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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 나세찬의 거평동 팔경(居平洞八景) 해설
글/나천수
1. 서두
조선 중기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은 1498(연산군 4)∼1551(명종 6),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비승(丕承), 호는 송재(松齋)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 나빈(羅彬)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8년 별시문과에 급제, 나주·황주의 훈도(訓導), 성균관 학유를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535년 봄에 관직에서 물러나 구거(舊居)인 나주 거평에 머물면서 주변의 경관을 자신의 모습으로 승화시켜 시문학으로 읊은 것이다. 송재공 38세 때의 일이다.
이 시기에 관직에서 물러난 이유를 필자는 찾을 수 없었다.
2. 팔경의 연원과 거평동 팔경의 배경
팔경의 효시는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시작한다는 설이 있다.
‘소상팔경’이라 함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 영릉(零陵) 부근, 즉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곳의 여덟 가지 경치를 말한다.
소상팔경은 8경은 다음과 같다.
山市晴嵐(산시청람) :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감도는 산간 마을
煙寺晩種(연사만종) : 연무에 싸인 산사의 종소리가 들리는 늦저녁 풍경
瀟湘夜雨(소상야우) :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遠浦歸帆(원포귀범) : 먼 포구로 돌아오는 배
平沙落雁(평사낙안) :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洞庭秋月(동정추월) :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
漁村夕照(어촌석조) : 저녁 노을 물든 어촌
江天暮雪(강천모설) : 저녁 때 산야에 내린 눈
소상야우는 영주시(永州市) 동쪽에 있고, 동정추월은 동정호수에 있으며, 원포귀범은 상음현(湘陰縣) 강변에 있다.
평사낙안은 형얀시(衡陽市) 회안봉(回雁峰)에 있고,
연사만종은 형산현(衡山縣) 현성(縣城)에 있으며,
어촌석조는 도원현(桃源縣) 무릉계(武陵溪) 지구에 있다.
강천모설은 장사시(長沙市) 수륙주(水陸洲)에 있고,
산시청람은 상담소산(湘潭昭山)에 있다.
우리나라는 소상팔경의 운에 맞추어 단양팔경, 관동팔경 등 우리나라 에서도 수많은 곳에서 8경을 새롭게 탄생시켰으며, 거평동 8경도 이러한 운에 맞도록 지은 것 같다.
거평은 1375년 고려 말 정도전이 유배를 온 곳으로 회진현 거평부곡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소상팔경에서 보면 멀리서 보는 경치(scenic view)를 일컬었듯이 거평동 팔경도 거평을 중심으로 한 원근 지역의 특별한 경치(special scenic view)를 지정하면서, 송재 본인의 취미 내지는 본인의 성품을 은근히 표현해 내는 것들이었다.
더더욱 특별한 것은 8경의 경치를 지정하면서 각각의 경치마다 시문을 붙였는데, 그것은 자신을 심정을 나타내는 것들이었다.
단순히 8경만을 열기한 것이 아니라 8경의 배경에는 송재 선생의 선비정신이 표출 되도록 시문을 붙였기에 제3자가 만약에 이 글을 읽을 경우 송재의 정신을 읽도록 한 것이다.
정도전의 유배지였던 작은 마을 거평동에 무슨 특별한 경관인 8경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보면, 또한 작자가 의미를 부여하면 8경으로 탄생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선 거평동 팔경의 전문을 보자.
<1景>낙산채순(落山採蓴)/낙산에서 순채 나물 캐기
고산일점명(孤山一點明)/외로운 산이 저 홀로 선명한데
백우양빙경(白雨漾氷莖)/소낙비가 고드름처럼 흔들거린다.
기대추풍지(豈待秋風至)/어찌 가을바람 불기까지 기다리는가.
계응선아행(季鷹先我行)/계응이 먼저 순채국 먹으로 고향 갔네.
<해설>
〇 계응(季應)은 장한(張翰)의 자임.
