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과 농사일에 대한 추억
육십년대의 우리나라 산골의 농촌이 다 그러하였겠지만, 조그마한 다랑이 논에 모를 심어 쌀 몇 섬 수확하고 산비탈을 일구어 만든 자갈밭이나 집 주위 텃밭에 콩과 옥수수를 심거나 고추나 배추를 길러 자급자족하는 것이 농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녹색혁명과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육십년대말경의 우리나라 농가호수와 농가인구는 이백오십만 농가에 천오백만명으로 전체인구의 45%를 차지하였고, 경지면적은 2,298천㏊로 농가당 1㏊에도 못 미치는 아주 영세한 농업 형태다. 그 동안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농가인구는 1/5로 줄어든 삼백삼십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고 경지면적도 1,800천㏊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탈농현상은 이 보다 더 가속화되어 농가당 경지면적은 1.3㏊로 오히려 조금 높아졌다. 당시 국민소득은 오늘날의 1/80 정도인 250불로서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아마 북한보다도 더 못 사는 나라가 우리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는 우리나라 평균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역마다 또는 지대마다 많은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평야지대와 우리 시골과 같은 산간지대와는 경지면적이나 농가소득 면에는 격차가 상당히 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산골이라 하더라도 부농과 빈농은 존재하는 법이다. 지금은 혼자 지어도 다 지을 수 있는 땅덩어리지만, 이곳에서도 일꾼을 부리는 부농과 남의 집 일꾼으로도 일할 수 없어 입에 풀칠을 겨우 하는 빈농이 존재하였다.
우리 동네는 첩첩 산중으로는 표현할 정도로 아주 깊은 산골은 아니지만 전후좌우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군소재지로부터의 거리가 백리를 넘을 뿐 아니라 면 소재지로부터도 이 십리나 되니 산골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면 소재지 친구들이 “모지 꼴티 사람”라고 놀리면서 우리 동네에 서로 놀러 오려고 했으니 말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를 기준으로 교육 환경을 살펴보면, 초등학교가 육리나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중학교가 면소재지에 있으니 이 길이 이 십리나 되며,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가 인근 면에 위치한 농고로서 사십여 리가 된다. 그 당시에는 매우 가난하여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였고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절반도 못되었다.
당시에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다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 때에 교실에 남포등을 켜놓고 보충수업을 하였다. 더군다나 중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집안은 별로 안 되어 시골학교에서 중학교 그리고 대도시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도 어려웠다.
대도시 또는 그 주변에 하급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장남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지 차남부터는 잘 가야 시골에 있는 농고이고 대부분은 농사를 짓거나 도시 공장으로 돈을 벌려나가야만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호롱불을 켜 놓고 공부 했다. 이 호롱불도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한 방에 켜 놓고 두 셋 정도는 둘러 앉아 공부하였다. 어쩌면 그 정도면 행복할 지도 모른다. 내가 아주 어린 초등학교 일학년 정도일 때에는 이 호롱불 옆에서 어머니께서 바느질하셨고, 조금 커서 중간 방으로 옮겨서는 할머니께서 문래를 타셨으며, 더 커서 사랑방으로 옮겨서는 할아버지께서 새끼를 꼬시고 가마니를 칠 때 이 호롱불을 같이 사용하였다. 등잔 위에 놓인 호롱불을 장난치다 쏟거나 더 밝게 하기 위하여 심지를 올려놓았다가 기름이 많이 없어진다고 할아버지께서 곰방대로 때려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남포등에 대한 추억도 많다. 당시에는 손전등이 귀하여 남포등을 많이 이용했다. 처음에는 사각형 형태로 모퉁이에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 세우고 옆면에는 문종이를 바른 후, 위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연기가 나가도록 만들어 사용했다. 손님이나 어른을 모시고 길을 안내하거나, 보리나 벼 타작을 하고 밤늦게 까지 뒷정리를 하거나, 어머니께서 키를 이용하여 낱알을 골라낼 때 마당에 이 남포등을 걸어놓고 일하였다.
그 다음으로 나온 것이 일본말로 호야라 부르는 등으로 둥근 유리로 만든 남포등이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유리라서 굉장히 밝아 크게 유행하였으나, 기름이 많이 소모되고 그슬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유리를 닦다가 깨뜨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 다소 약점이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 보충수업을 하기 위하여 두서넛이 한 조가 되어 이 호야를 켜놓고 공부했던 기억이 제일 많이 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문화라는 말을 붙이기에 민망할 정도로 문화적 혜택이 주어졌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전깃불이 없어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해야 했고, TV나 라디오는 물론 전화도 없으니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 수가 없고 도시가 어떤지 세계가 넓은지도 잘 몰랐다.
통신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산골 여러 동네를 묶어서 설치한 민간 앰프가 유일하였다. 그 것을 통하여 시간을 알았고 뉴스와 노래를 들을 수 있었으며 면내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보리 몇 되를 받고 하루 서너 시간 방송해주는 앰프라 툭하면 잡음 소리가 나서 귀를 쫑긋 세워도 듣기 어렵다. 미루나무가 서있는 시내길 따라서 소나무가 울창한 산길 따라서 이 동네 저 동네로 설치한 선줄 탓으로 바람이 세게 불어 나뭇가지가 꺾어져도 앰프는 먹통이 된다. 한 참 후에 방앗간에 들린 동민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된 앰프 운영자가 그 원인을 찾기까지 몇 날 며칠을 마냥 기다려야 하는 그런 통신시설이다.
그 다음으로 육십년대말경부터 보급된 것이 라디오다. 이 라디오도 월남전에 파병 간 국군들이 제대하면서 들고 들어오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외는 몇몇 부잣집에서 중고 라디오를 구입한 것이 전부다. 우리 집에서는 칠십년대초 쯤 라디오를 산 것으로 기억하는데, 밤늦게 킹스컵 축구나 농구 중계방송을 듣기 위하여 라디오 앞에 아버지와 여러 형제들 그리고 옆집 형들까지 모여서 가슴 졸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당시 신동파, 유희영 등 대한민국 농구대표선수들이 필리핀 대표들과 벌이는 농구전의 라디오 중계방송은 손에 땀을 쥐기에 충분했다.
