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고랑포구 역사공원
고랑포구 표지석
제방 공사 중인
고랑포구
DMZ 평화의 길
안내도
평화의 길 중에서
연천 코스의
안내도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안군과
경순왕의 7세손인 태사공의
영단에 관한
안내문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안군과
경순왕의 7세손인 태사공의
영단
경순왕릉에 관한
안내문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문화재 지정일 : 1975년 6월 25일 사적으로 지정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의 능. 왕릉.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1,777㎡. 무덤봉분의 지름은 7m, 높이는 약 3m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 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長明燈)과 함께 그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서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릉의 주변에는 1986년에 건립된 재실과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의
능
경순왕(敬順王)
신라의 마지막 왕(재위 : 927~935년).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927년 후 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시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와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을 살피고, 군신 회의(群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으며, 왕건의 딸 낙랑 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政丞)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경순왕릉에 관한
안내문과 안내도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된
경순왕릉
경순왕릉의 능표
경순왕릉의 능표에 관한
안내문
2024년03월14일(목요일) 연천군 [고랑포구 역사공원&호로고루&고랑포구&경순왕릉&숭의전&연천당포성] 탐방기 탐방지 : 연천군 [고랑포구 역사공원&호로고루&고랑포구&경순왕릉&숭의전&연천당포성] 탐방코스: [고랑포구 버스 정류장~(171m)~고랑포구 역사공원~(1.5km)~연천 호로고루~(1.6km)~고랑포구~(552m)~연천 경순왕릉~(518m)~고랑포구 버스 정류장~(83번 버스를 타고 14.5km 이동)~백학면 행정복지센터~(6.9km)~숭의전~(2.4km)~연천 당포성~(437m)~당포성 버스 정류장] (총 28.578km 중 14.5km를 버스로 이동하고 14.078km를 도보로 이동) 탐방일 : 2024년03월14일(목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연천군 장남면 최저기온 영하 2도C, 최고기온 15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48분 소요) 06:53~09:14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동묘앞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의정부역으로 간 후 연천행 1호선 전철을 타고 전곡역으로 이동 [2시간21분 소요] 09:14~09:24 전곡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전곡재래시장으로 이동 09:24~11:30 전곡재래시장을 탐방 후 전곡재래시장 앞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고랑포구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83번 버스 승차 대기 [83번 버스 첫차06:30|막차19:40|배차간격190분] 11:30~12:19 83번 버스를 타고 전곡재래시장 앞 버스 정류장에서 고랑포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49분 소요] 12:19~12:22 고랑포구 버스 정류장에서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209 번지에 있는 고랑포구 역사공원(高浪浦口 歷史公園)으로 이동 12:22~12:46 고랑포구 역사공원(高浪浦口 歷史公園)을 관람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高浪浦口 歷史公園) 위치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270 고랑포구는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임진강을 통한 물자 교류 중심 역할을 하던 나루터이다. 1930년대 개성과 한성의 물자 교류를 통하여 화신 백화점의 분점이 자리 잡을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쇠락하였다. 또한 1.21 무장공비 침투 사태의 침투로로도 유명하다.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고랑포구의 역사와 지리적 특성을 생생하게 구현·재현하였다. 가상·증강현실을 통해 실감 나는 역사 및 안보 체험이 가능하며 아이들의 놀이공간과 다목적 공간(식사 장소 포함) 및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용시간 : 10:00~18:00 (입장마감 17:00) 쉬는 날 :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 문의 및 안내 : 031-835-2002 ] 12:46~13:13 걸어서 경기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7-1 번지에 있는 연천 호로고루(漣川 瓠蘆古壘)로 이동 13:13~13:28 연천2경인 연천 호로고루(漣川 瓠蘆古壘)를 탐방 [연천2경 : 임진강변에 쌓은 고구려군의 요새 연천 호로고루(漣川 瓠蘆古壘) 대한민국의 사적 제467호 1. 개요 2. 조사 내용 3. 역사 4. 관련 유적 5. 사적 제467호 1. 개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위치하는 고구려 보루. 사적 제467호.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여담으로 이름이 호로인데 임진강이 옛날에는 호로하(瓠瀘河)라고 불렸기 때문에 호로하에 있는 오래된 보루라는 뜻으로 호로고루라고 불리게 되었다. 2. 조사 내용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1990년대부터 2014년, 2016년에 걸쳐서 조사한 고구려의 보루이다. 평면 이등변삼각형의 구조를 띠고 있는데, 사실 성벽이라고 말할 만한 건 동벽 단 하나뿐이다. 나머지 북쪽과 남쪽의 벽은 임진강, 한탄강의 용암절벽 그대로를 성벽으로 삼아서 공력을 줄였다. 대체로 토축이 주된 성벽의 구성방식이지만 일부구간에는 외면에 석축으로 보강한 곳도 있다. 또한 토축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토축 가운데에 석축으로 심주를 둔 방법을 택하였다. 