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목격한 본능과의 전쟁..
북한에서 내가 목격한 본능과의 전쟁
공산당의 특이한 점은 본능과의 전쟁이다.
내 것을 추구하는 이기심, 섹스와의 전쟁이다.
이기심과의 전쟁 최고조는 1970년 5차 당 대회이다.
<온 사회의 혁명화 로동계급화>를 제시한 것이다.
대표적 선전 영화 <꽃피는 마을>에서 이를 잘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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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라는 본능과의 전쟁은 초기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 대가는
침체를 몰아 왔고 이어 하락기에 접어들게 만들었다.
1970년 초부터 상점에 물건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1960년 말까지는 돈을 내면 물건을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식량만 배급제였는데 이제는 상품마저 배급제로 전환된 것이다.
배급제라는 것은 제 마음 대로 살 수 없게 되었다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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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김책 공대 입학 응시를 위해 평양에 갔을 때 만도
식당에서 돈을 내면 떡국을 사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는 돈이 많아도 <량권>이 없으면 먹을 수 없었다.
여기 분들은 잘 이해 가지 않은 <량권>은 자기가 받는 제한된 배급식량 표이다.
가치 없는 돈인데 그 남아 1979년 화폐 개혁으로 더욱 백지화 되었다.
김일성 얼굴 들어간 화폐가 처음 인데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가치가 급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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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말 나의 일기장에 보면 평양과 사리원 상점이 텅텅 비어 있다고 적혀있다.
이와 반대로 경제지표들은 올라간다고 요란하지만 대부분 부풀려져 있었다.
북한 경제의 표본, <대안의 사업 체계>창시의
평남도 강서군 대안 전기 공장에 1079년 견학 가보니 가동률이 40%였다.
1970년 후반부터 침체기에 들어선 것이다.
1980년 들어서서는 하락기를 맞는다.
하락기는 도미노처럼 급격한 하락기로 전환되어(1990년대)
황장엽 중앙당 비서의 증언대로 300만의 아사자를 발생 시켰다.
바닥에 내려 갈 때로 내려간 그때부터 지금까지 <급 하락 침체기>에 뭐 물러 있다.
김 씨 3대 세습에 걸쳐 공언한 <이밥에 고깃국>은 고사하고
강낭밥 배급도 못 주는 것으로 증명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수령과 나라의 덕택이 아니라 인민의 자생력이다.
개인 장사와 개인 뙈기밭 농사가 그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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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과의 전쟁은 신기하게도 부화와의 전쟁을 동반하였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본능과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화는 불륜을 북한 식으로 부른 것이다.
사실 섹스 전반과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늘 같은 수령이 나서 혼 기를 정하고 아이 낳는 수까지 간섭했다.
한창 힘쓸 때를 잠자리가 아니라 수령과 국가를 위해 쓰라는 것이다.
따라서 처녀는 28살, 총각은 30살 이상 되서 결혼을 하라고 하였다.
또 아이 하나는 애국 둘까지는 좋지만 셋부터는 양심이 없는 행위라고 했다.
사설 같은 얘기가 길어져 그만하고 내가 본 부화와의 전쟁을 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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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결혼이 뭐야? 부화는 뭐고?>
<응! 결혼은 잔치이고 부화는 딴 남자 여자 좋아 하는 것을 보고 그래>
열살 무렵 물어본 기억이다.
내가 멍청해서 인지 아니면 사회 환경 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에야 개념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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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문화가 열악한 공산권 국가에서는 술, 담배에 절어 산다.
그 공산권에서도 노는 문화가 가장 열악한 것이 북한이다.
가장 폐쇄된 곳이기에 말할 거리마저 적은 것이다.
그 적은 중에서 가장 흥미 거리가 단연 부화 얘기이다.
본능과 부합되었기에 짜릿할 만큼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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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경 황해도 서흥군 읍에 살 때이다.
아빠 직장의 당 세포 비서가 불륜 건으로 철칙 되었다.
