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5%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09c4f%26filename%3Dda_mebok-002.gif) |
[08-08-30]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25,14-30
(필자가 묵상한 구절을 중심으로 싣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14-30)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25%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844d7%26filename%3Dda_mebok-003.gif)
|
[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 <독서 : 1코린 1,26-31 / 복음 : 마태 25,14-30>
나는 아이들을 참 좋아한다. 참 사랑한다. 천진하고 순수한 맑은 영혼을 지닌 아이들을 바라보면 세상의 많은 죄까지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속에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이 살아 숨 쉬고, 오물오물 속삭이는 말속에는 내가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며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내가 선생님이 될 수 있었고,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것은 순전히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커다란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기까지 내게 도움을 주신 분이 두 분 계시다.
20년도 훨씬 전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나를 대학을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나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작은 잡지사에라도 취직해 내가 좋아하는 글과 함께 살려고 했다. 그래서 입시 공부를 소홀히 하려고 하자, 담임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하면 지금이 네가 공부하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마무리를 잘하면 좋겠구나!” 선생님의 말씀에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까지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치르고 보니 열심히 공부한 덕에 시험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슬금슬금 대학에 대한 열망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함께 살던 고모님이 그 사정을 아시고 ‘교육대학’에 갈 것을 권유하셨다. 그래서 교육대학에 갔다. 그리고 선생님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고, 내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두 분의 천사를 보내주셨으며, 나를 바라보는 사랑스런 아이들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뜨며 아이들과 함께 사는 삶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선물로 받은 오늘을 충실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현관문을 나선다. 밝은 햇살이 주님의 사랑처럼 내 안에 찬란하게 퍼진다. 이 소중한 선물을 잘 나누며 살아가리라...................◆
[말씀자료 : 김정임(인천 인동초등학교)]
|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시작기도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auline.or.kr%2Fdata%2Fcatholic%2Fimage%2Fcyber_pray_content%2F200808%2F080802_6.jpg) 우리들 가운데
가장 고약한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좋은 점이 있고,
우리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고약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은날개2 중-
|
오늘의 기도지향 : 남북한의 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 같은 형제 자매이면서도 자유 안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주님께 맡깁니다. 하루빨리 평화로이 교류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오늘의 복음 :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마태 25,14-30
(필자가 묵상한 구절을 중심으로 싣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14-30)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하느님이 하느님이 되시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믿는다는 것은 일차적 의미가 그리스도교 신경의 명제들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맡긴다는 뜻이다. 결혼할 때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합의는 혼례식에 따르는 제반 문제에 관한 합의가 아니라 배우자에 대한 합의이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빋는다는 것은 자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를 중단하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하느님이 되시도록, 다시말해서 손수 창조하신 만물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으며, 당신 생명을 바쳐 우리 모두의 새영을 건져 주신 자비의 하느님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개인과 교회 안에 드러나는 참된 회개의 표지 가운데 하나는 모든 조물에 대한 자비의 정신이 그들의 윤리 안에 팽배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느님 되시지 못하도록 거부하는 죄는 우리 본성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육체적 욕망만을 억제하면 죄가 없어 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 우리의 죄는 육체적 욕망보다 훨씬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천사의 타락 설화를 통해 표현된 바 있는 진리이다. 우리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육체가 아닌 정신 속에 자리잡는 죄이다. 모든 조물이 우리를 찬양하고 공경하고 섬기고 우리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살고 싶어하는, 우리 내면 아주 깊은 곳에 자리하는 교만의 죄가 그것이다. 교만의 성향은 우리의 내심 아주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 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 삶이 끊임없는 회개,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여 하느님을 자기 안전에 담보물로 삼으려 하는 삶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부단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G.W.휴즈 |「놀라우신 하느님」중에서>
마침성가 : 영원하신 성부(가 215장)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24%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aa54e3%26filename%3Dda_icon23.gif)
|
|
연중 제21주간 토요일(2008-08-30) I 복음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비교는 불행을, 감사는 행복을...
오늘 복음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비유 4편(24,45-25,46) 중에서 달란트의 비유(25,14-30)에 해당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은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24,44)는 말씀에 따라 종말비유의 특징을 ‘늘 깨어 준비함’으로 규정하였다.
