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의 기전여중, 고에 근무하던 작가 최 명희의 글을 내가 그 때 만약 보았다면, 아마도 제목만 보고 그냥 덮어 놓았을 겁니다. 근무를 했다는 말은 정식 선생님이 아닌 서무과 직원이었습니다. 훗날 기전 여고를 방문을 하여 교장 선생님을 만나서 알아보니 필경사로 근무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 전북 대학을 나온 뒤 최명희는 모교의 교사로 임용됩니다.
이 때의 글은 아직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못가고 학교 서무과 직원으로 힘든 생활을 할 때의 글입니다. 더구나 이 글은 중 3시절의 일기를 원래대로 실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다소의 가필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소녀 최 명희의 글에서 좀 더 나이 먹어 쓴 글과 달리 풋내가 느껴집니다. 전북대 시절과 견주니 잘 닦여진 글 보다 여기 글이 풋풋하고 덜 다듬어진 맛이 있군요. 그러면서 혼불의 글맛처럼 여기 글도 맛깔스롭고, 그래요, 그래. 글맛이란 사람 사람마다의 글씨체처럼 젊어 한 때의 그 체가 노년까지 끌어오듯 작가 최명희의 글맛은 이때 벌써 농익은 맛갈스롬이 다정합니다. 그런 평을 작가 최명희가 어찌 생각하든, 세상에 나온 글은 이제 작가의 것이 아니며, 내 품을 벗어난 자식이니, 자, 이제 최명희 아가씨의 글을 보시고요.
꽃잎처럼 흘러간 나의 노래들
나의 중3시절
최 명 희
<현재 기전 여중고 근무>
1962년 7 월 27일
" 왜들 그렇게 태평세월인지 모르겠어요. 이제 은행나무 낙엽 지듯 우수수 할 거야. 졸업반이 왜 이 모양이죠?"최 선생님 말씀에 아이들은 와- 웃었다. 나는 유리창 밖으로 운동장을 내다보았다. 프라타나스가 싱싱하게 펄럭였다. 그런데, 그 많은 잎사귀 사이로 한 잎이 빙글 빙글 맴을 돌며 졌다. 나는 묘한 충격으로 골이 띠잉했다.칠월에 낙엽이 지다니-.남들은 그 푸른 생명으로 힘찬 여름 한나절에 왜 그 잎은 이미 시들어 갔을까. 왜 채 물들지 않은 철 이른 계절에 혼자만 이름 없이 죽어 갔을까…."자살했어. 나뭇잎이 자살한 거야. ""왜 그랬을까 ? "" 외로우니까-. "제법 심각한 정희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7월의 落葉.생각해보면 철학은 사소한 곳에서 바탕을 두고 있는지 모른다. 정희는 그 낙엽을 <자연의 궤도를 벗어난 문제아> 란다.
1962 년 12월 19 일
온통 교실이 크리스마스 캐럴과 카드로 들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멀리들 서로 흘러가야 한다는 서글픔 때문일까? 종일 웅성거리며 맘 잡지 못하고 서성대는 것은- ? 선생님의 종례 때 들고 오시는 카드 봉투는 거의 책 두께만큼 두꺼웠다. 그리고 졸업 기념 사인지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의 걸음걸이도 들떠 보이고. 온통 수런거린다. 울고 싶다. 욱이가 내게 <냉하>란다. 너하고 나하고만 알고, 우리 훗날에도 이 날을 기억하자면서 내 이름을 냉하라 지어준단다. 찰 냉 (冷)하고 물 하 (河) -.내가 그렇게 항상 얼어 있는 강물 같으냐고 하며 웃었다. 예쁜 이름이었다.
1963년 1월 22일
인간에게 언제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일 텐데, 왜 卒業이란그렇게 내가 사그라진 것처럼 슬픈 것일까. 내가 사랑하던 이 건물들과 그 아이들의 낭랑한 음성들은, 강물처럼 흘러가, 어디 만큼이나 멀리 흘러가 버리겠지. 제 나름의 생활을 업으며.
