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에세이(17) 】
다시 동해구東海口에서 / 김잠출
일상이 심드렁할 때, 나는 신화의 소리를 들으러 간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날에도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집을 나섰다. 31번 국도를 달려 동해구에 닿았으니 만파식적과 신화의 소리를 들려주는 영험한 땅,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이다. 대종천을 건너 맞은편에는 대왕암이 있는 바다 감포읍 대본리가 있다. 동해구는‘풍파가 올 때 바다 밑에서 신라 대종이 울린다.’는 곳으로 신라에선 가장 신성한 장소였다. 우현 고유섭 선생은 생전에“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면서‘나의 잊히지 않는 바다, 동해구’라는 기념비를 남겼다.
만파식적 같은 방송
동해구에 서면 언제나 세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만파식적이라는 신비한 피리 소리와 신라 대종大鐘의 장중한 울림, 그리고 겸손하면서도 웅혼한 기상이 담긴 문무대왕의 유언이다. 때론 환청으로 때로는 상상 속에서 듣는 신화의 소리이다.
만파식적은 통일신라시대, 평화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소리였다. 죽창이 되어 적을 살육하는 무기였던 대나무를 악기로 만들어 오랜 전쟁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세상을 선포했다. 소리로‘치국평천하’를 이루고자 했던 문무대왕의 염원이 동해 파도에 남겨졌고 그 유언은 1,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문무대왕은 우리나라 왕 중에서 유일하게 문文과 무武가 합쳐진 묘호를 가진 왕이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분이다. 평생을 호국과 전쟁에 몸 바쳤던 왕은 당나라를 활용하긴 했지만 여제麗濟를 멸하고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룬 전쟁 영웅이기도 하다.
대왕은 통일을 이룬 뒤 동화同化보다는 화해和解를 택했다. 같은 민족끼리 지배와 피지배는 의미가 없으니 통치가 아닌 위민慰民의 정치를 펼쳤고 사후에도 만파식적을 전해 평화와 인화人和의 소리가 퍼지길 염원했다.
세상의 온갖 파란萬波을 없애고 평온息하게 만드는 피리笛는 지금 이 땅에도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정치적 불안이나 국난에 지친 나머지 태평성대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문무대왕의 유언은 겸손하고 각별하다. 선과 악,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는 명문이다. 메시지는 매우 구체적이고 한 줄 한 줄 읽으면 커다란 감동과 깊은 울림이 절로 인다. 왕은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다. 사치를 싫어해 검소와 절약을 강조한 대왕답게 화려하고 웅장한‘大王陵’을 배격했다.
문무대왕의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세우고, 용이 전해준 대나무를 보았던 대본리 언덕에 이견대利見臺를 지었다. 감은사는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뒤로(북쪽)는 용당산, 앞으로(남쪽)는 대종천의 넓은 하상을 마주하는 장소다. 용이 된 문무대왕이 출입한 용당이 남아있고 절 뒤쪽 언덕엔 아직도 대나무가 무성하다.
이곳 사람들은 신라 대종이 지금도 동해구에 남아 있다고 믿는다. 호란胡亂 때 약탈해 가던 오랑캐들이 대종천에 종을 빠뜨렸는데 물결에 휩쓸려 가 대왕암 바다에 묻혔고 태풍이나 파도가 심한 날에 웅웅거리는 대종의 소리가 들린다는 믿음이다.사람들은 그 소리가 마치 가마솥에서 물이 끓을 때 나는 소리와 같다고 증언한다.‘온 바다가 쩔쩔 끓는다.’는 그날엔 아무도 바다 일을 나가지 않는다. 물고기들이 대종의 소리를 따라 맥놀이에 맞춰 춤추거나 저마다의 집에 들어가 움직이지 않으니 사람도 쉬어줘야 한단다. 할喝! 관음문향觀音聞香이다. 청정한 소리는 눈으로 보고 맑은 향은 귀로 들으라는...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바라기는 방송이 이 시대의 만파식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세대와 이념, 진영과 지역 간에 갈갈이 찢긴 이 땅의 피 울음을 치유하는 관음문향의 도구가 된다면 말이다.