늘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종말의 시간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고,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종말 후에 세워질 신국(神國),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불시(不時)에 들이닥칠 종말을 깨어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종말로 시작되는 하느님나라의 시민(市民)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살아 있는 동안에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으로서 연중시기에 듣게 되는 마지막 복음이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오늘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행적과 가르침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묵상해 왔다. 이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한해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가복음(4,16-21,36)을 평일미사 복음으로 묵상하게 될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많은 종들을 부리는 아주 부자가 틀림없다. 주인은 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각자의 능력대로 재산을 맡긴다. 루가복음은 금화의 비유(19,11-27)에서 열 명의 종에게 각각 금화 한 개씩(100 데나리온)을 맡기는데 비하여 마태오복음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니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다. 따라서 세 명의 종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30,000 데나리온), 두 달란트(18,000 데나리온), 한 달란트(6,000 데나리온)를 받는다.
그리고 주인은 떠났다. 종들에게 이 많은 돈을 맡기면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없고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다. 따라서 맡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종들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주인이 떠나간 후에 종들은 각기 받은 달란트로 첫째와 둘째는 배가(倍加)시켰고, 셋째는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 느닷없이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셈을 밝히게 된다. 셈의 결과는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종말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깨어 기다리는 것’이다. 초기 교회가 당면한 ‘재림지체 현상’을 염두에 두고 ‘열 처녀의 비유’(25,1-13)와 ‘최후심판의 비유’(25,31-46)와의 맥락에서 달란트의 비유를 묵상하여야 한다. 출타한 주인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과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꼭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 사이의 긴장감은 일상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믿음의 마음을 굳건히 하고, 목적의식을 뚜렷이 가지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두 번째 교훈이 들어 있다. 비유가 주는 둘째 교훈은 각자가 받은 달란트(Talent)를 종말의 시기까지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그릇에 맞게 능력을 주셨다. 비유에서 보듯이 받은 능력의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받은 것을 그냥 묻어두어서도 안 된다. ‘얼마나 많은’ 능력보다는 많던 적던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불행은 남과의 비교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듯이 양을 가지고 남의 것과 비교하는 순간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반대로 양에 관계없이 자기에게 맡겨진 능력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사용한다면 여기서 인간의 행복은 시작될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ec874%26filename%3Dda_mebok-004.gif)
|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종말을 준비하는 신자, 탈렌트의 비유
마태오 25장에는 마지막날(종말)에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세 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복음에서 그 비유들 중에서 첫 번째 비유인 열처녀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열처녀 비유는 재림의 날을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을 통해서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재림을 준비하는 참된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지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들은 낙심하거나 좌절에 빠져서 영적인 잠을 자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신자들은 이 시기를 잘 지낼 수 있도록 충분한 대비를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종말을 사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지혜와 성령충만을 구해야 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잇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열처녀 비유에 이어서 나오는 두 번째 비유인 달란트 비유에는 옆처녀 대신에 주인을 기다리는 3명의 종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열처녀가 늦게 오는 신랑을 기다리듯이, 이 비유에서 3명의 종들은 주인이 없는 동안에 최선을 다해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신자들이 게으리지 말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맡겨진 탈렌트와 종들의 반응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4-18)
주님은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는 마치 한 주인이 먼길을 떠나면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긴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인은 특별한 일로 일정기간 동안 집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타국으로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여행 계획을 밝히고, 현금화 할 수 있는 재산을 정리해서 그 종들에게 나누어 맡겼습니다.
주인의 재산은 전부 "금 여덟 탈렌트"에 해당했습니다. 그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능력에 맞게 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탈렌트"(talent)라는 말은 오늘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예술가의 탈렌트를 가졌다"는 말은, 그가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에 기록된 "탈렌트"는 돈을 가리키는 일종의 화폐단위였습니다. 은으로 된 한 달란트는 당시에 6000드라크마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한 드라크마는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은 한 달란트는 일반 노동자가 20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복음에 나온 금 한 탈렌트는 은 한 달란트의 15배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돈이 매우 큰 액수였습니다.
그 주인은 자기 종들이 맡겨진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재산을 종들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 종들이 그 돈을 잘 관리해서 자기가 돌아올 때에 재산을 증식시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 주인은 돌아와서 이러한 종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고 생각했습니다.