나이 지숙하고 점잖은 분이었기에 모두 놀라서 더욱 소문이 났다.
주택 난으로 하모니카 집들이 많아 지나치면 다른 집 방도 보인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문이란 문,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 놓게 된다.
공동 변소에 가는데 이웃집 부인 자는 모습이 보인다.
자면서 본능적으로 더위를 피하려 넙적 다리를 다 드러내고 있다.
훗날 자기 비판에 보면 - 희여언 넙적다리에 나도 모르게 끌려갔으며
여자도 별로 반항하지 않아 진행했는데 누가 몰래 보고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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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경 읍 농장 마을에서 신생아 사체가 발견되어 난리가 났다.
주범은 마을 벌판 한 가운데 외 딴 집에 젊은 과부였다.
사별한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이 유난히도 잘 생긴 것이 기억난다.
조사 결과 준수한 마을 청년 간부가 여자가 못할 집 일을 해주다가
정이 통했고 그 숫자가 쌓여 임신하게 된 것이다.
결국 낳은 아이를 죽여 정신없이 마을 주변 구덩이에 묻지도 않고 버린 것이다.
아주 착한 여자였지만 부화가 들키면 패가 망신 하기에 이런 범행을 하게 된 것이다.
여자는 주위에 손가락질과 자책감으로 정신병자가 되었다.
봉건 유교 습성에 공산당 선전의 시너지 효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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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경 평안도 은산군 읍에 살 때이다.
아빠와 산업 은행에 같이 있던 분이 중학교 경리로 조동 되었다.
인상 좋지만 재정을 다루는 만큼 까다로워 원수도 있었다.
그 원수들이 그의 인상에 매료된 여 선생을 추적하였다.
그 처녀 선생이 학교 경비를 서는 날 음밀히 감시를 하였다.
예상대로 경비 실에서 함께 이불 속에 들어간다.
이때라 들이닥쳐 이불을 벗기니 발가벗은 남녀가 꼭 끌어안고 있다.
이런 얘기가 재미있는지 온 읍에 말 거리가 되었다.
이에 파묻힌 남녀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짐작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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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경이다. 김명건이란 분은 저의 고중 때 담임 선생이었다.
워낙 활달하고 영리하여 학교 교무 부장 겸 당 비서가 되었다.
임명권과 입 당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교장보다 영향력이 훨씬 크다.
처녀 선생 비중이 놓은 학교에서 당 비서는 왕궁의 자리이다.
이쁘고 활달한 사로청(청년) 지도원 여 선생은 나의 동창 누나였다.
이 두 분 사이에 부화 건이 터져 읍내에서 자자했다.
사연인 즉 이러했다.
김명건 선생이 말 잘 듣지 않는 학생들을 사로청 지도원 실에 가두고 비판서를 쓰게 했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퇴근 무렵 와 보니 학생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교탁 밑에 숨어 있었다.
이때 사로청 지도원 처녀 선생도 문을 잠그려 왔다.
이런 말 저런 말 시아까시(연애 스러운 말)걸다가 그러 안는다.
자신을 사로청 지도원으로 세워주었고 또 입당도 해야 할 처지에서
마다 할 수 없다.
이 과정이 교탁 밑에 숨어있던 아이들을 통해 소문이 퍼졌다.
쉬쉬 하였지만 그 소문은 한여름의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당국에서 조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처녀는 부랴부랴 시집갔고
김명건 선생은 철칙되어 탄광 기계 공장 노동자로 전락 된다.
담임 선생이었던 분을 만날 때마다 서로 옹색하여 모르는 체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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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초, 순천과 은산 사이 도로 포장 완공 식에 참가했을 때이다.
이 도로 포장은 은산 숭화리에 있는 김철주포병군관학교 까지 이어진다.
아프리카 나라 군인 유학생을 실어 나르는데 비 포장 길이 창피해서 급조한 것이다.
