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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romantic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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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2006-2013 스크랩 한밤의 사진편지 제1857호 (원릉군(元均)과 서강(尹種榮)과의 만남-1 13/2/22/금)
함수곤 추천 0 조회 48 13.02.21 20:0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한밤의 사진편지 제1857호 (13/2/22/금)

함수곤의 블로그 '한밤의 사진편지'로 가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blog.daum.net/ham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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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fe.daum.net/hansamo9988 >

cafe.daum.net/hansamo9988

 

 

원릉군(元均)과 서강(尹種榮)과의 만남(1)

 

 

: 윤종영 (한사모 고문,  yooncy1936@hanmail.net)

 

 

 

: 2001292(716) 11

장소: 평택시 도일동 원릉군 사우 앞뜰

 

 

서강: 장군님과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 질 수 록 초조해 자꾸 주변을 살폈습니다. 혹 나오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어려운 자리에 시간 맞추어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장군님을 기다리면서 장군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하고 호칭을 무엇으로 할까 걱정을 했습니다. 원릉군(元陵君), 장군(將軍), 통제사(統制使), 절도사(節度使) 가운데 무엇으로 하시는 것이 좋은신지요

 

원릉군: 호를 서강(西江)이라구, 어떻든 아무도 찾지 않는 나를 불러 주어 고맙고 올해가 임진년으로 왜란이 일어난지 7주갑 되는 해이고 해서 옛일에 대해 간혹 생각을 하던 차에 나를 찾는 다고 해서 만사 제처 놓고 나왔지. 나오면서 서강에 대해 생각을 해보니 십수년전 서강이 쓴 이순신장군에 대한 글에 다른 사람과 달리 나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쓴 것을 본 기억이 난데다, 금년 4월엔가 나의 묘를 찾아 술잔을 놓고 나의 종손과 나에 대한이야기를 나누었던 일이 떠올라 정말 반가워 빠른 걸음으로 나왔지. 우선 나보다 4백여년 뒷사람이니 말은 놓겠네, 그리고 내 호칭 문제는 다 좋지만 굳이 택하라면 내가 세상에서 마지막한 벼슬인 통제사(統制使)로 불러주면 괜찮겠네.

 

서강: 저는 통제사님을 모시기로 하고 모시는 장소를 어디로 할 가, 몇 곳을 생각 하다 그래도 통제사님이 태어나시고 사당이 있는 이곳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괜찮으시지요. 아마 오늘이 통제사님 기일이고 해서 혹 번거러울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조용해 한시름 놓았습니다.

원릉군: 장소를 이곳으로 한 것은 나에게는 고마운 일이지. 날이 어둡지만 주변 산야의 윤곽 등이 내가 어려서 뛰놀던 때의 모습과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아 반갑기 한이 없구만, 내가 동네 개구쟁이들과 이곳 들판을 누비며 병정놀이 했던 생각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네. 오늘이 내 기일이라고 요사히는 기일에 제례지내는 일이 거의 없고 1년에 두어번 시제(時祭) 때나 제례를 지내구 해. 오늘은 참 잘 ?구만, 기일(忌日)날 외롭지 않게 서강과 술 한잔 하며 이런 저런 옛날 이야기 나 하며 지나게 되.

서강: 오늘 통제사님 기일이고해서 술과 약간의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술은 경기도 일동 양주장에서 가양주로 만든 오순주(五筍酒)라는 술인데 기호에 맞으실려는지, 먼저 술 한잔하시고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원릉군: 오순주라 서강도 들었겠지만 나는 원래 술은 청탁(淸濁)을 안가리고 두주불사(斗酒不辭)이지. 술은 많이 가져왔나. 우선 한잔 따르고 자네도 한잔하게

 

서강: 통제사님 정말 호풍스러우시네요. 옛글에서 보았던 장군님들 모습이십니다. 술은 한말정도 가져왔습니다. 그만하면 되겠죠. 술맛은 어떠하신지요.

 

원릉군: 술맛은 이만하면 ?네. 자네도 오늘은 허리띠 풀르고 실컷 마셔보세. 참 오랜만에 마셔보는 술이구먼.