그 주인은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탈렌트를 주었고, 두 번째 종에게는 두 탈렌트를 주었으며, 세 번째 종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관습에 따라 주인과 돈을 맡은 종들 간에는 적절한 계약서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주인은 그 종들의 노력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을 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종들은 일종의 동업을 통한 이익 배당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종은 다섯 탈렌트를 가지고 장사하여 열 탈렌트를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종도 받은 두 탈렌트를 가지고 장사하여 네 달란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착하고, 성실했으며, 또 지혜로웠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받은 돈으로 장사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은 것을 인해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주인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매우 모진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원금을 잃으면 엄한 주인에게 큰 책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는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얻으려는 주인의 태도에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이익을 얻어도 결국 그 탈렌트는 주인의 것이 될 것이라고 그러므로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모험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인에게 받은 탈렌트를 땅에 묻어다 두었습니다. 그는 안전하게 원금을 보관했다가, 그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생각했습니다.
2. 착하고 성실한 종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19-23)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마침내 멀리 떠났던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종들에게 맡긴 탈렌트를 결산하기 위해서 종들을 불렀습니다. 주인 앞에서 회계 장부가 펴졌으며, 각 종들은 주인에게 받은 탈렌트 활용 결과에 해서 보고했습니다. 첫 번째 종은 자신이 받은 다섯 탈렌트 외에, 장사를 해서 번 다섯 탈렌트를 더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다섯 탈렌트를 받았지만, 열 탈렌트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뢰한 주인에 대해 충성으로 보답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단지 장사를 해서 다섯 탈렌트를 더 남겼다고만 보고했습니다.
그때에 그 주인은 착하고 성실한 종을 아낌없이 칭찬하면서 적절한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첫째로 그 주인은 그 종에게 "잘하였다"고 칭찬했으며, 둘째로 그 종을 "착하고 성실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셋째로 그 주인은 그 종에게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식탁에 함께 앉는 것은 주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기쁨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종 역시 첫 번째 종처럼 자기가 받은 두 탈렌트 외에 장사를 해서 번 두 탈렌트를 더 가져왔습니다. 그 종 역시 아무 자랑도 하지 않고, 자신이 장사를 해서 두 탈렌트를 남겼다고만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두 번째 종에게도 첫 번째 종처럼 크게 칭찬을 했습니다. 그 주인은 그 종을 칭찬했으며, 착하고 성실한 종으로 불러 주었고,그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길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 종에게 주인의 잔치에 참석하여 자신과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말했습니다.
3. 악하고 게으른 종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 25,24-25)
세 번째 종이 주인과 결산할 차례가 왔습니다. 그 종은 장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땅에 묻었던 원금만을 주인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는 다른 종들처럼 주인의 관대함을 찬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을 가리켜 모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자신들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책망을 듣지 않으려고 모험을 회피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씨를 뿌리거나 심지 않고 거두는 자, 즉 불로소득을 원하는 자로 알았습니다. 그는 주인이 자기를 시켜서 돈을 벌려는 고리대금업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열심히 일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험을 해가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이 준 원금만을 땅에 묻었다가 고스란히 주인에게 반납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원금을 잘 보관한 자신을 칭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준 돈을 잃어버리지 않고 잘 보관한 일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4. 주인의 반응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6-30)
그러나 그 주인은 세 번째 종의 말을 듣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 주인은 그 종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인은 그를 도덕적으로 악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 때에 그 주인은 그 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하면 "네가 정말로 내가 불로소득을 원하는 자로 생각했다면, 최소한 원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그 종도 돈을 금융기관에 맡기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받을 것을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에게 적은 돈을 맡긴 주인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는 주인에게 원금만을 가져왔습니다.