전기가 없으니 냉장고 등 가전제품이 있을 리 만무하고 아니 아예 있는지도 몰랐으며 냉장고 역할은 우물물이나 한 여름에도 시원한 찬물이 나는 “도내기 샘물"이 대신하였다. 한복의 동정이나 무명옷을 다리기 위한 다림질은 숯불에 달구어서 하는 인두가 하였다. TV는 내가 시골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전기가 공급되면서 들어왔으니 아예 언급을 않은 것이 좋을 듯하다.
모내기를 끝내고 이어서 보리나 밀 타작을 마무리하면 여름이 되어 더워진다. 이 때쯤이면 어른들께서 낙동강 백사장으로 찜질을 가신다. 그곳에서 찜질을 하고 돌아오실 때에는 수박을 사온다. 우리는 숟가락으로 긁어낸 수박의 속에 시원한 “도내기 샘물”을 붓고 사카린을 타서 온 식구들이 둘러 앉아 배를 채우곤 했다. 요즘 같으면 냉장고 얼음물 역할을 이 “도내기 샘물”이 대신했던 것이다.
산골이니 교통은 어떠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길이 멀고 좁아 버스가 못 들어오니 초등학교나 중학교는 걸어서 다녀야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초등학교 선생 한 분과 대서방하시는 아저씨 정도가 자전거를 타고 다닌 것으로 기억한다. 외딴집인 우리 집에는 리어카도 들어오지 못하여 지게가 농사일을 하는데 유일한 운반 기구였다.
상수도가 없으니 논 가운데나 냇가 옆 우물에서 물을 길러 먹거나 냇물을 그냥 마셨고, 싸리문 옆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는 휴지 대신 짚을 사용하여 뒤처리를 하였으며, 칫솔과 치약이 없으니 냇가의 고운 모래로 이를 닦거나 조금 잘사는 집안에서는 소금으로 양치질을 하였다.
나는 우물이라 하면 형제들과 싸운 기억이 제일 많다. 나의 위로 형이 둘이 있는데 위로 둘은 연년생이고 둘째 형은 나와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키나 몸무게가 거의 비슷하다. 우리 집은 대식구라서 물이 많이 필요하여 백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우물에서 매일 물을 길러 와야 한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어머니께서 항아리에 물을 담아 머리에 또래를 얹어 이어서 부엌의 독에 물을 가득 채웠으나, 우리가 조금 커서는 이 물 긷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여름은 덜 하나 겨울에는 이 물 긷는 일이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니다. 찬바람은 씽씽 불어 손은 시리고 얼음은 얼어 미끄러운데다가 우물에 물은 바닥을 겨우 가리는 정도이니, 이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양철통에 담아 물지게로 지어 큰 독에 가득 채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 오후가 되면 형제들 셋이서 “가위 바위 보”를 하여 결정한다. 1등은 닭 모이와 염소 모는 것, 2등은 소죽 끊이는 것, 3등은 물 긷는 것으로 분담을 한다. 그러나, 가위바위보가 어디 한두 번에 끝이 나야지, 무슨 핑개를 대어 또 하고 또 하다 어머니께 혼이 나고 나중에는 참다못한 아버지께서 몽둥이를 들고 들어오시어 혼비백산하고 산으로 도망친 일도 참 많았다.
또 하나 시골에서 농사일 다음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나무하는 일이다. 지금이야 산골인 우리 마을 뒷산이나 밭 주위에 널려 있는 것이 나무이지만 옛날에는 뗄감용 나무하는 일이 큰 일이였다. 부농은 볏짚으로 불을 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볏짚은 새끼 꼬거나 지붕을 이거나 가마니 짜는데 사용하여야만 했기 때문에 뗄감은 별도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야 했다. 가을걷이가 끝이 나고 초겨울에는 마른 풀을 베어다가 뗄감으로 사용하면 되나, 이것도 바닥나 점점 더 깊은 산골로 가서 나무를 하게 되고 나중에는 이것마저도 동이 나게 된다. 그러면 몰래 남의 산이나 사찰림에서 소나무를 베어서 사용하게 된다. 옛날에 무서운 것이 둘이 있는데 그것은 순경도 아니요 판사도 아니다. 첫째는 소나무 간수요 둘째는 밀주를 단속하는 간수다. 생소나무를 베어다가 산골짜기에 숨겨 두고 사용하다가 들켜 벌금을 물고, 밀주를 하다가 들켜 벌금을 묻는 것이 범죄라고는 없는 이 산골에서 제일 무서운 벌이였다.
내가 어릴 때에 제일 많이 한 것이 소나무 갈비(낙엽)를 모아서 망태기에 담아 뗄감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소나무를 베고 난 후에 죽어서 생기는 나무 밑둥치(둥걸)를 캐어다가 뗄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가끔 낫을 들고 풀을 베어다가 뗄감으로 사용한 적도 있지만 어려서 큰 도움은 못되었다. 내가 중학교 올라가서 처음으로 지게를 지고 어른들을 따라 산을 넘어 뗄감을 하러 갔다.
고개 넘어 산비탈에서 마른 풀을 베어서 칡으로 묶어 한 단을 만드니 해는 중천에 떠있고 어른들은 서너 단을 하여 지게에 싣는 것이다. 급한 마음에 많게 보이려고 새집지은 것같이 세게 묶지도 않고 지게에 싣고 산 정상에서 내려오다가, 바람이 “씽”하고 불어 나뭇짐이 흔들려 넘어지고 설 묶은 짐은 풀어져 바람에 날아간다. 겨우 짐을 챙겨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달달” 떨리고 산비탈 계곡에 처박을 것만 같아 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내려왔다.
