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얼라들 병치레 ‘기계충’에 얽힌 사연
(작성 중 : 병치레 시리즈 1회)
몇 주 동안 꽹과리와 장구와 북, 그리고 징소리만 들려 드려서 이번 파일에는 ‘니나노’를 게재하여 그동안 귓속에 베어든 소음을 제거해 드리고자 합니다. 박옥자의 ‘어릴적 약속’을 음미하시며, 어린 시절 그 추억과 누군가에게 손가락을 걸었던 약속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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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기계충(器械蟲)’이라는 어린이 피부병이 있었다. ‘기계충’은 머리카락이나 머리의 뿌리에 곰팡이균이 기생하는 질환으로, 머리털이 끊어지거나 비늘처럼 보이는 둥그런 각질(脚疾)이 두피(頭皮)에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위생적(衛生的)으로 깨끗하지 못하던 1940~50년대에 많이 발생하던 질환으로 주로 소아에서 사춘기 이전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서 많이 발생하였으며 어른들에게서 발생하는 예는 드물었다.
기계충
‘기계충’이라는 이름은 이발소에서 바리깡, 즉 이발기계(理髮器械)를 통해 감염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계(器械)에 의해 옮긴 병이라 해서 ‘기계충’이라고 한 것이다.
정식 질환명은 '두부백선'이다. ‘기계충’은 이발기계(理髮器械) 외에도 ‘기계충’에 걸린 환자가 사용한 빗, 브러쉬 등을 사용했을 때도 생길 수 있고, 지금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을 통해서도 감염되고 있다.
위에서 말한 ‘바리깡’은 프랑스의 머리 깎는 기계 제조회사(製造會社)인 ‘바리캉 에뜨마레’에서 따온 말이다. ‘바리깡’은 일본어 어투로써 ‘이발기’가 순화된 우리말이다.
바리깡
그리고 이발기계의 ‘기계’와 ‘기계충’을 한자로 ‘機械’나 ‘機械蟲’으로 쓰지 않고, ‘器械’와 ‘器械蟲’이라고 하는 것은 이발기계의 '기계'는 ‘연장·그릇·기구 따위’를 두루 일컫는 '기계(器械)'에 속하기 때문에 ‘器械’라 써야 맞고, 기계(機械)는 여러 부품들로 짜여지고 어떤 힘을 받아 쓸모 있는 일을 하는 장치를 말하기 때문에 ‘機械’라 써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쓴 ‘얼라’라는 말은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 어린아기나 어린이를 이르는 말로 ‘알라’라고도 한다. 그러나 엄밀(嚴密)히 말하면 ‘알라’는 갓난아기를 말하고, ‘얼라’는 4~5세 이상의 개구쟁이들을 이르는 말이다.
‘얼라’와 ‘알라’
“쪼매 전에 보이까네 그 집 ‘얼라’가 ‘알라’로 들체 업꼬, 지가부지캉 지검마자테 간다꼬 가더라”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조금 전에 보니까 그 집 ‘어린애’가 ‘애기’를 들쳐 업고, 저희 아버지와 함께 저희 엄마한테 간다고 가더라”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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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충(器械蟲), 서캐, 바리깡, 포마드란 말도 지금은 모두 잊혀진 단어들이지만, 부스스한 까치머리를 참빗으로 훑어내면 ‘서캐’가 하얗게 쏟아지던 시절이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반세기(半世紀) 전의 얘기가 되었다.
요즘은 하루 이틀만 머리를 감지 않아도 못 견디는데, 어떻게 우글대는 ‘이’와 ‘서캐’를 머리에 달고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하다.
그 시절 이발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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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유행하던 기계충(器械蟲)을 제대로 알려면, 우선 당시의 우리나라 이발문화(理髮文化)를 먼저 알아야 한다. 먼저 그 시절 이발소를 찾아가본다.
옛적 필자가 살던 향리(鄕里)에는 무면허 이발사 아저씨가 그분의 아래채 방 하나를 비워 역시 무허가로 운영하던 ‘야매 이발소’가 있었다.
그 시절 이발소
여기에서 말하는 ‘야매(やみ)’란 암거래(暗去來)라는 뜻의 일본어(日本語)로 거래를 통제하는 당국의 눈을 피해 거래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야매’ 이발소는 면허(免許)도 없는 이발사가 무허가(無許可)로 운영하는 이발소를 말한다.
당시의 무허가이발소(無許可理髮所)는 동리에 따라 다르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삿자리 방바닥에 사람을 앉혀놓고, 주인이 도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머리를 깎던 원시적(原始的)인 이발소였다.
대신 불국사역(佛國寺驛) 앞 오일장터 모퉁이에 있던 ‘불국장 이발소’는 당시의 활성리 이북 외동면과 내동면(內東面 ; 당시의 월성군 내동면) 일대에서는 제일 큰 신식(新式) 이발관이었다.
불국장 이발소
허름한 기와집 아래채 길가 쪽 행랑방 벽과 담장을 헐어내고, 미닫이문을 단 이발소(理髮所)였지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 그림이 ‘사진각구’에 넣어져 정면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옆벽에는 ‘개울 옆 물레방아 그림’이 역시 파리똥이 까맣게 눌어붙은 길쭉한 ‘사진각구’에 넣어져 걸려있었다.
그 시절 그 ‘물레방아 그림’은 이발소(理髮所)나 다방마다 예외 없이 걸어두고 있었는데, ‘물레방아 그림’과 이발소 사이에 무슨 연관(聯關)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疑問)으로 남아 있다.
이발소와 밀레의 만종
그리고 그 물레방아 옆에는 으레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시(詩) ‘삶’이 역시 기다란 ‘사진각구’에 넣어져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진각구’란 사진을 넣어 벽에 걸어두는 액자를 말한다.
당시의 필자들은 바로 뒷집에 있던 ‘정씨 아재’ 야매 이발소(理髮所)를 주로 사용했지만, 오일장인 불국장이 반공일(半空日)이나 공일(空日) 날에 서면, 장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서 '불국장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곤 했었다.