그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엄하게 대했습니다. 첫째로 그 주인은 그 종에게 한 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았으며, 둘째로 그 종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셋째로 그 주인은 그 종의 태만과 불충실을 책망했으며, 넷째로 그 종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열심히 일해서 많은 것을 남긴 자는 더 많은 것을 받아 풍족하게 해주었고, 게으르고 나태하여 이익을 남기지 못한 종은 가졌던 것까지 빼앗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 주인은 주인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악하고 게으른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아 버렸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그 종이 주인과의 주종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자기 식탁에 앉아서 기쁨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은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버려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5. 탈렌트 비유의 의미와 결론
탈렌트 비유는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비유였습니다. 열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 비유에 나오는 종들도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을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이 비유는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주님의 재림 때까지 받은 은총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들이 받은 은총과 재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신실하고 충성된 종들을 칭찬해 주시고,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실 것이며, 주님과 함께 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못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게으르게 살던 사람들은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완고한 독재자로 생각했으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엄히 책망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주었던 것을 빼앗고, 어두운 곳으로 내던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곳에서 가삼을 치고 울면서 자기의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주님 당시에도 적용되는 비유였습니다. 주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한 탈렌트를 받은 자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받은 것을 보관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이웃 나라에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서 이방 민족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전파하기 보다는 보존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유대민족에게 주신 보물을 잘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모든 보물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주었던 보물을 빼앗아서 새로운 (교회인) 자기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장차 그들을 주님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마지막날을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종말을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총과 재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각 신자들은 그 은총과 재능을 가지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충성스럽게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맡겨진 일을 완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때에 그들을 칭찬해 주시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실 것이며, 주님과 함께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ec874%26filename%3Dda_mebok-004.gif)
|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지금이 무슨 때입니까?
오스트리아의 유태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문 밖에서 일생 동안을 기다리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문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 밖에서 일생 동안 서성거리다 죽기 전에야 자기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문지기에게 '나를 들여보내지 않고 지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돕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번도 이 문을 열어달라고 나에게 요청한 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문안으로 들어가려고 일생을 문 밖에서 서성거렸지만 한번도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용기도, 모험심도 없이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죽어간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앞에 기회의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축복의 문이 열려 있는데도 한번도 열어보려고 하지 아니하고 시도도 해보지도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성공의 때를 놓치고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일생 동안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복음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각각 주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받았던 돈의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마태 25,21) 하며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속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꺼내 놓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마태 25,26-28) 하며 심히 책망을 했습니다. 결국 한 탈렌트 받았던 종은 문 밖으로 쫓겨나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줄거리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탈란트의 많고 적음의 문제, 금전의 가치에 대한 문제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잘 활용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기회와 시간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한가지 뜻으로만 풀이되어 있지만, 헬라어에는 시간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두 가지로 나뉘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흐르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연대로 보는 시간 관념입니다. 내가 30세가 되고 50세가 되고 80세가 됐다는 말은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출옥할 날을 손꼽아 세는 것,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을 받으며 빨리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교통체증 때문에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 차안에서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있는 것 모두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입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질적인 시간으로서, 의미 있는 시간, 가치 있는 시간, 보람있는 시간, 생동하는 시간,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 영원한 시간, 감격의 순간들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도 시간 시간을 얼마나 값있고 질적으로 의미 있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신앙 생활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한 탈렌트 받았던 종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 탈렌트 받았던 종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받은 탈렌트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탈렌트를 과소 평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가정의 곤란한 것, 잘못된 것은 확대해 보면서 다른 가정의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정, 자기에게 주어진 일, 자기에게 주어진 직장 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한 탈렌트 받았던 종과 같이 실패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평과 원망과 구실만을 찾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사회가, 우리 가정이 잘못됐기 때문에 내가 못산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과 탈렌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 5천 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점심때가 되었으나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 가난한 한 소년이 빵(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도시락 하나를 제자들이 받아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년의 도시락을 축성하신 후 군중들에게 나눠줄 때에 5천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말은 보잘 것 없는 빵 하나라도 하느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이 10배, 100배, 1,000배로 늘어가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교훈입니다.
어떤 농부가 오랫동안 좋은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자기의 농장이 싫증이 나서 이것을 팔고 다른 환경의 새 농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자기의 농장을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는 여러 곳에 광고를 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넓고 기름진 땅, 좋은 농가, 큰 곡식 창고, 이상적인 위치, 최신식 농기구를 갖춘 농장을 팝니다." 신문 광고를 보다가 이 농부는 "이 농장이 바로 내가 원하는 농장이구나!"하고 생각하고서 위치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자기 농장을 광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농부는 자기 농장이 가장 이상적인 농장임을 깨닫고 매물로 내놓았던 것을 취소하고 그 농장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과일이 크고 좋아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천부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도 소중합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못났다 하더라도 내 부모가, 내 형제가, 내 동생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을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길 때 그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주신 탈렌트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한 탈렌트 받았던 종은 주어진 것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변경시킬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받아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키가 165Cm인데 180Cm로 만들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구의 인력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변경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이를 먹지 않으려고 흘러가는 세월을 멈추게 하거나 지연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너희 중에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루카 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죽음은 받아들어야 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받아들일 때에 그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로부터 무한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동물을 다스리고 모든 과실을 마음대로 먹으며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행복한 환경은 보지 아니하고 "먹지 말라"는 그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한계선이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인류에게 무서운 타락의 죄악을 가져오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계를 인정하지 못할 때 범죄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요즈음에도 보게 됩니다.
