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힘들 때일수록 / 확철 칠통 명철 황 조규일
2. 육체란 몸통으로 인한 육체적 건강과 업과 관계된 영적 구조 / 칠통 조규일
3. 몸통(桶) 안을 청소하라. / 칠통 조규일
4. 영적 몸통 청소 수행에 대하여 / 칠통조규일
5. 마음이란? / 칠통 조규일
힘들 때일수록 / 확철 칠통 명철 황 조규일
힘들 때일수록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다독이며
가야한다.
요즘 힘들지
고생 많이 한다.
수고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내야 한다.
해야 한다.
용기내서 해내자
힘내서 해내자.
힘들고 괴롭더라도 파이팅하자.
화이팅하자.
세상은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시련과 고통은 나에게 앞날에 대한 약이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해주며
다독여주라.
그러면 우리는 더욱 더 힘을 내
해낼 겁니다요.
2019. 11. 24 12:03 칠통 조규일
육체란 몸통으로 인한 육체적 건강과 업과 관계된 영적 구조
육체란 몸통의 영적 구조 / 확철 칠통 황금종려
수행하는 분들 스스로 몸통을 청소하도록 그림을 그려서 설명해 주려고 했으나 단순히 몸통 청소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청소할 수 없고 또 보아야 할 수 있기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망설였다. 이것을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 글을 쓴다.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너무도 청명한 청정한 세계의 기운으로 정화해 보니 육체의 영적 구조와는 다르게 육체란 몸통의 영적 구조가 너무도 신비하고 신비롭다.
육체와 영적인 부분을 설명했을 때 역시도 믿는 이들이 있고 믿고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믿는 이들이 있고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지 안다.
이것은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영적인 부분을 한 걸음 더 앞서 간 육체란 몸통 속에 업과 연관되어 있는 영적인 부분으로 몸통과 업과 관계된 영적인 부분이다. 영적 구조도 믿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것보다 더 앞선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 안다. 그럼에도 소수의 믿는 이들이 있을 것으로 알고 믿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라는 마음에서 밝히는 것이다. 믿고 믿지 않고 떠나서 육체란 몸통에 분명하게 있고 또 본인이 보고 제거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몸통에 분명하게 있다. 누구나 다 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믿기 어려울 것이나 분명한 사실이다.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영적 구조는 자등명을 본인의 몸에서 보면서부터 이어지기 시작해서 광계(光界)에 올라섬으로 해서 광계란 자등명의 빛으로 상대방과 기운나누기를 통하여 자등명의 빛을 상대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본 것들이라면,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광계(光界)를 뚫고 올라선 너무도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 고요한 청정한 세계에 올라섬으로 해서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이 본인의 몸과 연결되어 본인의 몸이 마치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이 들어와 있게 됨으로 해서 기운나누기를 통하여 상대방으로부터 보게된 것들이다. (이것을 다 설명해 줄 수는 없다. 나름대로 좀더 심도 있게 관찰해 보기 위하여 별도로 사례들을 서술해 놓고 있지만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듯싶다. 지금 생각으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밝힐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지면으로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모임에서 암암리에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광계의 자등명의 빛은 어둠을 몰아내며 밝게 드러냄으로 해서 상대방의 육체로부터 보았다면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은 광계의 자등명의 빛까지도 씻기는가 하면 청정한 세계의 기운으로 자등명의 빛까지도 정화가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은 광계를 뚫고 올라섰을 때 광계가 마치 하얀 구름같이 보이는 것도 보이는 것이었지만 기운나누기를 통하여 탁함을 몰아내며 자등명의 빛으로 상대방의 몸에 빛이 흘러 들어가 하얗고 환하게 되어 있음에도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을 보내면 환하고 하얀 것들이 밀려나가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전에 기운나누기를 하면서 본 것들은 육체에 얽혀 있는 부분들이라면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육체란 몸통에 있는 영적인 것들이다.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을 보내며 탁하고 탁한 기운을 끌고 오며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으로 정화되면서 보인다.
맨 먼저 육체란 몸통 안에 있는 것들이 보인다. 육체란 몸통 안에 있는 것을 다 제거하고 다시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을 보내며 정화시키면 이제는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을 제거하고 또다시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으로 정화하면 또 다른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을 제거하고 또다시 맑고 깨끗한 청명하고도 청정한 세계의 기운으로 정화하면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또 다른 것이 보인다.
이렇게 보이는 것을 제거함에 있어서 몸통 안에 있는 것은 간단하고 쉽다. 문제는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어렵다. 보통 몸통 안에 있는 것을 보면 영혼들이 갖다놓았을 것 같은 것이 있고 또는 영혼들이 자기들이 살기 좋도록 해 놓았거나 또는 자기 자신이 어떠하느냐에 따라서 몸통 안에 있는 것은 서로 다르고, 몸통 안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육체란 몸이 영향을 받고 있는 듯싶었다.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이것들이 문제이고 이것들을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들이 소요된다. 이것들은 몸통에 달라붙어 있고 못이 박혀 있는 듯 못질이 되어 있는 듯 붙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제거하려면 못질하여 놓은 하나하나를 제거해야 하고 못을 제거하고 달라붙어 있는 것을 제거해야 하고 제거하는 것이 단순히 밋밋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울퉁불통 뽀족하고 몸통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위로 솟아 송곳처럼 있는가 하면 살갗으로 덮고 있다. 이것들은 몸통에 못질되어 붙어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백회, 장심, 용천부분에서 감싸 머리와 손, 발 밖으로 못질되어 꿈쩍도 못하게 되어 있다.
몸통에 붙어 있는 것을 하나하나 제거해 들어갈수록 몸통의 살갗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서 살갗을 자르지 않고 되지도 않고 또 울통불통 뽀족한 것 갈고리 같은 것...수도 없이 많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아마도 업과 관계가 깊다는 생각이다.