성 내부는 평탄한 지대로 감시초소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주혈건물지와 고구려 때의 생활의 흔적, 그리고 고려시대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고구려의 연화문 와당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장군총에서 나오는 와당부터 평양성에서 나오는 와당과 닮은 것이 많아서 호로고루의 중심적 운영연대는 역시 5세기대의 고구려 남진 정책의 산물로서 파악되고 있다. 고구려의 와당은 관아가 있는 건물에만 쓰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이 임진강, 한탄강 대치라인에서 호로고루가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추론하게 해주는 자료이다. 호로고루처럼 이등변삼각형의 평면형태를 보이는 보루들은 덕진산성(확인 要), 은대리성이 있다. 모두 와당이 나오는 거점 보루이다. 이 거점 보루들 간의 거리는 비교적 등간격이고 그 주변으로 더 작은 보루들이 임진강, 한탄강을 따라서 펼쳐져 있는데 농담이 아니라 거점보루를 대대본부, 작은 소형보루들은 작계 진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또 이 거점 보루들의 특징으로 도하(徒河), 도섭(徒涉)이 용이한 지점에 설치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지금 현재 고구려 보루들이 그러한 입지에 보루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주도권을 잡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전략적 입지선택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효과적으로 임진강, 한탄강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흙으로 만든 북이 출토되었다. 북 조각에는 '상고(相鼓)'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보이던 북으로 추정된다. 3. 역사 광개토대왕의 남진 사업과 그를 계승한 장수왕대의 남진은 475년 일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데까지 성공한 계획적인 진출이었다. 단계적으로 그 구분이 나뉘는데, 1. 황해도 일대의 점령, 2. 임진강·한탄강 유역 진출, 3. 양주 분지 진출, 4. 아차산 일대 진출, 5. 한성 공략의 과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 대의 남진으로 황해도 일대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황해도 일대에는 구월산성, 장수산성 등의 대규모 포곡식 산성을 건설하여 통치 거점으로 삼았다. 이를 발판으로 임진강 일대에 전선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이 임진강 일대의 보루군들은 그러한 과정의 증거이다. 임진강 권역 아래의 고구려 보루들은 모두 여기 임진강 유역의 거점 보루만큼 크지 않다. 되려 연천 무등리 보루처럼 비교적 소형인 형태로 주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현대의 군대 편제 마냥 사단 - 대대 - 중대 및 각급 소대 진지와 같은 구성으로 아차산까지 진출한 끝에 목표 대상인 풍납토성 및 몽촌토성을 점령한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다. 한편 이 고구려 보루들은 남진의 성공으로 필요가 없어진 뒤 몇몇 주요 거점들에 한해서만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었고 추후 신라 진흥왕대에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에 즈음하여 다시 대 신라 방어선으로 재활용된다. 지금도 임진강에는 고구려 산성과 신라 산성이 대치하는 구도 그대로 발굴되는 양상이다. 4. 관련 유적 남한의 고구려 관련 성곽 유적 남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은 산성과 고분군으로 나뉜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유적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남한엔 거의 없다고 보았었으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그 알려지게 되었다. 남한 내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의 편년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반경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역사적 맥락으로도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5. 사적 제467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연천 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효종 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도』 이며 이책에는 호로고루가 삼국시대의 유적임이 명시되어 있고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9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이다. 이 보고서에는 도면과 함께 사진을 싣고 있으며 삼국시대 성으로서의 중요성이 기술되어 있다. 그 후 1991년부터 2003년 사이 본격적인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의 형태는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의 수직단애 위에 있는 삼각형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성벽의 전체둘레는 성의 가장자리를 따라 재었을 때 약 400여m이고, 그중 남벽은 161.9m, 북벽은 146m이며, 동벽은 현재 남아있는 부분이 93m이고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성벽 최정상부는 30m 정도이다. 성벽 중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는 장대(將臺)가 설치되었으며, 성으로 진입하는 문지는 동벽 남쪽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호로고루는 연천당포성, 연천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임진강이 국경하천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이기환의 Hi-story](51)북한군과 고구려 기마병의 공통점, 연천 호로고루 주간경향 2024.01.01.~07. 글 :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지난 주말에 경기 연천 장남면 호로고루 주변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를 실컷 보고 돌아왔습니다. 6만송이의 해바라기밭에서 연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로 북적댔습니다. 오는 10월 4일까지 열리는 행사가 ‘통일바라기 축제’인데요. ‘해만 바라보고 돈다’는 해바라기를 따서 ‘통일바라기’, 즉 ‘통일을 바라는 축제’라 한 겁니다.