그가 낙양에서 벼슬살이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고향인 吳나라 땅의 순채국과 농어회 맛이 생각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곧장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〇氷莖은 水莖의 誤記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氷莖은 고드름으로 해석되고. 水莖은 물줄기로 해석되니 말이다.
원문 解讀과정에서 또는 移記과정에서 한번 誤記를 한 것이 원문인양 전해지는 것 같다.
백우양수경(白雨漾水莖)/소낙비가 흔들리는 물줄기 같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1연 2연의 문맥이 물 흐르듯 해진다.
나세찬공의 시 원문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景>학령청송(鶴嶺聽松)/학 고개에서 소나무 소리 듣기
구고독서처(九皐獨棲處)/아홉 구비 깊은 늪 홀로 사는 그곳에
수견취도래(誰遣翠濤來)/누가 푸른 물결(바람) 보내 왔나.
천한문갱원(天寒聞更遠)/임금이 차가우면 듣는 것 또한 머니
공예동량재(恐曳棟樑材)/동량의 재목인 나를 질질 끌고 갈까 두렵구나.
<해설>
〇구고(九皐)는 깊은 곳,
九重宮闕처럼 九重의 九는 깊은 곳에 있음을 강조한 것처럼
九臯도 아홉 구비 깊은 늪이라는 의미이다.
詩經에 학명우구곡(鶴鳴于九皐)/학이 아홉구비 깊은 늪에서 우니
성문우천(聲聞于天)/그 소리가 하늘에서 들리도다.
여기서는 居平을 九臯로 표현한 것이다.
〇翠濤(취도)는 직역하면 푸른 물결인데,
여기서는 학령청송 즉 소나무 소리를 예찬하는 글이니 원문의 글이 푸른 물결(翠濤)이 아니라 푸른 바람(翠0?)이 아닐까 생각된다.
원문 解讀 시 바람이란 글자 〇?을 濤로 본 것 같다.
〇天寒(천한)은 하늘이 추우면, 날씨가 차면, 추운 날씨, 추운 하늘,
의역하여서 임금이 차가우면, 차가운 임금이 아닐까.
〇棟樑材(동량재)는 동량의 재목인데, 여기서는 바로 나세찬 자신을 지칭한 것이다.
<3景>괴정사후(槐亭射帿)/느티나무 정자에서 활쏘기
녹영락조궁(綠影落雕弓)/푸른빛이 얼룩진 雕弓으로
공문증숙수(共聞曾熟手)/일찍이 익힌 솜씨 모두에게 자랑하네.
이장부일쟁(弛張付一爭)/활시위 당겼다 풀었다 한바탕 다투고 나서
입음사변주(立飮沙邊酒)/백사장 가에서 선채로 술잔을 기우리네.
<해설>
〇雕弓(조궁)은 아름다운 무늬를 새긴 활로 훌륭한 무장(武將)의 상징으로 쓰인다.
〇綠影落(녹영락)은 푸른빛이 얼룩진
〇共聞(공문)은 직역하면 모두에게 알리다,
의역하면 모두에게 자랑하다,
<4景>성천조어(城川釣魚)/성천에서 낚시질 하기
만풍취조사(晩風吹釣絲)/해질 무렵 바람이 낚시 줄에 부는데
방초입다시(芳草立多時)/물가에 향기로운 풀은 오랫동안 서 있구나.
득준우하대(得儁又何待)/큰 고기를 낚았는데 또 무엇을 기대하는가.
귀래횡류지(歸來橫柳枝)/돌아와 버드나무 가지에 비스듬히 걸어 놓았네.
<해설>
〇得儁(득준)은 큰 고기를 잡다, 살찐 고기를 잡다 라는 의미
<5景>남강심백(南岡尋栢)/남강에서 잣나무 찾기
독포후조조(獨抱後凋操)/시든 志操라도 홀로 보듬은 후부터
불수풍우망(不愁風雨忙)/비바람 몰아쳐도 근심을 하지 않네.