 

서강: 통제사님, 술 드시면서 말씀하시죠. 제가 궁금한 것은 통제사님의 집안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통제사님 집안은 당시에 손꼽히는 무반가문(武班家門)으로 선친되시는 원준량(元俊良)님은 통제사님과 같이 병마절도사를 엮임하시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통제사님의 유년시절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릉군: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하라고 집안 자랑 같아 좀 그렇지만 이야기 함세. 우리본관이 원주(原州)인 것은 알겠고 우리집안은 고려건국공신으로 통합삼한공신병부령(統合三韓功臣兵部令)’을 엮임하신 원극유(元克猷) 라는 분을 시조로 모신 후손들로 고려조와 조선조에 걸쳐 주로 무반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지. 선조 분들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나의 바로 윗대 분들만 들어보면 나의 고조부는 군자감정(軍資監正:追贈)이신 원몽(元蒙)이시고 증조부는 병조참의(兵曹參議:追贈)이신 원숙정(元叔貞)이시고 조부는 호조참판(戶曹參判:追贈)이신 원임(元任)이시지. 그러고 나의 선친은 서강이 이야기한대로 나와 같은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시고 돌아가신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신 분으로 내가 평생 사표로 삼았던 분이시지.

 

나의 유년시절이라, 이 부근에 나의 옛집이 있었고 내가 이곳에서 경자(庚子:중종35:1540)년 정월달(15)에 태어났지. 이곳은 원주원씨 집성촌이었기에 한마을이 전부 친척 집안이어서 어려서 정말 재미있게 지냈지. 우리 집은 무반을 많이 배출한 집안인데다 나는 여덟형제 중 장남이었기에 부모님의 기대도 컸고 나의 선친은 자기의 뒤를 이어 무반으로 벼슬길에 나가도록 수시로 나를 일깨우셨서.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과거시함 무과를 생각하게 되었고 선친으로부터 많은 것을 익히고 배워가며 준비를 하였지. 그래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병정놀이를 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기도 하고 지금 보이는 건너편 산에서 달 밝은 밤에 혼자 산위에 올라 무술을 익히기도 하였서, 지금 저산을 보니 옛 생각이 많이 나는구먼.

 

서강: 저산을 보니 통제사님이 어려서 무술을 연마(鍊磨)하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습니다. 통제사님 그럼 과거시험은 언제 급제하셨는지요.

 

원릉군: 나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선친이 내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내 나이 15세 되던 해에 우리 집안이 한양 건천동(乾川洞)으로 이사했지. 나는 그곳에서 몇 차례 과거를 보다 내 나이 28세 되던 정묘(丁卯:1567}년 과거시험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합격했서.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

서강: 뒤에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건천동 이야기가 나와서 여쭈어 보겠습니다. 최근에 나오는 소설이나 글속에 통제사님이 건천동에 살 때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1545-1598)장군과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공과 이웃에 살아 어려서 병정놀이도 같이하고 가깝게 지낸 것으로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사실인지요.

 

원릉군: 황당한 이야기야. 내가 건천동으로 이사온 것이 15세 때인데 이때 이수사 나이가 10여세로 나와 나이차이도 많이 나 친구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해 이수사는 건천동에서 부모를 따라 외가인 아산으로 이사하였기에 나와는 만날 수가 없었지, 어떻든 나는 그를 만난 기억이 없어, 뒤에 함경도 군영에서 처음 만났고 그때 자기가 건천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해 그 뒤에는 그런 인연을 가진 것으로 기억했지. 서애공은 동네서 몇 번 만난 기억은 있지만 전혀 친교를 갖지 않았서.

