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4일 오늘의 역사
2021년 한국 태권도 시범단 미국에 이어서 프랑스 갓탤런트 2021 최초골든버저!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 트리플 골든부저 신기록달성
2016년 박근혜 대통령 국회시정연설에서 개헌 추진 밝힘. JTBC 최순실 사용 태블릿PC 입수해 내용 일부 보도 “최순실, 대통령 연설문 사전 열람”
2013년 정부 전교조에 노조설립 취소 통보, 서울고법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효력정지 결정(2015.11.16.)
2009년 프로야구 KIA, 12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
2009년 10월 24일 KIA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정규리그 막판 파죽의 SK 19연승을 반 경기 차로 1위를 지키더니, 한국시리즈에서도 7차전 접전 끝에 9회말 끝내기 홈런으로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해태 시절인 1997년 우승 이후 12년 만의 우승. 통산 10번째 타이틀이다. 2005년과 2007년 최하위에 머무르며 '종이호랑이' 소리를 들어야 했던 KIA의 부활이었다.
조범현 감독의 첫 우승. 감독 첫해인 작년에 6위에 머물자, 바닥을 긴다는 뜻의 조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조 감독이다. 하지만 조 감독은 조금해 하지않고 우승보다 팀이 발전하는 밑거름을 만들어주겠다는 소신으로 팀을 운영한 결과, 지난 8월 20승4패라는 놀라운 승률을 보여줬다.
비록 3연패에는 실패했지만, 김성근 감독은 여전히 '야구의 신(野神)'다웠다. 투수 김광현 등 핵심 선수들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번 한국시리즈를 역대 최고의 명승부로 만들었다.
2007년 중국 첫 달탐사위성 ‘창어(嫦娥) 1호’ 발사
2005년 천재소년 송유근(8), 국내 최연소 대학생으로 인하대 2학기 수시모집에 합격
천재 소년 송유근(8)군이 2005년 10월24일 인하대에 합격해 대학생이 됐다.
국내 최연소 대학생이다.
정부는 이와 관련, 송군을 세계적인 과학자로 키우기 위해 대학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24일 송군이 인하대로부터 수시2학기 자연과학계열 합격 통보를 받으면서 국내 최연소 대학생이 되자마자 ‘송유근 팀’ 을 결성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정부가 천재 소년을 위해 두 팔을 걷고 나선 것은 송군이 처음이다.
이날 송군의 대입 최종 합격을 발표한 인하대도 송군을 위한 ‘천재 과학자 육성 프로젝트’ 를 전격 가동했다. 송군은 앞으로 일반 강의 대신 교수와 1대1 토론식으로 수업을 받으며, 원어민으로부터 영어 개인 수업을 받게 된다.
송군의 대학생활을 도울 ‘도우미 대학생’ 이 송군과 함께 지내도록 하고 체육, 음악, 미술 과목은 인근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맞춤식 학습’ 을 하게 된다. 의대와 심리학 전공 교수들이 청소년 정신 과학과 상담 심리에 대한 조언도 할 예정이라고 인하대측은 밝혔다.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 ‘특목고 정상화 방안’ 발표
2002년 美 연쇄자격 용의자2명 체포
미국 워싱턴DC 인근지역을 3주일 동안 10명의 사망자와 3명의 중상자를 낸 연쇄 저격살인 사건이 2002년 10월 24일 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3주째 저격범의 신원을 전혀 밝히지 못한 채 제자리 걸음을 하던 수사는 스스로 저격범이라고 주장한 한 남자가 경찰과 통화를 하던 중 “앨라배마주의 몽고메리 지역에서 강도사건을 저지른 일이 있다”고 밝히면서 급진전됐다. 경찰은 이를 단서로 지난 9월 21일 발생한 앨라배마주의 저격 살인사건 용의자였던 워싱턴주 타코마 출신의 무하마드를 찾아냈다.