강당, 그 선생님이 탁구하시다가 전화를 받으러 뛰어 가시던, 항상 <그 선생님>을 생각 키우던 강당에서 나는 이제 이 학교를 떠납니다.…하고 졸업가를 불렀다. 눈물이 마음속으로 녹아 흐르며 자꾸만 음성이 떨려 왔다. 건물의 벽에 뺨을 대고 울고 싶었다. 내 이름을 내가 부르며, 밖에 흩날리는 눈발처럼 흩어져 갈 나의 좋은 동무들을 부르며 마구 울고 싶었다. 밖에는 발등이 덮일 만큼 눈이 내렸다. 다른 학교 보다 하루 앞당긴 졸업은 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 속으로 나를 몰고 갔다. 나는 교복을 여미며 밖으로 나왔다. 옥아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운동장의,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발을 보고 우리는 서로 싱긋 웃었다."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같이 걷는 거… 우리, 운동장을 가로 질러 갈까? 처녀지를 딛는 탐험가처럼 ? "내가 발을 막 발을 옮겨 놓자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조그만 종이를 풀었다." 네 선물이야. 졸업이라는 유치한 단어에 연관시키지 말고- . 그냥 눈 오는 날의 것이라고 하자. 너언- 흰색을 사랑했지 않니?"내 목에 하얀 머플러를 감아주었다. 나는 펄럭이는 머플러 자락과 눈빛과 조금씩 어두워지는 지붕들과 그 아래 그 토록이나 다정하게 번져오는 불빛을 보며, 나는 오래 오래 모든 것을 사랑하리라 생각했다. 그래-.네 말대로 졸업 같은 건 생각지 말고, 눈 오는 선물이라 하자. 어느 훗날, 내 무릎에 놓인 뜨개질 감을 놓고, 잠시 창 밖을 바라볼 때, 그 때쯤이면 나는, 꽃잎처럼 흘러 간 나의 작은 노래를 기억하겠지. 낡은 일기장 갈피, 묵은 편지들의 잊혀지지 않는 구절들로 나는 아주 많이 그날들이 그리워질 게다. 강물처럼 소리 내며 가슴을 흘러갈 그런 그리움들 말이다.
―-<전주 기전여자중고등학교 교지 (기전 제 8호) 1967/12 p132-133>----
정말 그립고도 따뜻한 글입니다. 그러면 같은 해, 1967년의 내 글은 이렇습니다.
캠 퍼 스 1 년
중앙대학교 경상대학 경영학과 2년
황 종 원
3월이 갔다. 3월이 온다. 3월과 3월 사이. 거기에다 뿌리 내린 색색의 의미가 하나하나 밀어로 기립되어 온다. 세월은 유려하다. 유려한 세월에도 묻혀 오는 한은 있다. 사각의 가슴이 덜 찼다는 이유로, 이렇게 가라앉은 오후에는 의 의미를 풀어 젖혀야만 했다.
생활의 방향…. 두 서넛의 가능성만이람 어떠냐. 희망이란 건조한 현실에서 청량음료 이상으로 쾌미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뒤를 옭는 좌절감이 추월하기 전까지는. 그만큼 상대적인 환희의 부재가 거드름 핀다. 그 부재가 회의를 몰고 온다. 고집해도 , 그래도 산고의 아픔을 위한 '엄마'의 잉태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이제 막…전공 서적에다 나의 묘혈을 파리라. 묵은 일력과 함께 뻗대던 과연 묘혈을 판 선언이렷다."부정적인 미래와 동거 해야 할 바래움이 시퉁하다. 덩달아 조숙한 의무감이, 나를 질식케 한다는 연유로 해서…"더구나 낭자군(娘子群)을 향해 포격하던 은 이제 와서 악취가 물씬댄다.
" 때로는 미워할 상대도 없다 하던 자조의 끝 조짐은? "여대생 제위에게 일말의 동정마저 당했다. 저들 끼리 새새대는 소리가 사뭇 귓바퀴를 가렵게 한다." 그치 말이야. 온통 잘못 제작된 상품인 모양이지. 그러기에 제 상대 하나 못 잡아 온통 갈라진 목소리를 하는 것 아니겠니? 달보고 짖는 개마저 제 짝이 있다잖아. "입 싼 그네들 뒤 켠 에서의 내가 인간 이하로 격하 된다. 해도 하나 밖에 없는 여벌 없는 입으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해야 한다.