‘정씨 아재’ 이발관(理髮館)에 가면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고, 머리털을 뜯어내는 홍역(紅疫)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날이 무딘 기계에 머리털이 한 움큼씩 뜯기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였기 때문에 머리가 길더라도 참고 있다가 가급적(可及的)이면 불국장 이발소를 이용했었다.
그 시절 이발소
당시의 ‘야매’ 이발소는 소독(消毒)도 하지 않은 기계 하나로 여러 사람이 깎다 보니 ‘기계충’에 걸리기 십상이었고, 한번 걸리면 그 기계충(器械蟲)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나 ‘불국장 이발소’는 딴 세상의 이발소였다. 장작난로 연통(煙筒)에 걸린 빨간 체크무늬 수건들, 하얀 김을 내뿜는 찜통, 난로 옆에 따뜻하게 데워진 면도용(面刀用) 비누거품통, 빨간 페인트로 써진 미닫이문의 이용원(理容院)이란 글자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민들은 궁벽한 살림에 이런 이발소(理髮所)에는 쉬이 드나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당이나 동네 골목 양지바른 곳에 통 걸상 하나 달랑 놓고, 머리를 깎아주는 떠돌이 이발사(理髮士)에게 머리를 깎았다.
거리의 이발사
그 시절에는 아이들 뿐 아니라 동네 아저씨와 할아버지들도 따뜻한 양지쪽에서 ‘떠돌이 이발사(理髮師)’에게 머리를 내맡기고 졸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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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충’ 얘기를 시작한다. 그 당시에는 못 먹고 못 살아서 그랬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주변에 멀쩡한 아이들이 드물었다. 피부병이 제일 많았다. 불결한 환경 속에서 비위생적(非衛生的)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고 보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 할 수도 있었다.
기계충
너 나 할 것 없이 머리에 부스럼쯤은 다 앓아 봤고, 크기야 제각기 다르지만 머릿속 흉터 한 둘은 거의 가지고 있었다. 속칭 ‘기계충’이라는 머리 부스럼이 널리 퍼졌는데, 세균에 오염된 기계, 즉 ‘바리깡’이 주범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당시에는 또 이발관보다는 무허가(無許可)나 떠돌이 이발사에게 머리를 많이 깎았는데, 이는 순전히 이발요금(理髮料金)이 허가난 이발소보다 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발관
나중에 ‘기계충’에 걸리면 약값이 더 들곤 했지만, 그래도 당장 싼 요금(料金)이라는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할 만큼 가정 경제가 허술했기 때문에 가급적(可及的) 거리 이발소를 선호(選好) 했던 것이다.
품위 있는 상고머리 보다 ‘바리깡’으로 박박 깎아버린 삭발(削髮)이 아이들에게 넓게 퍼진 까닭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잔재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이발요금(理髮料金)이 싼 이유에서였다.
1940~50년대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두세 개 마을에 한군데씩 이발소(理髮所)가 있었다. 이발소래야 지금과 같이 빌딩 지하나, 2층 또는 단독건물에 있었던 게 아니고, 이발사(理髮師)가 살고 있는 자신의 초갓집 아랫채의 행랑방에 이발의자 두어 개를 놓은 것이 전부였다.
이용원
아이들은 의자가 있으면 의자 팔걸이에 판때기(판자)를 얹어놓고 머리를 깎았지만, 의자가 없으면 ‘말통(곡식을 되는 한말들이 통)’을 엎어놓고, 그 위에 앉게 한 후 대충 밀어주었다.
이런 행랑방 이발소에는 당연히 문패(門牌)도 번지수도 없었고, 민경(面鏡 ; 거울) 쪼가리 하나 없었다. 게다가 어른들은 면도(面刀)를 해줬지만, 청소년 이하 아이들은 면도(面刀) 자체가 없었다.
옛적 도회지 이발소 내부
(반라의 글레머 배우가 등장하는 달력이 여러 개 걸려있다)
도회지(都會地)에 있는 이발소는 일본인(日本人)들이 쓰던 적산가옥(敵産家屋) 아래층 점포에 엉성한 한글 간판을 붙이고, 그런대로 이발소 모양을 갖추기도 했지만, 시골마을 이발소(理髮所)는 아무런 표시가 없어 이웃사람이 아니면 그 곳이 이발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간판을 붙인 이발소의 이름도 가지각색이었다. 이발소(理髮所), 이발관(理髮館), 이용소(理容所), 이용원(理容院) 등 지방마다 업소마다 형형색색의 간판이 내걸렸다.
6.25사변으로 전국의 이발소(理髮所) 명칭과 수준이 평준화(?)된 탓이다.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統一)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름이 전국적으로 쓰이는 평준화(平準化)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이발소들은 지금과 같은 퇴폐이발소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고, 모두가 이른바 ‘모범이발관(模範理髮館)’이었다. 여기에서 잠시 김연성의 ‘모범이발관으로 간다’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모범이발관으로 간다
김연성
설이 내일모레라
서둘러 동네 이발관으로 간다
일곱 살 아들과 간다 그 곳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앉아
쑥덕공론하는 곳
그날, 어떤 이는 죽고 또 어떤 이는
시대의 영웅이 되기도 하는데
설혹 머리 감지 않고 가도 되는 곳
그 곳에 가면 나는 왕이다
두 다리 쭉 뻗고 고개 뒤로 젖히고
두 눈도 감고 있으면
세상이 다 내 영토가 되는 곳이다
액자 속 포효하는 호랑이 울음 뒤로
영웅호걸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잡담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싹둑 잘리는 동안
이 세상 온갖 소문 접할 수 있는 곳
그 곳에서 초라한 왕은
음모 같은 수염을 밀고 웃자란 일상을 자른다
귀지까지 파내면 명절이 바로 내일모레다
보아라, 눈 뜨면
꾀죄죄했던 아이의 눈도 빛나네
단돈 팔천 원에
오천 원만 더 지불하면 문을 나오네
이 풍진 세상으로 다시 돌진하네
휘적휘적 奉天가네
벽산 블루밍궁으로 가네
휘파람 불며
어린 왕자의 손을 꼭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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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 이발관
도회지(都會地) 이발소의 경우 일본식 미닫이문에 뺑끼(페인트)로 ‘이발소’라고 큼직한 글씨로 간판(看板)을 만들어 달았다. 겨울철에 문을 밀고 들어서면 장작난로 위에는 ‘스피아깡’을 반쯤 잘라 만든 물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가위질이 잘되도록 머릿결에 물을 뿜어주거나 발라주기 위한 것이고, 어른들의 턱수염 면도(面刀)를 위해 항상 덥히는 우물물이었다.
