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음반 판매량을 총집계할 때 가장 먼저 눈길이 끌리는 것은 차트 1위의 앨범이다. 그런 다음에야 시선이 차례로 내려가기 마련. 그러나 최후의 관심은 '여전히 잘 팔리는' 앨범이 무엇인가에 놓인다. '2000 튜브뮤직 총결산 Best 10'을 살펴보면 개중에는 몇 년 후에도 '여전히 잘 팔리는' 앨범이 될 만한 것들이 눈에 띈다. 비틀스(The Beatles)의 [1]이나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Greatest Hits], 에미넴(Eminem)의 [The Mashall Mathers LP], 라디오헤드(Radiohead)의 [Kid A] 등은 앨범만 지속적으로 제작된다면 그럴 만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베스트 10과 무관하게 올해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앨범은 무엇일까. 너바나(Nirvana)의 [Nevermind](1991/20위),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1997/21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Rage Against The Machine](1992/28위), 아바(ABBA)의 [Gold Greatest Hits](1993/35위)가 그 대표적인 앨범들. 이 앨범들은 모두 각 아티스트의 대표작이자 대중 음악사의 명반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 지난 해 말 [The Battle Of Los Angeles](39위)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92년의 앨범이 더 많은 판매고를 보이는 것은, 명반을 향한 수요자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는 깊이 생각할 것없이, 헤르만 헤세의 1919년 작 [데미안]이 아직까지도 서점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국내 음악 시장 여건상 3,4년 전의 발매된 앨범이 여전히 제작, 판매되고 있다는 것은 그 판매량에 관계없이 스테디셀러의 대열에 올라선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새 사장돼 우리 기억에서 멀어질 앨범들도 상당하다는 것. 소수 지지자들에 의해 인구에 회자되고 컬트화된다면 그나마 행운이 뒤따른 것이다. 여기서 소개할 2000년, 놓치기 아까운 앨범들은 시대적 문제작이거나 역사적 앨범이라는 칭호와는 거리가 먼 앨범들이다. 그렇다고 양서(良書)를 가려내듯 옥석을 선별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방관하는 사이에 절판이라는 최악의 판정이 내려질 수도 있는 앨범들, 말 그대로 '놓치기 아까운' 앨범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잣대에 의한 것. 다만 올 한 해 국내에 라이센스 혹은 수입 앨범으로 발매됐던 앨범들을 대상으로 선별했다.
올 한해 발매된 앨범 중 가장 놓치기 아까운 앨범은 벨 앤 세바스찬(Belle And Sebastian)의 카달로그. 잘 알려지지도 않은 영국의 포크 밴드의 모든 앨범이 국내에 발매되고, 또 이들의 2000년 신작이 거의 동시에 국내 발매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벨 앤 세바스찬은 라디오 방송이나 지면 매체를 통해서는 적잖은 언급이 이뤄졌고, 매니아들의 귀를 사로 잡은 이들. 특히 영국의 예술 지향주의적인 포크에 관심을 지닌 이들에게 이들은 피할 수 없는 대상이다. 스파이로 자이라(Spirogyra), 닉 드레이크(Nick Drake), 투더 로지(Tudor Rodge), 어메이징 블론델(Amazing Brondel) 등 영국 포크사의 가장 어린 막내에 속하는 이들은 이제 국내에서도 컬트 밴드화된 인상을 준다. 이는 많은 앨범 판매량을 거둬들인 것보다 더욱 의미있는 일이다. 아이돌 스타와 변종 록 사운드가 아니면 승부하기 어려운 듯한 국내 팝 음악 시장에서 포크 밴드가 일정의 지지를 얻은 것은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인 것. 여기 소개하는 놓치기 아까운 앨범들에 포크 앨범들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마크 코즐렉(Mark Kozelek) 역시 마찬가지. 마크 코즐렉은 지난 가을 이틀동안 홍대 앞 소극장에서 깜짝(?) 공연을 가졌다. 바람같은 그의 노래처럼 조용히 내한했다가 되돌아 간 것. 얼터너티브가 주류를 이루던 90년대 초,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Red House Painters)의 차분하고 감성적인 곡들은 국내 포크 팬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 밴드의 프로트맨 마크 코즐렉이 솔로 앨범 [Rock 'N' Roll Singer]를 발표한 것. 벨 앤 세바스찬이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같은 규모로 다양한 악기가 조화된 사운드를 들려주는 것에 반해, 마크 코즐렉은 기타 하나와 보컬로만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단조로운 앨범을 만들어냈다. 어쿠스틱 사운드로 변환된 AC/DC의 'Rock 'N' Roll Singer'를 듣는 순간 이보다 더 단조로워질 수 있는 앨범도 없을 것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로우 파이의 미학을 발견하는 순간 이만큼 아름다운 앨범도 없다.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의 앨범을 발매한 4AD 레이블에서 또 다른 주목 받는 아티스트는 모하비 3(혹은 모자브 3, Mojave 3). 혼성 3인조 밴드 모하비 3의 올해 발매한 앨범은 [Excuses For Travellers]. 앞서 발매한 두 장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드림팝 사운드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멜랑콜리한 감성도 여전하다. 슬픈 정서를 지닌 멜로디컬한 곡을 좋아한다면 모하비 3의 앨범을 추천한다.