청청반소죽(靑靑伴踈竹)/푸르름이 성긴 대나무와 친구가 되니
고처숙란황(高處宿鸞凰)/고상한 곳에는 난새, 봉황새가 깃든다네.
<해설>
〇凋操(조조)는 시든 지조
〇남강(南岡)은 나주시 문평면 신호리 남산을 의미, 송재 자신의 출생 터
〇高處(고처)는 높은 곳, 고상한 곳,
여기서는 남강 즉 나세찬이 태어난 남산을 말한다.
<6景>용암망운(龍庵望雲)/용이 깃든 암자에서 구름 바라보기
신물염평지(神物厭平地)/용은 평지를 싫어하니
허운암상수(噓雲巖上水)/바위 위의 물에서 구름을 부는구나.
변화재수유(變化在須臾)/변화란 잠깐 동안에 생긴 것이니
창생망일기(蒼生望一起)/백성들도 한번쯤 일어나길 바라네.
<해설>
〇신물(神物) : 신령한 것. 용(龍)을 가리킴
<7景>사지상연(沙池賞蓮)/사지(연못 이름)의 연꽃 구경하기
태화수이종(太華誰移種)/태화산 봉우리 위의 玉井에서 누가 옮겨 심었기에
천연출수중(天然出水中)/천연스럽게 물속에서 얼굴 내밀었네.
무풍향자원(無風香自遠)/바람 없어도 향기 절로 멀리 가니
욕채사가궁(欲採思何窮)/꺾고 싶은 마음 어찌 그리 窮迫할까.
<해설>
〇太華(태화)는 중국의 큰 산 이름. 화산(華山).
한유(韓愈)의 〈고의(古意)〉에 “태화산 봉우리 위 옥정의 연꽃은, 꽃이 피면 너비가 열 길이요 뿌리는 배만큼 크다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 하였다.
〇窮迫(궁박)은 곤궁(困窮)함이 절박(切迫)함
<8景>막포귀범(幕浦歸帆)/막포의 돌아오는 배 풍경
방주춘수생(芳洲春水生)/ 아름다운 모래섬에 봄물이 불어나니
풍편일범경(風便一帆輕)/ 바람맞은 한 돛단배 가볍게 떠있구나.
야심롱명월(夜深弄明月)/ 밤이 깊도록 밝은 달을 희롱하니
흡득경중행(恰得鏡中行)/ 흡사 거울 속을 가는 듯 같네.
<해설>
〇幕浦는 古幕浦를 지칭,
어떤 시문은 모포(暮浦) 즉 해 저문 포구로 된 시구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임.
3. 거평동 8경에 담겨진 송재의 모습
선비들이 말년이든 정치 활동 중에 벼슬길에서 밀려나면 대체로 낙향하여 고향마을에서 은거하면서 살았다.
송재도 1536년경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진 듯하다.
38살의 피 끓는 나이에 정치판에서 밀려나 시골에 묻혀 있지만 머리 속에는 나라와 임금을 위하는 충심이 깊게 고여 있었다.
거평동 팔경은 송재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경치를 자신의 모습으로 표출해 내는 것들이다.
선비가 낙향하여 마음을 비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나물먹고 사는 모습이다.
선비정신에 걸 맞는 음식은 나물이다. 또한 시골 은둔생활의 소일거리가 나물 캐기이다. 손님이 찾아왔을 때에는 보리밥과 채 나물로 대접하고, 나물을 통해 자연과의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었으며, 정자를 벗 삼으며 풍류를 즐겼다.
더더욱 송재는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활 쏘는 것뿐만 아니라 활쏘기의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낙산(落山)에서 나물 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1경이요, 느티나무 정자에서 활을 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2경이다.
송재(松齋)는 나세찬의 호이다.
