 여여(如如)한데, 또 무슨 실천 수행할 일이 있겠읍니까?" 객승이 또 말했다.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에 쌓인 무명(無明)의 미세한 염습(染習)이 아직 남아 있는데,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모두다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실천 수행이 없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나는 말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읍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정습(情習)이 남아 있다면 이것은 깨달음이 뚜렷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깨달음이 뚜렷하지 못하면, 반드시 뚜렷하지 못한 자취를 쓸어버리고 평생을 바쳐서라도 확절대오하도록 해야 합니다. 혹 누가 다 깨우치지 못했으므 로 실천 수행을 더 하여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마치 불쏘시개로 불을 끄려다 불길을 더 일어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 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지견(知見)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부처의 지견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과연 부처님의 지견으로 다스릴 수 있는 문제라면, 다스린다는 말부터 벌써 잘못입니다." 그러자 객승이 물었다. "그렇다면 실천 수행할 것이 없다는 말씀인지요?" 나는 대답하였다. "이것은 미리부터 실천할 것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스스로 미혹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니, 정신차려 들으십시오.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여 깨달음이 밑바닥까지 도달하고, 그렇게 해서 번뇌를 훌쩍 벗어나야만 실천 수행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저절로 알 수 있읍니다." 3학을 배워 3독을 끊어야 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악을 끊지도 않고 선을 닦지도 않으며, 탐(貪). 진(瞋). 치(痴) 3독(三毒)도 버리지 않고, 계 (戒).정(定) .혜(慧) 3학(三學)도 익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것이야말로 일성평등(一性平等)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 나는 말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자세히 말하고 싶어도 겨를이 없었던 문제였습니다. 마침 지금 질문을 하셨으니 간단하게 대답해드리겠읍니다. 달마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깨달은 분이니, 외도(外道) .2승(二乘)과는 비교할수 없읍니다. 일심법계(一心法界) 속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생사와 열반도 군더더기 말에 불과한데, 무슨 악을 끊고 무슨 선을 행하며, 무슨 탐.진.치를 버리고 무슨 계.정.혜를 익히겠읍니까? 요즘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일심(一心)의 요지는 조금도 못깨닫고, 입으로만 3학을 배우지도 말고 3독을 끊으려 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떠들어댑니다. 다만 이것은 미친 짓에 불과합니다. 범부만도 못한 행동을 하여 율의(律儀)를 파괴해서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지는 행동일 뿐입니다. 이야말로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되어 개를 그린 격입니다. 악을 끊고 선을 닦는 뜻을 알려면 굳이 문자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자기 마음을 부지런히 참구하면 그뿐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참구하여 더이상 참구할 것이 없으면, 악을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을 닦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는 것과 같아서 꿈속에서는 분명히 대상을 보지만, 말로는 표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문에 확철대오한 사람은 악과. 탐욕이 모두 본인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마음을 끊어버려야 할 이유도 없고, 끊어버려야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객승이 또 물었다. "마음을 끊어버릴 필요가 없다면, 갖가지 실천 수행을 해도됩니까?" 나는 말했다. "그대가 한 이 말은 사실이지 불조께서 매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선악이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하면서도 마음을 끊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실천 수행하는 마음을 인정할 수 있겠읍니까?" 객승이 물었다. "악.탐등이 자기의 마음이므로 끊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실천 수행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미 존재한 악.탐 등은 도대체 어디토 가는 것입니까?" 나는 말했다. "그대는 매우 미혹되어 있으므로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악업(惡業))과 탐.진.