봄편지의 시인 서덕출
지금은 장미의 계절, 지역마다 장미축제를 열고 사람들이 몰린다. 고혹과 매혹이란 단어와 잘 어울리는 장미는 가시가 있어 여인의 성정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는 어떤 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장미를 소재로 한 노래도 있다. 사랑과 평화는‘장미 한 송이’를 외쳤고 민해경은 ‘그대 모습은 장미’를 남겼다. 4월과 5월은 연인을 장미에 비유하며 ‘장미’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멜로디가 밝고 경쾌한데다 가사도 순정하고 단순해 장미를 노래한 가요 중에 가장 친숙하다.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고 싱그러운 모습에 가시까지 돋아 있으니 당신을 장미라 부를래요.”라는 가사를 읊조리면 차라리 사랑하는 이를 위한 찬사가 된다.
울산 사람들도 5월이면 온통 장미향에 취한다. 364만여㎡의 드넓은 울산대공원에 300만 송이의 장미가 피어나 경향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장미를 보는 이들은 잠깐이나마 러브스토리를 꿈꾼다.
울산의 5월은 장미에 더해 동요가 울려 퍼진다. 울산MBC의 <서덕출 동요제>가 창작동요를 보급하고 울산신문사가 전국 문인을 대상으로 <서덕출 문학상>을 시상한다. 경영난과 각종 어려움에도 서덕출 동요와 문학을 기리는 축제를 한 해도 빠짐없이 17년째 계속하는 것은 팩트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칭찬받을 일이다. 서덕출 문학정신의 전국화를 위해 애쓰는 지역방송과 지역신문이 있는 한 지역문화와 지역 인문학은 죽지 않는다.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트로트 열풍에 가담하고 있지만 우리 어릴 때는 말 그대로 모두가 ‘놀 애’(‘노래’의 어원)였고 동요만 불렀다. 노래의 소재도 고향과 구름, 바람과 물, 해와 달과 별, 산과 들이었고 시냇가와 꽃, 나무, 새들이었다. 지금 아이들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거나 “항구의 남자”에게 고향이나 이름을 묻지 말라고 감정을 쥐어짠다. 이런 판에 동심을 되찾게 해야 한다며 창작동요제를 고집하는 지역 방송에게 박수를 보낸다.
서덕출은 일제 강점기 시대, 장애를 딛고 아름다운 동요를 만든 뛰어난 아동문학가로 1925년 <어린이> 4월호에 동시 ‘봄편지’가 당선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이플 따서요/ 우표 한장 부처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갓던 제비가/ 푸른 편지 보구요/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차저 옵니다."
그 시대뿐 아니라 1970년대까지 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은 시로 평가받는 이 작품 하나로 서덕출은 일약 동요 문학의 스타가 되었고 사람들이 ‘봄편지의 시인’이라 불렀다.
서덕출은 1907년 2월 9일 경남 울산시 중구 교동에서 아버지 서형식과 어머니 박향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출正出이고(호적엔 덕줄(㥁茁)로 표기) 5남 4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라다 여섯 살 때 집 대청마루에서 베개를 가지고 놀다가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일로 등이 굽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의 몸이 되었다. 서울의 윤석중, 언양의 신고송 정인섭과 대구의 윤복진 등과 교류하며 격려하고 합동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소파 방정환이 울산에 왔을 때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그의 작품 봄편지를 노랫말로 윤극영과 홍난파가 작곡해 동요로 남겼다.
이제 동요는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골목이나 놀이터는 물론 학교에서도 ‘놀 애’가 안보이고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동요보다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듣고 트로트 경연대회에 참가하거나 휴대전화 게임과 SNS, 유튜브에 몰입한다. 누가 아이들에게서 놀이와 노래를 빼앗았을까. 지금 이 땅에는 5월임에도 우렁차고 청아한 동요를 들을 수가 없다. 동요가 없는 5월, 어쩐지 서글프지 않나?