모범이발관 내부
회(灰)를 바른 벽체에는 앞서 말한 ‘이삭줍기’, ‘만종’, 푸른 초원이 그려진 액자(額字)가 서로 다른 규격으로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이용사 면허증(免許證)이 자랑스레 걸려 있었다.
이발소(理髮所)에 따라서는 주인이름과 전혀 다른 사람의 면허증이 걸려있기도 했다. 남의 것을 빌려 온 것이다.
선반에는 바리깡, 면도칼, 가위, 쇠빗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흙벽에 박아놓은 ‘대못’ ‘마꾸리’에는 손때가 절을 대로 절은 ‘미영베’수건 두어 개가 걸려있었다.
해방직전 바리깡 선전광고
그러나 애들은 그 수건(手巾)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머리는 집에 가서 감아야 하기 때문이다. 난로(煖爐) 옆에는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난로(煖爐) 위의 ‘스피아깡’ 물통에는 보글보글 물이 끓고 있고, 긴 나무의자에는 머리가 덥수룩한 아이들이 쪼르르 앉아 차례가 지겨운지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
구형 바리깡
앞쪽에 앉은 어른들은 마을 일과 세상살이 이야기로 숨이 가쁘다. 아랫마을 누구 집 큰아들이 내일 장가를 들고, 지난 장날 소 값이 크게 떨어졌다는 예기에서부터 근래(近來)에 일어난 마을의 모든 일들이 낱낱이 쏟아지고 있다.
당시의 이발소(理髮所)는 자기 동네와 지역사회(地域社會)의 새로운 소식의 진원지(震源地)의 기능을 맡고 있었다. 때문에 한 사흘만 이발소에 들락거리면 온 동네의 대소사(大小事)를 훤히 알 수 있기도 했다.
신형 바리깡
이발소(理髮所) 주인이 머리를 깎으러 온 동네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주워듣고, 오는 손님들마다 똑같은 얘기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들려주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발소(理髮所) 아저씨가 가장 힘들어하는 고객은 털북숭이 아저씨들이다. 털이 많고 ‘고래쇠미(고래수염)’같이 빳빳하여 면도칼이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굴에 비누거품을 양껏 바르고 잠이 든 털보 아저씨의 검은 얼굴은 이발사 아저씨의 손에 잡힌 투박한 면도칼이 위에서 아래로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훤하게 바뀐다.
비누 거품통
그러나 털이 너무 많아 그렇잖아도 무딘 면도칼이 도무지 밀리지를 않는다. 이발사(理髮師) 아저씨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면도칼을 이것저것 바꾸어 보지만 모두가 마찬가지다. 수염이 ‘고래쇠미’보다 더 질겼기 때문이다.
이발사(理髮師) 아저씨는 할 수 없이 의자 옆에 달린 가죽 띠에 무뎌진 칼날을 세우려 면도칼을 써억써억 문지른다. 그리고는 바짝 선 칼날을 이리저리 노려보다가 털보 아저씨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다시 밀기 시작한다.
머리감기용 물조리
말라버린 비누거품을 다시 바르기 위해 비누통의 솔을 꺼내 난로(煖爐) 연통(煙筒)에 두어 번 문지른 후 털보아저씨의 얼굴에 풍경화(風景畵)를 그린다.
한잠이 들었던 털보 아저씨가 얼굴이 뜨끈한데 놀라 눈을 번쩍 뜨며, “모찌방 딜라 단디이 쫌 해라(얼굴 델라 단단히 좀 해라)”면서 이발사(理髮師)를 나무라자 이발사 아저씨는 “엄살 디게 하네”라면서 피식 웃는다.
면 도
여기에서 말하는 ‘모찌방’이란 말은 일본어(日本語)로 시계(時計)의 문자판(文字板)을 말하는데, 사람의 얼굴을 속되게 일컬을 때도 이 말을 쓴다. 얼굴을 '안반짝'이라고 하는 의미와 같은 말이다.
“모찌방이 빤빤한 가시나덜은 도회지(都會地)로 나가가 다방에 나가고, 앤 그라머 방적공자에 댕긴다 카더라”라는 용례가 있다.
“얼굴이 반반한 계집애들은 도시로 나가서 다방(茶房)에 나가고, 안 그러면 방직공장(紡織工場)에 다닌다고 하더라”라는 말이다.
미장원 아가씨의 이발
이발소로 돌아간다. 다른 의자에서는 보조이발사(補助理髮師 ; 면허증도 없는 견습생)가 이발의자의 팔걸이에 ‘판때기(판자)’를 걸쳐놓고 꼬마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다.
언제 빤 것인지 땟물이 조르르 흐르는 나이롱(나일론) 보자기를 아이에게 둘러씌우고, 고물(古物)이나 다름없는 ‘바리깡’으로 머리털을 뽑기라도 하듯 밀어 재낀다.
성능(性能) 좋은 ‘바리깡’은 어른들에게 쓰는 것이었고, 아이들 머리를 깎는 것은 항상 작동(作動)이 잘 안 되는 고물 ‘바리깡’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꼬마들의 이발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이발(理髮)을 할 때마다 생머리 뽑히기가 일쑤였다. 기계(器械)가 지나갈 때마다 머리가 따끔거려서 쩔쩔 매는가하면, 연방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을 찔끔거린다.
