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아트플랫폼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해안동 1가 1-5)
1883년 항구를 개방한 후 인천항은 서구 문물이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아직도 인천항 곳곳에 수탈의 흔적이 남아있다
인천항은 차이나타운과 일본식 건물이 또렷한 경계를 이뤄 이채로운 풍경을 선보인다
중국인과 일본인 거주지의 경계가 되었던 계단 아래 '인천아트플랫폼'이 자리한다
구도심 재생사업을 통해 개항기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여러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전시 공간으로 삼고 있으며 인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인천시에서 주도하여 리모델링 하였으나 운영은 인천문화재단을 통해 민간에게 위탁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작가가 일정 기간 동안 입주하여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을 전시한다
입주 기간이 끝난 작가들 가운데 다수는 계속해서 인근에 작업 공간을 얻어 활동하기도 한다
♤ A 동
옛 군회조점의 사무실로 1902년 벽돌로 건축한 2층 건물이다
조점이란 운조점(運漕店)을 줄인말로 배로 물건을 나르는 조운업(漕運業)을 하는 가게란 뜻이다
군회조점은 쓰시마 출신의 코오리킨 자부로(郡金三郞)가 세운 해운회사이다
해방 이후 건물은 이러 저러한 용도로 바뀌어 사용되면서 애초의 용도가 잊혀졌으며 2000년대 초에는 당시까지 운영되었던 인쇄소의 이름을 따 삼우인쇄소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벽면에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 B 동
대한통운이 사용하던 창고를 개조한 것이다
대한통운 창고는 1948년 지어진 것으로 인천아트플랫폼이 착공되던 때까지 계속하여 창고로 사용되었다
전형적인 창고로 박공 지붕에 함석 슬레이트를 올렸다
지금은 입주 작가의 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C 동
C 동 역시 대한통운 창고로 목조 슬레이트 지붕을 한 창고이다
♤ D 동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이었던 건물이다
==> 일본우선주식회사 참조
♤ E F G 동
모두 1933년 지어진 창고 건물이다
한때 인천 지역예술가들의 “피카소 작업실”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입주 작가의 작업실과 게스트하우스로 쓰인다
피카소 작업실은 인천 지역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 공동으로 작업하던 공간이었으며 리모델링 후 현재의 인천아트플랫폼의 운영 방식에 영감을 주었다
♤ H 동
1943년 건축된 일본식 점포 건물이다
리모델링 당시에는 금마차 다방이 있었기 때문에 금마차 다방 건물로 불렸다
현재는 커뮤니티관과 인천생활문화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양쪽 벽을 벽돌로 쌓은 목조 2층 건물이었다
지금은 그 위로 유리를 덮어 씌웠다
♤ 지금의 중부경찰서에서 새롭게 개통한 신포역 까지의 부두는 1883년 개항 이래 '칠통마당'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 시계탑
광장에 선 시계탑을 자세히 보면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숫자가 독특하다
'1883, 1902' 등 특정 연도가 적혀 있다
1883년은 인천 '제물포항'이 문을 연 해이고,
1902년은 인천에 '해관 등대국'이 생긴 해이다
(팔미도등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다)
또 다른 역사적 사건으로 인천 제물포에서 무려 121명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절반은 인천 사람이었는데,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자들이다)
1950년은 인천상륙작전이 발생한 해이고,
2001년은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이 개관된 해이다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18번길 3, 해안동1가 9)
1883년 4월에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郵便汽船 三菱會社)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개설되었다
이후 1885년 10월에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와 공동운수회사가 합병되어 일본우선주식회사가 설립되자 1886년 7월 16일에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출장소는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1894년 2월 조선의 해운사인 '이운사' 위탁관리 (청일전쟁으로 일본군에 징발)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에서의 해운업무를 독점하기 시작한다
청일전쟁 당시(1894년~1895년) 일본해군 병참사령부로 사용되었으며, 러일전쟁 당시 (1904년~1905년) 병력과 물자 수송업무를 맡았다
해방 후 대한통운 창고, 대진상사, 동화실업주식 회사, 천신항업, 대흥공사 등과 같은 항만회사 건물로 사용되다가 2008년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는 인천 아트플랫폼 아카이브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1895년쯤 지어졌다고 생각되고 있었는 데, 2008년 리모델링 공사를 하던 중 천장에서 건축물의 연혁이 적힌 상량판이 발견되었다
상량판에는 이 건물의 상량이 올라간 시기가 메이지 21년 9월 18일이라고 적혀있었다
따라서 이 건물은 1888년 하반기에 건축되었다
(기타 1886년, 1895년, 1908년, 1933년설說 등이 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근대건축물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
♤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노란색 타일은 1970 ~ 80년대에 시공된 것이다
건물이 노후하면서 벽돌 틈으로 물이 쓰며들었기 때문에 방수 목적으로 시공했다는 견해와, 1984년 인천전국체전 당시 도시미화 사업으로 낡은 외벽을 가리기 위해 타일을 붙였다는 의견이 있다
대불호텔 터 (인천시 중구 신포로23번길 101, 중앙동 1가 18)
대불호텔은 일본인 조계지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일본 나가사키 출신 무역상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1883년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와 함께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하여 호리상회를 열고, 일본거류지 제12호 및 제24호의 부지를 경매로 임대 받아 업무용 건물과 주거용 가옥을 신축(1883년 말경)하고 서양인을 상대로 숙박업을 시작(1884년 초로 추정)하였다
사업이 잘 되어 수요가 급증해서인지 새로운 건물을 다시 짓게 되는데 188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888년에 웅장한 벽돌건물의 호텔이 완성된다
(기존의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인지? 기존 건물은 자신의 거처로 삼고 분할 등기한 땅에 신축을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처음에(경인선 철로가 생기기 전)는 인천항에 도착하거나, 출항을 하거나 서울까지 가기 전에는 하루를 이곳에서 머물게 되었기 때문에 아주 사업이 잘 되었다
그러나 경인선이 생기면서(1899년 개통) 제물포에서의 숙박이 필수조건이 되지 않게 되는 바람에 사양사업으로 전락을 하다가 결정적으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주 고객이었던 서양인들의 내왕이 줄어들면서 인천에서의 외국인에 대한 숙박업은 막을 내리게 된다
1918년, 이 건물은 중국인에게 넘어가 중화루라는 식당이 되어 일제시대 때에는 아주 잘 나가던 중국요리집이었지만, 1960년대 이후 청관거리가 차츰 폐허처럼 변해가는 것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경영난에 빠져 1970년대 초에 문을 닫았다
드디어 1978년 90년 풍상을 견디던 이 건물은 허무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문화재가 되기 전 재산권 유지를 위해 서둘러 건물주가 헐었다는 얘기도 있다)
1978년 건물이 철거될 때까지 중화루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지만 내부는 월세집으로 바뀌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대불호텔의 기물이나 중화루의 고급 가구들은 대부분 세입자들이 땔감으로 쓰거나 내다버렸다
대불호텔(중화루) 터는 건물이 헐리고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등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다가 2012년 5월 상가(중앙프라자) 건축을 위해 터파기를 하다가 지하에 의미있는 구조물(대불호텔 터임이 증명)이 발견되어 공사가 중단되고
2013년 인천시 중구에서 이 터를 매입하여 문화재청과 근대건축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을 통해 3층짜리 서양식 근대 건축물이던 옛 호텔외관을 그대로 재현하여
대불호텔 전시관(1관) 및
생활사 전시관(2관)으로 사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