경찰은 10월 23일 오후 11시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퇴역 군인인 존 알렌 무하마드(42, 또는 존 알렌 윌리엄스)와 그의 양아들 존 리 말보(17), 이들이 타고 있던 뉴저지주 번호판(NDA 21Z)을 단 파란색 셰비 커프리스 자동차를 긴급 수배했다. 그리고 4시간여 후인 10월 24일 오전 3시19분 워싱턴시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진 메릴랜드주 프레데릭 지역에서 이 자동차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무하마드와 말보를 체포하고, 앞서의 연쇄저격살인사건에 사용된 것과 같은 구경의 총기도 발견했다.
1999년 전문경영인으로 재계 첫 그룹회장 역임한 정수창씨 별세
두산그룹 회장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정수창(80)씨가 1999년 10월 24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정 前 두산그룹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1980∼1988년)과 아시아-태평양 상공회의소 연합회장(1984∼1986년) 등을 역임한 재계의 거물이다.
별세 전까지도 아-태 상의연합회 명예회장과 전경련 원로자문위원, 두산그룹 연강재단 이사 등을 맡아왔다. 경북 영덕 출신인 정씨는 경성상업학교(현 서울대 상과대학)를 나와 지난 1945년 동양맥주에 입사했으며, 삼성물산 사장, 동양맥주 사장에 이어 두산그룹 회장을 두 차례(1977∼1981년, 1991∼1993년) 지냈다. 정씨는 박두병 두산 선대회장 타계 후 재계 최초로 전문경영인 출신 회장으로 그룹회장에 올랐다.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포도주 없는 한국`을 비아냥거리는 얘기를 듣고 `마주앙`을 생산해 내기도 했다.
30년 이상 아침 산책을 즐기면서 남산 등산로 쓰레기 줍기를 해왔으며, 벙거지 모자를 쓰고 담배꽁초를 줍는다고 ‘거지 할아버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1980년 환경보전협회 회장을 맡는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83년 골드 머큐리 개인부문상, 1984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99년 델 라 루아,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연합 후보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인 페르난도 델 라 루아(62)가 당선돼 10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델 라 루아 후보는 1999년 10월 24일 실시된 대선에서 50.3%를 득표, 35.5%를 얻은 집권 페론당 후보인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압도적 표차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그는 코르도바대 법대를 졸업, 21세에 변호사로 사회에 첫 발을 디딘 후 4년 간 내무부 관리로 일했다. 이후 급진당에 입당, 1973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83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라울 알폰신 전 대통령에게 패배, 일단 대권에 대한 꿈을 접었으나 199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첫 민선시장에 당선되면서 재기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1997년 야당연합 대선 후보 경선에서 독재정권 시절 실종자 어머니 모임인 ‘5월광장 어머니회’ 회장 출신을 제치면서 대권 고지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는 물가안정에 성공한 태환정책 등 기존 경제정책 유지방침을 밝혀 유권자들을 안심시켰다. 부대조건으로 범죄-부패 퇴치, 실업 타파, 중소기업 활성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지지를 얻었다.
1999년 모로코의 할리드 하누치, 시카고 마라톤서 세계신기록 (2시간 5분 42초) 수립
1999년 10월 24일 열린 시카고 마라톤에서 모로코의 할리드 하누치가 세계최고기록 2시간5분42초를 수립해 1988년 로테르담대회에서 에티오피아 벨라이네 딘사모가 세운 2시간6분50초의 세계최고기록을 11년 6개월 만에 경신했다.
하누치는 모로코 중부도시 메크네스에서 8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축구를 하다 15세때 아버지의 권유로 육상으로 전환했다. 그는 크로스컨트리와 5천m, 1만m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단숨에 국내 최고선수로 떠올랐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아내이자 매니저 산드라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도미니카 출신으로 15세때 이민온 아내는 딸 둘을 둔 이혼녀였다. 1996년 그녀와 결혼한 하누치는 이후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둔다. 1997년 시카고마라톤에서 2시간7분10초로 우승, 1998년 다리부상으로 2위(2시간7분19초), 그리고 이날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을 달성했다.