기운나누기를 통하여 이런 것들을 다 제거해 준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또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효과 면에 있어서 어떤 효과를 주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있는 것이 좋다면 본인의 몸을 볼 때 본인의 몸통에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본인이 볼 때 본인의 몸통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인다. 영적으로 볼 때...그러니 없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우리 육체란 몸은 영적으로 볼 때 하나의 통(桶)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몸통을 칠통(漆桶)이라고 한다. 몸통은 단순히 몸통만이 통(桶)이 아니라 팔, 다리도 통(桶)이다. 그래서 팔통(桶), 다리통(桶), 온 몸 전체가 하나의 통(桶: 漆桶)이다.
몸통을 청소함에 있어서 단순히 하단전에서부터 또는 골반 있는 곳이나 생식기 있는 부분에서부터 몸 위쪽으로 청소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리통도 청소해야 하고 팔통도 청소해야 한다. 다리통은 용천에서부터 시작해서 위로 끌어올리며 청소를 해야 하고 몸통을 지나 팔통에 이르러서는 장심에서부터 시작해서 몸통으로 끌고 들어와서 목통을 지나 머리통으로 해서 백회로 빼내야 한다.
백회로 빼내다 보면 백회에 걸려서 빠지지 않을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빼내려고 하는 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거나 또는 어떤 형태의 형상에서 백회로 빼낼 수 없게 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때는 백회를 마치 고무줄 늘리듯 늘려서 걸리는 부분을 늘려 백회로 나오게 한 후 빼내고 또 걸리면 또 걷어내면서 빼내야 한다. 몸통 것은 그래도 몸통 안에 있으니 쉽다. 그러나 몸통 안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쉽지가 않다.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제거하려면 그냥 용천으로 시작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용천을 살펴보고 못질되어 있는 부분의 못들을 우선 먼저 제거하고 망으로 되어 있는 것을 용천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몸통 안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제거해 올라가야 한다. 몸통에 있는 것은 그냥 끌고 가면 되었지만 이것은 박혀 있는 것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끌고 올라가야 한다. 보통 보면 용천 부분 장심부분 생식기 부분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못질이 많이 되어 있다. 그래서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제거할 때는 용천에서 끌고 올라온 것을 생식기 부분의 몸통 안쪽으로 얽어맨 것들 잘 풀거나 못질되어 있는 것을 잘 제거하여 몸통으로 끌고 올라와야 하고 몸통으로 올라와서는 팔 부분에 이르러서는 장심에서 장심 밖으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못질되어 있는 것을 제거하여 장심으로 갖고 들어가서 팔에 있는 것을 끌고 몸통으로 들어가 목통으로 해서 머리통으로 백회로 빼내야 한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백회부분도 백회 밖 머리에 못질이 되어 있어서 몸통에 붙어 있는 것을 제거할 때는 백회에 박혀 있는 못도 제거해야만 백회로 배낼 수 있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용천 장심 백회가 모두 다 몸통에 붙어 있는 것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못과 같은 것으로 못질 된 것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어떤 분의 경우에서 보면 몸통 안에 것과 몸통 밖의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육체란 몸통이 t로 연결된 사이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는 백회에서 몸통 안에 것과 몸통 밖에 것이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장심에서 용천에서도 정교하게 연결되어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붙어 있게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몸통 안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못할지라도 몸통 안에 있는 것을 청소할 수 있는 만큼 몸통을 청소하되 다리통 팔통도 청소를 해줘야 한다. 몸통만 청소하다보면 몸통에 있는 것이 다리통으로 몰려가거나 팔통으로 몰려가서 몸통을 청소한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행하면서 몸통을 청소하고자 하는 분이 있으면 용천으로 해서 다리통으로 몸통으로 장심에서 팔통으로 해서 몸통으로 목통 머리통 백회로 빼내야 한다. 백회로 빼내는데 걸리는 것 같아서 빼내지 못할 때 빼내지지 않는 부분으로부터 벗겨내서 빼내거나 또는 고무줄처럼 늘려서 빼내고 다시 놓는 방법을 써서 빼내야 한다.
2009. 8 26 19:06
몸통(桶) 안을 청소하라. / 칠통 조규일
아주 오래 전(빛으로 가는 길이란 책에 나와 있다.)에는 몸을 닦아내는 수신(修身)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몸을 닦아내는 수신(修身)은 말 그대로 육체란 몸을 물로 씻으며 목욕하듯 씻어내는 것을 설명했다.
그에 비하여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몸을 청소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 몸은 하나의 통(桶)과 같다.
처음 수행을 할 때는 몸이 통이 아니라 나라고 인식 의식하고 몸에 의지하여 수행을 한다. 그러다 수행이 깊어지면 몸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라는 것을 인식 의식하고 수행을 한다. 그러다 더 수행이 깊어지면 몸은 하나의 통이고 그 통 안에 '내가 있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인식 의식하게 된다.
내 것이라고 할 때까지는 몸을 닦는 수신(修身)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수행이 깊어지면 이제 몸을 닦는 수신(修身)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가 있는 육체란 통(桶), 통(桶)이라고 할 법당(法堂)을 청소해야 한다. 즉 몸을 청소해야 한다.
육체란 몸을 수신할 때까지는 육체란 몸의 혼탁을 말하게 되지만, 육체를 넘어서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육체를 말할 때에는 다만 육체는 하나의 통(桶)에 불과하고 영혼의 미숙아가 육체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서 영혼을 성숙시키는 하나의 통(桶) 인큐베이터에 불과하고 하나의 법당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수신(修身)은 몸의 혼탁을 말하며 몸을 맑히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면
몸을 청소하는 것은 육체란 몸의 인큐베이터 안을 청소하는 것이고
자성불이 있는 몸이란 법당을 청소하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청소인가? 영적인 부분들로부터의 청소이다.
