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129 號 Online Photo News
西 紀 2022 年 12 月 12日 月曜日
檀 記 4354 年 11 月 19日 己亥(기해)
compilation : 시나브로 李 福日 (鎔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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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영 교수의 페이스북 퍼온글입니다 / 시나브로 ♤🍎
오늘 내가 기쁜 두 번째 이유. 에 대한 얘기는 아주 여러 번 이곳, 페북에썼다.
6.25때 참전한 미군 장성. 그는 당시에 군수사령관이었다.
1952년 11월 27일,부산역 부근에 큰 불이 났다.
판잣집도 변변히 없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됐다.
입을 옷은커녕 먹을 것도없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열어 군용 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 일로 위 투컴 장군은 연방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 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한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것입니다"
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장군은 전쟁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고,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대통령한테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달라'라고 청했다.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러나 부산대 학생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이런사실을 거의 모른다.
그리고 장군은 메리놀 병원을세웠다. 병원 기금 마련을 위해 그는 갓에 도포를 걸치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라고 쑤근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전쟁 기간 틈틈이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이 전쟁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연유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구까지 찾아와 달라'라고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쭉길쭉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한테로 가져왔고, 한 여사 눈 유골 한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렇게 북한이 한 여사한테 갖다 준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사들이 것들이다.
한 여사는 한때 간첩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다.
남편만큼이나 강한 여성이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승을 떠났다.
UN공원에 묻혀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이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 씨도 장군과 합장되어있다.
이런 장군의 동상 하나가 없다. 이 땅에는 부산에도, 서울에도 없다.
전봉준 동상은 있어도 전태일 기념관은 있어도 그런데 오늘, 장군이 떠난 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자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 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 명,
1인당 1만 원씩 해서 일단 3억을 마련하기로 했다.
브라보!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한다.
오늘 그 첫 결의를 했다. 1만 원의 기적을 이루어보자.
70년 전 전쟁고아 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 원씩 내보자.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내보자.
1만 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 이 땅에 1만 원씩 낼 사람이 30만 명도 안 되지는않겠지?,
라고 생각하니 또 내 마음은 두둥실, 하늘을 날 것만다.
그리고 내일 대통령은 장군한테 무궁화 훈장을 더한다.
너 늦었지만 감사한 일이다. 이래저래 오늘 나는 기쁘다.
팝콘이 탁탁 터지듯이ㅓㅎ게 내 온몸의 세포들이 기쁨에 겨워 꿈틀거린다.
에스프레소 덕분인가? 까뮈 엑스오 덕분인가?
이제 나는 죽어도 한묘숙 여사를 만나 웃으며 두 손을 잡을 수 있게됐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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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이상용 님께서 보내주신 좋은 글을 공유합니다.
🍎迂直之計 (우직지계)
🤠 迂 : 돌아갈 우
🤩 直 : 곧을 직
🙏 之 : 의 지
💏 計 : 꾀 계
가까운 길을 곧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는 병법의 지혜로 《손자(孫子)》군쟁편(軍爭篇)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유명한 정치가 영이 제나라 왕, 경공을 모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사냥 지기가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부주의로 왕이 사냥한 사냥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 자리에서 사냥 지기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같이 사냥을 나갔던 주변의 신하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때 안영은 경공에게 직접 충고하지 않고 우회하는 전술인 "우직지계(迂直之計)"를 선택하였습니다.
안영은 사냥지기를 끌고 나오라고 해서 그에게 큰 소리로 세 가지 죄목으로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세 가지 죄를 범했다.
첫째, 너의 맡은 바 임무인 군주의 사냥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군주로 하여금 한낱 사냥감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했으니 부덕한 군주로 만든 것이다.
나아가 우리 군주가 사냥감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한낱 사냥감 때문에 사람을 죽인 군주라고 비난받게 만드는 것이 너의 세 번째 죄다.
네가 이러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안영이 사냥 지기를 추궁하는 말 중에는 우회하여 군주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사냥 지기를 죽이면 그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냥감 때문에 분노가 지나쳐서 사람을 죽이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냥 지기를 놓아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안영은 자신이 모시는 군주와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신하 된 도리를 다하고 자신의 주군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곧장 가는 직설화법보다는 돌려서 말하는 우회 화법이 더욱 지혜로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유난히 언변이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목소리가 부드러운 탓도 있지만 직설적이 아니라 우회적인 표현으로 본인의 의사전달은 물론 효과도 거둡니다.
물론 본인의 부단한 노력과 지적인 자산이 풍부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화법을 가리켜 담언미중(談言微中)이라고 합니다.
"완곡한 말로 정곡을 찌름이라는 뜻"입니다.
물을 유리컵에 담으면 마시는 물이 되고, 세숫대야에 담으면 씻는 물이 됩니다.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용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말에서는 말투가 그릇의 역할을 합니다.
말을 해도 어투가 퉁명스럽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지면 본인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듣는 사람은 마음이 상하거나 괜한 오해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왠지 모르게 호감이 생기거나 신뢰가 가는 사람은 말투가 좋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반대로 성격이 나쁠 것 같다거나 짜증을 잘 낼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은 말투가 안 좋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투란 사전적 의미로 "말을 하는 버릇이나 본새"를 의미합니다.
말투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보니 자신의 말투가 어떤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말투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경쟁력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직지계로 경쟁력있고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옮긴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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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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