 

서강: 과거에 급제하시고 벼슬길에 들어선 후 관직생활은 어떠하셨는지요. 특히 무장으로서 함경도에서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말씀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릉군: 과거에 급제한 후 몇몇 무직을 거쳐 선조 16(1583), 내 나이 43세때 거제현령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고을 수령이 되었다가 다음해 함경도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부임, 여진족과 국경을 접하며 이들과의 어려운 싸움을 하며 견디었서. 그러다가 여진족의 잦은 난동을 응징하기위해 조정에서 북병사 이일(北兵使 李鎰)장군에게 명하여 여진족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하였서. 그것이 유명한 시전부락(時錢部落) 정벌로 나도 여기에 참전하여 나름대로 한몫을 담당하였지, 지금도 그때 생각이 많이 나. 추운 정월 겨울밤, 꽁공얼은 두만강을 건너 날이 밝을 새벽에 시전부락을 기습하여 궁려(窮廬:여진족의 사는 장막) 200여채를 불태우고 여진족 380여급과 우마 수십필을 수확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초토화하였지, 이로서 북방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나도 이곳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부령부사, 종성부사를 거쳐 내 나이 52세되던 왜란이 일어난 선조 28(1592),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경상도 우수영으로 부임하였서. 어떻든 나에게 많은 것을 얻게 해주고 또 정이 들었던 함경도를 이때 떠난 후, 한번도 찾지 못하였서

 

서강: 선조실록에 보면 병조참의 조인득(兵曹參議 趙仁得)공이 어전(御前)에서 통제사님을 “---비록 만군이 앞에 있어도 돌진할 뜻이 있고--(--雖有萬軍 有橫突之意---)”라고 평하였는데 이것이 당시 통제사의 활약하신 것을 보고 한 말인지요.

 

원릉군: 내가 항상 부하들 앞에서 적진에 돌진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칭찬한 소리라 고맙긴한데 이 이야기로 나는 뒤에 많은 사람들로 부터 생각 없이 무모하게 적진에 돌격만 하는 만용(蠻勇)을 부리는 용장(勇將)이라는 평을 듣게 되 한편으로 서운하기도 했어.

 

서강: 지금도 세평이 통제사님하면 용장이라고 많이 평가하죠. 이에 대한 말씀은 차차 듣도록 하고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신 후, 왜란을 어느 정도 예견하셨는지, 예견하셨다면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요.

 

원릉군: 내가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것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달 전 이었서. 당시(1590) 왜국은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 정명가도(征明假道:명을 치러가는 길)을 요구해 전쟁에 대한 위험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왜란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 못했서 , 1. 2년 뒤쯤 일어나지 않을가, 그래서 나는 우선 나의 예하(隸下)의 포() ()을 장악하려 애를 썼지.

 

왜냐하면 서강은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당시 군사체계는 경상도의 경우, 수군은 절도사를 세 자리 두었는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하고 좌우절도사는 무반으로 보임하고 그 밑에 첨사(僉使), 우후(虞侯), 만호(萬戶)등의 무관을 두고 이중 첨사와 만호는 실질적인 병졸들을 거느리고 그 밑에 있는 포, (, )의 군권 및 행정권 사법권까지 행사하였지. 그렇지만 첨사와 만호는 관찰사의 통제를 받았고 또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기도 하였서. 그러다 보니 수군절도사의 경우 자기 관할지역의 휘하군의 지휘통솔을 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서. 그래서 나는 이들을 장악하는데 힘을 기우리고 있는데 전란이 일어 난 거지.

 

서강: 통제사님 말씀을 들으니 전란초기의 혼란했던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전란 초에 혼란상황은 이러한 지휘체계뿐 아니라 조선조의 병역제도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닌가요.

 

원릉군: 서강이 참 잘 보았서, 서강이 말한대로 당시에는 일종의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전시체제(戰時體制)일 때 징병하여 군대를 구성, 진관에 예속하는 진관체제(鎭管體制:각도마다 병영밑에 巨鎭을 두어 일종의 지역방위체제: 지금의 향토예비군과 유사)의 자전자수체제(自戰自守體制)였지. 그런데 오랜 평화시기와 국가기강이 문란해져 병사들의 소집이 거의 불가능했고 왜군의 침략소식을 듣고 주민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 산간으로 피난하여 왜군의 진격로에는 대부분지역이 공성허읍(空城虛邑)였으니 군대를 소집해도 응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었지, 참 가슴 아픈 일이었서.

