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승 베드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1마카베오 2,15-29 루카 19,41-44
참된 사람의 길
‘사람’이셨던 예수님의 성격을 이따금 상상해보곤 합니다.
적어도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들을 통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성품이나 성격은
참으로 자유롭게 사셨던 분임을 금방 알 수 있을 듯싶습니다.
특히,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던,
똑 부러지는 성격이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너무도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악의 세력에는 단호히 저주를 퍼부으면서까지
거부하셨던 모습들을 봅니다.
성전에서의 장사치들을 쫓아내는 장면이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노라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악’을 싫어하셨는지 잘 드러납니다.
또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운명을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과 단죄의 말씀에 가깝습니다만,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을 통해 드러나듯
예루살렘의 운명을 너무도 안타까워하신
당신의 심경을 드러낸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 하느님이시지만 참된 사람이기도 하셨던
예수님을 예루살렘은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 이름이 의미하는 ‘평화의 길’을 가지 못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ㅡ 예수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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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훈 토마스 신부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1마카베오 2,15-29 루카 19,41-44
예전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굉장히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와 싸우고 나서 울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자주 울컥합니다. 강의를 할 때도,
영화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조용히 눈물을 훔칠 때가 많습니다.
‘눈물’은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전혀 다른 감정 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분노하거나 억울하고 안타까울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어쩌면 눈물의 의미는 ‘감동’과 ‘공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에 감동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공감해 주지 못할 때,
그리고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지 못할 때 억울해하며 눈물을 보입니다.
오늘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시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엿보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뻔한 결과를 그들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억울함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말씀과 사랑을
베푸셨지만, 그들은 변하지도 달라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또한 그들이 겪을 아픔에 대한 공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혼란에 빠져 얼마나 힘들어할지 걱정하고 아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안타까움에, 분노와 슬픔에,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눈물을 흘리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모습, 당신 뜻을 따라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흘리시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어떤 의미의 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ㅡ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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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1마카베오 2,15-29 루카 19,41-44
오늘 제1독서에서
마타티아스가 신앙을 지키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리아의 임금이 유다인들을 모질게 박해하자,
마타티아스를 중심으로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결의합니다.
그는 이교도 제단을 헐어 버리고 이교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려던 배교자 유다인까지 죽여 버립니다.
그러고는 무리를 이끌고 산으로 달아나 저항 운동을 시작하지요.
마타티아스 사후,
그의 아들인 마카베오가 성전을 되찾고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러고는 하느님께 충실할 때만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보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측하시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지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70년경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 폐허가 되고,
무수한 사람들이 학살당하지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지금은 무엇이 필요한 시기인지,
이 혼탁한 사회를 보시며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박한 문제는 많기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나부터 하느님의 뜻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ㅡ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