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천이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니까, 판에 박힌 발상에서 ‘통일’ 자를 붙인 것이 아니냐고요. 해바라기와 통일바라기 축제 호로고루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호로고루(瓠瀘古壘)’, 그 이름부터가 낯설죠. ‘호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임진강의 구간 이름인 ‘호로하’에서 따왔고요. ‘고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옛 보루’를 뜻하죠. 보루가 있었다면 엄청난 요충지였겠네요. 임진강과 한탄강은 강원 평강 오리산·검불랑 등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하천인데요. 용암이 굳어져 생긴 현무암 지대를 따라 형성된 높이 10m가 넘는 두 강의 단애가 상류부터 끊임없이 펼쳐져 내려옵니다. 그중 두 강의 합류지점(연천 전곡 도감포), 칠중하(파주 적성 구간), 호로하(연천 장남면 구간) 등은 깎아지른 단애가 없고 수심마저 얕아 쉽게 건널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점입니다. 이중 호로하가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었습니다. 이 호로하에서 약 500m 하류 쪽으로 가면 한국전쟁 이전까지 번성했던 고랑포구가 있었습니다. 서해안에서 거슬러 올라온 조기·새우·소금 배들이 파주·연천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던 콩·땔감·곡물 등과 교역한 포구였죠. 그러니 고랑포~임진강 하류~서해안 구간은 수심이 깊어 사람이, 혹은 기마부대나 전차부대가 건널 수 없죠. 북한군의 남침로, 무장공비 침투로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문산이 아니라 20㎞나 우회한 곳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 임진강 구간이었습니다.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1·12사태 침투로가 이곳에서 멀지 않고요. 1974년 발견된 고랑포(제1) 땅굴도 8㎞가량 북동쪽에 있습니다. 장마철이 아니면 수심이 무릎까지밖에 올라가지 않는 곳이니 호로고루 부근을 침투로(남하로)로 삼은 겁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지형이 바뀌지 않은 이상 마찬가지였겠죠.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를 경영하려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충지였습니다. 호로하, 즉 호로고루 부근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린 백제의 영역이었을 겁니다. 최근 호로고루 인근의 파주 적성 육계토성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축조된 백제성이라는 발굴성과가 나왔는데요. 생긴 것도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닮아서 ‘리틀 풍납토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개풍 장학리(북한)~연천 횡산리~삼곶리~삼거리~우정리 1·2호분~동이리~학곡리 적석총 등 기원후 1~2세기에 축조된 백제 적석총이 8기나 확인됐습니다. 그러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부터 이 땅은 고구려 영역으로 바뀌죠.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396년(광개토대왕 5) 남침작전을 벌인 고구려가 58성 700촌을 빼앗고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奴客·신하)으로 삼은 뒤’ 돌아왔습니다. 고구려는 천자, 백제·신라는 제후?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되지 않았는데요.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백제 개로왕 21)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남침로도 바로 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그랬듯 호로고루 쪽이야말로 고구려 주력인 기마병 부대가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었을 테니까요. 고구려군은 이후 동두천~의정부~상계동 등을 거쳐 아차산에 이르렀고 한강을 건너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을 7일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을 겁니다. 그 루트를 따라 조성된 38곳의 고구려 보루 및 성이 고구려군의 남하 과정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이 고구려 성과 보루는 대부분 둘레 400m 안팎의 소규모인데요. 여기서 고구려의 점령지 통치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정관을 둬 점령지역을 다스리고, 조세를 받는 형식이 아니라 전진·후퇴의 루트만을 확보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으로 삼고 돌아왔다”는 ‘광개토대왕비문’이 눈에 띄는데요. 또 “475년 한성 함락 후 백제 문주왕(재위 475~477)이 신라가 보낸 원군 1만명과 함께 돌아와 보니 고구려군이 이미 물러갔다”는 <삼국사기> ‘문주왕’조도 주목거리입니다. 5세기 말에 작성된 충주 고구려비문에 “고려 태왕이 신라 매금(왕)과 (더불어) 세세토록 형제와 같이(如兄如弟)… 화합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5~6세기 전반 남진정책을 펼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노객’ 혹은 ‘형제국’으로 삼은 뒤 장기간 점령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이 심상치 않답니다. 이 때문에 만주벌판을 호령한 고구려가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백제·신라까지 조공국가, 즉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유력한 해석이 등장한 겁니다. 대식가였던 고구려군의 ‘짬밥’ 4세기 말까지 백제, 그리고 5~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리즈 시절’을 상징하던 임진강 유역은 553년(신라 진흥왕 14) 다시 격동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가 거침없이 북진합니다. 이때부터 임진강은 고구려-신라의 국경선으로 변합니다. 고구려는 강 북안에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 1·2보루 등 크고 작은 보루와 성을 고쳐 쌓거나 새로 구축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호로고루는 고구려의 최전방사령부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1998년 토지주택박물관의 정밀지표조사 결과 호로고루에서 고구려 기와 조각들이 대거 확인되면서 정식 조사가 시작됐는데요. 