1995년 부여 무장간첩 사살 및 생포사건
충남 부여군 석성면 정각사 입구에 무장 간첩 2명이 출현, 교전 끝에 1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 피해(전사 2명, 부상 1명)
1994년 안기부 6.25당시 참전했다 포로로 잡혀 납북된 조창호씨가 43년 만에 북한을 탈출, 해상에서 표류중 수산청에 의해 구출됐다고 발표
6·25전쟁 중 포로로 끌려가 전사한 것으로 처리됐던 국군 소위가 43년 만에 북한을 탈출, 고국의 품에 돌아왔다.
국가안전기획부는 24일 6·25전쟁 포로로 납북된 조창호(64)씨가 북한을 탈출, 해상에서 표류하다 23일 새벽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됐다고 24일 발표했다.
안기부는 조씨가 최근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 대연(다롄)에서 밀항선을 타고 전북 군산 서남방 약80마일 해상에서 떠돌다 23일 새벽 수산청 소속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으며 조씨를 인계받아 귀환경위 등을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북한 생활 중 장기간 탄광노동으로 인해 진폐증(2기)을 앓아온 조씨는 오랜 항해와 긴장 등으로 극도로 쇠약해져 서울 중앙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안기부 조사결과 조씨는 지난 1950년 연세대 1학년 재학 중 육군본부 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담당 소위로 6·25전쟁에 참전,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에 끌려가 억류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씨가 실종된 뒤 소식이 끊기자 군에서는 조씨가 1951년 9월 10일 중부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 국립묘지 현충탑 지하 위패실에 육군 중위로 위패카드가 봉안돼 있었다.
이후, 북한에서부터 평소 규폐증을 앓아오던 조씨는 2006년 11월 19일 오전 12시 30분, 생환한 지 12년 만에 경기도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씨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있던 국군포로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었다.
1994년 충주호에서 충주호관광선 소속 충주제5호 화재(29명 사망 및 실종)
1994년10월24일 오후 4시15분쯤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앞 충주호를 지나던 54t급 충주호 유람선에서 엔진과열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 10여명이 익사하거나 불에 타 숨지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승객과 승무원 등 1백34명을 태우고 이날 오후 4시쯤 신단양 선착장을 출발한 유람선에 처음으로 이상이 발생한 것은 출발 직후 5분이 지나서였다. 정상적으로 운행하는 듯하던 유람선이 갑자기 멈춰선 것. 그러나 잠시 후 유람선이 다시 출발했으며, 15분쯤 지나 기관실쪽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나면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사고 유람선이 10여분 만에 불길에 휩싸인 후 유독성 연기가 선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승객들이 우왕좌왕하자 승무원과 남자승객 일부가 “의자밑에 있는 구명조끼를 입으라”고 소리쳐 대부분 조끼를 착용했다.
사고 직후 신단양 선착장에 대기중이던 쾌속정이 사고현장으로 긴급 이동해 로프와 튜브 등을 던져 구조작업을 벌였고, 사고지점 인근에 있던 낚싯배 등 유도선 3~4척도 구조작업을 도왔다. 충북지방경찰청은 이날 사고가 난 지 1시간이 넘도록 유람선 정원과 승선인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 허둥대 사고수습에 허점을 드러냈다. 또 이같은 법석에도 불구하고 정작 경찰측 구조정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사고가 난 뒤 1시간30여분만인 오후 6시쯤으로 이미 낚싯배 등에 의한 구조작업이 거의 끝난 뒤였다.
승객들은 대부분 친목모임차 충주호 및 단양 고수동굴 관광에 나선 단체관광객들로 경기도 부천 동일관광(30명), 의정부시 동아관광(63명), 강원도 홍천 보람관광(27명) 등 관광회사를 통해 침목모임차 충주호 및 단양 고수동굴 관광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했다.