수신(修身)은 육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청소하여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면
몸을 청소하는 것은 육체란 몸통을 청소하는 것이다.
마치 방을 깨끗이 닦고 청소하는 것과 같이 몸이란 통(桶) 안을 청소하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청소인가?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또 자기 자신도 모르게 들어와 있는 영혼들을 나가도록 하는 것이며 또 영혼들이 갔다 놓은 것들로 인하여 더럽혀진 몸통이란 방, 방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성불이 있는 법당을 맑고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다.
몸이란 육체가 맑고 깨끗하지 않으면 인체의 기회로도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이 몸통 안이 깨끗하지 아니하면 이 역시 몸통 안에 있는 영적인 것들로 인하여 인체의 기회로도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인체의 기회로도가 잘 돌아가지 않으면 수행 또한 잘 되지 않는다.
몸이 통이라 생각하고 흙탕물의 병이라 생각하고 지금껏 흙탕물을 가라앉히고 몸을 맑혔을 것이다. 그러한 병이란 통이란 몸을 맑히고 보니 그 안에는 맑고 깨끗한 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순수한 물에 하나의 영혼이 있다. 각기 저마다 나라고하는 영혼이 있어서 육체란 집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미숙아가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이...인큐베이터 안이 더럽거나 오만가지 잡것들이 있다면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미숙아는 어떠하겠는가? 이와 같이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대 몸통 안 또한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을 청소해 보면 보통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맨 처음 백회를 열어주면 오만가지 잡동사니가 백회로 빠져 나온다. 그나마 수행한다는 사람들은 좀 낫되 백회가 열리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호흡문들이 열려있지 않은 경우에는 일반인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우리들 각기 저마다 가지고 있는 육체란 몸통(漆桶)을 보면 구멍이 여러 개가 있다. 눈, 코, 입, 귀, 생식기, 항문 등이 있다. 이에 반하여 영적으로 보면 이러하다. 지금 자기 자신의 육체란 몸통이 하나의 통이고, 이 하나의 통에 영혼이 출입할 수 있는 영혼의 문 영문(靈門)인 백회가 있고, 신(神:머리부분의 신)이 출입할 수 있는 인당(제3의 눈)이 있고, 마음이 출입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이 있고, 기의 바다인 단전이 있고 회음이 있으며 명문이 있고 장심과 용천이 있다. 이것들을 영적으로 보면 영혼의 구멍이다. 영혼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봐도 된다. 다만 나갈 때는 영혼의 문을 통하여 나가야 한다. 영혼이 아닌 영혼들이 갖다놓은 잡동사니는 그 외의 보이지 않는 호흡문인 영혼의 구멍을 통하여 밖으로 버릴 수 있지만 영혼이 들어와 있을 경우에는 백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밖으로 나가도록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호흡문으로 설령 영혼이 들어왔다 할지라도 영혼의 문을 모르고서는 몸이란 통에 들어간 영혼은 나가고 싶어도 영혼을 문을 모르면 나갈 수 없다. 이러할 때 백회를 두드리며 이곳이 영혼의 문이니 이곳을 통하여 가라고 하면 된다.
몸을 어떻게 청소할 것인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수신(修身)은 백회로부터 했지만 몸통의 청소는 용천으로부터 몸 전체가 하나의 통(桶)이라 생각하고 맑고 깨끗하게 탁한 것을 다리 위로 끌어올리고 몸통으로 해서 백회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백회가 열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할 수 없을 것이다. 백회가 열려있어야 가능하다.
처음은 길을 내는 것만으로 만족하라. 길을 내고 나서는 이제 길을 낸 것을 토대로 길의 폭을 조금씩 넓혀가며 넓혀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을 용천에서부터 백회로 빼내며 청소한다. 육체란 통 안에 있는 잡동사니와 때와 먼지 티끌이 모두 다 백회로 빠져나가도록 하면서 청소를 한다. 그래서 몸통이란 통(桶)만 있게 해야 한다.
청소를 하면서 몸통이란 통을 맑고 깨끗하게 하라. 몸통이란 통만 남겨놓고 통에 붙어 있는 모든 티끌먼지를 청소하라. 청소하다보면 탁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또 몸통이란 벽에 달라붙어 있는 것도 있고 무엇인지 모를 물건들이 있는 것과 느껴지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들은 영혼들이거나 영혼들이 갖다놓은 잡동사니들이니 모두 다 백회로 빼내며 청소를 하고 또한 천도를 해야 한다. 그래서 몸통이 맑고 깨끗하도록 청소를 해야 한다.
이렇게 육체란 몸도 몸이란 통(桶)도 맑고 깨끗할 때 인체 기회로도는 잘 돌아간다. 그러나 육체란 몸이 맑지 아니하거나 몸이란 통 안이 맑고 깨끗하지 아니해도 인체 기회로도는 잘 돌아가지 않는다.
몸이란 육체의 청소는 수신(修身)으로 하고, 몸통 안의 영적인 부분의 청소는 몸통 안을 청소함으로 맑고 깨끗해진다. 육체를 맑히는 수신(修身)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육체란 몸통 안을 청소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몸통 안에 잡동사니가 없고 몸통 안이 맑고 깨끗해야 좋고 넓으면 넓은 마음 편안하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몸통 안을 보라. 어느 정도 맑고 깨끗한가? 그리고 어느 정도 공간이 있는가? 공간이 없다면 비워내고 청소하며 공간을 확보하라. 꽉 차 있어서는 틈이 없음으로 틈 없는 곳에 있는 영혼도 불편해서 불편한 관계로 몸통 안팎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들이 불편하기만 할 것이다. 그런고로 몸통 안을 청소하라. 그리고 몸통 안의 공간을 확보하고 확보한 공간을 맑고 깨끗하게 청소하라. 그러면 즐겁고 행복하지 아니한 일이 없을 것이다.