 

서강: 통제사님 말씀을 들으니 북방의 용장이었던 이일(李鎰:1538-1601)장군 이야기가 떠오름니다. 이장군이 순변사(巡邊使)로 명받아 병조로부터 군대를 수백명 받았지만 실병력이 없어 3일나 기다렸다 거의 군관들 만 거느리고 남하하면서 길가에서 만나는 주민들을 소집해가며 상주까지 내려가 이들을 모아놓고 활 쏘는 훈련을 시키다 왜군 척후병의 기습을 받아 와해(瓦解), 대패(大敗)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통제사님도 알고 계신이야기죠.

 

그럼 전쟁초기 왜군의 근거지가 되었고 왜군 진격로의 중심이였던 경상도 상황은 어떻하였는지요, 임진왜란 초기의 이곳 상황은 초유사 김성일(招諭使 金誠一)공이 조정에 보고한 것을 보면“---경상좌수사 바홍(朴泓)은 화살한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동래로 도망하였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연로(年老)하고 겁이많아 시종 전투를 피했으며---”라고 실록에 기술되어 있는데 사실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원릉군: 이일장군 이야기는 내가 전쟁 중에 이장군으로부터 직접들었서, 전쟁초기에 이런 모습이 도처에서 목격되었지.

 

임진왜란 초전 상황은 김성일 공의 보고한 내용과 거의 비슷했서. 선조 25413(1592), 왜군 15000여명을 200여척의 함선이 부산에 쏟아내면서 왜란은 시작되었지. 이들은 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 부산포를 공략하여 이곳에서 부산진첨사 정발(鄭撥)장군의 저항을 받았으나 곧 이곳을 점령하고 부산에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하였고. 더욱이 이곳 해상방위 임무를 맡은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왜군 침략소식을 듣고 수영에 있던 군선과 군량을 모두 불태운 후 근왕(勤王)을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도망쳤지. 왜군은 곧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공은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에게 원병을 요청하고 동래성에서 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이각은 울산의 병영을 탈출하였다 뒤에 평양에서 도원수 김명원(都元帥 金命元)장군에 잡혀 처형되었지. 곧이어 왜군은 방향을 울산과 김해부로 나누어 공략하였서. 당시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나이가 74세 고령이어서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차례로 김해 창원이 왜병에 점령 당하였서 그러다 보니 경상도가 거의 왜적에게 함몰되었지.

 

서강: 당시상황을 통제사님으로부터 직접들으니 생생하고 긴장감이 느껴지네요. 정말 전쟁에 대한 준비 없이 기습당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럼 통제사님이 맡았던 경상우수영 이야기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좀 말씀드리기 거북하지만 당시 조정에 올라온 우수영에 대한 초유사 김성일공의 보고서를 보면 경상우수사 원균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아가 단지 배 한척만 보존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통제사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원릉군: 초유사의 보고서가 과장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맞는 점도 많은 것은 솔직히 인정하지. 내가 이야기하면 나의 변명 같아 좀 그렇지만 이야기함세. 먼저 이야기 한대로 내가 우수영에 부임한 것이 왜란 일어나기 2개월 전이야. 그래서 각 포 진에 대한 업무파악도 미진했고 장악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야. 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는 거제도 가배에 있는 우수영에서 경상좌수사 박홍장군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서, 그래 나는 우선 각 포 진에 대해 자체방위와 병력을 규합하여 우수영에 집합하도록 파발(擺撥)을 띄었서. 그리고 파발을 계속 보내 왜군이 접근해 오면 싸우다 후퇴할 때는 군용물품을 소각하라는 청야작전(淸野作戰)을 명하고 왜병의 침략사실을 조정에 관문(關文)을 띄어 보고 하고 인근 수영에 알려 대비케하였서. 그러면서 각포진의 함선이 수영(水營)에 모이기를 기다렸지.