그 때마다 이발사(理髮師)는 ‘바리깡’을 한두 번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머리에 갔다 댄다. 고친 바리깡은 금세 머리카락이 끼여 오도 가도 못하고 머리 중앙에 멈춰버린다.
바리깡
이발사(理髮師)는 ‘바리깡’이 찍찍하다며 기름을 들이붓는다. 기름은 아이의 머리까지 넘쳐흘러 머리 전체가 미끌미끌해 진다. 이 마당에도 이발사는 생머리가 뽑혀 아이가 괴로운 줄 알면서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머리를 깎는다.
옆에서 보고 있던 어른들이 “아 머리 다 뽑는다”고 한마디 거들면 그때서야 “어제까지도 잘 됐는데…” 하면서 ‘바리깡’에 기름을 치고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이고 풀고 야단이다.
고물 바리깡
한마디로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라 생머리를 뜯어내는 것이다. 당시의 아이들은 이처럼 머리를 깎을 때마다 고장 난 ‘바리깡’에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팠지만, 주위(周圍)의 분위기에 눌려 “아야” 소리도 못하고 끝까지 참아내는 인내심(忍耐心)을 발휘했었다.
문제는 통증(痛症)보다는 ‘바리깡’ 하나로 여러 사람이 머리를 깎다보니 머리에 기계충(器械蟲)을 옮기는 것이었다. 깔끔하던 머리가 동네 이발소(理髮所)에서 머리를 깎은 다음 부스럼이 덕지덕지 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기계충
그리고 그 시절의 시골 서민가정(庶民家庭)에서는 돈이라고는 먹고 죽으려 해도 없었던 터라 자기 집 아래채 행랑방이나, 마당에서 ‘말통’을 엎어놓고 아이들 머리 깎아 주는 ‘야매 이발소’에 평생 동안의 이발(理髮)을 의존했었다.
그리고 이발요금(理髮料金)은 언제나 현물(現物)로 지불했었다. 아이 하나에 보리 철에는 보리 두되를 주고, 나락 철에는 나락 두되를 이발비(理髮費)로 내어놓곤 했었다.
오성환이 어렸을 때 이웃집 ‘야매’ 이발사(理髮師)인 관동어른에게서 머리를 깎고, 보리 철에는 보리 두되를 주고, 나락 철에는 나락 두되를 이발비(理髮費)로 내놓던 시절을 노래한 ‘이발소’를 잠시 음미해 본다.
이발소
오 성 환
보리 철 보리 두되,
나락 철 나락 두되,
지야, 일 년에
한번을 깎든 열 번을 깎든
보리 철 보리 두되,
나락 철 나락 두되 주고
머리를 깎았다.
우리 마을 관동어른은
머리 깎는 기계 사다놓고
이발을 했다.
새벽에 우리들이 가면
말 통 엎어놓고
마당 가운데 앉혀놓고
이발 기계에
석유 칙칙 뿌리고
마구 깎아 올렸다.
어떤 놈은 깎이고,
어떤 놈은 뽑히고
따갑다고 눈물을 글썽거려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구 깎아 올렸다.
듬성듬성 고속도로도 보이고
석유냄새는 코를 찌르고
면도는 아예 생각도 못했다.
“집에 가서 머리 감아라”
머리에 쇠똥 한바가지 붙이고
깎인 머리카락 한 움큼 붙이고
석유냄새 팍팍 풍기며
집으로 왔다.
보리 철 보리 두되,
나락 철 나락 두되,
우리 마을 관동어른은
머리 깎는 기계 사다놓고
이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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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엉터리없는 ‘야매’ 이발소(理髮所)들 때문에 심할 때는 온 동네 아이들의 머리가 ‘기계충(器械蟲)’ 천국이 되기도 했었다. 멀쩡한 아이가 ‘야매’ 이발(理髮)을 하자말자 '기계충'에 걸렸고, 한번 걸리면 도무지 떠나지를 않았다.
지금 같으면 난리가 날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풍경이 너무나 흔하다 보니 뭐라고 나무랄 일도 아니었다. 부모들이 이발소(理髮所)에 가서 따져봤자 입만 아플 뿐이었다.
그 시절 이발소
“싫으면 오지 마라”는 식이었고, 괜히 한 마디 했다가는 동네에 하나뿐인 이발소(理髮所) 주인의 미움을 받아 다음에는 그런 이발도 못하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한 동네에 이발소(理髮所)가 하나, 또는 두 세 마을에 한 곳뿐이다 보니 이발소 주인의 배짱도 만만치 않았다. 손님에 대한 친절(親切)은 아예 딴 나라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이발쟁이가 무면허(無免許)였고, 거의가 빌린 면허증(免許證)을 벽에 걸어놓고 영업을 했다.
그 시절 이발소
당시 이발사(理髮師) 면허(免許)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발’의 ‘이’자도 모르는 문외한(門外漢)으로 돈께나 가진 유지(有志)들의 것이었다. 관청에 돈을 주고 싼 것을 돌팔이 이발사에게 빌려주고 권리금(權利金)을 받아 챙기곤 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발(理髮)을 한 후 이발한 머리가 마음에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이었다. 이발사(理髮師)가 깎아 주는 대로 헤어스타일이 정해 졌고, 명절(名節)을 한번 지나고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의 머리 모양이 똑 같이 만들어졌다.