몸통이란 인큐베이터가 맑고 깨끗한 만큼 수행 또한 일취월장 이루어진다 하겠다.
맑고 깨끗하면 쉬이 더럽히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영혼이든 자신 이외의 다른 영혼이든, 어둡거나 탁하거나 더럽거나 잡동사니가 많으니 자신 이외의 영혼들이 들어오는 것이고 또 잡동사니들을 갔다 놓는 것이다. 중음신들이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기에 들어오는 것이다. 몸통 안이 어둡거나 탁하거나 더럽거나 잡동사니가 많아 숨어있기 좋으면 들어오는 것이다. 맑고 깨끗하면 들어올 수 없다,
몸통 안을 어둡게 하는 것은 영혼의 빛이 흐려지는 것이며 또한 부정적인 마음 내지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의식이라 할 것이며, 탁하게 하는 것 역시도 어떤 마음 어떤 의식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할 것이며, 더럽다는 것은 이것저것 생각이나 의식 마음으로 끌어당겨서 즉 착(着)하여 몸통 안으로 추하게 생각되거나 더럽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가져다 놓고 품고 있는 경우라 하겠으며, 잡동사니란 물건이나 가구 옷 그 외에 각종 여러 가지 물품들을 생각으로 의식으로 마음으로 취하려하거나 탐착하여 가지고 있거나 품고 있는 경우라 하겠다. 물론 중음신이 갔다 놓는 잡동사니와는 다르다. 중음신 갔다 놓는 경우에는 여러 경우들이 있다.
미워서 갔다 놓을 수도 있고, 맑아지면 들어가 있을 수 없으니 맑지 못하게 하려고 하거나 탁함을 유지하게 하기 위하여 또는 어둠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게 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중음신 자기 자신이 어떤 식으로도 위협이 되니 그 위협으로부터 중음신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짓이다. 만약에 이런 경우라면 중음신이 갔다놓은 것을 치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앞서 중음신을 천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중음신을 천도하여 맑아지고 깨끗해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방해하는 요소를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방해요소 없이 맑고 깨끗하게 청소해 가는 것이다.
무엇으로 청소합니까? 묻는다면 생각과 의식 마음으로 청소한다고 하겠다.
2009. 07. 11. 08:54
영적 몸통 청소와 수행에 대하여 / 확철 칠통 황금종려
영적으로 몸통 청소를 하다보니 몸통 안에 들어 있는 것 외에 몸통 안쪽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몸통 안에 달라붙어 있는 것과 연결되어 몸통 밖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있는 경우들이 종종 보인다. 이 경우 몸통 안만 청소해서도 안되고 몸통 안쪽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청소해도 아니 되고 몸통 밖에 몸통 안에 있는 것과 같이 달라붙어 있는 것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
어떤 경우를 보면 몸통 청소를 해주고 본다고 보아도 몸통 밖으로 마치 허물이나 껍질처럼 몸통을 감싸고 있거나 몸통에 달라붙어 있는 경우들이 있어서 이것을 제거하면서 보며 마치 허물을 벗는 듯 껍질이 벗겨지는 듯하기도 한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이렇듯 몸통 청소를 하고 몸통 안쪽에 붙어 있는 것을 제거하고 몸통 밖에 붙어 있는 것을 제거한다고 하고 보아도 어떤 경우에는 떨어지지 달라붙어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몸통 밖에서 몸통 안까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보통은 보이지 않는 호흡문으로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 이 경우는 보이지 호흡문과는 상관없이 몸통 아무 곳으로든 관통해 있는 경우들이 있었다.
처음은 단순하게 아주 작게 보았으나 여러 번 접하면서 좀더 넓게 그리고 좀더 높은 곳에서 관하여 본다고 보다보니 이런 경우 보통은 어떤 크고 작은 기운들이 몸통을 감싸고 있거나 관통하고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몸통에서부터 몸통 밖으로 해서 연결되어 있는 기운까지도 제거해야만 하였다.
보통은 몸통 청소만 해도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몸통 밖에 있는 것도 제거해야 하며 또한 몸통 안팎으로 동시에 청소하며 닦고 껍질을 벗기듯 벗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기운 연결되어 있는 경우 기운까지 제거해 주어야 하였다.
중생들이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과 부대끼거나 또는 함께 하면서 없던 것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자신이 생각이나 의식 마음으로도 끌고 오는 경우들도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전에는 없었는데 몸이 무겁다고 해서 보면 몸통 밖으로 무엇인가가 붙어 있고 붙어 있는가 하면 무엇인가 모를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단순히 몸통 청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몸통 밖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되지 않으며 또한 밖에서 몸통 아무 곳으로든 연결된 기운만 제거해서 아니 되는 것 같다. 이런 것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생활이고 생활하면서 일으키게 되는 생각이나 의식 마음이라 하겠다.
몸통 안이 깨끗했다가도 부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의식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그런 생각 그런 의식 그런 마음을 가짐과 함께 몸통 안에 맑지 아니하고 탁한 검은 것들이 생성되어 몸통 안이 온통 검다. 그리고 그 검은 것으로 인하여 무엇인가를 만든다. 만들어서는 몸통 안팎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몸통 안팎으로 연결해 갖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저런 것들을 볼 때 수행하는 수행자가 가지고 되는 생각 의식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느끼게 되고 보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것을 볼 때 중생들이 수행 정진해 감에 있어서 수행 정진만큼이나 8정도는 참 중요하다고 하겠다. 8정도를 실천하지 않고서는 수행 정진해 가는데 어느 정도까지 될 수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이상은 될 수 없으며 또한 생각이나 의식은 어느 정도 아는 식으로 지식이 되듯 수행된 듯 싶을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수행이 되지 않는다.