소나무 송(松)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라는 재계할 재(齋)이다.
재(齋)와 비슷한 제(齊/제나라 제)를 잘못 혼용하는 사례가 많다.
호는 본인의 성품을 표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송재는 평생 소나무, 잣나무를 좋아했고 그러한 모습으로 살았다.
송재는 올곧은 선비이다.
그가 책문을 통해 붕당을 조성하는 조정대신들에게 쓰디쓴 소리를 했다 하여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것이다.
산에 있는 상수리나무, 오수나무들이 송죽을 어지럽게 하고, 그러한 나무들 속에 소나무 시달리며 살아도 겨울이 되면 푸른 빛 잃지 않고 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좋아했다.
송재집에 실린 애병백부(哀病柏賦)는 “잣나무의 병들음을 슬퍼하다” 라는 뜻이니, 정치판에 밀려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잣나무에 빗대어 지은 글이다.
1519년 기묘사화 , 1521년 신사무옥으로 이어지는 사화로 선비들은 실의에 빠지었다. 기를 펴야 할 사림들이 위축되었고 훈구파들의 무모함과 행패가 만연하였다.
송재는 이런 세태를 탄식하고 좌절한 사림들을 병든 잣나무에 비유하여 쓴 시다. 잣나무가 지천으로 깔린 잡나무들의 시달림을 받아서 병들었지만 그 병이 곧 나아서 다시 푸르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학령(鶴嶺)의 소나무가 곧 송재 자신이요 송재의 소리 듣는 것이 3경이다.
남강(南岡) 즉 남산의 잣나무도 곧 자신이다. 그는 남산촌에서 태어난 것이다. 남산에 은둔하고 있는 자신을 찾는 것이 4경이다.
사지(沙池) 연못에 핀 연꽃도 자신을 의미한다.
자신은 바로 사시사철 변치 않은 소나무요, 잣나무이며, 흙탕물 진흙 속에서도 고개를 내밀어 꽃을 피우는 자라는 뜻이다.
상수리 같은 활엽수들이 온산을 덮고, 소나무를 괴롭혀도 겨울에는 소나무 홀로 우뚝 서 있다는 지조를 표출한 것이며, 붕당의 더러운 흙탕물 속에 빠져 있는 듯하지만 자신은 그 흙탕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서로운 꽃을 피워낸다는 뜻이니 이는 곧 충의 표출이다.
남강은 거평에 있는 남산(南山)을 의미하며 바로 송재가 태어난 곳 남산촌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깊은 곳, 내면에 사철 푸른 잣나무가 숨겨져 있으니 찾아보라는 말이다.
용암망운(龍庵望雲)의 용은 곧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깊은 산골 속 거평마을의 칩거하는 작은 집은 암자와 같다.
용이 구름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든지 승천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출사(出仕)를 준비하는 송재의 속심을 표출한 것이다.
용과 구름으로 자신의 호연지기를 마음껏 발산한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6경인 것이다.
성천조어(城川釣魚)는 주나라 때의 강태공을 비유한 것이다.
위수(渭水)에서 낚시질 하고 있던 강태공을 문왕(文王)이 큰 재목감으로 불려 들였던 옛 고사를 인용하여 송재 자신도 성천에서 낚시질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임금이 불러주기를 고대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물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7경이다.
마지막으로 막포귀범(幕浦歸帆)이다.
거평부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방향으로 고막천이 있다.
천이 있으니 포구가 있을 것이니 그곳이 바로 고막포(古幕浦)이다. 오늘날에 고막천의 석교(石橋/고막천 똑다리)가 보물 제1372호로 지정되어 있다.
4자 운을 맞추기 위해 고(古)를 생략하고 막포로 표현 한 것이다.
고막포로 돌아오는 배는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것은 자신을 불러주는 배가 서울로부터 오는 풍광을 그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제8경이다.