또 다른 포크 사운드의 앨범은 엘리옷 스미스(Elliott Smith)의 [Figure 8]. 엘리옷 스미스는 벨 앤 세바스찬과 마찬가지로 포크 사운드를 기반으로 다양한 편곡을 통해 풍부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가 오랜 마이너 레이블 생활을 접고 발표한 [Figure 8]은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여전히 포크 음악은 상업성으로부터 변방에 속하는 것. 그러나 이 앨범을 만나는 순간 [아메리카 뷰티]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Because'보다 더욱 아름다운, 그리고 철저한 작가주의적인 그의 음악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아트 록(프로그레시브 록)은 포크보다도 더욱 특정 매니아들의 소유물처럼 느껴진다. 아트록의 경계선이 애매모호하기는 하지만,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는 올해 초 발표한 [Is There Anybody Out There? - The Wall Live] 앨범으로 일정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몇몇 밴드를 제외하면 아트 록에서 대중성을 획득하기란 어려운 일. 12월 들어 여섯 번째 앨범 [Lightbulb Sun]을 국내 발매한 포쿠파인 트리(Porcupine Tree) 역시 마찬가지. 이들은 전형적인 아트 록이라 하기에는 모던 록과 병합된 사운드로 보다 친밀한 사운드를 지닌다. 즉, 아트 록이 지나치게 심오하고 난해한 음악이라는 관념을 깨고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국내 발매된 전작 [Stupid Dream]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발매된 지 얼마 안 된, 즉 호응을 얻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최신작을 거론한다. 영국의 평론가들로부터 '영국 록의 비밀을 간직한 최고의 앨범'으로 평가 받는 [Lightbulb Sun]는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의 대표적 밴드 핑크 플로이드와 서정적이고 철학적인 음유 시인 닉 드레이크, 두 선배와 동시대적 음악씬의 모던한 감각을 결합하고 있다. 진보적이고 변종적인 사운드는 하드코어, 인더스트리얼, 핌프 록 등의 하이브리드 장르에만 국한 것이 아니다. 이들 장르가 선사하는 강렬한 훅(hook)에 비한다면 [Lightbulb Sun]은 단조롭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리한 귀의 소유자라면 이 앨범 속이 다채로운 사운드의 결합체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포쿠파인 트리와 유사하게 크로마 키(Chroma Key)의 앨범 역시 전혀 대중성이 결여된 앨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 크로마 키는 드림 씨어터(Dream Theater)의 첫 번째 키보디스트 케빈 무어(Kevin Moore)의 솔로 프로젝트. 케빈 무어는 94년 밴드를 떠나 1999년 [Dead Air For Radios]를 발표, 그리고 올해 두 번째 앨범. [You Go Now]를 발표했다. 이 두 작품은, 프로그레시브 메탈 씬을 장악하고 있는 드림 씨어터를 떠나야 했던 그의 가장 명쾌한 해명이다. 그의 음악은, 드림 씨어터가 보여준 고도의 테크닉과 난해한 곡의 구조에서 벗어나 우주적이며 정적인 사운드로 일관하고 있는 것. 그러나 우리는 드림 씨어터에 열광하면서도 그에 속해 있던 단일의 아티스트에게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드림 씨어터가 새 앨범 [Metropolis Part 2 - Scenes From A Memory]를 비롯 데뷔작 [Images And Words]으로 여전히 확고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과 달리 크로마 키는 앨범이 라이센스로 발매된 것만으로도 놀라울 정도다.