수행은 앎의 지식을 쌓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 아는 것을 내려놓거나 지혜를 통하여 밝혀 아는 것이 수행이다. 밝혀 아는 지혜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8정도가 필요하고 8정도의 실천 속 생각과 의식 마음을 바르게 하고 수행 정진해 가야 한다.
몸통 밖으로부터 몸통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로부터 차단되어야하고, 몸통으로 일어나는 몸통의 생각으로부터 차단되어야하고, 일어나는 생각들로부터 차단되어야하고 이렇게 차단된 것에 기뻐하는 마음이나 환희심으로부터 공처(空處)에 머물러야 한다. 공처에 머물러서는 머리로 아는 식(意識)으로부터 차단되어 머리부분이 완전히 쉬어야 한다. 이렇듯 선(禪)에 들어야 한다. 선에 들어서는 정에 들고 정에 들어서는 삼매에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차단하거나 초월하고 또는 해탈하며 가야 한다.
하나하나 벗어나 들어가면서 초월하지 못하거나 해탈하지 못한다면 수행이 된 것이 아니라 수행이 된 듯 머리로만 헤아린 것이 될 것이다. 반드시 수행은 자기 자신이 수행한 것으로부터 처음은 차단하고 그 다음에는 초월하고 그 다음에는 해탈해야지 벗어날 수 있다.
몸통 안과 몸통 안쪽에 붙어 있는 것들 또는 몸통 밖에 붙어 있는 것들 및 기운으로 몸통에 들어오는 이 모든 것들이 수행하면서도 자꾸만 반복되어 생기고 일어나고 붙고 기운적으로 연결되어 괴로운 것은 수행하면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차단은 되었을망정 초월을 하지 못한 것이고 초월을 하지 못했으니 해탈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를 알고 수행 정진하되 8정도에 의지하여 수행 정진하고 몸통을 청소하되 몸통 안팎과 밖으로부터 연결된 기운까지도 차단 및 초월 내지는 제거할 수 있어야 수행이 오롯이 된다.
2010. 4. 23 12: 02
마음이란? / 칠통 조규일
마음은 네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네 마음 하는 것은,
마음은 형체가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할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네 마음 하는 것은, 마음의 어떤 작용 때문인가?
아니 그 작용이 어떠하기에 그러한가?
마음은 한 마디로 말해서 허공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허공이 아니라 진실허공을 말하며, 진실허공인가 하면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는 진리이고 법이며 빛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름이 그러한 것이고,
그 마음 자체에서 보면 실체가 없다.
텅 빈 허공이다.
내 마음, 네 마음 하는 것은 텅 빈 허공을 저마다의 형상과 형태의 육체로 허공에 성곽을 쌓은 것과 같고,
테두리 그어 울타리를 쳐놓은 것과 같고, 허공 꽃을 보는 것과 같고 꿈과 같다.
그러니.
비록 육체를 나라고 할지라도 마음을 나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 왜 저마다의 형상과 형태의 마음이 모두 다 같은 텅 빈 허공일텐데,
내 마음, 네 마음,... 지구의 마음, 우주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것은 저마다의 형태의 형상이 제각각의 의식과 무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식과 무의식에 따라 마음의 그릇을 가지기 때문이다.
마음의 그릇이란
제각각 의식과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념의 한계가,
저마다의 마음의 그릇이라 할 것이다.
모든 형태의 형상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 내에서 생활을 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 내지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니.
자연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의 범주로 하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은 자신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방, 인식의 테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하나의 인식의 속에 의식 무의식 상념이 사방팔방, 시방으로 펴져 있으나,
저마다 형태의 형상이 인식하는 폭의 한계를 가지는데. 이를 흔히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저마다의 인식의 한계를 저마다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런고로 내 마음... 네 마음 지구의 마음, 우주의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을 텅 빈 허공이라 했는데,
그럼 왜 텅 빈 허공이 슬퍼하고 기뻐하고 화가 나고 고요하고 즐겁고 괴롭고. 등의,
무수히 많은 마음의 상태가 나타나는가?
그것은 이러하다.
마음이라 했을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이
사방팔방, 시방으로 펴져 나가는 가운데 그 한계를 가지는,
그 한계로 허공의 테두리를 그은 것이고,
그 한계로 허공에 성곽을 쌓은 것과 같고,
그 한계로 허공에 자기만의 하나의 방을 가진 것과 같다.
그러니. 마음은 허공 속, 하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집(集)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네 마음이라 했을 때, 네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상념, 의식과 무의식이 거쳐할 수 있는, 거쳐하고 있는, 집이고, 방이며, 집안의 방은 너에게 있어. 하나의 의지처가 되고 귀결처가 된다.
예를 들면 너는 쉬기 위하여 어디를 찾는가? 집이다.
집도 네 방이 있으면 네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밖이 아니 안팎으로 밝으면 사방팔방으로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나,
밖이 어두우면 아니 안팎으로 어두우면 너는 밖을 향한 모든 것을 접고, 안으로 향한다.
집, 방이라는 곳을 향하여, 빛을 찾아, 그리고 너는 그곳에서 쉴 것이다.
너는 태초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 곳 그래왔다.
아니 태초 본성의 맑고 밝은 빛의 빛에서,
빛 속에 빛의 그림자, 그 빛과 빛의 그림자의 틈이 벌어지며 허공이 생기면서부터,
그 허공 안에 빛과 그림자 사이의 허공만큼에서, 움직이고 활동하며, 그 움직임으로 활동으로부터, 너의 집을 만들어 온 것이다.