정명定名과 정명正名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꽃 중)
우리는 서로서로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해 줘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제대로 된 이름이 있어야 하고 이름을 제대로 불러줘야 그 사람의 정체성이 제대로 드러나고 서로는 특별한 관계가 된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방송 프로그램도 그러하고 역사적 사건도 바른 이름이 중요하고 제대로 부르는 일이 중요하다.
일테면 동학난이나 동학혁명이라는 이름보다. ‘동학농민운동’으로 불러야 격에 맞다. 5·18 광주민주항쟁도 마찬가지다. 30여년 만에 제 이름을 찾긴 했지만 ‘5·18’이나 ‘광주사태’로 불러선 안 된다.
(사족, 80년대 남성 3인조 댄스 팝 그룹으로 인기 절정이었던 소방차의 원래 이름은 ‘코스모스 위에 앉은 나비’였다. 올바르고 제대로 된 이름 짓기와 이름 바르게 부르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봄철 프로그램 개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4, 5월이면 늘 들었던 방송 안내 멘트이다. 간혹 개편을 ‘개판’으로 오독하는 아나운서도 있었지만 어쨌든 4, 5월은 각 방송사의 봄철 개편 시기였다. 다채널과 미디어 홍수 속에 경쟁이 과열된 요즘이야 개편 시기가 따로 없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방송사는 춘하계와 추동계 전면 개편을 의무로 받아들이고 반드시 실천해야만 했다. 시청자들에게 새로움을 선사하고, 시청률을 높이기위해 필요한 작업이라는 명분은 참으로 지엄했다.
개편 준비에서 가장 큰 고민은 타이틀이었다. 진행자 선정 이른바 캐스팅이 핵심이지만 타이틀은 새로 선보이는 프로그램의 문패이자 이름표 역할을 하는 얼굴이었으니 기획 의도와 내용, 방송 목적에 적합하고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PD들을 강하게 지배했다. 그때는 定名이란 곧 正名이어야 했다.
개편 한 두 달 전부터 아이디어를 모으고 저마다 기획안을 만들어 합숙하거나 파일럿 프로그램을 미리 제작해 애피타이저나 미끼로 선보이기도 했고 기억하기 쉽고 간단명료한 타이틀이 가장 좋다는 원칙과 대여섯 자 정도의 글자 수를 고집했던 것 같다. 재미와 의미, 흥미와 감동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창의적인 타이틀을 요구하는 윗선의 지시에 머리에 쥐가 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PD들은 기획서의 제목만 보고도 히트할지 말지를 직감할 정도로 타이틀의 비중은 컸다. 지금은 성공한 남의 타이틀을 슬쩍 도용해 비틀어 쓰기도 하고 패러디와 모방, 수정과 개작이 판을 쳐도 재미에만 방점을 두니 그럭저럭 묻어가기도 하지만 ‘라떼’는 신선하면서도 관심을 끌 만한 타이틀을 찾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댔다.
유명한 주철환 PD는 늘 “방송이 재미만 추구하면 끝이 항상 허전하다.”고 말했다. 또 재미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감동이나 의미가 있어야 하고 재미의 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설파했다. 그냥 ‘오락’은 소비적인 장르지만 ‘예능’은 시청자들에게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걸 웃음으로 환기해주는 장르라는 말처럼 좋은 예능 프로그램은 볼 때 지루하지 않고, 보고 나서 뭔가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많은 후배들이 동조했다. 감동을 전해야 한다는 말과 감동의 사촌은 감사라는 그의 지론에 나도 격하게 동의했던 적이 있다 .‘미스터 트롯’을 보면서 고향의 부모님께 전화하게 된다는 젊은이들도 많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방송이 인기 있고 오래가고 기억에 남는다.