치와 무명번뇌(無明煩惱) 및 갖가지 망상들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미혹된 본심 때문에 히깨비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온도가 내려가면 물이 얼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이 마음을 확연히 깨닫기만 하면 모든 허망은 사라집니다. 이것은 날씨가 따뜻해져 녹은 얼음을 어디로 갔느냐 묻는 것으로써, 이야말로 몹시 미혹된 사람이 하는 짓이라 하겠읍니다." 객승이 또 물었다. "아무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악과 탐심이 일어나도 전혀 혼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입니까?" 나는 말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도 확철대오하지 못하여 번뇌 망상이 조금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더 수행하지 않으면, 끝내는 번뇌망상의 구덩이로 되돌아가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뚜렷이 깨달아 어젯밤 꿈처럼 확실히 꿰뚫어 보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동사섭법(同事攝法)을 실천할 경우는 걸으포 보기에는 흡사 악과 탐심이 있는 듯 해도, 그의 진실한 마음은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알아두어야할 것은 이러한 행동을 확절대오하지 못한 사람이 흉내를 내면, 그사람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입니다." 선업을 쌓으면 도(道)를 얻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물었다. "사람이 매일 수만 가지 착한 일을 계속해서 한다면, 그 결과 도를 깨달을 수 있겠읍니까?" 나는 말했다. "도는 무위(無爲)가 근본이므로, 선.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읍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미혹과 허망 때문입니다. 성인은 그런 미혹과 허망을 타파하는 도구로써 착한 일을 합니다. 그런 선업(善業)이 두드러지면 미망(迷妄)이 소멸되고, 미망이 소멸되면 악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따라서 모든 악 이 사라지고 나면. 모든 선 또한 없어집니다. 옛 사람이 '선.악을 모두 생각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를 자연히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한말이 있읍니다. 여기서 마음의 본체란 지극한 도(道)를 말합니다. 만약 악을 버리고 선만 있는 상태에서는 지극한 도(道)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변소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향기로운 냄새를 뿌려둡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부터 악취도 향기도 없는 것만 못합니다. 변소는 악에 비유된 것이고, 향기는 선에 비유한 것이며,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는 것은 바로 지극한 도(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어두운 지하실을 밝히려고 횃불을 켜지만, 그곳이 원래부터 밝은 방만은 못합니다. 여기서 어두운 방은 악을 비유한 것이고, 횃불은선을, 밝은 방은 지극한도(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엄동설한 추위가 싫어 모닥불을 피웁니다. 그러나 이것은 따사로운 방은 있는 것만 못합니다. 여기서 추위는 악을 비유한 것이고, 모닥불은 선을, 따뜻한 방은 지극한 도(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향은 사룰 적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며, 횃불도 켤 때와 끌 때가 있으며, 모닥불 역시 피울 때가 있고 꺼질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도(道)만은 영원토록 변치 않고, 세월이 홀러가도 항상 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어찌 지극한 도(道)를 끊겼다간 계속되고, 생겼다간 소멸하며, 있었다 없어지는 것들과 비교하겠옵니까? 그렇다면 도(道)를 깨닫는데에 선(善)을 행하는 것이 과연 어떤 효과가 있는지 이제는 알수 있을 것입니다. 이치가 이러한데, 제가 어떻게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읍니까?" 선.악의 참된 뜻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선.악에 대한 말씀은 이미 들었읍니다. 선.악에 대한 것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때리고 욕하는 것을 악이라 하고, 이런 악행을 참고 보복하지 않으면 선이라 함니다. 또 칼로 살인을 하면 악이라 하고, 그것을 모두 받아들여 조금도 개의치 않는것을 선이라 합니다, 또 음탕하게 많은 것을 탐내면 악이라 하고, 조용히 심신을 가다듬어 경전이나 읽고으면 선이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읍니까? " 나는 말했다. "이 말은 다 선.악의 겉껍데기만 말한 것입니다. 선.악의 속뜻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선.악의 참된 뜻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이익을 주려 하는 것이면 모두 선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짓이면 악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면 일하는 과정에서 설사 욕을 먹고 배척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선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아무말 안해도 자신에게만 이로운 일이면, 그것은 악입니다. 