너의 방을 만들어 온 것이다.
너만의... 이것이 지금의 너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러니. 그뿐만이 아니라 인식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네가 네 방문을 닫고 가만히 있는다면, 모든 것은 고요하고 조용할 것이고,
네가 네 방(마음)에서 이리저리 움직인다면 (생각한다면),
네 방안(마음)은 좁고 복잡(괴로울)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 네 방을 충족시킬 그 무엇이...
내 방에 들어오면 즐겁고 행복할 것이며,
네가 필요로 하는 것 필요로 했던 것이 소중한 것이 없어진다고, 네 것 없어졌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슬프고 괴로울 것이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누군가 부수고 가져가려고 한다면 화가 날 것이다.
이것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네가 어느 식당 아니 방에 있다고 가정을 하고 생각하라.
방에 들어가면 너는 방문을 닫기도 하고 열어 놓기도 하겠지.
방문을 열어놓았다면 그 방은 방문으로 하여금 안팎으로 통할 것이다. 방이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방문을 닿았다면 방은 안팎으로 통하지 않고,
방안에 있는 허공만큼 그 방은 허공을 가질 것이다.
그 방을 한번 둘려 보라. 무수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네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네가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더욱 많다.
네 마음의 그릇이란 방도 역시 이러하다.
네가 인식하고 있는 생각이나 상념 의식이 있는가 하면 무의식 있다.
네가 인식하고 있는생각이나 상념 의식은 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라 할 것이고,
무의식 역시 사물이기는 하지만
너무 오래 전에, 네 방에 들여 놓아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있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네가 그 방에서 돌을 던져 보라.
허공은 지나치고 사물은 부딪칠 것이며, 부딪친 곳에는 흔적이 남을 것이다.
이 흔적이 네 마음에 상처가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모든 언행이 돌이 되고, 파장이 되어.
자기 자신을 시발점으로 허공을 향해 날아간다.
타인들의 언행 역시도, 그 사람을 시발점으로 허공을 향해 날아온다.
오고 가는 가운데 상처를 입어 즉각 반응을 한다.
이 반응이 연기의 인연법. 희로애락으로 나타난다.
이는 방에 무엇이 있느냐. 두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러는 언행은 자기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가, 어느 벽에 부딪치고는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돌을 물에 던지면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가 끝에 다다랐다가,
되돌아와 파문을 일으킨 원점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다.
날아오는 돌의 방향을 보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면, 있는 그것을 치우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방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모르니.
있는 것을 치우지 못하고돌에 부딪친다.
수행이란 자기 자신의 마음의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이며,
자기 자신도 모르는 방을 이룬 벽을 허무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이루는 마음의 성곽을 부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이루는 마음의 땅을 없애는 것이다.
그럼, 자기 자신의 방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흙탕물병을 하루 종일 들고 흔들어 되며, 그 물병의 물이 원래 흙탕물인지 맑은 물인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가만히 두면 가라앉는 물병 속, 흙탕물 알갱이를 하나하나 보는 것과 같다.
(여기서 병은 육체로 인한 마음의 그릇을 말하는 것이고 흙탕물은 업(業)을 말한다)
그래서 맨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온갖 생각들이 일어난다.
가라앉는 알갱이를 봄으로써 자기 자신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원래 흙탕물이 아니라 맑음 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그릇에 흙탕물이 다 가라앉았을 때를 혜오(慧悟)라 할 수 있으며,
그 병을 깬 것을 돈오(頓悟)라 할 것이다.
혜오를 해도 남아 있는 가라앉은 알갱이(업)는 병을 깨기 전까지는 다시 흙탕물이 되겠지만, 병을 깨고 나면 흙탕물은 그 흔적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병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고, 병이 깨진 것을 거울이 깨졌다 할 수 있다.
자! 이제 우주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자.
우주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우주의 마음이란 우주의 허공이 우주의 마음이다.
우주의 허공 속에 무엇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우주의 허공 속에 있는 것이 우주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우주의 허공 속의 변화가 우주의 마음속의 변화다.
우주의 허공 안에는 수많은 은하계가 있고,
수많은 별들이 있으며 태양계가 있고, 태양계 안에 지구가 있고,
지구 안에 너라는 형태의 형상이 있다.
이 많은 것들은 우주 속 티끌로 우주 안에서 작용하나, 그 자체가 우주가 아니고
그 작용은 그 티끌들로 인한 빛과 어둠 사이 그림자로 인한 밀고 당기는 힘의 작용에 의하여,
어떠한 원칙 없는 원칙에 작용하며 그 형태의 형상들을 나타내나,
결국 우주를 벗어나지 못하나 우주라 했을 때, 우주 안의 그것들은 즉 티끌은 우주에 있어 우주의 중심 수미산이 되고, 이것이 우주의 마음이 된다.
그러나 그 마음을 다 알기에는 너무도 광대무변하고 변화무쌍하다 하겠다.
이는 멈춰 있는 일이 없이 흐르고 변한다.
이 모든 것을 우주 속의 티끌이고, 우주의 작용이고, 우주의 마음이라 하겠으나,
우주안의 은하계는 우주의 마음 안에서의 티끌, 은하계라고 하지 않는다.
태양계 역시 그렇고 지구 역시 그렇고, 너 역시 우주의 티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주의 티끌이고
우주 마음속에 있는 것들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우주에 있어서 생기고 없어지는 것은 우주가 지은 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 속에 있는 티끌인 네가 알고 인식하고 있는, 태양계의 작용은 어렴풋하나
너의 작용 하나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우주의 마음속에 작용을 다 알리요.