누가 먼저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수십 명의 나무꾼들이 짐을 지고 내려오다가 잠시 쉬어가는 곳이 정하여져 있다. 그런데 나는 다리와 발가락에 하도 힘을 주어서 짐을 내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날 때에는 힘이 없어 일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일어난 그 다음부터는 쉬지도 않고 집까지 오느라 죽을 고생을 하였다. 겨우 집까지 와서는 나뭇짐을 마당에 내려놓고 어깨에서 지게 끈도 못 풀고 꼼짝도 못한 채 그냥 누워 있었다. 안방에서 인기척 소리를 들은 어머니께서 문지방을 내다보다 그 꼴을 보고는 놀라 맨발로 뛰어나와서 하시는 말씀, “그래,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무하러가더니 꼴이 좋다”고 하시면서, “공부 보다 쉬운 것이 없으니 내일부터 공부만 해라”고 하셨다.
그 후로도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공부하기 싫어서 나무를 하러 가끔 갔다. 어느 정도 숙달이 되니 내리막길에서도 다리가 떨리지 아니하고 쉴 때도 같이 쉬는 등 요령이 생기는 등 나도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아 가끔은 나무하러 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때 어머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내가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할 수 있겠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으니 말이다.
그 당시의 농사와 농가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 동네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지지리도 가난하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우리 동네에는 사십여 농가에 줄잡아 한 삼백여명이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임란을 피하여 이곳에 정착한 경주 최가와 그 이후 이곳에 정착한 영월 신씨가 씨족을 이루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최가와 신씨 정자가 유일한 기와집이고 모두 초가집이었다. 옆 동네에는 기와집이 두어 집 있고 방앗간도 있었으며 땅도 넓었으니 제일 골짜기인 우리 동네가 옆 동네보다는 훨씬 가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을 피하여 배 타고 강을 건너 가장 깊은 골짜기로 왔으니 문전옥답이 어디 있었겠으며 비탈진 산을 개간하여 밭농사를 짓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개울 옆으로 이어지는 논두렁이 어른 키만큼 높은 천수답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모두가 천수답이라서 가뭄이 들면 벼농사도 지을 수 없어 논에 조를 심어야 하고, 밭농사보다는 돈이 더 되는 쌀농사를 짓기 위하여 부단히도 개답을 하여 해마다 논은 조금씩 늘어만 갔다.
우리 동네의 논과 밭은 다해봐야 이십㏊에도 못 미치니 농가당 0.5㏊로 우리나라 평균의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십여 또는 이십여 마지기 농사를 짓는 농가가 있는 반면, 산비탈을 무단 개간하여 비만 오면 자갈만 남은 비탈진 밭만 가진 농가도 있었으며 손바닥만한 밭떼기 하나 없이 남의 집 머슴살이로 연명을 하는 농가도 있었다.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은 논마지기가 조금은 있고 아버지께서 6.25전쟁에 참전하시어 부상당한 관계로 일을 잘 하지 못하여 머슴으로 반일꾼을 두었다. 반일꾼은 이틀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와서 일을 하는 형태로 세경도 반만 주는 방식이다. 반일꾼으로 들인 머슴은 우리 동네 분으로 아버지 친구이고 그 분의 자식은 내 친구였다. 굳이 머슴이라기보다 한 동네에서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그런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른다. 여러 형제들이 커가면서 농사일을 거들 수 있고 한편으로는 공납금 등 학비가 많이 들어감에 따라 일꾼을 들이지 않고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농사를 지었다.
경운기도 없고 경지정리도 되어 있지 않으며 수리시설이라고는 연못이 전부인 육십년대말의 농사를 계절에 따라 한 번 그려보면서 어릴 적 농촌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양력으로 일월은 한겨울이다. 모든 땅이 얼어붙은 관계로 농사일도 할 수가 없어 일년 중 가장 한가한 농한기라 할 수 있다. 학교도 방학을 하여 온 식구가 거의 매일 한 지붕 아래서 지낸다. 이 때 하는 일이라고는 나무하기, 쇠죽 쑤기, 가마니 치기 정도다.
십이월말부터 겨울 방학이 시작되면 이때부터는 집안이 형제들끼리 장난치다가 싸우고 동네 애들이 모여서 놀기 때문에 하루 종일 시끌벅적하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랑방에 가마니 짜는 틀을 차려놓는다. 미리 꼬아놓은 새끼를 가마니틀에 끼우고 볏짚을 추려서 입에 물을 머금고 “푸”하고 뿌려서 부드럽게 한다. 할아버지께서 가마니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중심을 잡고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새끼 간격을 벌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긴 대나무로 만든 막대에 볏짚을 감아 넣는다. 이어서 할아버지께서 쿵하고 다지면 아버지께서 또 짚을 넣는 작업을 반복하여 가마니를 짠다.
내가 초등학교 때에는 어려서 볏짚을 추리고 물을 뿜는 일을 주로 했고 아버지와 형이 긴 대나무를 잡았다. 그 후 중학교 들어가서는 나도 대나무를 잡고 가마니를 짰는데, 이 때부터 형제들끼리 서로 하지 않으려고 눈치를 엄청 보았다. 가마니 한 장을 다 짜고 난 후, 마무리 작업은 할아버지 아니면 못하기 때문에 이 때를 이용하여 안 동네로 놀러 가버린다. 놀러가지 못한 사람이 하루 종일 붙잡혀 가마니를 짜야했기 때문이다.
낮이 짧고 밤이 길다 보니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노름이다. 어른들도 심심하다 보니 동네 사랑방에 모여서 화투로 술내기를 많이 한다. 때로는 노름으로 번져 일년 내내 지어 마련한 쌀가마를 하룻밤에 날리는 등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또 이 때가 되면 노름꾼들이 동네로 들어와서 순진한 농사꾼들을 유혹하여 땅문서를 잡히는 경우도 심심찮게 벌이지는 때다.