유전자 공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인간이 완전히 성장하는데 20년 정도 걸리므로 보통 그 7배수인 140년은 넉넉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40에 죽고, 또 어떤 사람은 50, 60에 죽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순리를 무시하여 교만하게도 그것을 파괴하고 한계를 넘으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일생동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더우기 그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소중한 것으로 알고 잘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가정에 태어났지만'.'만일 저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졌다면'.'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학교를 나왔다면'하고 '만일에…, 만일에…'를 연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가는 선한 일도, 생산적인 일도, 창조적인 일도, 의미 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허송 세월을 보낼 뿐만 아니라 불평과 원망을 일삼고 책임을 회피하다가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합니다.
1895년 미국의 아담스(Adams)라는 선교사가 대구에서 선교 생활을 하다가 안식년이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대구에 돌아올 때에 아담스 선교사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과가 대구에 없는 것을 생각하고 사과 씨 한 알을 주머니에 넣어 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집 마당에 사과 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는데, 그 사과 씨가 대구의 기후와 토질에 맞았기 때문에 점점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과 맛을 보니까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사과 씨를 이웃에게도 조금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사과 씨 하나가 아담스라는 선교사에 의해 대구에 심어지고, 그로 인해 오늘날 대구가 세계 제일의 사과 명산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알의 사과 씨앗이 떨어지게 될 때 기적을 일으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알의 사과 씨, 이것을 과소평가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 속에 소중히 심어둘 때에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비유로 하신 약속의 말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신 탈렌트를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한 탈렌트 받았던 종은 이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고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땅에다 파묻었습니다. 이 사람은 모험심도, 용기도 없었기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일생 동안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해보려고 시도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파묻어 버리고는 잃어버릴까 그 주위를 맴돌다가 일생을 탕진하고 마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활용하려고 시도할 때에 성공의 기회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려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사목 컨설턴트 한분이 부흥하지 못하는 2백 교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한 교회 사목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교회가 확장(부흥)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 사목자는 "말도 마십시오.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이 많이 걷히지 않아 선교비도 없고 교회에 인재다운 인재가 없고 그러니 이 교회가 부흥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컨설턴트는 "아닙니다. 이 교회는 돈이 없는 곳이 문제가 아니고 당신에게 아이디어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모험심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그 사목자에게 충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탈렌트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확장 또는 부흥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로 배워서 되로 쓰는 사람이 있고, 되로 배워서 말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느냐를 가르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정년 퇴직할 때까지 우체부 생활을 하던 프리슬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퇴할 때 매달 받을 얼마의 연봉과 은행에 예금해 놓은 1,200달러가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퇴한 우체부는 언제나 선한 마음을 가지고 동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던 꽃을 가꾸는 방법이라던가 새를 키우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은퇴한 이 우체부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프리슬리는 이웃들을 위해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일리노이 주 사람들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생활하기 때문에 바다 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프리슬리는 그들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 주리라 결심하고 바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자료를 준비한 후 바다 관광을 할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수백 명이 몰려왔습니다. 그 사람들을 버스에 싣고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비치에 데리고 가서 구경을 시켰습니다. 바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다 관광을 가겠다고 신청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사람들은 프리슬리에게 바다만 구경시켜 줄 것이 아니라 다른 관광 명소도 안내를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제 프리슬리는 플로리다 주뿐만 아니라 미국 전지역을 커버하는 관광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은퇴한 후에 쭈그려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82살의 프리슬리는 재산이 7백만 달러나 되는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내 지식과 내 노력을 남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충실히 활용하게 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며 하느님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여러분! 2008년도 추수의 계절, 열매의 계절,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인께서 봄에 떠나시면서 주신 씨앗(탈렌트)을 열심히 여름에 가꾸어 가을에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말입니다. 아니면 금년에도 그 씨앗(탈렌트)을 땅에 파묻어 버리고 내년으로 핑계를 댈 것입니까?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탈렌트를 활용하길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제 기지개를 폅시다. 움추렸던 마음을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스스로의 탈렌트를 사용할 때입니다. 그 달란트가 크든 작든, 지금부터는 여러분의 탈렌트를 소중히 여기고 활용함으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소중한 하느님의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ec874%26filename%3Dda_mebok-004.gif)