그 결과 임진강이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이뤄진 삼각형 형태의 천연 단애부에 접해 둘레 401m의 성벽을 조성한 사실을 확인했고요.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만 높게 성벽을 쌓았고요. 임진강, 즉 호로하에 면하는 곳은 30m의 절벽으로 곧장 이어지고, 북쪽 역시 40~60도가량 아찔한 급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벽만 막을 수 있다면 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요새로 기능했을 겁니다. 성 내부의 전체 규모는 2000평 정도 됐습니다. 이곳에서는 임진강·한강 유역의 40여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고구려 기와와 토기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심지어는 한성백제의 도성 체계에 있던 몽촌토성보다 많이 출토됐는데요. 그만큼 규모가 큰 건물이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2006년 확인된 지하보급창고에서도 흥미로운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소·말·개·사슴·멧돼지 등 6종의 동물뼈와 불에 탄 쌀·콩·조·팥 등 곡물들이 출토됐습니다. 1300g들이 밥공기도 나왔는데요. 요즘의 밥공기가 200g 정도 되니까 고구려 병사들은 엄청난 양의 ‘짬밥’을 먹은 겁니다. ‘흙으로 만든 북(鼓)’도 출토됐는데요. 적의 습격을 알리거나 아군의 진격을 독려할 때의 두들겼던 ‘변방의 북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호로고루와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무등산 보루에서 수백가마니에 달하는 탄화 곡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5~7세기 고구려군의 군량미 창고였습니다. 연구결과 고구려군이 먹은 쌀의 품종이 ‘인디카(Indica)’가 아니라 ‘자포니카(Japonica)’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인디카’는 지금 동남아 등지에서 먹고 있는 ‘메진’ 쌀이고, ‘자포니카’는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차진’ 쌀이죠. 5~7세기 고구려가 양질의 군량미를 군사들에게 제공할 만큼 부강한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저는 호로고루에만 가면 임진강 맞은편, 즉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성터를 바라보고 상념에 잠기곤 합니다. 그곳이 ‘이잔미성’인데요. 정식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일부 남아 있는 석축으로 미뤄보면 신라성일 가능성이 큰데요.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고구려-신라의 최전선 사령부였겠죠. 그렇다면 임진강은 삼국시대판 군사분계선, 혹은 휴전선이겠네요. 강 양쪽의 성에 주둔한 병사들은 어땠을까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지만, 때로는 “밥은 잘 먹었냐”, “고향 생각은 안 나냐”고 큰 소리로 소통하지는 않았을까요. 가끔은 그렇게라도 숨 막히는 대치국면을 풀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것 같습니다. 신라를 똥개 취급한 당나라 이와 같은 신라~고구려의 살얼음판 대치국면(553~660)은 백제 멸망(660)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고구려가 공격 목표가 되면서 혈전의 무대로 변하죠. 662년(문무왕 2) 정월의 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 ‘문무왕’조를 봅시다. 신라는 “보급품을 평양으로 보내라”는 당나라군의 요구에 따라 김유신 장군(595~673)의 지휘 아래 군량미를 운송합니다. 한 달 넘게 눈보라와 함께 강추위가 불어닥쳐 사람과 말이 얼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철군을 결정합니다. “철군하던 신라군이 호로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군이 쫓아와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기습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는 “이때 신라는 고구려군의 수급을 1만이나 베고, 5000명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이 치열한 전쟁터가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나라군의 과도한 요구가 계속됐습니다. ‘오라 가라’는 당나라군의 ‘똥개 취급’에 신라의 괴로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667년(문무왕 7)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위해 칠중성(호로고루 인근 성)을 막 함락시킬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당나라 사자가 달려와 “칠중성은 됐으니 빨리 평양성으로 군량미를 보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김이 빠진 신라군이 공격하다 말고 군사를 돌려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군량미를 싣고 진격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이 이미 철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장안(당나라 수도)으로 철군한 당나라군은 문책이 두려워 황제(고종·재위 649~683)에게 “신라가 군사를 늦게 보내는 바람에 철군했으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고해바쳤답니다. 문무왕과 신라 조정의 분노가 켜켜이 쌓여갔습니다.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에 전승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킨(668)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냅니다. 신라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임진강 호로하와 칠중하는 신라-당나라군의 격전지로 변합니다. 673년(문무왕 11) 5월 당나라 총관 이근행(?~682)이 호로하 서쪽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치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로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9월에는 신라군이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을 역시 호로하에서 격퇴했습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는 “호로하에서 왕봉(경기 고양)까지 치른 9차례의 전투에서 당나라군 2000여명의 목을 베었다”면서 “두 강에 빠져죽은 당나라군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 당나라를 내쫓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아본 호로고루에 해가 저물고 있었는데요. 