이 때문에 성현이 중생들을 교화하여 세상을 구제 하느라고 쉴 겨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지극히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걸으로 성현처럼 언행을 아름답게 꾸며도 남에게 이익올 주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이것은 악 입니다. 그런데 더우기 겉모습마저도 포악하고 성낸 모습으로 쉬지 않고 날뛰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읍니다. 행동은 이렇게 하면서도 칭찬을 바라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참선은 어떤 관계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공자(孔子).맹자(孟子) 등의 서적은 왕도(王道)를 말하여 인의(仁義) 사상을 주장했읍니다. 또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책에는 횡도(皇道)를 말하여 무위(無爲)사상을 주장했읍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은 패도(覇道)를 잡다하게 설명하며 공리(功利)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처님 경전에서는 단지 성품자리만을 밝혀 이르기를, '모든 법은 오직 마음에서 빌현된 것이다'고만 하며, 일념 (一念)도 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읍니다. 이들의 주장은 각각 달라서 서로 공통된 부분이 없는 듯 합니다. 과연 공통되는 부분이 전혀 없읍니까 ?" 나는 말했다. "공통된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펀협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경솔한 것이 됩니다. 깨닫는 공부는 특정한 부분을 유난히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가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깨닫고 나면 서로의 차이가 없어져 3교(三敎)의 성인이 하신 말씀이 서로 동일한 줄 알게 되고, 세간 출세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비록 「4고서(四庫書」를 달달 외워도, 그것은 다문(多聞)과 아견(我見)일 뿐입니다. 이른바 인도(印度)의 총명외도(聰明外道)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이 확철대오 하려 하지 않고 문자만을 이해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총명하지 못한자들은 마음의 망정(妄情)을 죽여 바르게 깨달으려 하지는 않고, 매양 문자와 말만 따지려 합니다. 이렇게 하면 깨달음은 고사하고 알음알이〔識情〕의 사량분별만 늘어나 걸핏하편 성인의 도를 어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화의 방편은 쇠퇴하고, 총림은 무너지게 될 것 입니다." 「벽암록」으토 깨달음의 증표를 삼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종문 중에는 「벽암집(碧岩集)」이라는 책이 있읍니다.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스님이 협산(夾山)에 머물때, 설두(雪竇)스님의 송고(頌古)를 취하여 강요(綱要)를 나누어 배열하고, 말씀을 해설하여 만든 책입니다. 그 책의 설명은 세밀하고도 분명합니다. 풍부하고 유려한 것으로 말한다면 명주(明珠)와 패옥(貝玉)을 수북이 쌓아 놓은 것 같고, 그 충만해 넘치는 것으로 말한다면 황하의 싱류인 우문(禹門)을 가로막아 역류가 소용돌이치며 물결이 출렁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정말이지 매우 위대한 책입니다. 법을 깨달았어도 자유롭지 못한 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그 책을 사다리 삼아 깨달음을 얻으려 하자, 이 사실을 원오스님의 제자인 묘희 (妙喜:1088∼1163) 스님이 알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책에 얽매여 배우는 사람들이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혹시나 잊어버릴까 염려해서 민(閔) 땅에 있던 판각(板刻)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지금 전국 선원에서 다시 「벽암록」을 간행하는데, 이것은 말세에 배우는 자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중생들에게는 각각 자기에게 현성공안(現成公案)이 하나씩 있읍니다. 부처님께서도 영산(靈山)에서 49년 동안 설법하시면서도 이것을 일일이 다 설명하지 못하셨고, 달마대사도 서쪽으로부터 만 리 길을 왔지만 이것을 일일이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덕산스님과.임제스님 역시 이것을 다 찾아내지는 못했읍니다. 그러니 설두스님이 어찌 이것을 다 송(頌)할 수 있으며, 원오스님이 이것을 다 해설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벽암록」이 백천만 권이 있다 해도 현성공안의 하나인들 더하거나 덜 수 있겠습니까? 묘희스님이 이런 이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벽암록」판각을. 불지른 것은, 마치 석녀 (石女)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벽암록」을 간행한 사람들의 행동은 석녀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객승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각자의 현성공안은 끌내 불조의 언교(言敎)와는 관계가 없는지요? 또 우리들은 무엇을 참고로 하여 깨달음의 증거를 삼겠읍니까?" 나는 밀했다, "참고로 할 것도 없고, 증거를 삼율 것도 없읍니다. 