|
<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착하고 성실한 종
오늘복음은 주님께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착하고 성실한 종이 될 것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앞서 주님께서는 이런 저런 징조와 더불어 자신의 강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이런 저런 징조를 보게 되면 인자(사람의 아들)의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지만 그 때는 노아의 때처럼 하늘로부터 홀연히 임하게 될 것이고, 어떤 자는 데려가고 어떤 자는 버려지는 비참함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올 것이므로 그러므로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되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슬기로운 자가 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여기 나오는 이런 비유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가 함께 들어갈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믿는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비유에서 말하는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늘나라는 주님의 오심으로 임하게 될 나라인데, 심판으로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나 믿는 자에게나 주님께서는 심판의 주인로 오실 것이고, 그분의 오심에서 그 나라는 임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비유에서 말하는 하늘나라 즉 천국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 천국은 어떻다' 했을 때, 이 천국은 심판으로 임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으로 임하는 나라를 기다리는 믿는 신자의 삶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되어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요, 슬기로운 자가 되어 주의 오심을 예비하는 삶이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착하고 성실한 종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착하고 성실한 종의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길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의 재산을 맡겼습니다. 주인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다섯 탈렌트를 맡겼고, 두 탈렌트를, 한 탈렌트를 각각 맡기고 떠났습니다.
재능이 적어 한 탈렌트를 맡았다고는 하지만 여기 금 한 탈렌트라고 하는 것은 결코 적은 재산이 아닙니다. 한 탈렌트는 일반 노동자가 근 20년 동안을 일해 꼬박 모아야 할 만큼 큰 돈이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약 2억 정도 되는 돈이 되겠습니다. 그런 큰 돈을 주인이 그들에게 그 소유를 맡겼다는 것은 종들로 하여금 누구나 그 소유를 잘 경영하도록 맡겼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마치 어떤 회사 사장이 외국에 나가면서 크고 작은 계열사의 경영을 맡긴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주인이 이렇게 자신들에게 큰 돈을 맡기고 떠나자, 다섯 탈렌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열심히 활용하였고 그 결과 다섯 탈렌트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자도 열심히 활용하여 두 탈렌트의 추가 수확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이 준 탈렌트를 감추어 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다섯 탈렌트를 맡았 던 자가 와서 말하였습니다.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주인이 말하였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이렇게 주인은 그 종을 크게 칭찬하여 주었고,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그에게 맡기겠다고 하였습니다.
두 탈렌트를 받았던 자도 와서 말하였습니다.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 주인이 그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 두사람은 모두 주인이 맡겨준 것을 가지고 충성을 다해 부지런히 일했고 또 그만큼 이익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들이 이익을 남겼는가, 못 남겼는가, 남겼으면 얼마를 남겼는가' 또는 '만약에 이들이 열심히 일했음에도 그 돈을 말아먹어 버렸다면, 과연 주인은 어떻게 했을 것인가'하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까지 과도한 추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비유는 그런 '장사 원리나 결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비유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고, 그들의 착함과 성실함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탈렌트를 받은 자가 와서 말하였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는 주인을 모진 사람이라고 악하게 폄하하였습니다.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그 모든 핑계를 주인에게 돌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탈렌트를 감추어두고 일하지 않은 이유'를 주인의 못된 성격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주인이 모진 사람, 즉 무정하고 냉혹한 사람이어서 혹시라도 자신이 그것을 말아먹어 버렸을 때, 당하게 될 혹독한 추궁을 인해 그것을 감추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전 만이라도 돌려주면 적어도 책망을 받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핑계에 불과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는 악하고 게으른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게으른 종이 주인을 어떻게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것에 촛점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주인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핑계에 불과한 것이지, 진짜로 그가 주인을 그렇게 알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여기 비유의 강조는 그가 주인을 잘못 알았는가, 바르게 알았는가 하는 것에 강조가 있지 않습 니다.