옛적 중국의 거리이발(배코치기)
때문에 이발(理髮)한 모양만 보고도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듯 엉터리 이발사(理髮師)들이 활개를 치던 시절이 지나고, 1970년대부터는 중소도시(中小都市) 이발소에도 면도사(面刀師) 아가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쁜 여자 면도사(面刀師)가 수염도 깎아주고, 안마(按摩)도 해주는 곳이 이 곳 저 곳에 생기자 이발소들이 경쟁적(競爭的)으로 단장을 했고, 말쑥한 양복(洋服)을 입은 신사(紳士)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면도사 아가씨
(어디를 면도할 작정인지 자세가 야리꾸리하다)
평소 두 달에 한번 이발소(理髮所)에 가던 시골 아저씨들도 한 달이 멀다하고 이발소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자연히 마누라들의 의심(疑心)을 살 수밖에 없었고, 의심을 싼 마누라에게 뒤를 밟혀 ‘우사(위사)’를 당하기 일쑤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사(위사)’란 ‘웃음거리’ 또는 ‘창피’라는 말로 예쁘장한 이발소 면도사(面刀師) 아가씨에게 눈을 기웃거리다가 자기 아내에게서 망신을 당하는 경우를 말한다.
면도사 아가씨
외동읍(外東邑) 북부지방에서는 ‘위세’ 또는 ‘윗세’라고도 했었다. 여기에서 다시 당시의 이발소(理髮所) 풍경을 그린 고경숙의 ‘그 이발소, 그 풍경’을 음미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 이발소, 그 풍경
고경숙
시골 이발소 앞 빨래건조대에
분홍 수건들이 바람에 나풀대고 있다
깨끗하게 면도를 마치고 나가는 남자의
파르스름한 턱을
감쌌을 훈기와 샴푸향기
집게로 고정시키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같이 들뜬
낱낱의 수신호가 허공을 부른다.
하얀 보자기 목에 두르고
대기하는 사람들
삐거덕거리는 의자와
의자를 사이하고
행성처럼 떠있는 까만 뒤통수들
뜨거움으로 혹은 침묵의 냉랭함으로
어두움 떠다닌 시간들이
빨랫대에 걸린 수건만큼이나 비좁다.
행성처럼 떠있는
머리 주위를 요리조리 돌아
귓불을 베어 물며
가위가 들려주는 세상 얘기
은하수로 흐르는
정오의 희망음악까지
모두 눈을 감고 경청한다.
덥수룩해진 잡념을 털어내던가
가위질이 필요 없을
듬성듬성해진 태양인들
상관 있으랴
주기 일정하게 떠돌다가 한 달이 지나면
이곳에 모여 의자 하나씩
차고 늘어서면 그뿐,
내일 모레면 입대한다는
청년의 파란 지구가 싱그럽다.
아가씨 스커트 자락에 얼굴을 묻듯
냄새 좋은 분홍색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거울에 비친 쑥스런 모습에
서둘러 뛰쳐나가는,
간판 옆에서 힘차게 도는
이발소 표시등처럼
씩씩한 그의 머리는
어떤 궤도를 그리며 세상을 돌아올까
만날 날 기약하자 깃발로 펄럭이는
분홍색 수건이 널려있는
그 이발소 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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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이발관
그러나 시골 벽촌(僻村)에는 여전히 조그마한 초갓집 행랑방의 동네 이발소(理髮所)가 고작이었다. 이발소 사정도 좋지 않았지만, 당시의 초등학생(初等學生)들은 머리를 깎을 돈조차 없어 항상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명절(名節)이 코앞에 닥치면 이발소(理髮所)는 사람들로 터져 나간다. 이때는 순서를 지키지 않고 ‘새치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밀가루 푸대종이에 연필로 커다랗게 쓴 번호표(番號票)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했다.
글씨가 서투른 보조이발사(補助理髮師)가 아라비아 숫자를 제대로 쓰지 못해 ‘2’번과 ‘5’번, ‘6’번과 ‘9’번이 뒤바뀌면서 주먹다짐이 일어나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아이들 이발
그러나 문제는 이런데 있는 것이 아니었고, 명절(名節) 대목마다 이발소(理髮所)가 문을 닫는 데 있었다. 인근동네 이발소에서 이 동네의 이발소가 무면허(無免許) 이발소라고 진정(眞情)을 해서 이 동네 이발사가 이발을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명절(名節)을 맞는 것이 당시의 풍습(風習)이었는데, 이발소(理髮所)가 문을 닫아 머리를 깎을 수 없으니 온 동네에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성급한 집에서는 아이들의 머리칼을 가위로 잘라 쥐가 파먹거나, 소가 풀 뜯어먹은 자국처럼 울퉁불퉁한 모습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야 그렇게라도 해서 명절(名節)을 쇌 수 있었지만 어른들은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단체 이발
사정(事情)이 이렇게 되자 마을의 구장(區長)을 비롯하여 반장(班長)들이 모여서 연일 대책(對策)을 논의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그래서 모두다 이 꼴로는 명절을 쇌 수 없다며 면사무소(面事務所)로 몰려간다.
면장(面長)님께 사정사정을 해서 그해 명절 대목에만 무허가 이발소(理髮所) 문을 열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하루 후에 다가오는 명절날까지는 도저히 그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깎을 수가 없었다. 이웃마을 이발소 주인의 진정으로 며칠간 이발을 못했기 때문이다.
시골 이발소
그래서 동네에 이발기계(理髮器械 ; 바리깡)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다 나와 머리를 깎았다. 밤에는 등불을 밝혀놓고 꼬박 날을 새웠다. 그래도 머리를 다 못 깎아 읍내(邑內) 이발사를 급히 데려와 모두다 명절을 쇄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흔한 것이 미장원(美粧院)과 이발소(理髮所)이지만, 1940~50년대 시골에서는 이발소도 그만큼 귀했었다. 당시의 외동읍의 경우 미장원(美粧院)은 아예 없었다. 그때까지도 ‘파마’를 하는 여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바리깡
요즘은 마을마다 미장원(美粧院)이 있을 정도고, 남자들도 예전처럼 ‘까까머리’나 군대식(軍隊式) 머리를 깎지 않기 때문에 웬만하면 미장원에서 ‘커트’를 한다.
