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무상/ 인생무상, 이 이의근 전지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었는데,
김경홍기자 기자 / 입력 : 2009년 04월 26일(일) 17:31 공유 :
ⓒ 경북문화신문
“정치는 할 것이 못된다.", "사람이 살면 얼마를 사나. 서로 헐뜯고, 지지고 볶고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요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종종 듣는 얘기들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야 삶을 향유할 수 있고, 어우러짐의 조직체인 사회의 통로를 통해서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숙명적 현실 앞에 정치는 필수 일 수밖에 없다. 덧없는 것이 인생라고 하지만, 니힐리즘에 빠질 수 있는 자유가, 경쟁 시대의 중심에선 우리들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몸이 시리도록 아프지만 누울 권리조차 없는 존재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부부(가장)들이 아니던가.
최근들어 인생무상, 권력무상이라는 말이 예전보다 휠씬 많이 회자되고 있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들에게 그 무엇인가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인생하는 말을 곶잘 해대는 이들의 이면을 파고들면 그 중심에는 최근 들어 별세한 이의근 전 경북지사와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존재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이 지어내는 말이 곧 이 의근 전 경북지사를 염두해 둔 인생무상이요, 노무현 전대통령을 염두해 둔 권력무상이다.
인생이나 권력을 말할 때 세상은 종종 그 의미를 등산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을 살아가거나 권력을 향유하는 과정은 힘겹게 비탈을 오르내려 정상을 정복하는 이치와 같고, 인생을 하직하거나 권력의 향유를 끝내는 과정은 산정에서 내려올 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의근 전 지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산정을 바라보며 첫발을 떼어놓던 출발 시점, 이들에게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었다.
일제 말기인 1938년 11월7일 경북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에서 태어난 이 전지사는 지난 4월 21일 향년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61년을 시작으로 45년 동안 걸어온 공직의 길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기도 했다. 공직 기간 내내 그에게는 “바닥에서 출발. 결국 정상을 정복했다”는 영광스러운 별명이 따라 다녔다. 이등병으로 입대, 장군에 오르는 영광에 비유될 만큼 9급으로 출발한 그의 공직 이력이 휘황찬란함을 빗댄 표현이었다. 19778년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83년 내무부 행정과장, 86년,88년 경기도 부천시장, 안양시장, 89년에서 92년까지 내무부의 지역경제국장, 지방행정국장, 기획관리실장, 1993년 관선 경상북도지사, 94년 대통령 행정수석비서관, 95년부터 11년간 민선1.2.3기 경상북도지사가 이를 말해 준다. 그는 행정고시 출신도 넘나들기 힘들다는 산정을 정복했던 것이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맞대면 했던 것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 1994년 대통령 행정 수석비서관 시절이었다. 일년 후 실시되는 초대 민선 경북도지사 출마의 뜻을 갖고 있던 그는 경북지역 지역신문 협의회 주최 심포지움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를 방문했다. 행정수석비서관이라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직위에 있었지만, 이 전지사는 내내 그의 트레드마크인 입가의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았고, 안개 낀 장충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처럼 조용하면서도 뼈가 있는 그의 연설은 청중의 시점을 집중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로부터 11년의 민선지사 시절에도 이 전지사는 그 특유의 웃음과 육성을 잃지 않고 유지했으니, 그것이 바로 9급 공무원에서 출발해 소위 소통령에 비유되는 민선경북도지사 11년 재임이라는 힘의 근간이 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전지사와 함께 근무를 했던 은퇴 공무원들의 입을 빌리면 이 전지사는 민선 재임기간에도 종종 아픔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잠재되어 있던 몸의 병은 저물어가는 노을을 감상할 만큼 삶의 여유가 있을 때 찾아오는 법이다. 이를 반증하 듯 눈코뜰새 없는 민선지사직의 일정을 그만두자마자 이 전지사는 몸속에 꽈리를 틀고 있던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말단 공무원에서 청와대 행정수석 비서관, 관선 도지사, 3선 민선도지사에 이르기까지 공직생활 45년간 동안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표본을 남긴 그 였으나, 죽음 앞에는 황우장사도 방법이 없다는 삶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인생무상이 아닐수 없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며, 인생불 백년이요, 화무 십일홍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전지사는 퇴임 후 ‘히말리야 시다의 증언을 들으리라’는 자서전을 냈다. 히말리야 시다는 개잎갈 나무로 가로수나 학교, 관공서 등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수목이다. 이 전지사는, 그를 세상에 보낸 청도군 이서면 선영으로 영원히 돌아갔다. 하지만 영원과 함께 지천에 우거질 개잎갈 나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시간을 초월해 ‘히말리야 시다의 증언을 늘 말하리라’.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비운의 전직 대통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재로선 권력무상의 집합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빈약한 환경에서 출발, 산정을 정복한 이 의근 전지사 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세상 출발은 빈약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한 때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8·15해방 이듬해인 1946년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화마을에서 빈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입학금이 없어 외상 입학한 중학교 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3·15부정선거, 1960)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는 행사장에서 백지동맹을 선동하다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한 그는 기우는 가세를 버티지 못해 부산 상고를 마지막으로 학업의 길을 접어야 했다. 특히 그는 농협 시험에는 낙방했으나, 고교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 주변을 당혹케 하기도 했다.