불이 나자 경찰과 공무원 소방대원 등 1백여명이 출동, 오후5시쯤 불길을 잡았으나 유람선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전소됐다.
1989년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 방한1987년 자유민주총연맹 발족(위원장 이철승)
1988년 필리핀 여객선 도나 마릴린 호 태풍 루비호에 휩싸여 침몰 실종 230명
1986년 중국 해군 정차이톈 MIG19 몰고 귀순(나중에 대만행)
1982년 동해서 어선 제1동화호 침몰 어부 36명 실종
1981년 싱가포르 대통령에 챙가라 비틸 나이르 취임
1980년 공주사대, 백제토성 발굴
1979년 미국, 북한 여행제한 철폐 확인
1977년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
1974년 미국 공군, 사상최초로 ICBM의 기상(機上)발사 성공
1974년 동아일보 기자 일동, 자유언론실천선언
유신정권이 한창이던 1974년 10월 24일 오전 9시 15분, 동아일보사-동아방송의 기자 PD 아나운서 등 180여명이 동아일보사 3층 편집국에서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채택했다. 전날 송건호 편집국장을 비롯한 간부사원 3명은 서울대 농과대 학생들의 유신반대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온 상태였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며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 사회 존립의 기본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언론상황은 긴급조치 등으로 위축될 대로 위축돼 학생시위는 물론 외국인 반체제 운동이나 연탄파동까지도 보도가 통제되던 때라, 민주회복을 갈망하던 재야 민주세력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자유언론실천 운동은 곧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장과 편집국장 연행에 항의하며 이틀째 철야동성을 하고 있던 130명의 한국일보 기자들은 24일 저녁 7시 30분 연행사실이 자사신문에 보도될 때까지 제작을 거부하기로 결의했고, 조선일보 기자들은 그날 오후 9시 20분 긴급 기자총회를 열어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전국 31개 신문사와 방송사, 통신사도 들고 일어서 기사에 대한 외부압력 배제와 사실보도를 다짐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광고탄압이라는 방법으로 동아일보사 경영진에 압력을 가했고, 동아일보사는 1975년 3월 17일 선언에 앞장섰던 기자 PD 아나운서 113명을 강제로 해직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조선일보사 기자 70여명이 해직된 데 이어 전국 35개 언론사가 동아투위에 지지를 보내고 대학생과 종교단체가 성명을 내고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4년 소련의 바이올린 연주자 오이스트라흐 사망
1973년 이집트-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10월 전쟁 종결
1972년 남북적십자 3차 본회담 (~26일 평양)
1971년 보림사 불상에서 ‘월인천강지곡’ 등 전적 다수 찾아냄
1970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에 선출
좌파 인민연합(UP)의 아옌데 후보가 1970년 10월 24일 칠레 국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35표대 35표의 큰 차였다. 9월 4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아옌데 후보는 107만5616표를 획득, 1위로 당선됐지만 득표율이 과반수가 안되는 36.3%에 불과해 2위인 우파 후보와 국회에서 결선 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1970년 11월 3일 정식으로 발족한 아옌데 정권은 미국 자본 소유의 동광산 등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사회주의에 착수했지만 그 결과로 대미 관계 악화를 감수해야 했다. 연합정권이라는 근본적인 제약과 300%라는 인플레로 아옌데의 노선은 좌우에서 협공을 받아 곧 난관에 봉착했다. 그런 와중에 칠레의 육-해-공 3군사령관은 정국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라는 최후통첩을 아옌데 대통령에게 보냈고 아옌데가 퇴진을 거부하자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이끄는 칠레군부는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권접수를 발표했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을 포위한 군부대의 공격에 저항하다 피살됐다. 그의 죽음과 함께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에 새로운 길을 열 것으로 좌익지식인들 사이에 기대를 모았던 사회주의도 종말을 고했다. 1908년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출생한 아옌데는 칠레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정치운동에 참여해 1933년 칠레사회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2년에는 서기장이 되었다. 1937~45년 하원의원, 1939~42년 후생장관, 1945~70년 상원의원을 역임했다.
