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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열게 하고 여자로 성전환당한 원인제공자는 신윤복 자신이긴 하다. 그는 관아의 후원에서 벌인 고위관료들의 여성행각부터 서민 남녀의 내밀한 뒷골목 만남까지 유교적 예절에 빗나간 애정사를 숨김없이 표현하는 한편, 개울에서 목욕하거나 빨래하는 등의 여성생활에 가까이 다가갔고, 〈미인도〉 같은 여인초상화를 남겼다. 그 선묘나 색감은 화사하면서 감미로워 여성취향을 짙게 풍긴다.
'여류화가 신윤복'은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얘기하기도 낯부끄러울 만큼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사람들은 이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지난 10월 간송미술관의 가을 회화전에 신윤복을 만나러 장사진을 이룬 인파가 그 한 징표이다. '역사적 오답(誤答)'이라는 원작 소설가의 말대로, 신윤복을 부흥시켜 준 셈이다. 까칠한 우리 시대에 신윤복이 왜 되살아 왔는지 뒤돌아보자.
신윤복의 풍속화는 1805∼1813년 사이에 그려진 것들이다. 18세기에 쌓았던 정치·경제와 문예의 긍지가 무너지는, 곧 조선사회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순조시절이다. 세도정치의 시작과 함께 삼정(三政)의 문란이 자행되는 봉건사회의 해체시기에, 퇴폐적인 향락과 도덕적 해이를 들춰내어 영상화했다는 데 신윤복의 위대함이 있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질 정도이다. 그런 한편 인간의 감성에 솔직한 모습들이 생생한 신윤복의 화면은 근대를 앞둔 시기의 개방적 산물이기도 하다.
발칙스러운 신윤복이 다시 세상에서 빛을 본 것은 100년 뒤 1920∼1930년대이다. 일제강점에 의한 식민지 시절 대공황까지 겹쳐 민족이 고통스럽던 때이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문화코드로 등장한 모던-뽀이나 모던-걸과 동시에 신윤복의 풍속도가 떴다. 여러 화가들이 신윤복의 풍속도와 춘화들을 즐겨 모사했다. 또 성냥갑 그림이나 목욕탕의 벽장식, 그리고 광고로 재활용되기도 했다. 1930년대 대공황에 비견되는 불안스럽고 무력한 요즘, 또다시 신윤복 신드롬이 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여성으로 희화화된 신윤복은 현대 한국사회의 문화지형으로 읽힌다. 자극적인 상상의 표현이어야 사람들 마음을 끌고, 성정체성 혼란이 대중의 취미로 자리 잡힌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적 진실과 픽션의 왜곡 사이를 두고 논쟁하는 일은 진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잘 훈련되어 매서운 신윤복의 손끝에서 되살려진 19세기 조선의 분방한 모던 남녀, 그들의 아름답고 정밀한 이미지는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때 어떤 패션이 유행했나를 알려주는 복식사전의 역할마저 할 정도이다. 이처럼 세밀한 고증으로 자기 시대를 꾸밈없이 드러낸 회화의 사실미는 분명 상상보다 감명 깊다. 신윤복 풍속도를 보고 '상상하기' 못지않게, 지금 '신윤복 되기'가 필요한 시대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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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이면 간송이술관의 특별전이 선물처럼 펼쳐진다
올해는 드라마 바람의 화원덕인지 신윤복 특별전이개최되었고
그야말로 인산인해 , 1년 동안 찾아온 간송미술관사람보다 이행사인파가 더믾았으리라
아무리 광고 ,홍보세상에서 살고 있다지만 ,
한국 국민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등, 와!와 ! 들고일어나는 쓰나미현상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 .
펀드열풍은 반토막으로 , 아파트는 골칫거리로 , 사교육열풍은 조기유학으로 이어져 , 아이들을 반쪽형 인간으로 교육시키고
촛불집회 주동자는 호텔에서 붙잡히고, 미국산 쇠고기는 잘도 팔리고 있단다 .
값싼 양식으로 세상을 재단하는인터넷의 편협한 촌극처럼
속물적 세상살이에 이골날때도 되지않았을까 ? 생각해보면서
이영자 ,홍진경 ,김구라 ,강호동 이런이들에게 신윤복같은 대중의 공기와 소금같은 역활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