해바라기밭을 앞에 두고 호로고루 위로 넘어가는 일몰과 붉은 노을을 찍으려는 카메라가 장사진을 치고 있더라고요. 예부터 호로고루 주변의 임진강 절경을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했거든요. “낚시터에 비치는 깊은 밤 고운 달빛(釣臺暮月)… 자미성(호로고루)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嵋城初月)… 저물녘 고랑포 선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石浦歸帆), 장단 석벽 좌우로 펼쳐지는 가을 단풍의 절경(赤壁丹楓), 경순왕릉에 비치는 저녁햇빛(羅陵落照)….” 호로고루라는 심상치 않은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심상치 않은 역사’의 사연을 한번쯤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통일바라기’라는 이름의 축제를 여는 뜻도 한번쯤 새겨 두기를….]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190] 연천 호로고루 기자명 강병찬 기자 대경일보 기사 입력일 : 2023.07.13. 한반도 중부에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임진강이 흐른다. 북한 땅 강원도 법동군 두류산 남사면 마식령 근처에서 발원한다. 휴전선을 거쳐 경기 파주시 문산읍에서 한강과 합류하고 서해로 흘러든다. 한강으로선 큰 지류다. ‘삼국사기’에 임진강은 ‘호로하’ 또는 ‘표하’로 기록돼 있다. 임진은 강의 하류에 붙어 있다는 뜻이다. 이에 우리말로는 ‘더덜나루’, ‘다달나루’라고도 불렸다. 삼국시대 이 강 가까운 고을이 고구려의 진임현 또는 오가홀이었다. 신라가 점령해 임진현으로 바꾸고 그대로 조선조에 이른다. 이 고을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군내면에 편입된다. 이후 오늘날 문산읍이 된다. 강의 이름이 임진현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임진강은 지형적 특성으로 5~7세기 삼국시대 세력다툼의 각축장이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고구려 남하에 대비한 백제와 신라로서는 한강이북 국경이었다. 그만큼 군사전략적 요충지였다. 지금도 남, 북간 경계선을 치달린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는 임진강 중류 마을이다. 이 마을 강변 북쪽 절벽(단애)위에 너른 삼각형 구릉이 있다. 그 위에 고구려 보루(일종의 성곽) 호로고루 터가 있다. 이름이 ‘호로’이고 ‘고루’는 ‘옛 보루’라는 뜻이다. 보루는 규모는 작지만 일종의 성곽이다. 또 다른 어원은 이 부근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忽) : 호로’와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합쳐져 됐다는 설이 있다. 주민들은 호로고루를 자미산 또는 재미성이라고 부른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 기록은 1670년(현종 11)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이다. 위치와 경계지점, 지형 설명 등이 담겨 있다. 특히 ‘삼국시대 군사가 주둔, 방어하던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 ‘경기읍지’에는 ‘당나라 장군 유인궤가 군대를 이끌고 호로하를 끊고 신라 칠중성을 공격한 곳이 바로 이 성이다’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지금도 호로고루는 개성과 서울을 잇는 길목이다. 호로고루는 자연스레 형성된 강과 절벽을 최대한 이용해 축조한 성이다. 노동력을 줄이고 외적 방어기능에만 충실한 것이다. 이 성은 임진강 북쪽 단애 위 평지에 있다. 성곽 형태는 북서쪽을 향하는 직각삼각형이다. 임진강은 전체적으로 한반도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호로고루에서는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른다. 강물이 남북을 오르내리며 흐르기 때문이다. 성 북쪽은 원당리에서 지류가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강과 하천 물살은 남북 모두 높은 수직단애와 직각삼각형 분지를 형성한다. 호로고루는 이 분지에 있다. 강물과 하천은 자연 방어망 해자이다. 물살이 깎아낸 절벽은 천혜의 성벽이 된다. 규모는 둘레 400여m 남쪽 성벽(=절벽) 160여m 북쪽 성벽 140여m 규모다. 면적은 600여㎡다. 강변 쪽 절벽 높이는 10여m로 짐작된다. 인공 축조 성벽은 직각삼각형 밑변격인 동쪽에만 높게 쌓았다. 토축을 쌓고 밖에 석축을 보강했다.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방식이다. 중국 집안 국내성과 평양 대성산성처럼 견고하다. 지금도 길이 90여m 높이 20m 가량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다. 얼핏 보면 마치 큰 언덕처럼 보인다. 성벽 정상부 강변방향 끝 지점에 장대 터이다. 장대는 직각삼각형 북서쪽 끝 지점에도 두었다. 지금은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세운 망향단이 있다. 성문 터는 동쪽 성벽 끝과 강변 수직절벽이 만나는 지점으로 추정된다. 이곳 이외 성문 역할을 한 곳은 찾을 길이 없다. 토축 바깥 성벽은 현무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아올렸다. 이 일대는 화산폭발지형으로 현무암이 많다. 석축은 대체로 각진 부분이 없다. 전반적으로 곡선으로 처리했다. 위로 쌓아 갈수록 고구려의 전형적인 축성방식 들여쌓기가 확인된다. 성안 평지는 트인 이곳으로만 드나들 수 있다. 성안에는 집수정 터가 발굴됐다. 강을 끼고 있지만 식수원 확보는 필수불가결 했던 것이다. 동쪽 성벽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수직절벽이 이어진다. 절벽 위에 사람 무릎 높이에 폭 1∼2m의 성벽이 이어진다. 이곳은 성 터 밖이다. 그러나 호시탐탐 적은 성벽을 바로 공격하지 않고 우회도 획책했을 것이다. 성 밖에서 강을 건너 기어오르는 적을 무찌르던 성벽 위 여장이 아닌가 싶다.] [호로고루 해바라기축제 호로고루에서는 매년 9월 중순부터 10월까지 해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호로고루의 성벽을 따라 조성된 3만3000㎡의 부지에 6만 송이의 해바라기가 장관을 이룬다. 인근에 코스모스 꽃의 향연도 펼쳐져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코스모스는 해바라기보다 약 1~2주 늦게 피기 때문에, 9월 중순에서 하순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호로고루에서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경도 감상할 수 있어서, 해바라기 축제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연천의 대표 축제가 되었다.] 13:28~13:46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고랑포구로 이동 [고랑포구(高浪浦口)는 임진강을 통해 내륙과 서해안 바닷길을 연결하는 나루터로 그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고랑진이라고 불렀고 조선시대 말에는 바다와 내륙의 물산이 집결하는 중요한 항구로 역할했다. 