1968년 서울 광장시장과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조세 저항 데모
1966년 마닐라에서 월남참전7개국 정상회담 개막
1964년 함태영 前 부통령 별세
1964년 10월 24일, 함태영(咸台永) 전 부통령이 91세로 눈을 감았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법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를 이준 열사와 함께 수료하고 검사 시보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은 함태영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1898년 독립협회의 개혁안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 혁파령을 내려 이상재 등 17명이 재판에 회부됐을 때였다. 고종의 뜻이었음에도 함태영은 경미한 죄를 적용, 담당 판사의 태형 판결을 유도했다. 이때문에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지만 결국 한일합병 때 법복을 벗었다.
3ㆍ1운동 때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음에도 33인이 아닌 48인에 이름을 올려 3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나라잃은 설움을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한 그는 광복후 심계원장(현 감사원장)을 거쳐 1952년에는 3대 부통령에 당선돼 6ㆍ25로 폐허가 된 조국을 복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5공화국 때 주미대사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다 아웅산폭발사고로 숨진 함병춘씨가 아들이다.
1964년 잠비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2년 케네디, 흐루시초프로부터 세계평화보장에 관한 서한 접수
1962년 미국에 의한 쿠바봉쇄 시작
1962년 10월 24일 쿠바 봉쇄가 시작됐다. 케네디 대통령의 봉쇄 선언 이후 이틀이 지난 뒤였다. 19척의 함선이 정해진 위치에 도착, 쿠바 동쪽 800km에 원을 둘러치고 그것을 점차 좁혀갔다. 그리고 바로 제2의 원이 2만명의 해병을 태운 42척의 함선으로 만들어졌다.
같은 시각 쿠바에 건설중인 소련의 미사일 발사대는 완료단계에 들어갔고 미사일은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발사준비가 완료되면 소련의 미사일은 6분 이내에 반경 2천5백km 안의 미국 전 도시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쿠바 주둔 소련군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방위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공중방어는 2개 사단이 맡고 있었다. 고도 3만미터 상공에서 날고 있는 비행기를 격추할 수 있는 미사일 발사대는 모두 144대나 됐다.
25일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소련의 유조선이 쿠바로 진입했다. 무기가 실려있지 않은 사실을 확인한 미국은 일단 유조선을 쿠바로 진입시켰다. 26일 바하마 제도 나소의 300km 북동지점에서 다시 새로운 대결이 발생했다. 소련의 화물선이 가시거리에 들어온 것이다. 이번에는 미국이 직접 승선해 무기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통과시켜 양국은 위기를 넘겼다. 27일 이른 아침, 충격적인 소식이 워싱턴으로 날아들었다.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되었다는 것이다. 이 긴장된 상황속에서 흐루시초프로부터 전문이 날아들었다.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철수하는 대신 터키에 있는 미국 중거리 탄도미사일 주피터의 철수를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고민 끝에 흐루시초프가 미사일을 단념한다면 해상봉쇄를 중단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흐루시초프는 라디오로 “소련 정부는 쿠바에 있는 무기를 배에 싣고 소련군과 함께 철수하겠다”는 내용을 방송했다. 절대절명의 순간은 이렇게 지나갔다. 불안과 희망이 교차한 13일간이었지만 3차 대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냉전은 쿠바 위기로 정점에 달했으나 그것은 동시에 대립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1962년 한국-과테말라, 국교 수립
1957년 크리스찬 디오르 사망
평생을 독신으로 살던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오르가 1957년 10월 24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였다.