비용도 저렴(低廉)하고, 남자 이발사보다는 친절하고 야들야들한 미용사(美容師) 아가씨의 손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미장원 아가씨의 이발
어쨌든 필자들이 ‘까까머리’를 깎을 당시에는 미장원도 없었지만, 모두가 너무 어려운 형편들이라 행랑방 이발소(理髮所)에서 머리 한번 깎는 것도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때문에 웬만한 가정에서는 읍내(邑內)에서 이발 기계(器械)를 사다두고, ‘왜지름(등유)’을 발라가며,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곤 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머리를, 아들은 아버지의 머리를,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깎아주곤 했었다. 물론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까까머리로 깎았고, ‘기계질’이 서툴러 기다란 머릿결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고, 기계(器械)가 지나간 경계선(境界線)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등 엉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손간 이발
(할아버지는 기계로 손자머리를 깎으시고, 동생은 머리가 뜯겨 죽을
상이고, 기계충 자욱이 커다란 형은 '아방시'라며 약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다 두 손으로 손잡이 두개를 잡고 깎는 구형 ‘바리깡’은 여차하면 머리털을 뜯어먹기가 일쑤였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겨우 머리를 깎기는 하지만, 아이들은 서투른 ‘바리깡’질로 내내 야단만 맞다가 끝이 난다.
필자네의 경우도 아버지와 여섯 형제들이 모두 ‘까까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경주읍내(慶州邑內)에서 ‘바리깡’을 사다두고,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곤 했었다.
구형 바리깡
그리고 그런 이발(理髮)을 하는 가정에서는 면도(面刀)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어른들은 수염을 그냥 기르고, 턱수염이 듬성듬성 나는 사춘기(思春期) 머슴애들은 어머니가 쓰시던 ‘쪽찌께(쪽 집게)’로 뽑아내는 것으로 면도를 대신했다.
어쨌든 사정이 이쯤 되고 보니 이발소(理髮所)에서 머리를 깎든, 집에서 깎든 온 가족과 온 동네 남정네들과 사내아이들의 머리에는 ‘기계충(器械蟲)’ 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마다 진물이 나고 고름이 생겨 머리털이 뿌리째 뜯겨 나왔다.
기계충 자국 머리
게다가 1년에 몇 번 정도만 머리를 감아 ‘쇠똥’이 새까맣게 눌어붙어 ‘기계충(器械蟲)’이 빠른 속도로 온 머리에 퍼지곤 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쇠똥’은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 피부(頭皮)에 낀 때가 변색(變色)되어 마른 ‘쇠똥’의 색깔 같이 까맣게 눌어붙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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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기계충(器械蟲)은 제대로 된 치료약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시골 영세민(零細民)들은 그런 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있다 해도 사다 쓸 형편이 되지도 못했다.
그 시절 이발요금표
(성인 이발료가 600원일 때인 1977년의 것이다)
가장 흔한 치료법(治療法)은 겨울에는 그냥 내버려 두고, 여름철이 다가오면, ‘물맞이’를 다니는 정도였다.
필자들의 경우 할머니를 따라 해마다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 백중 등 한 해에 서너 번씩 기계충(器械蟲)과 ‘땀띠’를 치료하기 위해 ‘물맞이’를 다녔다.
당시 필자들은 기계충(器械蟲)으로 머리에는 언제나 ‘헌데’가 나 있었고, 온몸에 ‘땀띠’가 생겨 종기(腫氣)가 되다시피 하여 여간 고생을 하지 않았다.
‘물맞이’를 하면, 가렵고 따가운 ‘땀띠’와 ‘헌데’가 낫는다고 하여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도 할머니의 뜻을 따라 필자들의 ‘물맞이’를 특별히 권장(勸獎)하곤 하셨다.
미장원 아가씨의 이발
매미 소리 요란한 산길을 따라 얼마 오르지 않으면, ‘하이골’ 아흔아홉 골자기 계곡(溪谷) 물이 모여 바윗골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瀑布)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곳이 골짜기 안에 몇 군데 더 있었는데, 할머니는 항상 제일 위쪽의 폭포(瀑布)로 가셨다. 남들이 쓰는 물이 흘러내리는 아래쪽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물맞이
제일 위쪽 폭포(瀑布)는 한 길이 넘는 바위가 삼면(三面)에 둘러져 두세 명이 들어서 물을 맞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땀투성이가 되어 도착하면, 필자들은 앞 다투어 깨 벗고 물속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쳤다. 얼음물같이 찬 물에 뛰어들면 금방 심장(心腸)이 멎을 것만 같았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는 머리와 어깨와 등으로 사정없이 퍼부어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흑흑 흐느끼기만 한다.
할머니께서는 이리저리 피하는 필자들의 머리를 움켜쥐시고 제일 센 물줄기에 몇 번씩이나 ‘짱배기’를 갖다 대곤 하셨다. ‘기계충(器械蟲)’과 ‘헌데’를 치료하시기 위해서였다.
물맞이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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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기계충(器械蟲) 얘기로 돌아간다. 전술한 대로 옛날의 시골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계충’이란 걸 앓았다.
이발소의 머리 깎는 기계(器械)를 통해서 옮는 것인데, 머리에 생기는 비슷한 피부병으로는 ‘두부백선(頭部白癬)’이라는 것도 있다.
두피(頭皮)에 무좀균이 침범, 머리카락이 빠지고 진물이 나거나 딱지가 앉는 증상(症狀)을 말한하는데, 요즘에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드문 것만은 아니다. 몸통이나 팔, 다리에 생기는 무좀은 ‘체부백선’이라 한다.
두부백선
‘두부백선’은 머리카락이나 머리의 뿌리에 곰팡이균이 기생(寄生)하는 질환으로, 머리에 생기는 무좀이라고도 한다. 곰팡이 중 ‘마이크로스포룸’과 ‘트리코파이톤’ 종류의 균(菌)에 의해 주로 감염된다.