이월이 되어도 만물은 여전히 움츠리고 있다. 옛날에는 요즘과 비교하여 눈도 많이 오고 추위도 훨씬 더 추웠지만, 그래도 이월말경이면 해동이 된다고 부지런한 농사꾼은 서서히 농사일을 준비한다. 우선 해동이 되어 땅이 서서히 녹으면 온 가족이 논과 밭에 나가서 보리와 밀 밝기를 한다. 보리밝기를 하는 이유는 겨우내 얼었던 논이 해동되면서 땅이 솟아올라 밝지 않으면 웃자라고 말라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에는 개학하여 등교하면 하는 일이 이 보리밝기였으니, 보릿고개 시절에 보리와 밀농사의 흉풍은 농촌 경제만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또한, 볕이 드는 따뜻한 마당모퉁이에서 볏짚으로 영을 만들고 새끼를 꼬아서 초가지붕을 새롭게 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달이기도 하다. 설과 보름이 끼는 이월에는 동네 행사도 다양하게 벌어진다. 설날부터는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어른들께 세배를 한 보름까지 다니고, 보름날에는 보름달을 보려 앞산에 올라가서 한 해의 소원을 빈다. 보름날에는 동네 농악대가 지신밝기를 하여 악귀를 내쫓고, 논두렁 밭두렁을 태우는 쥐불놀이를 하여 병해충을 죽여서 한 해 농사가 잘되길 기원한다.
우리가 잘 아는 “농가월령가”의 정월(음력)편을 보면 1월은 초봄으로 입춘·우수 절기로 들판에는 서서히 봄기운이 오는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내가 어릴 적에 느낀 봄과 별도 다르지 않다.
正月는 孟春이라 立春 雨水 節侯로다.(정월은 초봄으로 입춘 우수절기로다)
山中澗壑의 氷雪은 남하시나(산속 골짜기에 얼음과 눈이 남아 있으나)
平郊 廣野의 雲物이 變하도다(넓은 들과 벌판에는 경치가 변하기 시작하도다)
봄의 길목인 삼월에는 만물에 생기가 돌듯이 겨우내 움츠렸던 농촌에도 생기가 돈다. 어른들은 저마다 한 해 농사를 준비하고 아낙네들은 들판에서 냉이를 캐거나 연못에서 말을 따다가 입맛을 돋운다. 겨우내 여물만 먹고 놀아 윤기가 흐르는 황소의 코뚜래를 갈고 쟁기를 달아 못자리용 논을 갈고 천수답이라 물을 가두기 위해 논두렁을 정비한다. 그 다음으로 여름 홍수에 미쳐 마무리 하지 못한 논두렁을 고치고 거름을 내거나 흙을 지게로 져다 나르며 땅심을 돋군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돌산을 깎아 내거나 빈터의 자갈을 치워 밭을 일군다.
이때에는 보리밭이나 밀밭에서 김매기를 하여 잡초를 제거하고 볍씨와 씨감자를 준비해놓아야 한다. 호박을 심기 위해 큰 구덩이를 파고 통시의 인분을 퍼 다가 똥통에 담아 짊어지고 구덩이에 붙은 일도 이 때쯤 한다. 인분 냄새 때문에 서로 안 하려고 싸우기도 하고, 인분으로 장난을 치다가 옷을 다 버려 울기도 하였다. 밭둑이나 쓸모없는 빈 공터에 이렇게 호박을 심어 놓으면 누가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호박이 열려 국수에 넣어서 먹기도 하고 겨울철 호박범벅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고 비가오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지붕에 영을 이는 것이다. 겨우내 미리 준비하여둔 영과 새끼로 낡은 초가집의 지붕을 제거하고 새 짚으로 만든 영을 씌우는 작업인데, 이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서로서로 돕는 품앗씨로 한다.
요즘과 달리 옛날에는 사월부터가 본격적인 농사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볍씨를 소금물에 담겨 싹을 내는 것과 모판을 잘 정리하여 파종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큰일이라 할 것이다. 이 볍씨를 소독하여 독에 담그고 싹을 내어 모판에 뿌릴 때까지 온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당시에는 이 볍씨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것과 묘판의 묘를 잘 내지 못하는 것은 일년 농사를 망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둘째는 씨감자를 두서넛으로 쪼개어 감자를 심은 것이다. 당시에는 봄 감자가 식용으로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은 감자를 유월경 캐어 가마솥에 넣고 삶아 먹는데, 가마솥 제일 밑에 약간 누른 감자는 단맛을 내기위해 뿌린 사카린이 모여서 특히 더 맛있다.
그 다음으로 누에씨를 잘 살피고 잠실과 양잠도구를 손질하는 것이다. 그리고 뽕나무를 심거나 뽕나무를 잘 관리하여 뽕잎이 잘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다. 텃밭에 완두콩도 심고 채소도 심어 가족들 반찬거리도 준비해야 한다. 어릴 적에는 이 완두콩이나 콩 그리고 옥수수 씨앗을 심은 후, 한 잎 두 잎 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교과서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아 아침마다의 즐거움이었다.
오월은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이자 농작물이 영그는 계절이다. 제일 먼저 완두콩이 익어가고 감자 꽃이 피면서 감자가 여물어가며, 보리와 밀이 자라 바람에 흔들리면서 이삭이 패고 영글기 때문이다.
모판의 모가 파릇파릇 자라 더위에 타지 않도록 물 관리를 잘 하여야 한다. 이 모가 튼튼하게 잘 자라야 한 해의 벼농사의 절반은 성공하는 것이라 바람에 넘어질라, 햇볕에 탈라, 물이 부족하여 말라 죽을까, 그야말로 자식 돌보듯이 애지중지 길렀다.
오월에 가장 힘든 것이라면 역시 양잠이다. 당시에는 뽕밭도 많았지만 논두렁이나 밭두렁 또는 공터 등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누에치는 것이 큰 농사다. 누에는 오월과 구월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자라기 때문에 한 달만 고생하면 자식들 공납금을 벌어들일 수가 있어 벼농사 못지않게 중요한 농사다. 우리 집에서도 한 장 정도의 누에를 키웠는데, 누에가 한참 나라는 오월 중순경에는 아버지가 뽕나무를 베어서 마당 멍석에 져다 놓으면 우리 형제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뽕잎을 다 따놓고 학교를 갔다. 이때가 되면 누에 키우는 잠실이 별도로 없기 때문에 우리 집 식구들은 거처를 옮기는 대이동을 해야 한다.
누에고치를 따가다 지게에 지고 공판장에 가서 농산물검사소 직원들의 검사를 받아 돈을 쥐고 오는 기쁨이 짧은 기간 동안 온 식구들의 고생을 잠시 잊게 하는 것이다. 이 때 특등을 받은 날이면 어머니께서는 과자를 사오시어 우리 형제들에게 주곤 하셨다.