오직 각자마다 한 순간에 회광퇴보(回光退步)하여 눈앞의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그대로 한꺼번에 뒤엎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바람결에 들려오는 폭포수 소리와 비온 뒤 시냇물 소리가 모두 송고(頌古)인 것을 알게 되고, 공산(空山)에 진 동하는 우뢰와 대낮에 울리는 자연의 청아한 음향이 모두 해설〔判〕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넓으며, 밤은 어둡고 낮은 밝은데 만상삼라(萬象森羅)가 정연하게 설법을 하고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현성공안인 「벽암집」인 것입니다. 비록 백 천의 설두스님과 원오스님이라 해도 현성공안의 그림자에는 쩔쩔멜텐데, 어찌 언어나 문자를 사용해 이러쿵저러쿵 논란할수 있겠 습니까? 선배들의 가르침이 어떤 때는 왕성하게 만들고 어떤 때는 부숴버리며, 어떤 때는 금지하고 어떤 때는 장려하는 것은, 다만 세속의 일반적인 풍속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지, 이치가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벽암집」이 참석하는 자들을 잘못된 길로 들게 하여 스스로 깨닫는데 장애가 된다고 말하나, 두 스님의 마음을 소급해 추측해보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존께서 법계 중생 모두가 여래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망상 집착(妄想執着)때문에 증득하지 못하는 현상을 올바른 법안(法眼)으토 환히 관찰하시고, 당신 스스로 성도(聖道)를 가르쳐 중생을 모든 집착에서 떠나게 해야겠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왜 모르셨겠읍니까? 성도(聖道) 또한 중생을 구속하여 언어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듣는 이의 근기에 따라 무려 300여 회나 설법하신 대(大).소(小).편(偏).원(圓).돈(頓).점(漸).반(半).만(滿) 등의 가르침은 하루도 입에서 떠난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즘이나 옛날의 참선하는 자들은 그것이 언어로 표현된 방편인 줄을 모르고 참된 법이라고 여겨 집착합니다. 그들이 각기 이해한 데에 집착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분분히 내세워 시비가 복잡하게 일어났읍니다. 끌내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능(能)과 소(所)로 쪼개어 「벽암집」의 원래 취지와는 아주 멀어졌습니다. 성인의 가르침도 그러한데 더구나 범인들의 가르침은 어떻겠읍니까? 그렇기는 해도 언교(言敎)의 장단점을 잘 응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당사자가 자기 일에 얼마나 진지하고 절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의 일에 진지하고 절실하다면 하잘 것 없는 이야기도 생사를 초월하는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경전 중에 '거위왕이 우유만 가려 먹는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스승과 제자가 진지하게 자기의 일을 밝힐 수 있고 자기 종문(宗門)의 사활(死活)을 걸머지겠다는 뜻이 있다면, 절대로 문자에 의지해 의미를 깨달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스스로게 물어 참구한다면 「벽암집」의 유무에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사들도 계율을 지켜야 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고봉(高峰: 1238∼1295) 스님께서 제자들에게 수계 (受戒) 할 때에 손가락을 태우게 했다는데, 제방(諸方)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정말 고봉스님이 그랬읍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또한 그런 소문을 직접 듣고, 스님께 여쭈어보았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상할 것이 없다. 저들이 방편임을 알지 못해서 그럼 것인데, 난들 어찌 모르겠느냐' 달마대사께서 흘로 전하신 성품을 바로 가리키는 선은 문자(文字)도 쓰지 않았는데 무슨 계(戒)를 주고 받겠습니까? 그러나 달마스님이 계율을 말씀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근본 종지(宗旨)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고, 둘째는 제자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첫째의 근본 종지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했다는 뜻은 달마스님은 오로지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는 것으로써 종을 삼았읍니다. 오직 바로 가리키는 것에만 힘을 기울여 단 한번에 훌쩍 깨달음의 자리에 그대로 들어가게 했을지언정, 대.소 2승(二乘)의 단계를 차례차례 거치도록 하지는 않았읍니다. 그종지가 이와 같으므로 계율을 말한다면 벌써 잘못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을 믿었다는 뜻은, 일반적으로 달마스님의 문하에는 모두가 상근기의 인재들만이 모였었읍니다. 숙세에 반야의 종지를 익히고 최상승(最上乘)의 근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계정혜(戒.定.慧) 3학(三學)을 닦았기 때문에 또다시 계율의 수지 (受持)를 말할 필요가 없었읍니다. 그러므로 달마스님 당시에는 계율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아도 잘 지켜졌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굳이 계율을 지키라고 강조하지 않았지만, 어느제자도 고의적으로 계율을 어기는 자가 없었읍니다. 달마스님 이후로 대승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선사들이 천지 사방에서 구름처럼 일어나고 바닷물이 용솟음치듯 하였읍니다. 