아나운서는 친일파?
예나 지금이나 친일파를 욕하고 일본이란 단어에 본능적으로 흥분하며 침을 튀기는 이중적인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편가르기와 프레임 씌우기에 휩쓸리는 방송인들도 허다한데 가끔 멋모른 아나운서들이 일본어를 방송에서 사용할 때가 있다. 그들이 친일파여서 그러는게 아니다. 혼동했거나 다소 무지하거나 습관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다가 실수하는 경우이다. 그런 일본어 중에 ‘땡땡’이나 ‘똔똔’이란 단어가 있다. 오늘 아침에도 땡땡을 반복하는 아나운서의 방송을 들으며 출근했다.
울산의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궁거랑) 벚꽃축제에 관한 퀴즈를 낸 아나운서가 힌트랍시고 “땡땡땡 벚꽃축제, 여기서 땡땡땡은 무엇일까요? 활처럼 휜 모습에서 따온 말입니다.”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이곳의 벚꽃은 군항제로 유명한 진해의 벚꽃이나 거의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까 똔똔이란 말이죠.”
강성곤 아나운서의 지적에 따르면 땡땡이나 똔똔은 방송 용어로 부적합한 일본말이다. 꼰대들이 가끔 오남용한다지만 우리말이 아니다. とんとん이란 일본어로 ‘엇비슷하다/어상반하다/팽팽하다’로 대체해야 옳다. 누구나 일상에서 쓰는 말이고 너무 자주 들어 우리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란다.
영(0)이나 동그라미 아니면 둥근 빈칸을 보면 반사적으로 뗑뗑뗑/땡땡땡 하기도 한다. 방송에서도 열에 아홉은 이렇게 읽는다. 점點을 일본말로는 뗀/뗑(てん)인데 아나운서가 부지불식간에 또렷이 일본말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채...
하기야 예전에 공영방송의 아나운서가 방송 중에 일본어 ‘쿠사리(くさり)’를 표준어라고 주장했다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일도 있다. 면박이나 핀잔, 꾸지람이 맞는다.
다시 강 아나운서의 훈계를 더 들어보자 .“000은 우리 식으로 하면 사람일 경우 아무개, 사물일 경우 무엇(세 글자/3음절)이 대안이다. 이도 저도 귀찮으면 그저 ‘공공공(空)’하면 된다. ‘땡땡이 무늬의 옷’이라고 하지 말고 ‘빗방울 무늬 원피스’나 ‘점박이 블라우스’라 하면 그만이다. 반면에 ‘또이또이’는 분명한 우리말이다. 원래 ‘똑똑히’의 충청 방언이지만 비슷하다/똑같다/엇비슷하다란 뜻으로 많이 쓰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우리말 샘(오픈사전)에서는 인정한다고 돼 있다."
방송언어! 아나운서는 우리말 지킴이의 최일선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아나운서들은 우리말 지킴이로 어울리지 않는 분들이 많다. 아나운서는 최고 수준의 말을 사용해야 하고 표준어로만 방송하거나 그리 못하면 최소한 국어를 오염시키진 말아야 한다. 영국의 표준어는 BBC 아나운서들이 구사하는 언어라고 한다. 일본의 표준어는 NHK 아나운서의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표준어는 아나운서와 상관없다니 이래도 괜찮을까.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 KBS 아나운서의 말을 표준어로 가름하면 어떨까 하는 주장이 있어 주목된다. 아나운서의 책무가 얼마나 중하고 귀한지를 강조하기 위한 말이지만 나는 한 표를 주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유랑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견디어 내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된 유대 민족의 이산離散, 디아스포라(Diaspora)의 기간은 무려 2000년이었다.