 

그러나 옥포만호 이운룡(玉浦萬戶 李雲龍), 영등포만호 우치적(永登浦萬戶 禹致績), 남해현령 기효근(南海縣令 寄孝謹)만이 몇척의 함선을 가지고 우수영에 모였서, 우수영의 함선과 병력을 결집하여 함대를 구성하는 데 실패한 것이 지금생각해도 가슴이 아파, 정말 통탄할 일이지. 그래 나는 하는 수 없이 우수영을 노후 우응진(虞侯 禹應辰)에게 맡기고 휘하장군과 4척의군선을 이끌고 곤양 해구에 머물러 적을 지키며 비장 이영남(裨將 李英男)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에게 보내 원병을 요청했지. 그런데 전라좌수군을 기다리는 동안 각 포 진에서는 왜군이 접근해오자 함선을 깨트리고 관아를 불지르고 내륙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 초유사의 그런 보고서가 쓰여진 것이라 생각되. 어떻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내가 책임져야할 일이지. 그런데다 조정은 신립(申砬)장군의 주장에 따라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에 의한 수군무용론(水軍無用論)이 주류를 이루어 지방수장들이 이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것이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고 볼 수 있지. 나도 왜란 전에는 그런 군사전략에 공감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어.

 

서강: 저도 어느 사서(史書)에서 보니 임란이 일어난 그해 4월말 조정에서 패전을 거듭하는 육전에 집중하기 위해 수군 폐지령을 하달했고 이에 대해 이순신장군이 수군 존속의 필요성을 장계를 올렸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런 조정의 처사로 수군군영의 청야작전이 가증(加增)되었다고 보아도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겠죠. 다시 이야기 본론으로 들어가 통제사님의 원병 요청에 이순신장군은 언제 함대를 동원,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하시어 연합합대를 구성하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연합함대구성이후 왜군과의 전쟁과정을 간략하게 말씀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릉군: 내가 이영남 비장을 보내 이수사에게 원병을 요청했으나 쉽게 움직이지 않던 전라좌수군이 427일 조정의 명을 받고 54일 출동하였지. 나는 이수사의 내원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차 56, 당포에서 기다리던 전라좌수군을 만났지. 평소 이수사가 재주있는 지장(智將)임을 알고 있었지만 판옥선(板屋船) 24척과 협선(狹船), 포작선(鮑作船) 85척의 함대를 보고 놀랍고 마음 든든하였서 우리는 여기서 내 휘하의 판옥선 4척을 합쳐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이곳이 나의 관할인 경상도이기에 내가 지휘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전라좌수영군이 연합함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 지휘를 이수사에게 맡기고 나는 안내와 나의 휘하 함선과 선두에 섰지.

 

다음날 우리함대는 정오경 옥포 앞바다에서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斥候將 蛇渡僉使 金浣)이 보낸 적의 발견 소식을 듣고 옥포만으로 진입해 보니 30여척의 왜선들이 거제도와 옥포만일대를 약탈하던 중이었서. 우리함대가 왜함을 향해 돌격하자. 6척의 왜선이 우리와 맞서고 곧이어 다른 왜함들도 바다로 나와 우리를 향했으나 우리공격에 대부분 격파되어 이 해전에서 우리는 왜선 26척을 분멸(焚滅)하였지. 곧이어 우리함대는 합포에서, 다음날 고성의 적진포에서 왜선을 대파하였지. 이렇게 우리연합함대는 1차출전에서 왜란 발발이후 처음으로 왜함 44척을 분멸하는 대승첩을 거두고 우리함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몇 일 뒤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기 본영으로 귀항하였지.

 

나는 1차 출전이후 휴식하는 동안 군력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왜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중, 527일 왜함이 곤양 등지에 출현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전라좌.우수영에 급보를 보냈지. 급보를 받고 이수사는 곧 출항하여 529, 나와 노량에서 만나 연합함대를 구성했지. 이번 2차출전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全羅右水使 李億祺)수사가 합류하기로 했지만 늦게 출항하여 사천해전, 당포해전을 치른 후인 64, 25척함대를 이끌고 합류, 명실공히 경상, 전라 좌.우수영군의 연합함대가 구성되었고. 우리는 사기충천하여 뒤이어 당항포해전, 율포해전을 통해 11일동안 네차례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분멸하는 대전과를 올렸서. 610, 군장을 정비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전라 좌. 우수군은 본영으로 귀항하고 나는 경상도 해역을 초계하며 군비보강에 힘을 기우렸지.

