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의 산맥체계가 대세를 굳혀가던 1906년까지도 '딴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다.
<최신고등대한지지(最新高等大韓地誌)>의 정연호 같은 이가 그랬다.
책에 "백두산이 국내 제산(諸山) 의 조종(祖宗) 이 되며
여기서 뻗은 남맥이 수천리를 남주(南走)하여 금강산, 오대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이 된다." 고 쓰고,
12명산을 중심으로 한 산줄기 경로나 산경표나 대동여지도와 유사한 그림을 실었다.
그 책은 물론 공식적인 사용이 절대 금지된, 학부(學部) 불인가도서가 되었다.
나라의 교육이 이미 통감부의 감시체제 하에 들어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딴소리 하는 책이 금서(禁書)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애국적 노력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조선광문회의 활동이다.
조선광문회는 "조선 구래(舊來)의 문헌, 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를 수집, 편찬, 개간(改刊)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전,
전포(傳布)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다.
즉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사라져가는 고유문화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써 고전간행사업을 택한 모임이다.
육당 최남선이 주축이 되어 1910년 결성하였다.
조선광문회는 맨 처음 <동국통감>과 <열하일기>를 발간했다.
<산경표>는 1913년 발간되었다.
지리서로는 <택리지>, <도리표> 다음 세 번째였다.
이 대목을 박용수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최남선이 발간을 계획했던 지리서는 모두 22권이다.
그 중에는 <아방강역고>, <동국지리지> 등 산경표보다 널리 알려져 있고,
저자가 분명하며, 문헌자료적 가치가 높은 책들도 많다.
그것들을 제치고 <산경표>가 서둘러 발간된 것은,
일제가 도입한 산맥 때문에 우리의 지리개념에 혼란이 오고 있다는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따라서, 그처럼 부당한 지리인식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었다.
비록 당시에는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더라도,
인쇄본 <산경표>는 물리적으로 산경표를 보존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것 아니었더라면 백두대간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므로 그렇다.
산경표가 문헌으로서 대접을 받은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일제가 물러가고 해방이 되었으나 산경표는 깨어나지 못했다.
지리교과서는 여전히 산맥을 싣고 산맥을 가르쳤으며, 학계에서는 산경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지리는 과학이다.
따라서 미국이 만들었건 일본이 강요했건 논리에 하자가 없고 필요한 것이라면 굳이 배척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산맥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 산맥의 분류체계 및 명칭의 변천사를 연구하기 위해,
고토 이후 오늘까지의 거의 모든 교과서를 검토했던 한 지리학도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고토의 연구결과를 오늘날까지 답습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의 연구가 전적으로 옳게 평가받아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교과서에 계속 형식적으로나마 실리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박민, 1996. <우리나라 산맥의 분류체계 및 명칭의 변천>,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한마디로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교과서는 일제의 그림을 옮겨싣기 바빴으며, 그것도 저자 임의로 이리 구불 저리 살짝 조금씩 바꿔 넣었다.
대학 교과서 3종이 각기 다른 산맥도를 싣고 있으며,
그걸 베낄 수밖에 없는 중등학교 검정 지리교과서 8종 또한 모두 다른 그림을 그려놓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척박한 풍토에서 백두대간이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기막힌 만남' 때문이다.
만남의 주인공은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라는 책과 이우형이라는 사람, 1980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