요즘은 뽕나무와 누에가 건강식품으로 인기가 있지만, 옛날에는 오디와 번데기가 베고픔을 달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간식거리였다. 손에 물이 빨갛게 들도록 잘 익은 오디를 따먹은 맛은 그만이며, 어머니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을 때 나오는 번데기를 먹기 위해 형제들이 둘러 앉아 다투던 게 어저께 같은데 벌써 세월은 흘려 나나 형이나 주름살이 깊게 패이었다.
유월이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이다. 이마 일년 중에 가장 바쁜 시기였던 것 같다. 논과 밭에 심어져 누렇게 변한 보리와 밀을 수확하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보리농사가 힘든 것이 아니라 보리와 밀을 베거나 타작할 때 몸에 붙은 까끄래기 때문에 농사 중에 제일하기 싫었다. 보리와 밀을 베어다가 뒷산에 쌓아두고는 논부터 먼저 갈아야 한다. 그래야 비라도 오면 물을 대어 모내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천수답이라 서로 먼저 물을 대기 위해 밤을 새우고 물꼬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흔한 일이다.
가뭄이 들면 보에서 겨우 물을 퍼 다가 이 논에 모를 심으면 그 논의 물을 빼어다가 아래의 논으로 대어서 모를 심었다. 심하면 칠월 초까지 모내기를 하였는데, 그 때까지도 도저히 모내기를 할 수 없거나 모가 말라 죽으면 조를 심었다. 조를 심는 해에는 대흉년으로 공납금을 낼 수도 없었고 그 다음 해까지 조밥이나 조죽을 먹는데 참 진절머리가 났다.
옛날에는 우리 고유의 풍습인 “품앗씨”가 성행하여 힘든 일은 이웃과 같이 서로 도와가면서 일을 하였는데, 제일 많이 품앗씨 하는 일이 모내기다. 모내기는 여러 사람이 같이 해야 능률도 오르고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모내기는 새벽에 일어나서 모판의 모를 찌는 일부터 시작된다. 모 찌는 것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니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자면 허리가 매우 아프다. 농약을 거의 쓰지 않는 때라 거머리가 많았다. 모를 찌다 보면 거머리가 다리 특히 뒷끔치 바로 위와 복숭아 뼈 사이의 연한 부분을 파고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피를 철철 흘린 경우도 많다.
아침밥을 먹고는 미리 갈아놓은 논에 물을 대고 써래질을 하여 편편히 고른 곳에 찐 모를 띄엄띄엄 던져놓고 모내기를 시작한다. 못줄을 쳐 가로 세로 줄을 맞추도록 하여 벼를 심는데, 못줄을 대는 사람의 역할이 크다. 한쪽에는 장줄을 쳐서 줄이 맞도록 하지만 한쪽은 어림잡아 줄을 대야하고, 또 모 심는 속도에 맞추어 줄을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모를 심을 때에는 줄 대는 것 때문에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해마다 싸운 것 같다. 나중에 내가 커서 품앗씨 할 때 따라 다녀봤는데, 손목은 퉁퉁 붓고 허리는 아픈데도 쉬지도 않고 한 열흘 정도하고 나니 손톱과 손의 지문이 달아 없어지더라. 농기계로 이앙을 하는 요즘의 농사법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란 고사가 딱 어울린다고 할 것이다.
유월말부터 칠월초까지는 밀을 베어낸 밭에 콩, 목화, 고추, 고구마도 심어야 하고, 밭 가장자리에는 수수와 옥수수, 팥과 녹두 등을 심어 양식으로 해야 한다. 당시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반영하듯이 모를 심고 난 다음에 논두렁에 구멍을 뚫고 콩을 심어 콩 한 되라도 더 수확하고자 노력하였다. 요즘은 농약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뜸북 뜸북”한다 하여 이름 지은 뜸북이가 이 콩을 하도 파먹기 때문에 먹지 못하도록 콩에 재를 사용하여 심었다. 물론 재가 거름이 되어 콩이 잘 자라도록 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지만,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까닭은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다. 콩을 심을 때에 내가 막대기로 2~3센치 정도의 크기로 구멍을 뚫으면 어머니께서 콩을 그 속에 넣은 후 재로 덮으시면서 “뜸북이 때문에 재로 덮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칠월이 되면 모내기로 미루어둔 보리와 밀 타작을 해야 한다. 내가 초등학교 일 이학년 때에는 탈곡기도 제대로 없어 굵은 새끼로 보릿단을 묶어 어깨 너머로 들어 올려 돌에 내리쳐서 탈곡을 하거나 도리깨로 작업을 했다. 이어서 나온 것이 발로 밝아 탈곡을 하는 탈곡기다. 그 소리가 “와룽와룽”한다 하여 “와룽”이라 불렸다. 동네에 몇 대가 없는지라 가난한 집에서는 부잣집에서 이것을 빌려다가 탈곡을 하였다. 어릴 적에 이 탈곡기로 벼 탈곡을 하다가 힘이 부족하여 당겨 들어가 다친 적도 있다. 탈곡기가 고장이 나면 일을 하지 않고 쉬어서 좋고 베아링 부근의 쇠구슬을 팽이 심으로 사용하여 좋아하였으니, 부모님의 심정도 헤아리지 못하는 철없는 아들이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보리타작은 참 힘든 작업이다. 몸에 달라붙은 까끄래기와 나방 때문에도 더 힘든 작업이다. 어린 적에는 큰일은 못하고 주로 탈곡하고 남은 보릿짚을 뒷산으로 날라 쌓은 작업을 하는데, 이 때 보릿짚으로 여치 집을 많이 만들었다.