여기 비유의 강조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슬기로운 삶에 있습니다. 곧 착하고 성실하게게 일하며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과, 악하고 게으름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지 않는 삶의 두종류를 대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착한 것은 달리 착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오심을 생각하며 맡겨진 일에 충성된 것이 착한 것이고, 여기 악한 것은 게을러 일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주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악한 것이 될 것입니다.
여하튼 여기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은 그 모든 책임을 주인에게 돌렸고,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이에 주인은 그 변명이 결코 합당치 않은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그 종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너의 말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을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였습니다. 사실은 자신이 게을러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 결과 어떤 이자도 붙이지 못한 것인데, 그 책임을 주인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주인이 말하였습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주인은 노하여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그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았습니다. 이상이 오늘 비유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체적인 정황들을 세세히 우리에게 연결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주제적인 메시지만 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여기 탈렌트를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천부 적 재능'쪽으로 연결시켜, '우리의 재능을 썩히지 않고 개발해야 함', 또는 '반드시 주신 은사에 합 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 쪽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오늘복음이 말하는 직접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삶이지요? 장차 주님께서 큰 권능으로 임하여 오실 것이고, 천국은 심판으로 임하게 될 것인데, 그 때를 준비하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강조가 있습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까?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기 탈렌트는 하느님이 주신 재능 쪽 보다는, 이런 저런 하느님 나라의 직무와 봉사에 더 가까운 의미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15절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주어진 각자의 능력에 맞도록 탈렌트를 맡겨주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또 21절에서는 그것을 '작은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앞서 24장에서는 충성되고 슬기로운 종이 되어 집 사람(식솔)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하튼 여기 탈란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각각 주님으로부터 탈란트를 위임받은 종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일들을 위임받은 종들인 것입니다.
그럼 그 일은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주님을 대리하여 그 나라를 세우는 일이 되겠지요?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세우신 나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터 위에 세우신 그 나라로서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섬김에 있어 우리는 각각의 재능과 은사를 따라 고유한 봉사의 직무를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 탈렌트를 맡은 사람은 교회의 직무자만 해당되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겠지요?
교회의 직책자만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주님께로부터 자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종들입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일하는 것이 우리의 직무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하셨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거룩한 사명을 위임받아 세상에서 일하고 있고, 주님 오시도록까지 충성스럽게 이 직무를 감당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셔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과연 우리가 주님 오시도록까지 착하고 성실한 종이 되어 작은 일에 충성했는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부지런히 노력한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지금 노력한 것보다 더 풍성한 것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주를 위해 수고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 날에 그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고, 오시는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리라고 주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지금 수고치 않고는 오는 나라에서 받을 것이 없고 나아가 그 나라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어떻게 턱걸이를 해서라도 그 나라에 결국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로 두려울 정도의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 가운데 우리를 돌아 볼 수 있도록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말씀하신 의도의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는 심판으로 임하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때는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에 심판하시는 때요, 우리의 모든 노력과 행위가 그 앞에 드러나고 판단 받는 때입니다. 천국 문이 닫히는 때요, 친히 종을 불러 결산하는 때입니다.
그 때 어떤 자에게는 칭찬과 영광이, 어떤 자에게는 수치와 비참한 버림이 주어질 것입니다. 어떤 자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어떤 자에게는 책망을 하며 내쫓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으로 임하실 때의 일이요, 지금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칭찬과 영광의 때가 아니요 땀 흘려 수고해야 할 때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이 되어 맡기신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 열매가 어떨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 손에 아무 열매가 없는 것처럼 우리 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착하고 충실한 종으로 노력했어도, 이 땅의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것 같으면, 아무런 열매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1코린 4,1-5)에서 말하기를 "나도 나를 판단치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의 눈과 판단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주께서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하도록 하십니다. 그 일이 큰가 작은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다섯 탈렌트를 받았는가, 한 탈렌트를 받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가, 그렇지 않고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이런 저런 핑계로 주님의 일을 게을리 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노력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그 열매를 볼 수 없을지라도 반드시 그 날에는 그 모든 열매가 드러날 것이고, 우리는 노력한 바를 따라 칭찬과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를 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맡겨진 작은 일들에 충성하고, 착하고 성실한 종,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주님의 쓰심에 유익 한 종으로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기꺼이 주님을 위해 노력함으 로써 장차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성실한 종"이라 일컬음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ec874%26filename%3Dda_mebok-004.gif)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