하여튼 이 도로 완공 식에 갔을 때 한 직장 즉 농업과학원 강냉이 연구소 처녀들이
소스라치듯한 놀라운 소식에 경색하며 수군거린다.
북한의 <최은희>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우인희 배우가 부화건으로 총살됐다는 것이다.
숱한 연예인들 앞에서 행해진 끔찍한 행위로 까무러친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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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함남도 경포 수산 사업소에 들렸을 때이다.
1년 전 홍원 수산 사업소에 겨울철 수산 전투로 작업 동원 갔을 때 기술 혁신 하면서
알게 된 리동현이란 3대 혁명 소조원(삭주가 고향)이 경포로 이동되어 초대한 것이다.
3대 혁명 소조원이 해야 할 기술 혁신을 내가 대신 잘 해주었다는 답례였다.
경포는 소나무와 백사장이 깔린 해변가이다.
부화하기 좋은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어선 지 가자마자 그 소리가 자자했다.
경포리 당 비서가 교환 수 처녀와 부화했다는 것이다.
부화 건이 분명함에도 군 당에 빽이 든든해서 처벌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처녀가 더 나쁜 것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라고 했고
시집가면 그 만이기에 그 방향이 합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부화는 권력과 부, 여유 시간이 있는 간부들에게서 더 자주 일어난다.
본능과 싸우라고 내보낸 최전선 간부가 오히려 그 본능에 더 못 견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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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에 한 번씩 하던 생활 총화를 2 일로 변경한 것은 1974년이다.
매일 출근해서는 수령께 충성하는 선서를 하고 일을 시작해야 했다.
무지한 농민들도 새벽 벌판에서 추워 벌벌 떨면서 주먹을 들고 선서하던 모습이 선하다.
수령을 위해 정말 충직하고 순수한 혁명가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당중앙>이란 명칭으로 김정일이 한창 후계자로 활약할 때이다.
연예계로 시작한 김정일 정치이기에 이 분야 단속이 가장 심했다.
하지만 김정일 자신의 부화는 그 전부터 절정이었다.
유부녀까지 다쳐 김정남을 낳은 성혜림 여배우 건이 대표적이다.
우인희 유명 배우의 처형도 자신과의 부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자신은 부화할 대로 다 하면서 이러는 이중성은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무법 유일 체제에서는 도둑이 도둑이야! 해도 권력만 있으면 상책인 것이다.
연애만 해도 간첩 잡아내 듯한 시기에 청춘을 보낸 우리가 가장 억울한 인생이기에 원통하다.
할 수만 있다면 김 부자에게 내 청춘 돌려 다오! 소송 걸고 싶다.
그렇다고 돌아오지 않은 청춘이니 - 얼마나 그 자들이 나쁜지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강 건너 불 보듯 하겠지만 그래도 동정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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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는 첫 북한 영화는 김정일이 납치한 신상옥, 최은희 가 만든 <철길 만 리 천 만 리>이다.
마찬가지로 첫날 밤 여자 옷 고름을 벗기는 것은 <사랑 사랑 내사랑> 영화가 처음이다.
별 세상 보듯 너무 좋아하면서도 이러 다 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본능에 거역된 선전과 사상에 세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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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 겨울이다.
연구 사업 하느라 새벽 1-2시 집에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날도 집에 가는데 우렁찬 합창 노래가 새벽 하늘을 가른다.
천리 행군을 하는 인민군 대열에서 나는 <사랑 사랑 내사랑>이었다.
정치 지도원을 비롯한 군관들도 분위기대로 따라간다.
혁명 원칙으로 토 달면 맞아 죽지 않는다 해도 왕따가 될 것이 뻔했다.
지칠 대로 지친 인민군에게서 흘러나와 할 노래는 이렇게 혁명가가 아니었다.
군사 복무 10년 간 오로지 혁명만 교육 받고 훈련 받는 군대가
가장 정답을 말하고 있었다.
죽인다 해도 <한류>가 퍼져 나가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글 /이민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