그러나 이 또한 우주란 허공 안의 작용이고, 우주의 마음이란 허공 속 티끌들의 작용이다. 이것이 우주의 작용이고, 우주의 마음 작용이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인식하고 우주 안에서 작용하는 것들을 통 털어.
우주의 마음 내지 우주 의식 우주의 무의식이라 힐 것이다.
자! 이제 지구의 마음을 살펴보자. 지구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지구의 마음이란, 먼지덩어리인가 하면 티끌덩어리 지구라는 땅과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이 지구의 마음이다.
지구의 마음속에 무엇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5대양 6대륙이 있고, 수많은 형태의 형상들이 생겼다 없어지고 없어졌다 생긴다.
이들의 변화를 보자. 태양이라는 빛의 작용에 따라 변하는 것 역시 곳곳에 따라 다르다. 남반구와 북반구가 그렇고 적도가 그렇고,
5대양 6대륙이 지역에 따라 태양으로부터의 빛을 받아드는 곳에 따라,
변화가 다르고 그 지역의 토양에 따라 다르고 동식물이 다르나,
이것들의 변화는 지구 밖의 태양에 따라 우주의 변화에 따라 다르고, 지구 내의 변화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르게 변하는 것은 인과 연에 따라 다르고 연기에 따라 다르다 할 것이다.
머물러 있는 듯하나, 어느 것 하나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라찰라 소멸과 생성을 하고, 여러가지로 움직이며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
지구 안에서 생존하고 생하고, 멸하는 멸하고 생하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 하는 듯 하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에서, 지구 안에서, 우주란, 지구란, 제왕의 영토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지구 안에서 한정적일 때, 이를 지구의 마음 안에서의 작용이다.
지구의 핵심은 지구라는 곳의 땅의 중앙에 있으며,
그 중앙으로부터 어떤 힘의 에너지의 영향을 지구 안팎으로 받는다.
지구가 지구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수미산을 이야기한다면,
지구에 있어 수미산은 지구라는 땅덩어리 먼지덩어리 티끌덩어리가 될 것이다.
이렇듯, 마음을 내 마음, 네 마음이라 했을 때,
어떤 대상의 형태의 형상에 한정하여 마음이라 했을 때,
이는 저마다의 자기 자신 안의 성곽 안에서 허공을 말한다.
그 허공에 단순히 허공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먼지덩어리이고 티끌덩어리이고,
빛과 티끌의 사이의 허공에서 생기는 그림자, 생각과 상념.
의식과 무의식이 업식으로 영토를 이루고 있다.
너에게 있어. 이 영토를 이루는 영토라 할 수 있는 땅은 업식, 5온이다.
지구가 지구라는 땅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업식 오온이 땅이다.
이 업식이 밖에서 오는 파장 내지 빛과 그림자에 따라
그 연결 체계가 6근과 6식이고 이들이 다가와 오는 길이 6처고,
이들로 인하여 오온의 땅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주의 변화무쌍이 그렇고, 지구의 변화가 그렇고,
나라는 내 안에서의 마음의 변화 또한 무쌍하다.
이는 태초 빛과 빛 속에서, 빛과 빛, 빛과 빛의 그림자 속에서 틈이 생기고,
빛과 그림자의 틈에 어둠이 생기고,
어둠이 생김으로 허공, 공간이 생기고,
공간이 생김으로 우주가 생기고, 지구가 생기고, 빛과 그림자 사이 티끌 먼지가 모이고,
그 안에서 흐르고 변하는 가운데, 유정물과 무정물이 생겼다.
마음의 근본은 빛으로 시작하여,
빛과 그림자 사이의 공간만큼의 마음이 생기고,
점차적으로 넓어진 마음은 우주 공간만큼의 마음이 생기고,
이것이 우주의 마음이고 그 안에서 변하는 모든 것들이
우주의 공간 안에서의 전체적 변화의 작용이고, 이것이 우주 마음 안에서의 우주 마음작용이고, 이것을 지구로 한정적일 때, 지구와 대기권이 있고, 지구의 마음이 있고.
이 안에서 변하는 모든 것이 지구의 마음작용이고,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향해 마음이 열려 있을매, 즉 우주 속에 들 때, 지구의 마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우주의 마음이다.
우주의 마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빛과 빛 속의 빛의 그림자고, 그 틈이 벌어지기 전에 빛이다.
모든 형태의 형상 역시도 한정적일 때, 그 형태의 형상의 마음이지만,
그 형태의 형상을 벗어나 밖을 향할 때,
그 밖을 향하는 만큼 그 테두리는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그 마음 역시 달라, 형태의 형상의 마음이 아니라 밖을 향한 만큼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형상을 하고 있더라도, 우주의 마음에서 보면 우주가 보면, 은하계, 태양계, 지구.......
우주 안의 모든 것들은 우주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우주와 통하고 있다.
지구가 지구라 했을 때.
이는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를 말하고 태양계에서 보면, 지구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계고 태양계의 마음이고, 우주에서 보면 지구가 아니라 지구의 마음이 아니라, 태양계 태양계의 마음이 아니라 우주고 우주의 마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너, 나, 우리라 했을 때, 네 마음, 내 마음, 우리의 마음이라 하지만, 지구에서 보면 네 마음, 내 마음, 우리 마음, 하지만,
너, 나, 우리를 벗어나 지구에 있을 때, 이미 지구의 마음이다.
우주에 있을 때, 이미 우주의 마음이다.
너, 나, 우리라고 할지라도, 우주에서 보면 우주의 마음이고,
태양계에서 보면 태양계의 마음이고, 지구에서 보면 지구의 마음이다.