송재는 거평동 팔경을 가탁하여 자신의 모습을 시문으로 엮어낸 것이다. 거평동 팔경이 소상팔경처럼 거대한 경관(great scenic view)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자신의 모습을 8경으로 탄생 시킨 것이다.
거평동 8경은 곧 자신이요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4. 중종(中宗)이 다시 송재를 중용하다.
거평동 8경을 지은 이듬해 1536년 중시(重試)에서 장원하여 다시 관직에 들어간다.
그리고 중시(重試)대책에서 당시 권세가 김안로(金安老)를 “지록지간(指鹿之奸)”이라고 통렬히 배척하여 뼈와 살점이 떨어지는 고문을 받게 된다.
지록(指鹿)은 지록위마(指鹿爲馬)에서 찾을 수 있는데 즉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뜻이다.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을 뜻하며, 진나라의 조고(趙高)가 황제에게 사슴을 말이라 속이어 바친 일에서 유래한 말이다.
옥중에서 혈소(血疏)를 올려 죽음을 면하고 고성(固城)에 유배된다.
옥중에서 혈소를 쓸 수 있었던 용기와 염원도 거평동 팔경에서 팔경을 가탁하여 자신의 충심(忠心)을 자신에게 약속한 글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죽을 때까지 거평동 팔경은 좌우명이 되었으며, 자신의 가치관이 되었다.
거평동 팔경은 송재의 마음 안에 있었지, 마음밖에서 육신의 눈으로 보는 단순한 경치가 아니란 점을 간파할 수 있다.
1537년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를 폐하려 하다가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봉교(奉敎)로 기용되었고, 1538년 가을에 탁영시(擢英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문명을 떨침과 아울러 이로부터 수년간 병조정랑·병조좌랑, 홍문관의 수찬·교리·응교·전한, 사헌부의 지평·장령·집의, 사간원의 헌납, 시강원의 문학·필선·보덕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조참의로 특승(特陞)된 뒤 승정원동부승지·성균관대사성·판결사를 거쳐, 대사간으로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이 유관(柳灌) 등을 탄압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체직(遞職) 당하였다.
그 뒤 곧 대사헌이 되었지만, 권신(權臣) 이기(李芑)와의 알력으로 일시 면직되기도 하였다. 뒤에 한성우윤으로 문소전(文昭殿)에 인종을 부묘(祔廟)하려다가 전주부윤으로 좌천되어 재직 중 병으로 죽었다. 두 차례의 장원급제로 문명을 떨쳤으며, 권신을 서슴치 않고 탄핵하는 기개가 있었다.
송재의 문집은 7세손 나치경(羅致褧)이 유고(遺稿) 약간 편을 모아 편집하고, 8세손 나성오(羅星五)가 1777년에 11행 22자의 목활자로 처음 간행하였다.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의 저본은 1830년에 간행된 중간본을 1864년경 증보한 추각본(追刻本)이다. 본 문집은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권1은 시(詩)이다. 이 문집 속에 거평동 팔경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송재의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첨부> 송재유고집에서 따온 거평동 팔경 원문
孤山一點明。白雨漾氷莖。豈待秋風至。季鷹先我行。 右落山採蓴
九皐獨棲處。誰遣翠濤來。天寒聞更遠。恐曳棟樑材。 右鶴嶺聽松
綠影落雕弓。共聞曾熟手。弛張付一爭。立飮沙邊酒。 右槐亭射帿
晩風吹釣絲。芳草立多時。得雋又何待。歸來橫柳枝。 右城川釣魚
獨抱後凋操。不愁風雨忙。靑靑伴疏竹。高處宿鸞凰。 右南岡尋柏
神物厭平地。噓雲巖上水。變化在須臾。蒼生望一起。 右龍庵望雲
太華誰移種。天然出水中。無風香自遠。欲採思何窮。 右沙池賞蓮
芳洲春水生。風便一帆輕。夜深弄明月。恰得鏡中行。 右幕浦歸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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