( 그네들- C며, K야. 너희가 대신 들려주련? 찬란했던 어제의 연가를… "….콧등에다 내걸었던 문자 이 한 때는 거창했었다. 자조의 낱말이 혀끝에서 신랄하다는 자가 당착.바라보이는 미래는 공백 상태. 식성은 철 맞춰 음식을 갈아 삭인다. 미래에 응고된 시계가 제 자리를 지키라는 억지는 무모다. 아주 진지하게 미래의 현실에 팽창될 가능성 있는 자기 자신을 우롱했었다.
조물주의 권능을 차용 할까 나. 를 오늘 저녁쯤 색색으로 꾸미자꾸나. 일방통행중의 우정… 情은 온도계로 가늠 못 할 열을 의복인양 두른다. 골라서 끌려들고, 두껍게 묶이는 내 경우. 잔을 돌린다. 이윽고 술이 사람을 먹었을 때, 잽싸게 그는 두 몫을 치른다. 못 이기는 체 하며 나는 그것이 우정의 변형이라는 강요를 강제 당한다. 동양 군자는 은혜( ? )를 값지게 새겨야 하느니-.그에게 일편의 엽신을 답례 대신 삼았다.― 오랫동안의 무언이 有恨이다. 맘은 너에게 기우는 데 몸뚱이는 네가 있기에 너무 먼 거리를 돌며 어느 하루를 상실했다.
너를 찾아 가리라. 묵은 기억을 나누어 갖는 시간이 그립다. 기다려라. 나의 고뇌를 너의 환희와 맞바꾸러 가마. ?- 욘석아. 골고다의 성자가 코리아에서 부활했다니 ?요 놈, 유다야.싹수 노란 친구의 말이다.― 나 혼자 도맡던 실의까지 덧 붙여 주마. 알간? 무료로 희생 중이시다.―3월의 상큼한 감각이 떠돌고 있다. 나목에 꽃 샘 바람이 가지를 울리며 치달린다. 봄은 이제부터이다. 건강한 언어를 한 바리 가슴에 잇댄 체, 못 다한 한이 있대도 다음일랑 참자.웬지 내일을 기다린다. 기다려지는 내일을 두고두고 생각 키울랸다.곱게 가꾼 마음을 저 만큼 두고 보며, 오늘은 이렁저렁 살아야 한다.
----- <중댁신문 제 329호, 1967/03/23(목)p4-------------------
무슨 이야기인가요? 그 당시에 잘 쓰지 않던 한문 용어가 사슬처럼 힘에 겹군요. 글의 주제가 무엇인지. 사랑을 찾았으나 사랑은 없고, 공부를 한다 작정하고 그냥 세월이 부질없이 간다는 것이며, 친구를 만나도 늘 고독하다는 이야기군요. 최 명희 아가씨와 나와의 글이 아주 비교가 됩니다. 최양의 글은 물 흐르듯 가건만, 내 글을 숨이 가쁘고 생각이 여기 저기 뜁니다. 그러나 저마다 가슴에 담긴 감정은 왠지 쓸쓸한 그늘 입니다.
여기 글 가운데 최명희 아가씨 (가슴이 설레며 부끄러워지는군요. 마치, 그 세월에 미팅하는 기분입니다.)의 글은 아주 소중합니다.
내 글은 나에게만 소중하지만 작가 최 명희의 그 시절의 글은 모두에게 소중한 글입니다.
우리는 춘원 이 광수, 李箱 金海卿(김해경), 이 문열,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학교 때나 대학시절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망각의 여로에 나그네처럼 떠나갔을 이 글을 전해 주신 기전여고 교감 김 환생선생님께 새삼 감사드립니다.
MBC FM <여성시대> 방송작가 박금선씨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인연이란 알 수 없는 일이 박 금선씨와 내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애, 우등상이나 백일장에서 단 한 번의 상을 받은 일이 없는 나는 금년 4월에 MBC에서 있었던 '신춘편지쇼' 에서 ' 동상' 을 받는 기쁨을 준 분입니다. 시상식장인 용인 에버랜드에서 작은 몸매의 여인이 휴대 전화기를 들고 이리 저리 뛰면서 시상 대상자를 전화로 찾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보조 PD인가 했더랬지요. 그리고 잊었습니다.