심할 경우 머리털이 빠지고 쉽게 끊어지면서 탈모(脫毛)가 생길 수 있는데, 이러한 탈모는 대부분 ‘두부백선(頭部白癬)’을 치료하면 원상태로 복구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성의 두부백선
하지만 만약 병변부위를 심하게 긁거나 ‘두부백선(頭部白癬)’이 생긴 이후에도 위생(衛生)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2차 염증(炎症)이 일어나고, 심하면 머리의 뿌리에 침범하게 되어 영원히 머리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의 '두부백선'은 주로 애완동물에게서 감염된다.
백선의 종류
‘두부백선(頭部白癬)’이 최근에 다시 활발해지는 이유는 과거와 달리 애완동물을 집안에 키우는 문화가 이루어지면서이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에게는 백선균(白癬菌)을 흔히 발견되고 있는데, 이런 애완동물(愛玩動物)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많이 감염되고 있다.
또한 그렇게 감염(感染)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하거나, 감염된 사람의 머리를 자른 이발도구를 소독(消毒)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경우 그대로 전염(傳染)될 수 있다.
때문에 학교에서 ‘두부백선(頭部白癬)’이 한 아이라도 발견되면 학급 전체를 관찰해 주어야 한다.
두부백선
그리고 ‘두부백선(頭部白癬)’을 제대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애완동물이 피부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머리를 잘 감기는 등 평소 위생에 신경(神經)을 써야한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애완동물(愛玩動物)을 키우지 않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두부백선(頭部白癬)’ 치료를 위해서는 병변 부위의 머리를 짧게 자르고 위생 상태를 깨끗하게 해 주며, 머리를 자주 감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여성의 두부백선
약물에 의한 치료 과정에서 국소적(局所的)으로 연고(軟膏)를 바르는 정도로는 효과가 떨어지므로 반드시 항진균제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2차 세균 감염이 있으면 항생제(抗生劑)를, 상태에 따라서는 부신피질(副腎皮質 ; 곁콩팥의 바깥층을 이루고 있는 내분비 조직) 호르몬제를 병용하기도 하며, 가끔 보조적(補助的)으로 약용샴푸를 이용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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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白癬)’은 ‘두부백선(頭部白癬)’ 외에 여러 가지 ‘백선’이 있는데, 피부사상균(皮膚絲狀菌)에 의해 감염을 일으키는 모든 피부질환을 말한다.
피부사상균(皮膚絲狀菌)은 각질분해효소를 가지고 있는 각질친화성 진균으로 표피의 각질층, 모발, 손톱 등의 각질에 침투해 각질에 감염을 일으키며 피부질환을 발생시킨다.
피부사상균(皮膚絲狀菌)의 종류는 세계적으로 42종이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11종 이상이 알려져 있다.
백선의 종류는 발생되는 부위에 따라 머리백선, 몸백선, 샅백선, 수염백선, 얼굴백선, 손백선, 발백선, 손발톱백선 등으로 나뉜다. 이들 백선을 이해를 돕기 위해 도표로 소개한다.
종 류 |
개 요 |
머리백선
(두부백선) |
머리백선은 모발과 모낭, 주변 피부에 감염을 일으켜 발생되는 질환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이전에 전체 백선환자의 30 ~40%가 머리백선으로 조사되었으나 이후 점차 줄어들고 있다.
70년대 이후 경제적 발전과 개인위생의 개선으로 현재는 약 1% 내외로 조사되고 있다.
머리백선은 주로 10세 전후의 소아에게서 많이 발생되는 질환이지만, 최근에는 소아의 발병률은 줄어드는 반면 성인의 발병률은 늘어나는 추세이다.
염증과 탈모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원형 또는 타원형의 인설반(鱗屑盤 ; 각질 또는 인비늘이라고도 하며, 표피에서 떨어진 과다한 가루로 비듬(dandruff)같은 것)이 생성되거나 모발이 윤기를 잃고 쉽게 부스러지기도 한다.
염증형 백선의 경우 모낭염을 일으켜 농포, 농종을 발생시키기도 하며 치료가 늦어지거나 방치될 경우 영구탈모가 될 수 있으므로 빠른 치료가 요구된다. |
몸 백 선
얼굴백선 |
몸백선은 머리, 수염 난 얼굴, 손, 발, 사타구니 등을 제외한 피부 전체에 발생하는 백선이며, 일부에서는 얼굴백선을 몸백선에 포함시키고 있다.
경계가 뚜렷한 병변을 발생시키며, 경계부를 따라 구진이나 소수포가 발생되고 구진과 소수포가 발생되는 인설(鱗屑 ; 각질)이 나타난다. 피부백선은 피부접촉이 많은 레슬링, 유도 등의 운동선수들에게서 많이 발생되며, 최근에는 고양이, 토끼 등 애완동물과의 접촉을 총해 감염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
발 백 선
(무 좀) |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선으로 전체 백선의 30~40%를 차지하고 있으며, 20~40대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1970년대 이전에는 다른 백선에 비해 발생 빈도가 낮은 편이었으나, 경제 발전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구두와 양말, 스타킹 등을 신고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발의 습도가 높아져 감염률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발백선은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 주로 발생하며 간혹 발등에도 발생되는 경우가 있는데, 발등에 발생한 백선의 경우 몸백선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증상에 따라 지간형, 소수포형, 각화형으로 구분되며 지간형이 약 58%로 가장 많이 발생되며, 약 30%에서 두 가지 이상의 증상이 함께 발생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
지간
형 |
발백선 중 가장 흔한 증상인 지간형 백선은 다른 곳에 비해 폐쇄되어 있어 통풍이 잘 되지 않고, 습기가 차는 4번 5번 발가락 사이에서 주로 발생된다.
가려움증이 심하며 다한증을 동반하기도 하여 심한 발냄새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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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포형 |
발부위에 소수포가 발생되는 백선으로 소수포끼리 결합하여 큰수포를 형성하기도 한다.
