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연관이미지카페의 풍경은 카페가 놓인 옛 빈의 카페 거리와 도시의 풍경을,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성정(性情)을 몹시도 닮는다. 카페 ‘플로르’나 ‘마고’에 있으면 파리와 파리지엔이 보이고 카페 ‘플로리안’에 들어서면 베네치아와 베네치아 사람들이 보인다.
오스트리아의 빈은 파리에 견줄 카페의 거리이며 빈 사람들은 대개 태어나면서부터 카페맨이다. 그들이 그만큼 유서 깊은 고도(古都)에 알맞은 한유(閑遊)와 사교를 즐기는 멋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빈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연 것은 16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음악의 도시 빈의 카페 문화는 원래 음악가들이 의해 뿌리내렸다.
커피를 좋아한 바흐의 작품에 〈커피 칸타타〉가 있다. 그 소품이 만들어진 1732년 무렵 유럽 여러 도시에 카페가 출현하였다. 처음에 카페를 즐긴 이들은 시인·작가, 특히 음악가와 연극배우 그리고 극장 관객이었다.
유럽 도시의 중심 광장에는 대개 오페라극장이 주위를 홀겨 보듯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시민의 사교와 교양의 열린 터전인 극장은 도시 문화와 도시 전체의 상징이기도 하다. 극장 주변에는 으레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빈의 국립 오페라극장과 그 정면의 카페 ‘모차르트’다. 빈을 무대로 한 영화 〈제3의 사나이〉에 등장하는 ‘모차르트’는 1794년에 문을 연 카페다. 모차르트를 비롯하여 베토벤, 슈베르트 모두 카페 단골이었는데 모차르트의 경우처럼 베토벤의 이름을 붙인 카페가 빈에는 여러 곳이 있다.
음악가나 미술가는 대개가 보헤미안이다. 그들을 본받아 음악과 미술 애호가 중에도 보헤미안이 많다. 그것이 음악의 도시 빈이나 미술의 도시 파리에서 특히 예부터 보헤미안들의 사랑방인 카페 문화가 꽃핀 이유다.
빈의 카페 문화는 19세기 중엽 이후 세기말에 절정에 올랐다. 세기말을 짙게 물들인 멜랑콜리한 정념이 사람들을 비(非)일상적인 시간이 흐르는 카페라는 비일상의 공간으로 몰고 간 것일까. 카페 문화를 멜랑콜리 문화라고 한다면 지금은 역사 저편의 추억이 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제의 세계’ 사람들에게 카페만큼 알맞는 공간이 또 어디에 있을까.
플로리안이나 파리의 프로코프가 17∼18세기 유럽 카페 역사의 제1세대라고 한다면 제2세대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전형적인 카페로는 빈의 ‘첸트랄(Central)’을 들 수 있다.
원래 19세기 중엽 빈의 카페를 대표한 것은 1847년에 문을 연 ‘그리엔슈타이들(Griensetidl)’이었다. 그곳에는 알텐베르크, 헤르만 발, 슈니츨러, 호프만스탈(귀재)로 불린 그는 당시 김나지움의 학생이었다) 등 빈의 세기말 문학을 대표하는 ‘청춘 빈파’가 단골로 상주하였으나 도시개혁으로 1897년에 헐리게 되었다. 이때 시인 카를 크라우스는 ‘헐고 해체되는 문학’이라는 추도문을 그리엔슈타이들에 바쳤다.
“빈은 지금 대도시가 되기 위해 파괴되고 있다. 옛집들과 더불어 우리의 추억인 마지막 받침이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명예로운 카페 그리엔슈타이들마저 제멋대로의 삶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우리의 문학은 집 없는 시대를 맞게 되고 시인들이 뽑아내던 창작의 실은 무자비하게 끊어진다. 앞으로도 문인들은 자기 집에서 즐거운 사교에 열을 올리리라. 그러나 문인으로서의 생활, 갖가지 초조함과 흥분에 따르는 문학이라는 업은 문학적 교류의 터전을 제공해 준 둘도 없이 소중했던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에서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너진 카페 밖으로 시인이 연행된 현실의 세계는 문학이라는 도락(道樂)의 토대를 부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젊은 문학은 어디로 가야 하나? 우리의 새로운 그리엔슈타이들은 어디인가!”
집을 잃은 유배자가 된 젊은 문인들은 곧 새 둥지를 찾아야 하였다. 그곳이 바로 카페 첸트랄이다.