고랑포 물길은 깊이가 얕아지면서 서해안에서 올라오는 수운의 종점이었으며, 화신백화점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고랑포에는 경기북부에서 큰 규모의 소시장이 있었고 여관, 우체국, 유치원 등이 들어섰다. 서울과 개성을 오가는 물산의 길목이자 시장으로 역할했지만 해방 후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군사접경지역이 되면서 나루터와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사라지게 되었다.] 13:46~13:54 경기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288 번지에 있는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으로 이동 13:54~14:06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을 탐방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문화재 지정일 : 1975년 6월 25일 사적으로 지정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의 능. 왕릉.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1,777㎡. 무덤봉분의 지름은 7m, 높이는 약 3m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 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長明燈)과 함께 그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서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릉의 주변에는 1986년에 건립된 재실과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경순왕(敬順王) 신라의 마지막 왕(재위 : 927~935년).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927년 후 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시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와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을 살피고, 군신 회의(群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으며, 왕건의 딸 낙랑 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政丞)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14:06~14:12 고랑포구 버스 정류장으로 회귀 14:12~15:00 고랑포구 버스 정류장에서 백학면 행정복지센터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83번 버스 승차 대기 15:00~15:24 83번 버스를 타고 고랑포구 버스 정류장에서 백학면 행정복지센터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4분 소요] 15:24~17:05 걸어서 백학면 행정복지센터 버스 정류장에서 연천8경으로서 고려의 종묘라 불리는 연천 숭의전지로 이동 17:05~17:18 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 번지에 있는 숭의전지를 탐방 [연천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 유;洪 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 희;徐 凞, 강감찬;姜邯贊, 윤 관;尹 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 충;趙 冲, 김방경;金方慶, 안 우;安 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총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였으며, 이를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에 의하면 1899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 [패망한 고려 왕조의 종묘가 왜 이곳에? 글 : 박성호 기자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21. 6. 17. [연천여행 2편] 숭의전지에 가다.. 코로나 시대의 여행은 역사 이해를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여행 중에 어떤 유적들을 만날 때면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의 역사를 들춰보게 된다. 나와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 어떤 교감도 없지만 지금의 나 혹은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오월 초순 연천 여행을 다녀와서 지난 기사에 소개했던 고구려 시대 성인 '당포성'이나 한반도의 지질학적 역사를 보여주던 '임진강 주상절리'도 그러했고 이번 기사에서 소개할 고려 왕조의 종묘격인 '숭의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종묘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 어떤 방문자들은 한줌의 기억 거리도 가져가지 못하겠지만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 역사를 조금 안다면 숭의전은 진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초라하지만 의미 있는 유적지 '숭의전지' 당포성에서 임진강 하류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절벽 위에 비운의 왕국 고려의 종묘격인 숭의전(연천군 미산면)이 자리하고 있다. 숭의전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임금이 물을 마신 곳임을 의미하는 어수정은 사실 한반도 여러 곳에 있다. 동두천 어수정은 조선 태조가, 여주는 단종이, 그리고 이곳 연천은 고려 왕건이 물을 마신 곳이다. 한반도에 어수정이 몇 개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수정에서 걸어서 백여 미터만 올라가면 돌담으로 구분된 3개 구역에 잘 보존된 한옥 다섯 동이 나타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조의 종묘라고 하기엔 너무 보잘 것 없는 규모와 시설이다. 왼쪽부터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패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동안 머무는 앙암재(仰巖齋, 재실)가 있고, 담장 너무 바로 옆에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들이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전사청은 원래 조선시대 나라 제사와 증시(贈諡) 등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전사관(典祀官)이 배치되어 제사에 소홀함이 없도록 관리를 하는 관청이다. 