수포가 형성될 때 심한 가려움증을 동반하며, 수포가 마르면서 두꺼운 가피(痂皮)가 형성된다. 더워지면 발에 땀이 나면서 더욱 악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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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
형 |
발바닥 전체가 두꺼운 각질로 뒤덮여 긁으면 고운 가루처럼 떨어지는 증상을 보이는 백선으로 각질이 두꺼워지는 것 이외에 증상이 거의 없어 방치되는 경우가 많으며, 결과적으로 만성적으로 경과되어 치료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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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백 선 |
손백선은 발백선의 각화형과 유사한 형태로 주로 발생되며 가려움증이 동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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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톱백선 |
발백선, 손백선을 치료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할 경우 손발톱까지 감염을 일으키게 되어 손발톱백선을 발생시킨다.
손발톱 아래에 염증이 발생되고 각질이 비후되며, 피부와 손발톱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손발톱의 색이 탁해지며 더 진행되면 부스러져 정상적인 형태를 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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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백선 |
성인 남성의 콧수염, 턱수염에 있는 모낭과 그 주위 피부에 발생하는 백선으로 백선균성 모창이라고도 한다.
수염백선은 50대에 가장 많으며, 직업적으로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에서 많이 발생된다. 다른 부위의 백선과 동반되는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 모낭에 염증을 일으켜 반흔성 탈모를 남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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샅 백 선
(완 선) |
사타구니 부위에 발생하는 샅백선은 대부분 성인 남성에게서 나타나며, 몸백선과 유사한 형태를 띈다. 샅백선은 발백선과 동반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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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토를 달자니 또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에서 무조건 파일을 덮어버린다. 배경음악은 앞서 소개한 대로 박옥자의 ‘어릴적 약속’을 게재하였다. ‘기계충’이 덕지가 되어 나더라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간절한 이 밤이다.
내일은 경주시 충효동 ‘석하(昔河 ; 한식당)’에서 그 시절 그리운 ‘기계충 친구’들을 만나는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제7회 2012년도 제1차 동기회(同期會)가 있는 날이다.
70을 넘긴 남녀 ‘노땅’들이 몇이나 나올 것인지 자못 기대를 가지면서 작년 2차 동기회(同期會) 때 찍은 기념사진 CD를 정성스레 가방에 챙긴다.
다음 동기회(同期會) 전에 혹시 떠나버릴지도 모를 그리운 ‘기계충(器械蟲)’ 친구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다. 금년도 제2차 동기회는 오는 10월 7일이다.
60여 년 전,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에 다닐 때 똑같이 기계충(器械蟲)을 달고 살던 개구쟁이들이 이제는 똑같이 고희(古稀)를 넘어선 황혼(黃昏)을 맞아 서둘러 떠나는 통에 가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1년에 동기회를 두 번씩이나 하고 있다.
2012년 3월 7일 영지초등학교 제7회 동기회(경주시 충효동 ‘석하’에서)
(카메라잡이의 실수로 필자는 좌측 하단에 얼굴이 거의 잘려져 나왔고, 필자의 주위에 있던 남자 친구들은 찍히지도 않았다. 남자애들은 이제
'기계충' 자국은커녕 머리털이 거의 다 빠져버리고 머리 밑이 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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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경쓴 모습이 그래도 제일 크게 나오셨네요.ㅎㅎ 영지분들 참 우정이 남다르신듯...많이 모이네요...이발소에 얽힌 얘깃거리가 끝이 없네요...그때는 그랬지요...바리깡이라는 머리깍는 기계가...머리를 깍기도 했지만..물어 뜯는거 같았지요..ㅎㅎ 괘릉 이발소는 경주가 가까워서...이쁜 면도사가 있었는가베요 웻세할만한 일도 생겼는가베요...모화에는 그런 호화판 이발소가 없었고...우리 집안 어르신인 철베이 아제가 ....그분은 한문도 잘 하셨고..언변도 좋아셨고...목수로도 유명하신분이 이발기술까지 배우셔서...만물박사이셨지요..ㅎㅎ
사진각구란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보네요....온가족 사진을 모아 넣어서 벽에 걸어 놓고 있었지요...이발소에는 촌스럽던 명화같은 것도 하나 정도는 기본으로 있었지요...저는 그래도 기계충에 한번도 걸린 거 같지 않았던거 같은데..요사이 쩌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 버리니....기가 막히는 겁니다..ㅎㅎ
모찌방 소리도 참 오랜만에 들어 봤네요..ㅎㅎ 모찌방이 좋은 누나들은 거의 다 경주 울산으로....대구 부산으로.... 서울로..... 갔던거 같아요.ㅎㅎㅎ
멀꺼디 훤하기 빠지는 빙 저거 도장부스럼이라 안쿠능교? 기계충이 그빙이 그빙인강? ㅎㅎ 아련한 추억, 우리동내 키작은 이발재이 아재가 생각나네요, 빨래판 위에 올라앉아 가리야게 깍던 시절.......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도장부스럼'은 기계충이 아니고, 의학용어로 말하는 '백선'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체부백선'으로 피부 사상균에 의한 곰팡이에 의해 발생하는데, 머리가 아닌 주로 엉덩이, 사타구니, 허벅지 등에 생깁니다. 물론 피부사상균에 의해 머리에 발생하는 '두부백선'도 있습니다. ‘가리야게’ 머리에 대한 추억을 갖고 계시는군요. 언젠가 틈이 나면, ‘가리야게’를 포함하여 옛적 우리들의 고향에서 유행하던 소년소녀들의 헤어스타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머리깍는 이발사가 우리삼촌 이라서 자랑도 했지만 공짜로 깍는탓에 손님 없을때 멘 꼬바레이로 깍았는데,냉조 알고보이 여름에는 보리를 주고 가을에는 나락을 주는걸 모르고 공짜베긴줄 알고 미안해 하기도 하고,,...헌디 진물이 멀꺼디를 물고 있어가 기계가 몬차고 나가가 얼메나 따갑든지, 덜 따갑을라꼬 목이 빠지도록 처들기도 했지요, 커서는 아가씨가 면도를 해주는데 일부로 팔을 벌리면서 그곳에 부디쳐도 보고 어굴이 붉어 지면서 기부이 야릇하면서 좋기도 하데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