1868년에 문을 연 카페 첸트랄. 장려한 바로크풍 건물들이 처마를 잇댄 ‘헤렌 가세(귀족의 거리)’에 자리잡은 첸트랄가의 일부를 차지한 건물은 오늘날에도 설계자의 이름을 따서 ‘페르스텔 팔레스’라고 불리는 당당한 귀족관이다. 문을 열기 바쁘게 들어서면 첸트랄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진을 치고 있던‘청춘 빈파’의 면면과 더불어 츠바이크, 웰페르, 웨디킨스 등 작가들과 화가 코코슈카, 부르크극장의 배우 등 당대 빈의 정신적 귀족들을 볼 수 있었다. 단골의 한 사람이던 포르거는 〈카페 첸트랄〉이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여기에서는 무기력이 그에 가장 알맞은 고유한 힘을 버티게 하고 불모의 열매가 익어 가고 모든 무소유가 이자를 낳고 있다. 카페 첸트랄은 빈의 위도(偉度)와 ‘고독의 자오선’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곳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 혼자 있기를 바라면서도 동료를 필요로 하고 인간에게 적의를 품으면서도 격하게 사람을 찾는 이들이다. 흡사 스위트 홈을 몹시 혐오하는 사람들의 스위트 홈이었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 기묘한 카페의 가장 고유한 매력을 공유한다.”
카페맨에 의한 카페 중의 가장 매혹적인 카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다. 세기말 빈의 카페맨 중의 카페맨은 단연 보헤미안작가 페터 알텐베르크였다. 그는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언제나 첸트랄에 앉아 있었다. 알텐베르크는 자기집 주소를 ‘빈 1구 카페 첸트랄’ 이라고 공언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한 동료 작가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카페의 한복판에서도 그의 눈에는 산골짜기의 일출(日出)과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그의 감성은 습관이나 관례에 아랑곳않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극단적이 되더라도 결코 정신의 빛을 잃는 일이 없었다… 야생아였던 그는 전적으로 자신이기 위해 살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살아 나갈 힘을 주었다. 그는 한가할 때 그는 언제나 한가하였지만 최대 최고의 시간을 누렸다.”
이러한 알텐베르크의 편린 속에서 우리는 이상적 카페만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다. ‘빈의 소크라테스’로 불리며 창부에게서 ‘맑은 것’을 본 알텐베르크는 자기 생활비를 누군가가 지출해 주는 것에 대해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많은 에피소드가 붙어다녔다. 그중에 그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 한 토막.
“한 달치 집세 15크로네를 대신 내준 어느 사나이가 ‘페터, 자네들 단골 테이블에 오늘밤 내 애인을 데려가도 좋은가? 자네들과 어울려 시야를 넓혔으면 하네.’ ‘시야를 넓힌다고? 15크로네로는 안 되네. 아무리 값싸더라도 월 25크로네는 되어야지. 15크로네로는 그녀는 계속 멍청이로 남을 걸세.’”
유럽과 미국의 최신 잡지 갖춘 문학카페
빈 시립공원 내에 있는 요한 스트라우스 상은 음악과 예술의 도시 빈의 대표적인 조각상이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중심가에 있는 슈테판 대성당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건축물이다. 카페 첸트랄도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세기말 빈 화단을 대표한 코코슈카가 1909년 첸트랄 안뜰에서 그린 알텐베르크의 초상화는 이 카페풍 보헤미안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빈의 카페에는 보통 당구대가 4, 5대 놓여 있으며 포커놀이에 열중하는 손님들도 자주 눈에 띈다. 첸트랄의 당구대에는 프로이트나 ‘이민자’로 위장하여 1907년부터 몇 해 동안 빈에서 망명의 나날을 보냈던 러시아의 트로츠키도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유럽에서 좋은 문학카페의 조건 중 하나는 신문, 잡지를 구비하는 것이다. 첸트랄에는 유럽과 미국의 문학과 예술에 관한 주요 잡지와 22개국에서 발행된 251종의 신문이 언제나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단골들은 만날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신문·잡지를 손에 들고 있었고 그것들을 처음부터 읽기 위해 카페를 찾는 이도 적지 않았다. 첸트랄의 명물 급사장인 프란츠는 단골들이 나타나면 먼저 그들의 애독지부터 갖다주었다. 그가 20년 만에 모습을 나타낸 옛날 단골에게 이전에 그가 애독하던 신문을 바로 갖다준 이야기는 두고두고 카페거리의 신화가 되었다.