달마스님 때부터 계속하여 계율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종지로 볼 때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애초에 계율을 지키지 않고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수했다는 소리는 내 아직 들어본 적이 없읍니다 . 옛날에 자수화상(慈受和尙: 1077∼1132)은 종문(宗門)의 빼어난 지도자이십니다. 항상 제자들이 계업(戒業))을 잘지키는 것을 극도로 찬양하였습니다. 또 진헐화상(眞歇和尙)은 '권발보리심대회(勸發菩提心大會)'롤 개최하여 사부대중과 함께 계율을 권장 선양하였습니다. 이 두 스님은 모두 점진적인 방현을 사용하신 분들이십니다. 옛날에 담당무준(湛堂無準: 1061∼1115)스님께서 양산승(梁山乘)스님을 찾아뵙고 인사하자, 승스님은 이렇게 말했읍니다. 즉 '어찌 계율을 받지 않고도 감히 불법을 배울수 있겠는가?' 그러자 담당 준스님은 합장예배하고 말하기를, '계 받는 장소가 계일까요? 아니면 삼감마(三갈磨)와 청정한 아사리(阿사梨)가 계인가요?' 라고 했습니다. 승스님이 깜짝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하자, 담당 준스님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감히 계를 받지 않아서야 되겠읍니까? '라고, 하고는, 곧 바로 강안율사(康安律師)에게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읍니다. 옛부터 선가(禪家)에는 계율에 대한 말이 아주 많았지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들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방편이란 상황에 알맞게 운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봉스님이 수계한 것을 조금도 이상스레 여기지 마십시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대중 생활을 할 때 는 개경(開慶).경정(景定) 연간이었읍니다. 그때도 정자사(淨慈寺).쌍경사(雙徑寺)같은 절은 대중의 수효가 400∼500을 넘었읍니다. 그 절의 주지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면, 항 상술을 마신 것이 아닌데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꾸짖었읍니다. 가끔 술을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드물었읍니다. 그러나 지금은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가 방탕하여 피하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는 일반 신자들을 위해 5계(五戒)를 말씀하셨고, 비구들에게는 4분(四分).승지(僧祗)등의 계율과,3취정계(三聚淨戒).구족대계(具足大戒)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요즘 승려들은 일반신자가 지키는 계(戒)도 못지키는데, 율의(律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위산스님도 '지지작범(止持作犯)은 처음 발심한 수행자들의 수행지침이다. 그러나 처음의 발심은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하는 천리 길의 첫걸음으로서, 첫걸음을 내딛지 않고 천 리길을 갈 수 없다. 또 옛 사람들은 계율을 지키고 도를 배우는 것이 수행의 근본이라 생각했다'고 하셨읍니다. 또한 근성(根性)이 둔해서 평생 수행을 했는데도 도안(道眼)이 밝아지지 않으면,계의 힘으로라도 도념(道念)을 잃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세에는 도를 이루기가 쉽습니다. 계의 중요성을 거론한 경전으로는「능엄경(楞嚴經)」.「원각경(圓覺經)」을 들 수있는데, 모두 대승원돈(大乘 圓頓)의 중요한 밀씀입니다. 의심스런 부분이 있으면, 다시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서는 수행의 근본을 계라하지 않은곳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계는 기초이고, 도는 집이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이 한 몸을 어디에 의탁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근기에 맞게 방편을 말 한 것이므로,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계율지키게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편 예컨대 백장(百丈)스님은 허다한 위의(爲儀)와 예법(禮法)을 세우셨읍니다. 스님은 사소한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도 빈틈없이 계율을 만드셨읍니다, 이것을 달마대사의 사람의 본성을 바로 가리키는 종지에 비교할 때,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읍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부터 총림에는 예법이 없어서는 안되게 되었다'고 예법의 세세함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율이 총림예법의 근본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근본없이 지엽(枝葉)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선배 스님들도 '아아 ! 도체(道體)를 잃으면 계의 힘이 소멸하고, 계의 힘이 소멸하면 총림의 예법도 잃게 된다. 그리고서 어떻게 천하의 인심을 다시 도(道)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금일 제자들에게 계율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 했는데, 모두 진실한 말씀입니다. 그대가 공연한 질문을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출처] 山房夜話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