건전한 도덕성, 민주화 지향, 인권옹호를 주창하던 그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다가 국회에 입성한 1980년대 ‘5공비리 조사특위’를 통해 당시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청문회 스타덤에 올랐다. 5공비리 조사 특위가 국민적인 최대 관심사가 될 무렵인 1988년 12월 31일 5공청문회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던지고, 고 정주영 현대 회장 앞에 눈물을 흘림으로서 정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노 전대통령의 청문 활동은 대통령이 되는데 주춧돌 역할을 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노 전대통령은 당시 기업가의 청렴과 지도자의 반민주, 부패를 해부하면서 국민적스타가 되었으나, 그는 지금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다. 과연 노 전대통령이 가족과 부인의 일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문제이지만, 건전한 도덕성과 청렴을 생명으로 하는 진보와 개혁 운동, 이 운동의 신봉자인 노 전대통령은 이미 가족과 측근들의 비리 연루로 도덕적 사망신고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손가락 물어 아프지 않은 자식이 없다고 할 만큼 자식은 부모의 신체 일부이며, 부부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합니다. 원칙을 바로 세워 신뢰사회를 만듭시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갑시다. 정직하고 성실한 대다수 국민이 보람을 느끼게 해드려야 합니다.”
2002년 국민을 향한 취임사를 앞세우고 대통령직 수행에 들어간 노 전대통령, 돌아보면 그만큼 외로운 대통령도 없었을 것이다.
선거법 위반 여부, 측근 비리, 경제 파탄등을 이유로 국회에서 역사상 최초의 탄핵의결을 받은 노 전대통령은 헌법 재판소가 기각 결정을 내릴 때까지 두달여 동안을 백의종군해야 했다. 기각 결정 후 이어진 총선에서 국민은 여당에게 과반이 넘는 국회의원을 탄생시켜주었다. 탄핵 기각의 역풍은 대단했다.당시 야당은 여당 국회의원들을 가리켜 ‘탄돌이’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우는 경제상황과 ‘대통령이라면 권위주의는 배제하더라도 권위는 갖추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될 만큼 잦은 발언’등은 그를 기대하던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실망의 근저에는 애증이 함께하고 있었다.
2008년 짤막한 퇴임사를 마치고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싣고, 귀향할 무렵만 하더라도 국민들은 평가는 후일에 맡기자는 여론을 만들어 냈다. 그만큼 사랑의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대하던 형의 구속을 시작으로 측근들이 줄줄이 철창으로 향하고, 아들과 부인까지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서 귀향 후 운영하던 사이트‘ 세상사는 사람’에 실리는 노 전대통령의 글도 점차 어둠을 향해 갔다.
“잃는 것 많은 정치하지 마라”-“사과드립니다”- “해명과 방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앞들을 돌려주세요”라는 제하의 글을 올리던 노 전대통령은 최근 ‘세상사는 사람’ 홈페이지를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올렸다.
“처음 형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설마’했습니다. ,,그러나 500만불, 100만불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도 도덕적 신뢰도 바닥이 나버렸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저는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전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상문 비서관이 ‘공금 횡령’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이제 저는 이 마당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제 제가 할 일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일입니다.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 마당에 이상 더 사건에 관한 글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
진보와 개혁운동의 생명은 도덕성과 청렴성이다. 이러한 바탕이 없이 진보와 개혁은 국민적인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청렴과 도덕성, 민주화를 정치적 가치관으로 내걸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고, 눈물을 보임으로서 정주영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던 1988년 12월 31일, 그 이후 세상은 그에게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9년 4월, 노무현 전대통령은 정치적, 도덕적 항복선언을 하고 검찰 소환을 기다려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권력무상이다. 국민들은 구속되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구속을 지켜보아야 했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권력무상을 체감해야 했다.
아름다움을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인생무상의 사례는 국민들에게 진한 감동과 함께 진지하게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국민에게 권력무상을 체감하게 한다면, 국가와 권력을 증오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 진취적, 개척적인 에너지를 갉아먹게 만든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다. 권력은 꽃이다. 만발한 꽃에게는 무수히 벌들이 날아들기 마련이다. 꽃으로 온전하게 살아남아 알찬 열매를 맺고 싶지만, 세상은 그러한 꽃의 희망을 수시로 무너뜨리려고 하는 법이다.
부부끼리도 살아 있을 때 서로를 알뜰하게 사랑해야 부부의 맛이 나는 법이다. 권력도 그렇다. 쥐고 있을 때 올바르게 권력을 휘둘러야 권력의 꽃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금오산 너머 봄은 무르익어 가는데, 한데 어울려 무르익지 못한 허망한 메아리들이 삶의 여로에서 고개를 숙여 걸어가고 있다. 다시 3년 후 이맘 때 이 나라에는 어떤 봄풍경이 펼쳐질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을 논할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역사화하는 것은 미래의 사람들의 몫이다.그날 역사는 오늘의 상황을 어떻게 기술할까.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