칠월 중순쯤이면 모들이 활착을 하여 논의 골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는데, 이런 모습을 보아야 농민들은 쌀농사의 반은 지었다고 한숨을 던다. 모가 자라면 비료도 주고 김매기를 한다. 그 때는 제초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모를 심은 뒤 세 차례 정도 김매기를 했다. 더운 날씨에 볏잎 속으로 얼굴을 묻고 바닥의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 또한 굉장히 힘든 작업이다. 육십년대말경에는 서서 미는 제초기가 나와서 조금은 힘이 덜 들었다. 요즘에는 제초재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논에 피가 있어도 그냥 뇌두지만, 옛날에는 논에 피가 많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게으른 농사꾼”이라고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여름방학철인 팔월이 되면 육칠월 보다는 농사일이 조금은 덜하나 무더위 때문에 만만한 농사일은 아니다. 논의 김매기가 계속이어지고 농약도 친다. 옛날에는 도열병이나 벼멸구 등이 한 번 지나가면 그 해 농사는 흉년이기 때문에 농약 치는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농약을 치는 방법도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해왔다. 농약을 물에 타서 분무기에 넣어 어깨에 짊어지고 치는 방식이 대부분인 그 당시에는 논 몇 마지기를 치는데 며칠씩 걸린다. 가루로 된 농약은 무명천으로 봉지를 만들고 그 속에 가루농약을 넣고는 막대로 두들겨 가루가 볏잎에 붙도록 하는 방식인데 사람 몸에 굉장히 해로운 방식이다. 이 때문에 농약을 치다가 쓰러지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농약에 중독되어 죽는 사람도 발생한다.
이 더운 여름에 제일하기 싫은 농사가 또 하나있는데 그것은 호미 들고 쪼그려 앉아서 일하는 콩밭매기다. 산비탈의 긴 콩밭을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부지런히 김을 매어도 이 삼일 걸린다. 여름철에는 비도 자주오고 하여 김을 매고 돌아선지 며칠 지나면 풀이 수북이 자라 또 김을 매어야 한다. 콩밭을 매는 일은 다리도 아플 뿐 아니라 허리가 하도 아파서 할아버지께서 콩밭 저 끝으로 가시면 우리는 이쪽 끝에 앉아 한 참을 쉬고, 물 먹는다고 주전자 들고 천천히 물을 떠오고 배고프다고 새참 안 준다고 어머니를 조르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하루에 꼭 해야 할 일은 소를 방목하는 것과 쇠풀 하는 일이다. 여름철에는 산과 들에 소 먹이가 많고 소가 할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여물을 주지 않고 아침 일찍이 산으로 몰고 가 방목을 한다. 그러면 동네 소들이 모여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가며 풀을 뜯어 먹는다. 낮잠을 함 심자고 난 후, 오후 늦게 망태기를 매고 낫을 들고 산으로 가 쇠풀을 한 짐하고서는 해질 무렵 소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루 일과이다.
이 때 동네 애들이 모여서 메뚜기와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거나 씨름과 기마전을 하기도 하고 낫 꽂기를 하여 쇠풀 내기도 한다. 겨울에 먹일 쇠풀도 부지런히 하여 말려놓아야 하고 퇴비용 풀베기도 하여 거름을 만들어야 한다. 이 여름철에 산을 타면서 산딸기와 산머루를 많이 따다가 먹었으며 도라지와 칡을 캐어다가 내다 팔기도 하였다.
시골길가의 코스모스가 꽃을 피우고 고추잠자리가 장대 위를 맴돌 때면 귀뚜라미가 귓전을 울리고 새벽녘에 이슬이 내리는 구월로 접어들게 된다. 이 구월이 되면 날씨가 한결 서늘해지면서 차츰 수확의 계절로 접어든다. 감나무의 홍시가 제일 먼저 익어 입맛을 돋우고 대추도 익어가며 밤도 익어 간다. 잘 익은 고추를 따다가 멍석 위에 말리며 조석으로 멍석을 덮었다 피었다가 해야 한다. 조숙한 깨를 쪄다가 네 발로 세워 말리고 김장용 무와 배추에 물을 부지런히 주어야 한다. 고구마가 잘 익었나 하고 캐어 생으로 깎아 먹기도 한다.
이 때 또 하나 하는 일은 가을 누에치기다. 봄누에치기와 달리 가을누에는 뽕나무를 벨 수가 없기 때문에 뽕칼을 손에 끼고 다래끼를 옆에 차고 뽕잎을 하나하나 따서 담아 와야 한다. 봄누에치기 보다 훨씬 힘이 드는 누에치기다.
음력으로 계산하는 절기가 굉장히 과학적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구월 하순에 추석이 끼는 경우에는 오곡백과가 빨리 익어 햅쌀과 햇과일로 조상의 차례를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올해와 같이 추석이 구월 중순에 드는 경우에는 차례에 올릴 햅쌀을 마련하기 위하여 다른 것 보다 일찍 벼를 베다가 양지에 말리고 디딜방아로 찧어서 마련하여야 한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풍년가를 울리는 수확의 계절 시월이 되면 농촌은 한층 풍요로워지고 농사일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시월 초에 벼를 베기 위해 논에 도랑을 쳐서 물이 빠지게 한다. 곧이어 벼베기를 시월 한 달 내내 한다. 낫으로 벼를 베야하는데 하루 종일 베어야 한 마지기도 베지 못한다. 하루 이틀 지나면 허리가 뿌려질 듯이 아프고 낫을 잡은 손에는 물집이 생긴다. 이렇게 벤 벼 단은 논에서 말린 후 논 가운데 쌓아 놓거나 아니면 집근처로 이동하여 쌓아 놓는다. 그리고는 보리와 밀을 심기 위하여 논을 갈고 흙을 잘게 부수어 놓는다. 밭에서는 마무리 고추도 따고 고구마도 캐어서 섶에 넣어둔다. 콩을 뽑아다가 빈 공터에서 말리고 목화도 말린다.