반면 고도의 테크닉과 과도한 돌연변이 사운드도 호응을 얻기에는 힘든 듯하다. 물론 슬립낫(Slipknot)과 같은 경우 일정의 성공을 거둬냈지만 버킷헤드(Buckethead)의 [Monster & Robots]는 상업적인 실패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됐다. 슬립낫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버킷헤드는 KFC 바스켓과 하얀 마스크로 비밀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사나이.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윙위 맘스틴(Yngwie Malmsteen)의 계보를 잇는 스타일리스트이자 스피디한 플레이어인 그는 [Monster & Robots]를 통해 힙합, 랩,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그로테스크하게 버무린다. 슬립낫 그리고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과 더불어 또 하나의 변태적인 사운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속주 애드립과 불협화음적인 프레이즈가 곳곳에 난무하는 탓일까, 혹은 그가 지나치게 언론에 노출되기를 꺼리는 탓일까. 그의 앨범은 그 어떤 앨범보다도 단 한번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위터스(Wheatus)는 이제 겨우 데뷔작을 발표한 신참내기며, [Wheatus]는 여기에 소개한 그 어느 앨범보다도 가장 대중적인 앨범이다. 이들은 록 밴드라기보다는 파워 팝 밴드에 더욱 가까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즉, 기타 록과 멜로디컬한 라인을 결합하고 있는 것. 그러나 최근의 모던 록 밴드와는 또 다른 사운드다. 그렇다고 브릿 팝과도 다르다. 이들의 첫 번째 싱글 'Teenage Dirtbag'은 마치 수다를 떨듯 재미있는 가사와 사운드로 일관되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유치증으로 보일 정도다. 그러나 라디오헤드의 'Creep', 벡(Beck)의 'Loser'가 있다면 위터스의 'Teenage Dirtbag'은 고등학생들을 위한 또 다른 'Loser들의 찬가'다. 또한 그린 데이(Green Day)의 [Dookie]가 그랬듯 [Wheatus] 역시 쉬운 사운드이지만 충분히 매력적으로 들리 수 있는 것.
마지막으로 음악적 유산을 재해석한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의 [Pieces In A Modern Style]과 랜디 로즈(Randy Rhoads)의 트리뷰트 앨범, 둘을 빼놓을 수 없다. 마돈나(Madonna)의 [Ray Of Light]나 [Music]을 통해 최고의 일렉트로닉 프로듀서로 떠오른 윌리엄 오빗의 [Pieces In A Modern Style]은 일렉트로닉 뮤직이 단지 빠른 비트의 테크노 뮤직이며 댄스 플로어만을 위한 음악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오해를 불식시킬 앨범. 윌리엄 오빗은 이 앨범에서, 바버, 비발디, 베토벤, 헨델 등의 클래시컬을 앰비언트 테크노로 변환한다. 고전이 최첨단의 장르로 탄생하는 순간이 이 앨범에 놓여 있는 것. 그리고 [Randy Rhoads Tribute]는 헤비 메탈의 고전과 같은 존재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의 곡을 통해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에게 존경을 표하는 앨범. 올 해 역시 국내외적으로 많은 트리뷰트 앨범이 발매됐다. 그러나 이 앨범만큼이나 원곡에 충실한 가운데 깔끔한 사운드로 재현해낸 트리뷰트 앨범은 찾기 어렵다. 80년대 헤비 메탈은 이제 흥망성쇠를 다한 듯 보이지만 좋은 음악은 고전으로 남는 법. 그리고 그것을 같은 80년대 아티스트들이 프로젝트를 이뤄 완성도 있는 사운드로 만들어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오지 오스본의 베스트 앨범과 같은 성격과 더불어 더 이상의 검증을 필요치 않는 헤비 메틀의 거물급 아티스트들의 신뢰도는 이 앨범의 가장 커다란 메리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