 

 그런데 왜군은 남해에서의 거듭된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70여척의 함대를 구성, 서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연합함대의 3차출전을 결정하고 76일 출항, 노량에 모여 연합함대를 구성하였지. 연합함대는 왜함을 탐색하던 중 견내량 해역에서 왜함대와 마주쳤서. 우리는 왜함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 이곳에서 학익진(鶴翼陣)으로 왜함을 포위, 대대적인 섬멸전을 전개, 왜선 59척을 격파하고 왜병 4000여명을 수장시키는 대전과를 거두었고. 그리고 다음날 안골포에서 왜선 20여척을 분멸하였지, 정말 통쾌한 8일간의 해전이었고 이 해전을 통해 가덕도 이서(以西)의 남해 제해권을 완전 장악 해 왜적들의 임진왜란 기본 전략인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분쇄하는 대업을 이루웠지. 우리는 다시 만나기를 다짐하고 전라 좌.우수군은 각기 자기본영으로 회군하고 나는 이곳의 잔적소탕을 하며 경상도 해역을 다듬으며 임란의 최대승첩인 한산도 대첩을 마무리지었서. 3차출동이후 우리는 왜군의 우리땅의 교두보요 침략의 근거지인 부산을 공격하기로 하고 824, 연합함대를 구성, 부산으로 출동하였지, 우리는 91, 절영도를 돌아 부산포로 진격하였지. 이곳에는 왜선 500여척이 부두에 정박하고 있었고 우리는 이들을 장사진(長蛇陣)으로 열을 지어 포구로 돌진하며 공략하여 왜선 100여척을 분멸(焚滅), 왜적의 조선침략의 심장부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지.

 

서강: 남해에서의 연합함대가 이룩한 대 승첩은 절망에 빠졌던 조정의 분위기를 기사회생(起死回生)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 뒤에 불행이도 통제사님과 이순신장군과의 군공논쟁(軍功論爭)이라는 불화가 생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좀 말씀드리기 거북하지만 이것이 뒤에 많은 문제가 연계되어 있어 통제사님의 솔직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괜찮으신지요.

 

원릉군: 언젠가는 나도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니 가슴을 탁 터놓고 이야기 함세.

이수사와 내가 처음연합함대를 구성하고 출전하고 해전을 치른후 이를 조정에 장계(狀啓)할 때 나는 나의 관할(管轄)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내가 장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나 이수사의 전라좌수군이 함대의 주류를 이루었기에 두사람이 연명으로 장계하기로 했지.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 지휘관이란 부하들을 이끌어 전쟁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가장 큰 책무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 부하들의 공을 어떻게 잘 챙겨주느냐 하는 포상(褒賞)문제가 가장 기본이지.

 

그런데 두사람이 연명으로 장계(狀啓)를 올리다보니 자연히 병력에 다수를 차지한 이수사가 유리해 1차 출전에서 이수사는 가선대부(嘉善大夫:2)로 가자(加資)되었지, 그런데도 이수사는 자기 나름대로 불만이 있어 3차서부터 단독으로 장계를 올리었고 나도 단독으로 올리게 되었고 이것이 점차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지. 그러다보니 군공을 놓고 쟁공(爭功)하는 모습이 되었서. 그리고 한산도 대첩이후 이수사는 자헌대부(資憲大夫:2), 그리고 나와 이억기수사는 가선대부(嘉善大夫:2)에 가자되었고 부하들도 이와 비슷하게 포상을 받았서. 그러다가 나보다 나이도 어린 벼슬길에 후배인 이수사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어(1593,8,15) 나의 상관이 되니 정말 기분이 별로 편안하지가 않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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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2.21 22:13

    첫댓글 서강 윤종영 고문님의 작품을 잘 읽었습니다. 원균 통제사의 행적이 왜곡되어 얼마나 원통하셨을까요? 서강 선생님께서 풀어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동료 교사 원대식 선생이 억울해하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리 이창조 드림

  • 13.02.22 09:59

    서강 윤종영고문님 역사 이야기을 읽으며 많은 것을 익혔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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