우리 지방에는 감이 많은데 농사일이 어느 정도 끝이 나가면 홍시가 되기 전에 감도 따다가 서늘한 곳에 두어야 한다. 제사에 쓸 곶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월이 넘어가면 감나무에 달린 감은 홍시용으로 두지에 넣어두었다가 겨울철에 내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십일월에는 곡식을 탈곡하여 곳간에 넣어 두는 계절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 같다. 시월 말부터 십일월 초까지는 벼나 콩을 거두어들인 논과 밭에 보리나 밀을 빨리 심어야 제대로 자란다. 보리 심기 위해서는 우선 벼를 베어 낸 논을 소에 쟁기를 달아 갈아 놓으면 온 식구들이 나서서 나무망치 형태로 생긴 고무래로 흙을 잘게 부수어 거름과 같이 섞는 작업을 한다. 이어서 보리씨앗을 똥통에 인분을 퍼 다가 같이 잘 섞어서 논에 뿌리고 흙으로 덮어두면 싹이 나고 겨울을 나게 되는 것이다. 보리씨앗을 인분과 같이 섞은 이유는 아마 들쥐나 날짐승들이 먹지 못하게 하고 거름이 되어 보리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또한, 우리 지방에는 마늘 농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마늘을 쪼개어 보리와 비슷한 방법으로 논을 정리한 후, 쪼갠 마늘을 심고 비닐을 덮어서 겨울철에 얼지 않게 해둔다.
보리와 밀을 다 심은 후에 곧 이어서 벼 탈곡 작업을 한다. 학생들이 노는 일요일에 탈곡기인 “와룽”을 설치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탈곡을 한다. 이 탈곡작업은 분업이 잘 되도록 하여야 한다. 어린 우리들은 쌓아둔 볏단을 나르는 작업과 탈곡하고 남은 볏짚을 다시 날라서 쌓을 곳에 두는 작업을 주로 한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볏단을 탈곡하는 사람이 손에 쥐기 싶게 분류하는 작업을 맡긴다. 아버지와 품앗씨 온 엎집 아제가 탈곡기를 발로 밝으면서 벼를 기계로 탈곡하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이 제일로 힘들기 때문 어른들이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오는 볏짚을 묶어내는 작업과 벼가 쌓이면 대빗자루로 검부지를 쓸어내는 작업을 같이 한다.
이 작업조가 손발이 잘 맞아야 능률이 오르고 일이 쉽게 풀린다. 탈곡기를 밟은 작업이 제일로 힘들기 때문에 이들이 힘들 때쯤이면 쉬었다가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또 작업을 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탈곡은 그만하고 후속조치로 뒷치닥거리를 한다. 벼를 다시 한 번 깨끗하게 쓸어 바구니에 담아서 두지에 넣은 작업과 볏짚을 쌓은 작업을 밤늦게까지 한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검부지와 같이 쓸려간 벼 낱알을 키로 까불어 한 톨의 벼라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이렇게 작업을 끝내고 나서 씻고 저녁을 먹고 잠에 들면 정신없이 잔다. 어쩌다가 오줌이 마려워 한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보면 그때까지 어머니께서 등불을 켜놓고 키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희생한 우리 어머니인데 환갑을 넘기지 못하시고 가시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 다음으로 콩을 뽑아다가 햇볕에 말린 것을 마당에 놓고 도리깨질을 하여 탈곡하는 작업이다. 긴 도리깨를 어깨 너머로 돌려서 내치는 일은 어린 아이도 잘못하고 처음 하는 사람은 하지도 못하는 작업인데,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부터 도리깨질을 했던 것 같다.
또한, 깨를 터는 작업과 말린 고추를 섶에 담아 두지에 넣어두는 일, 김장용 배추와 무를 뽑아다가 그늘진 곳에 보관한다. 겨울철에 접어든 십일월도 농촌에서는 이런저런 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십이월부터가 그야말로 농한기라 할 수 있다. 추수도 다 끝이 나고 곳간에 곡식이 가득하여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당장은 먹을 걱정은 없다. 이 때 주로 할 일은 정부에서 추곡 수매를 하기 때문에 벼를 말리고 정선하여 매상을 대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다. 옛날에는 추곡 수매 시 1,2,3등과 등외 및 불합격으로 단계가 많았을 뿐 아니라 등급간의 가격차가 지금보다는 훨씬 켰다. 그렇기 때문에 추·하곡 및 누에고치 수매 업무를 담당하는 국립농산물검사소 검사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또한 힘이 상당히 셌다.
수매 일자가 정해지면 탈곡을 하여 두지에 넣어 두었던 벼를 껴내어 멍석에 말린다. 벼의 수분이 15%가 넘거나 정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선을 하기 위하여 도리깨를 묶어 나무로 삼각대를 만든 다음 키를 거꾸로 걸어 놓는다. 말린 벼를 소쿠리에 담아서 키의 위쪽에 내리면 앞에서 돗자리의 가운데를 발로 밟고 끝을 양손으로 잡아 오무렸다 폈다가 하면서 바람을 일으켜 쭉정이를 제거한다. 잘 정선된 벼를 가마니에 담아 저울로 40㎏+3㎏로 정확히 달아 묶는다. 덤으로 더 넣어야 하는 것은 가마니 무게와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오차 때문이다.
당시에는 검사원들이 수분이 초과하거나 정선이 잘되지 않거나 함량이 미달되면 가차 없이 불합격 처분하기 때문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한다. 옛날 시골에서 수매가 있는 날에는 동민들로 북적거려 주막에서는 돼지를 잡아 놓고 장사할 정도로 큰 대목이다. 매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래 걸리어 등급을 잘 받아 기분 좋아 한 잔, 등급을 못 받아 기분 나빠 한잔하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벼농사에 시달린 고통을 달랜다.
늦가을에 뽑아다가 가마니로 덮어둔 배추와 무를 손질하여 김장을 하여 독에 넣어서 뒷마당 담장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둔다. 당시 김치라곤 배추를 씻어서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로 양념을 한 게 전부이지만, 이 김치가 없으면 겨울을 나지 못할 정도로 김치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반찬이다. 산골의 기나긴 겨울에는 점심으로 이틀에 하루 정도는 고구마로 때워야 했는데, 이 때 김치가 없으면 고구마를 배불리 먹지 못할 정도로 김치는 밥의 반찬으로 뿐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최고의 식품이었다.
또한, 무를 썰어서 햇볕 잘 드는 조상의 묘의 잔디 위에 멍석을 깔고 말리어 만든 무말랭이도 아주 좋은 식품이다. 김치를 담그고 무무말랭이를 만들고 남은 무와 배추는 구덩이를 파서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겨울에 꺼내어 국을 끊이거나 반찬으로 사용한다. 특히, 배추의 뿌리는 고구마와 더불어 기나긴 산골의 겨울을 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간식거리다.