조선 정부가 패망한 고려의 종묘를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 태조 왕건과 세 왕의 위폐가 모셔진 숭의전(崇義殿), 숭의전의 위폐를 잠시 모셔 두었다는 이안청(移安廳), ㄱ자로 건물 배열이 바뀌는 자리에 고려 공신 16인의 위폐가 모셔진 배신청(陪臣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태조(이성계)가 1397년(태조 6년)에 고려 태조(왕건)의 사당을 이곳에 지었고 이후 고려의 네 임금을 모시는 사당 즉 고려의 종묘가 되었다는 단편적인 상식을 가진 채 접한 숭의전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패망한 고려의 일부 왕족과 대신들이 왕건의 신위를 돌로 만든 배에 실어 개성 인근 예성강으로 나갔다고 한다.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날이 저물어 배를 묶어 놓고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배를 묶은 쇠줄은 다 썩어 없어지고 배도 사라져 버렸다. 강을 이 잡듯이 뒤지다 결국 지금의 숭의전 자리인 임진강 잠두봉 아래에서 배를 찾게 되고 그리하여 이곳에 신위를 모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 아무래도 자신의 왕조를 멸망시킨 이씨가 만들어준 숭의전에 대해 못마땅했던 일부 왕씨들이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재실 '앙암재'라는 명칭에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태조 왕건의 명복을 빌던 원찰(願刹) '앙암사(仰巖寺)'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기에 조선 태조가 이곳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정종 1년에 왕건을 포함하여 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경왕)·충렬왕·공민왕까지 여덟 왕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세종과 문종 때 중건을 했다. 숭의전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고려 공신 16인의 위패를 함께 모신 것도, 충청도에서 왕씨 성을 가진 후손 왕순례를 찾아 부사라는 벼슬을 주어 이곳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게 한 것도 문종이었다고 한다. 조심스레 숭의전의 돌계단을 올라 안을 보니 태조(왕건)의 영정과 위패는 정면에, 다른 세분의 위패는 좌우에 모셔져 있다. 세종 7년 당시 아직은 건국 초기여서 조선의 종묘엔 네 분의 왕(아마 태조의 부친과 태조, 정종, 태종)만 모셔져 있는데 고려 종묘에 여덟 왕을 모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란이 일어 이때부터 태조와 현종, 문종, 원종으로 축소했다고 한다. 좌우간 패망한 고려 왕조의 종묘가 이곳에 만들어지고 지켜지게 된 사연이 단순하지는 않아 보인다. 배신청에는 정몽주, 강감찬 등 개국 공신이거나 아니면 홍건적 등 전란의 위기에서 고려를 지킨 인물들이 모셔져 있다. 개국 공신뿐만 아니라 고려 말기 인물까지 고루 분포시킨 걸로 봐서, 조선 조정이 숭의전의 고려 종묘 기능은 제한했지만 공신을 기리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원봉사하시는 여성분이 정전 앞 가운데 돌계단은 사용하지 않는 계단이며 마당에서 숭의전으로 오를 때는 우측으로, 참배를 하고 내려올 때는 좌측 계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설명을 해주신다. 발을 옮길 때도 왼발과 오른 발을 번갈아 움직이지 않고 오른 발이 디딘 단을 왼발이 따라 디디는 식이어야 한단다. 세 개의 문으로 구성된 삼문도 가운데는 혼이 드나드는 문일 뿐 산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며, 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동입서출(東入西出) 원칙에 따라 밖에서 보아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삼문으로 나와 임진강 쪽으로 나서면 벼랑 위에 향토문화제로 지정된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오백년이 넘는 범상치 않은 나무들이다. 문종이 숭의전을 중건하던 1452년에 왕씨의 후손이 심었다고 하는데 전사청의 부사로 임명된 왕순례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안내판에는 느티나무에서 '웅' 하는 소리가 나면 그 해에는 눈이나 비가 많이 왔었고, 까치나 까마귀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나 초상이 났다는 얘기가 보인다. 흔한 얘기지만 그렇게 느티나무는 숭의전을 지키는 신물로 신성화 되었을 것이다. '숭의전지'의 우여곡절 앙암재를 제외하곤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지 않기에 찾아보니 원래 건물들은 한국 전쟁 때 유실되었고, 1970년대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된 후 1973년 왕씨 후손들이 정전을 복구 했으며, 나라 돈을 지원받아 1975년에는 배신청을, 1976년에는 이안청을 그리고 이듬해 2월 삼문(三門)을 신축했다. 좌우로 나란한 건물의 배치가 조선의 사당에서 찾아보기 힘든 경우여서 70년대 복원 과정의 엄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도 눈에 띄었다. 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건의 사당을 지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여러 역성혁명의 역사에서 발견되듯이 새로운 권력이 빠르게 나라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조선 태조는 조선의 종묘에 공민왕을 모심으로써 새로운 권력이라기보다 고려 권력의 승계로 포장하려 했다. 태조는 고려말 임금인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던 신돈의 자식이라고 간주하고 자신이 섬긴 마지막 임금은 공민왕이었다고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민왕을 이씨 조선의 종묘에 모시고 실제로 창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세운 공양왕(고려 20대 왕 신종의 7대손)으로부터 선위를 받는 식으로 임금에 오르기도 했다, 왕건의 사당을 연천에 지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상상력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사람 됨됨이다. 새로운 왕조는 구 왕조의 흔적을 지우고 구세력의 씨를 말리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씨 중에는 옥(玉)씨나 주(主)씨로 성을 바꾼 이들도 있었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도 결국 고려 유민의 비극적 사건이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부조현이라는 고개에 조복을 걸어두고 광덕산에 들어가 '두문(杜門)'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살면서 '새 왕조에 출사를 하지 않고'(不出) 있던 고려 충절 72분이 있었는데 마을에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른바 두문동 화재 사건이다. 