빈의 카페에서는 귀족풍 실내장식이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귀부인들을 종종 보게 된다. 마이센 자기의 찻잔을 앞에 놓고 창 밖을 넘겨다 보는, 60대에 접어든 그녀들의 전아한 자태는 30, 40대 주하(朱夏)와 백추(白秋)의 화려했던 계절들을 추상하는 것일까. 일순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빈이라는 도시의 고전적 풍경 때문일까.
여생을 조용히 지내는 귀부인 같은 고풍스러운 도시 빈, 그 빈의 ‘태내, 시골집’ 이라 불린 첸트랄에 앉아 사람들은 세기말 유럽의 석양 빛과도 같은 찬란한 문학과 예술 및 사상에 출렁이고 정치, 사회, 경제의 암울한 소식에 심상치 않은 앞날을 예감했다.
카페 첸트랄에는 작가나 음악가, 미술가 이외에도 반유대주의자들과 시오니스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국수주의자들이 자주 출몰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좌절한 그림쟁이 히틀러도 종종 나타났다는 후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첸트랄, 카페 첸트랄은 음울한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바람개비이기도 하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주치는 왕궁과 극장 음악당, 고딕 성당과 미술관, 대리석 혹은 청동의 조상들, 그 밖의 많은 역사적 모뉴멘트로 메워진 빈의 거리거리에서 당당히 품위를 발산하는 빈의 카페들, 첸트랄 이외에도 헤렌호프, 무제움, 임페리얼, 슈페를, 모차르트 등 빈에는 카페의 역사에 오를 만할 카페가 50여 곳이나 된다고 한다. 이 카페들이 꽃피운 카페문화는 세기말의 시인, 작가, 음악가 및 화가들의 작품과 같이 바로 세기말 빈의 최고 작품이다.
슈니츨러와 호프만스탈의 작품에 말러와 클림트의 음악과 그림에 농밀하게 아로새겨진 에로스와 죽음이 교차된 세기말적 아름다움의 열락(悅樂)과 색음(色音)들, 그 모두는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의 800년 왕도 빈이 운명적으로 상징한 유럽의 ‘어제의 세계’가 그 황혼길에서 하늘 가득히 붉게 메운 찬란한 광망(光芒)이 아니었던가!
오스트리아제국의 소멸(1918)과 알텐베르크의 죽음(1919)은 카페 첸트랄의 슬픈 운명을 예고했다. 첸트랄의 단골 중 한 사람인, 극작가이며 역사가이자 배우였던 에곤 프리델은 1938년 나치가 가택 수색을 할 때 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은 바로 빈 카페문화의 죽음을 상징하였으니 첸트랄은 1940년에 문을 닫았다. 그 얼마 뒤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헤렌 거리와 슈트라오호 거리의 길모퉁이에서 폐쇄된 창을 통해 첸트랄이 울적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하품하고 있다.”
첸트랄은 히틀러 제3제국의 종말과 더불어 소생하였다. 오늘날 그 건물 정문 위에는 카페 첸트랄의 깃발이 지나온 역사를 상징하듯 나부끼며 우리를 맞는다. 그리고 홀 내부에 들어서면 신문을 쥔 손을 무릎에 댄 알텐베르크의 납인형상이 옛 친구들을 대하듯 멜랑콜리한 표정으로 원래(遠來)의 이 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홀 안 속삭이듯 퍼지는 그의 쉰 소리에 나도 따라 읊어 본다.
“고민이 있으면 카페로 가자/그녀가 이유도 없이 만나러 오지 않으면 카페로 가자/장화가 찢어지면 카페로 가자/월급이 400 크로네인데 500 크로네 쓰면 카페로 가자/바르고 얌전하게 살고 있는 자신이 용서되지 않으면 카페로 가자/좋은 사람을 찾지 못하면 카페로 가자/언제나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카페로 가자/사람을 경멸하지만 사람이 없어 견디지 못한다면 카페로 가자/이제 어디서도 외상을 안 해주면 카페로 가자
첫댓글 <카페의 한복판에서도 그의 눈에는 산골짜기의 일출(日出)과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그의 감성은 습관이나 관례에 아랑곳않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카페 문화를 즐기는 알텐베르크를 회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