밭에서 수확한 콩으로 메주를 쑤어 천정에 달아 메어두는 것도 이 때할 일이다. 가마솥에 콩을 넣고 푹 삶아서 틀에 넣어 꼭꼭 밟은 후 짚으로 메주를 묶어 천정에 달아매어 둔다. 한 참 클 나이인 우리는 배가 고프면 어른들께 들키지 않도록 이 메주의 뒷부분을 조금씩 떼어 먹었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연못에 얼음이 얼면 시게도도 타고 팽이도 치며 연을 만들어 날린다. 눈이 펑펑 오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산으로 토끼몰이를 하려가기도 하고 참새를 잡기 위하여 새총을 만들어 누가 먼저 잡는지 내기도 한다. 추운 겨울날 밤, 남의 집 배추뿌리를 꺼내어 먹거나 밥을 훔쳐 먹는 재미도 있다. 친구들과 같이 어른들이 모르는 곳에 볏짚으로 아지트를 만들어 불을 피우고는, 사랑방 섶에서 꺼내온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놀다보면 어느덧 한 해가 가고 다시 새 해가 돌아온다.
오가는 이 별로 없고 가진 땅이라고는 더 늘어날 곳이 없는 이 산골에서 새 해가 온들 형편이 나아질 것이 없으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저 오는 해를 맞이할 뿐이다. 아니 또 한 해가 돌아와 정월이 되고 곧 있을 보릿고개를 걱정하는 한 숨만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의 농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변한 만큼 우리의 농촌과 농업방식도 많이 변하였다.
새마을운동과 녹색혁명으로 인하여 농촌의 모습은 산전벽해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초가집이 없어지고 오솔길이 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넓혀지고 포장이 되어 비만 오면 신발을 버리던 시절은 갔다. 낙동강 물을 퍼 올려 용수를 공급하니 하늘만 바라다보는 벼농사도 끝이 나고, 항시 물이 넘쳐흐르니 개울가 보나 연못이 필요 없게 되었으며 해마다 풍년이 든다. 산비탈 다랑이논과 야산을 일군 밭은 경지정리를 하여 바둑판 같이 반듯하게 되어 농사짓기에 참 좋아졌다.
짐을 지고 나르던 지게는 리어카로 변하더니 경운기와 트렉터가 그 일을 대신하고, 못줄을 대고 손으로 모내기하던 모습은 그림에서나 볼 수 있다. 지금은 별미로 즐겨 찾는 꽁보리밥이 예전에는 배가 곱아 그것이라도 배부르게 먹었으면 원이 없었다. 추운 겨울에도 논과 밭을 파릇파릇하게 하였던 보리와 밀농사는 없어진지 오래 되었으며, 옆집 누나가 목화꽃을 머리에 꽂고 활짝 웃던 모습은 목화밭과 같이 사라지고, 사리 긴 콩밭을 매기 싫어 골 사이에 숨어 낮잠을 자던 시절도 다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산골 외딴집에서 등굣길에 나서면 이슬에 검정고무신을 다 적시며 오솔길을 따라 나와야 겨우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오고 여기서 한 참을 걸어가야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나온다. 여기서도 더 가야 초등학교가 있어 육년을 이렇게 걸어 다녔다. 버스가 다니지 아니하는 이 산골에서 중학교 삼년을 산길로 걸어서 다녔으니 그 때가 육십년대말부터 칠십년대 초다.
이 길이 리어카가 들어오도록 넓어진 것이 칠십년대 초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고도 한참 뒤였으며, 팔십년대 중반부터는 버스가 들어올 수도 없었던 이 곳으로는 하루에 버스가 두 번이나 다니고 있다. 구십년대 중반부터는 승용차를 몰고 외딴집인 우리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직도 우리 마을 입구까지는 버스가 들어올 수 없어 잔칫날에는 동구 밖의 느티나무까지 이십여분간 걸어가서 대기 중인 관광버스를 타고 예식장으로 간다.
지금은 외딴집 앞에 까지 차가 들어가고, 구불구불한 논두렁길은 어디로 갔는지 형체도 없어지고 나지막한 동산과 시냇가에 우거진 미루나무는 경지정리로 다 사라지면서 쭉 뻔은 길과 그 옆으로 냇물이 흐른다. 이런 탓에 저 멀리 숲 사이로 보일까말까 가물가물하게 보였던 산골 마을이 지금은 가까이에 있는 듯이 뚜렷이 보인다. 어디 변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건만, 그렇게도 불편했던 그때 그것이 지금은 그립기만 하다. 어머니 무덤가에 핀 할미꽃이 보고 싶듯이 그때를 다시 보고 싶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라왔고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이 아직도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므로 가끔 농촌을 찾는 것이 나의 행복이다. 그런 뜻에서 내가 더 늙어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인 육십년대 말의 우리 동네 모습을 회상해 보고, 그 당시 농사일을 더듬어 보는 것도 내 자신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천팔년 삼월 초
첫댓글 친구의 긴글 읽으면서 먼저 지나간 가난했던 시절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구나,워낙이도 가난했던 때라 내가철이들어 처음부모님께 효도했던게 라디오를 사드린것이 생각난다,아버지께서 몹시기뻐하셨지,그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이순간이 있지않은가 새삼스레 생각한다,모지꼴짜기가 지금도 많이그리워진단다 내가자란곳이고 부모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겠지,친구야 좋은글 항상고맙게 생각한다, 누가뭐라해도 내가자란 고향이 최고인것이여,,
언제적 애긴가싶구나 이렇게 구구절절히 기억을 되살려낸 그때를 아십니까 눈물이 날것 같구려 근데 우리 시골이랑 조금은 다른것 같기도하구려~~ 아니야 내가 기억이 좀 모자랄수도 있겠고 그때 일 을 새삼 생각을 나가 하는글이군 이제는그형태가 희미해져 도시화 정보화가 되어 가는 시골입니당^^
아~~~~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징거럽도록 모내기 오라이 소리 ㅎㅎㅎ 지금은 정겹게 들리는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