비록 영조 때에 처음 비석을 세워 72현을 기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두문동의 비극은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영조 재위 시절에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 수많은 피 부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태조가 비록 백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역성혁명을 일으켰지만 평생 섬겼던 왕씨 왕가나 죽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예를 갖추려 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두문동 사건으로 불필요한 참극까지 벌어졌으니 역사가 태조 임금을 아무리 냉혈한으로 몰더라도 실제로 인간인 그에게도 괴로움과 고뇌가 일지 않았을까 싶다. 숭의전은 권력을 안정화시키려는 현실 정치의 결과물이자 태조 이성계의 인간적 참회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17:18~17:45 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78 번지에 있는 연천당포성으로 이동 17:45~18:03 연천당포성을 탐방 [기나긴 한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연천 박성호 기자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21. 5. 31. 반복되는 긴장의 역사 현장 - 당포성 당포성(시적 468호)은 외관상으로 탄성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동벽의 일부만 남아 이곳이 중요한 성이었음을 혼자서 버겁게 증명하고 있다. 이 일대를 정비하고 관광 안내를 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 분위기다. 동벽의 강 쪽 상단부에 전망대를 꾸며놓았고 바로 옆에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아래에서 보면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성의 풍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리쯤에 전망대와 함께 조성된 듯한 관광안내소가 만들어져 있었지만 아직 사용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연천 방문의 해(2020-2023)를 기해서 야심 차게 준비했다가 코로나를 만난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안내하는 이는 없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관광안내판이 아쉬우나마 여행객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 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 성으로 강에 접해 있는 두 면은 절벽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하고 있고, 나머지 한 면만 성벽을 쌓아 올린 아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한강 유역을 빼앗겨 후퇴한 고구려는 6세기 중엽부터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아 하류에서 상류 방향으로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무등리보루 등 10여 개의 성을 배치했다. 당포성은 강이 크게 굽어 흐르면서 물살이 느려져 도강이 가능한 여울목으로 신라군이 양주 쪽에서 북상하여 개성으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전략요충지이다. 고구려가 만든 성이지만 신라 땅이 된 이후에도 성벽을 수리하여 사용되었다. 그래서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기와와 함께 신라 기와들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관광안내소는 개점 휴업 상태지만 당포성을 둘러보는 이들은 간간이 눈에 띄었다. 임진강과 성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벽 전망대에 올라보니 성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로 동벽의 성벽이 그냥 저수지의 둑처럼 흙담만 보이는 것은 고증 결과에 따라 석축 바깥에 점토로 보강을 했기 때문이다. 당포성은 임진강 주상절리를 성의 한쪽 벽으로 사용하기에 결국 주장절리와 어우러져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자연이 빚어낸 놀라운 풍광에 역사 이야기까지 보태지면서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올 가치는 더 풍성해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포성 근처에 우리 국군이 사용하는 참호나 방어진지들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수천 년 전 한반도가 여러 국가로 나뉘어 서로 작거나 큰 전쟁을 치르고 겨우 통일이 되어 하나의 나라가 되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다시 분단국가가 되어 그 당시 방어 지점들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최초의 당포성은 북쪽의 고구려군이 사용하던 방어 시설이어서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주로 했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임진강을 건너 양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18:03~18:07 경기 당포성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8:07~18:27 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있는 당포성 버스 정류장에서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 있는 농협사거리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81번 버스 승차 대기 18:27~18:39 81번 버스를 타고 당포성 버스 정류장에서 농협사거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2분 소요] 18:39~18:42 걸어서 농협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전곡역으로 이동 [3분 소요] 18:42~18:44 전곡역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18:44~20:46 전곡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2시간2분 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