그 뒤 9월에 다시 내 글이 방송을 타고(나는 그 방송을 못 들었고, 아직도 방송 테프를 받지 못했지만…), 나를 취재하자고 했을 때, 나는 행여 만날 장소에서 서로 못 볼까 내 옷차림을 말하려드니 박금선 씨는," 저는 알고 있어요. 지난 번 봄에 뵙잖아요." 해서 나는 깜짝 놀라며 나를 알 턱이 없는데….취재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그 이를 만났을 때 바로 그 꼬마 PD인줄 알았던 이가 방송 작가 박 금선 씨였답니다. 내 일생에 보통 사람이 가끔 재미 삼아 갖는 소원처럼 한 번 책에 내 글과 내 이야기가 나오고 싶었던 꿈을 꾸어보았답니다. 물론 교만한 욕심이지요. 탤런트도, 남에게 선행을 한 일도, 뛰어난 일을 한 일도 없는 시중의 사람이 무슨 일로 남이 알아주는 좋은 잡지나 신문에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박금선씨가 (혹은 여성시대 스탭이) 나를 ' 여성시대가 뽑은 10월의 이 사람'으로 뽑아서 잡지에 내준 것은 무슨 귀신에 씌어서 일 것입니다. 그 글은 보통 직장인의 평범한 반생으로 과연 10만부가 나가는 '여성시대' 독자들에게 무슨 감동을 줄 지 잔등에 소름이 돋습니다. 다른 한 편, 그 여성 시대 10월 호는 내게 희망과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작가 최명희 어린 시절의 글을 찾는데도 나는 10월 호를 써먹었답니다. 김환생 교감 선생님께" 여성 시대 10월 호에 나온 누구 입니다. "해서 괜스레 재는 듯이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교감 선생님께서 여성 시대를 보셨을 리는 없지요. 어찌 어찌해서 보시게 되면 (박금선씨가 책을 보내주시면 내가 보내드려서 보시겠지요.) 더 좋으련만…교감 선생님께서는" 아주 훌륭하십니다. "했을 때 아차 싶더라고요.
그리고 작가 최명희의 동생인 최선희 씨에게 작가에 대한 독자로서 흠모와 존경을 글을 띄우면서 나는 '여성 시대'를 보냈습니다. 최선희 씨가 내 글과 여성 시대를 보았을 때, 독자인 나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조금은 친밀감을 느꼈을까. 보성 여고를 방문했을 때, 내가 여성시대를 도서실 담당 선생님께 보여주자 선생님의 눈빛이 부드러워지니 내가 어찌 MBC방송 작가인 박 금선 씨에게 고맙다 하지 않으리까. 내가 ISO지도를 나가서 '여성 시대'를 주니, 그 회사 사장은 " 이렇게 훌륭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합디다. 사실 ,그 글에 내가 훌륭한 일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열심히 살았다는 말이면 몰라도….열심히 살아온 내 반생을 박금선 씨가 열심히 써주셨으니 그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박금선 씨는 작가 최 명희가 MBC에서 방송 작가로서 한 동안 근무했었다는 말을 해 주기까지 했답니다. 더 반가운 일은 내가 쓰는 작가 최명희에 대한 글을 매일 꾸준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KBS 방송 작가인 이 금림 씨는 작가 최 명희와 막역한 친구입니다. 같은 방송계의 사람들끼리 나보다 더 통할 겁니다. 전화 한 번해서 이금림 씨가 가지고 있는 학교 시절에 학생 최명희가 쓴 글이 실린 교지를 가지고 있는지 MBC 에서 작가 최명희가 방송 작가를 했다면 그 때가 언제인지 얻을 수 있을 지 한 번 물어보아 주십시오.
나는 작가 최명희가 이 세상에서 혼 불이 되어 떠났던 12월 11일까지 내가 구한 모든 글을 띄울 참입니다. 작가 최명희에 대한 독자로서 나름대로 남다른 감정을 정리할 생각입니다. MBC의 여성 시대 방송 시간에 남성들의 편지를 읽어주는 요일은 목요일이고 12월11일은 금요일 입니다. 남성시대의 주제가 생활에 지쳤지만 용기를 갖는 남자들의 이야기라지만 우리 모국어를 우리 앞에 너무 아름답게 보여준 한 여인의 자취를 찾아 나선 남성의 글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잘 났다 자랑이 아니고, 우리 모두 소중했던 사람을 아껴 달라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MBC 방송을 자주 탄 내 글이 그냥 다른 한 쪽에 밀릴까봐 마음 쓰입니다. 그러면서 금년 한 해, 내게 기쁨을 준 MBC가 내게 모교 같아 다른 방송국에 글 띄우기도 망설여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