1905년 프랑스 노르망디 그랑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디오르는 파리정치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미술과 화훼에 더 관심이 많았다. 파리에 화랑을 열어 화가들과 친분을 쌓던 그는 갑자기 집안이 몰락하면서 1938년 로벨 피케 의상실에 디자이너로 취직했다가 1946년에 독립했다. 1947년 2월 12일 그의 첫 패션쇼에서 발표한 ‘뉴룩(New Look)’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그 쇼는 일종의 ‘혁명’이었다. 몇시간 만에 크리스찬 디오르는 서양 여성들의 실루엣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좁은 어깨에 날렵한 선의 재킷, A라인의 스커트 등 과거 옷들과 달리 전혀 새로운 선의 옷으로 꾸며진 패션쇼가 끝나자 패션지 `하퍼스바자` 편집장 카멜 스노는 디오르에게 달려와 이렇게 외쳤다. “완전히 ‘뉴룩(New Look)’이군요”. 2차대전의 상처에 찌든 여성들에게 그는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세련된 ‘뉴룩’을 제안, 패션계에 전설을 탄생시켰다.
1954년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발족
1951년 미국, 대(對)독일 전쟁상태 종결 선언
1949년 유엔극동경제위원회 한국가입 결의
1945년 군정청, 일본인 철퇴령 발표
1945년 유엔창설
유엔의 날 또는 국제연합일(國際聯合日, United Nations Day)은 1945년 10월 24일에 유엔이 창설된 것을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유엔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평화를 유지하고 각 나라 사이의 우호를 다지며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도적 문제에 대해 서로 협력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이다.
1941년 8월14일 영국의 처칠총리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발표한 대서양 헌장에서 유엔창설이 첫 구상된 후 4년만 이였다
유엔은 주요 기구와 보조기구, 전문기구로 구성됐으며 국제연맹의 실패를 거울삼아 안전보장이사회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게 특징이다
본부는 미국 뉴욕에 있으며 우리나라는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가입하였다.
또한 2007년 1월 한국인 최초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취임했다
1939년 나일론 스타킹 델라웨어 윌밍턴에서 발매 시작
1931년 국제연맹, 일본군의 만주 철병(哲兵)권고안 가결
1929년 미국 주가 대폭락...대공항 신호탄
1920년대 미국의 번영은 눈부셨다. 10년동안 공업생산은 90%나 상승했고 자동차는 5명당 1명꼴로 홍수를 이뤘다. 증권시장도 전례없는 대호황이었다. 1929년 당시 증권구좌는 155만개에 달했고 이 가운데 60만개는 신용거래로 대박을 꿈꿨다. 방미중이던 처칠 영국 재무장관이 월가에서 신용거래로 한몫 잡았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느끼지 못했을 뿐 성장은 이미 1929년 6월에 멈춰있었다. 생산이 감소하고 자동차 판매가 줄어들었다. 파죽지세로 상승하던 주가가 9월 3일부터 하락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불안감을 느꼈지만 여전히 낙관론이 팽배했다.
10월24일, 이날도 개장과 함께 정상적으로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1시간이나 지났을까. 주가가 갑자기 곤두박질치면서 객장 분위기가 공포로 돌변하더니 너도나도 주식을 팔아치우려고 아우성이었다. 처칠도 월가로 몰려든 군중들 틈에 섞여 황금의 꿈이 사라지는 것을 넋놓고 지켜봐야 했다. 다행히 오후들어 은행가의 큰손들이 방어에 나서 폐장무렵에는 전날의 주가수준을 거의 회복해 ‘검은 목요일’은 안도속에 지나갔다.
‘비극의 화요일’이었던 10월 29일, 뉴욕 증권가는 다시 거대한 투매 폭풍에 휩싸였다. 하루동안 다우존스 평균지수가 40포인트나 떨어졌고 100억 달러가 휴지조각이 됐다. 통화금액의 2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대공황을 알리는 음산한 종소리는 이렇게 울려퍼졌다.
1912년 은행령 공포
1856년 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 출생
1632년 세균과 원생동물을 최초로 관찰한 미생물학자 레벤후크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