새내기 PD는 방송국 ‘시다’
방송과 완전히 작별하고 새 직장에 출근하면서 방송 새내기 시절의 웃픈 경험이 떠올랐다. PD가 뭔지도 모른 채 입사해서 겪은 일들이다. 입사하자 말자 사장은 자취방 주인집 반상회에 참석해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고 직장 예비군 중대장은 농번기 모심기나 벼베기 일손에 참여하라고 지시하는 일이 허다했던 시절이었다. 가끔 공개방송이 있는 날에는 허드렛일에 무조건 투입됐다. 장비와 각종 비품을 들고 짊어지고 나르는 배달꾼이 주 임무였다. 공연장의 기도역할도 마다 않았고 표 받기와 관객 정리, 관객호응을 유도하는 박수몰이꾼 역할도 자주 맡았다.
정광태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고 혜은이의 파란나라, 들국화의 행진이 힘차게 울려 퍼지던 1985년 여름, 톡톡히 창피를 당했던 에피소드를 소환해 본다.
7월15일 오후 태화강 남쪽 둔치에서 ‘울산시 구제區制 실시’ 축하 공연이 있었는데 입사 이후 현장에 첫 발을 내디딘 행사였다. 내 역할은 관람객 의자를 둘러싼 줄을 보호하며 무단출입하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뙤약볕에 정신없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데 왜 그리 아는 사람을 자주 보는지. 그 중에 얼굴 마주 친 분이 하필 재종누님이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연예인 보러 왔다는데 그냥 들어가고 말지, 새까만 얼굴에 꾀죄죄한 동생을 보더니 혀를 차며 하는 말, “야야! 방송국 취직했다 카디마는 니 시다하나?”
그나저나 축하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8월의 바캉스 시즌을 앞둔 어느 주말, 나는 또다시 창피스런 경험했는데 한여름 백주대로에서 포니차를 밀고 가던 일이다.
K모 차장이 가족들과 함께 경주 도투락 월드에 놀러 가는데 동행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토요일은 반공(半空)일이라 얼씨구 하고 동승한 것은 좋았는데 회사를 출발한 지 10여분 만에 잘도 달리던 포니가 강변도로에서 푸르릉하며 퍼져버렸다. 우물쭈물하는 초짜 PD에게 차장께서 하는 말, “야 뭐하나, 빨리 내려 뒤에서 밀어 봐.” 엉덩이 높이 쳐들고 삼복염천에 찐득한 팥죽 같은 땀을 흘려대며 곤죽이 된 그날, 여행이고 나발이고 길 위의 원숭이가 된 기분에 “당장 때려 치워야지.”를 다짐하고 결심했다. 진짜 집어치웠으면 지금 회상하며 웃을 일은 없었겠지만. 추억은 시간이 지워나간다. 방송일 보다 ‘노가다’부터 배우고 몸으로 때우던 시절, 1980년대였다.
물 맑은 5월, 동해구가 보이는 언덕에 피었던 벚꽃이 모두 지고 수박향내 나는 은어들이 대종천으로 모천회귀 중이다. 은어들은 동해구를 거치면서 신화와 종소리를 자신의 몸 곳곳에 새겨 놓아 몸피가 많이 부푼 것 같다. 내 시선도 대종천에 머문다. 이때를 기다려 온 낚시꾼들이 하나둘 몰리더니 낚시에 열중한다. 대부분 살아 있는 은어를 미끼로 물속에 있는 은어와 싸움을 붙여 잡는 ‘씨은어 놀림낚시’ 중이다. 친구를 꾀어 친구의 구역을 침범케 하고 둘이 다툴 때 잡는 방식이다. 은어는 자기 구역을 지키려고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운다. 먼 바다까지 갔다가 회유한 천신만고의 노고를 보상하고 위안받기도 전에 지들끼리 골육상쟁하다 함께 바늘에 꿰어주니 사람은 그저 손맛을 즐기고 수확하기만 하면 된다. 어부지리가 따로 없다.
첫댓글 동해구의
문무대왕 유언을
이 시대에도 살펴
잘 기억해 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고향의 새소리
파도소리가 그리워지는
5월이네요~~☆
고향바다는 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