우주로 보면 우주 전체가 하나로, 태초의 빛과 빛속의 빛의 그림자 사이 마음이고,
이 태초의 마음이 안팎 없이 하나로, 어둠이 사라지고 빛 속의 빛의 그림자까지 사라지면,
그 자체를 마음이라 하나, 마음이라고 하기 이전의 빛이 도래했으니. 빛이라 할 것입니다.
텅 빈 허공인 듯한, 텅 빈 성곽 안에 무엇이 있기에,
그 허공이 어떠하기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 하는가?
이는 이미 앞에서 설명을 했고, 마음의 어떤 작용 때문인가?
텅 빈 허공이 진실허공이, 본성이 어떠하기에 그러한가?
허공의 마음은 환상과 같아 허망한 분별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허공의 마음은 바람과 같아. 멀리 가고, 붙잡히지 않으며, 모양을 보이지도 않는다.
허공의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멈추는 일없이 나자마자 곧 사라진다.
허공의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 인(因)이 있어 연(祿)이 닿으면, 불이 불어 비춘다.
허공의 마음은 번개와 같아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에 소멸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 뜻밖에 연기로 더럽혀진다.
허공의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움직인다.
텅 빈 허공의 마음은 화가와 같아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난다.
허공의 마음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혼자서 간다.
마음은 허공과 허공이 결합되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 속에 업의 덩어리로 있는 것이다.
텅 빈 허공의 마음은 제왕과 같아 혼자서 모든 것을 통솔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의 원수와 같아 업으로 온갖 고뇌를 일으킨다.
텅 빈 허공의 마음은 모래로 쌓아 올린 성곽과 같고 집과 같으며 방과 같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으로 인하여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똥파리와 같아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생각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낚시바늘과 같아 괴로움인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꿈과 같아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생각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적과 같아 항상 약점을 기뻐하며 노리고 있다.
텅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존경에 의해서
혹은 분노에 의해 흔들리면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비굴해지기도 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도둑과 같아 모든 선근(善根)을 훔쳐간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불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싸움터의 북처럼 소리를 좋아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썩은 시체의 냄새를 담히는 멧돼지처럼 타락의 냄새를 좋아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입이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리는 배고픈 개처럼 맛을 좋아한다.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은 업이 기름접시에 달라붙은 파리처럼 감촉을 좋아한다.
이와 같이 텅 빈 허공의 마음과 텅 빈 허공에 업이 있는 마음을 관찰해도
마음의 정체는 알 수가 없다.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허공처럼....
허공을 이름하여 허공이라 해서 그렇지 허공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텅 빈 허공의 진실허공처럼 얻을 수 없는 찾을 수 없는 마음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과거, 미래, 현재에 없는 것은 삼세를 초월해 있다.
삼세를 초월해 있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은 생기는 일이 없다.
생기는 것이 없는 것에는 그 실체 자성이 없다.
실체가 없는 것 자성이 없는 것에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에는 사라지는 일이 없다.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것에는 지나가 버리는 일이 않는다면 거기에는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다.
지나가 버리는 일도 없다.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다.
가고오고 죽고 나는 일이 없는 것에는 어떠한 인과(因果)의 생성도 없다.
인과의 생성이 없는 것은 변화와 작위(作爲)가 없는 무위(無爲)다.
무위는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본성이다. 이는 텅 빈 허공이 진실허공이 본성이 가지는 특성이다.
이 본성은 너와 나 뿐만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에 다 있다.
이 타고난 본성은 허공이 어디에 있건 평등하듯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타고난 본성은 모든 존재가 마침내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 본성은 몸이라든가 마음이라는 차별에서 아주 떠나있으므로 열반의 길로 향해 있다.
그 본성은 어떠한 번뇌로도 더럽힐 없으므로 무구(無垢)하다.
그 본성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집착,
자기 것이라는 집착이 없어졌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다.
이렇듯 마음의 본성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어느 것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점에서 모두 다 평등하다.
그 본성은 본질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없어지는 일도 없다.
그 항상 있으므로 영원性)으로서 본성은 존재의 여실성(한 것이다. 그 본성은 가장 수승(殊勝)한 열빈이므로 즐거움이다. 그 본성은 온갖 더러움이 제거되었으므로 맑은 것이다. 그 본성은 찾아보아도 자아(自我)가 있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다. 그 본성은 절대 청정한 것이다. 그 본성은 대자대비하며 빛과 사랑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의 본성에서, 왜 인간의 신체에 비추어 본다면,
변화하는 마음을 하체에서 느낀다기보다는 상체 특히 가슴 부위에서 마음이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왜 이러한 형태로 마음의 변화를 느껴야 하는가?
나라고 인식했을 때, 마음은 자신의 안팎으로 작용하나,
나에게 있어 내 마음은 나의 몸 전체를 말하지만, 몸 전체에 있어 중심은 가슴 부분 중단전에 있기 때문이다.
가슴부분을 살펴보면,
내가 살아 있게 하는 생존의 열쇠가 가슴 부분에 우리 몸에 있어 중요한 것들은 다 몰려있다.
이 몸을 이끄는 첫 번째 요인인 심장, (사실은 업이지만 육체에 한정적으로 생각하여) 심장의 고동소리로 그 사람의 젊음과 폐기를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육체에 있어 핵심은 심장이다.
중요한 만큼 많은 보호 속에 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 자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도 이곳에 녹아 있다 하겠다.
그래서 온몸 전체의 안팎으로 마음 작용은 일어나,
다른 부분들은 미세하게 작용하여,
작용이 중심 현재의 육체의 핵심부분인 가슴으로 되돌아가,
그 부위에서 업식과 함께 작용하니.
우리가 쉽게 아니 누구나 "내 마음"이라 했을 때, 가슴을 가르치고 가슴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마음의 중심 입식이 몰려 있는 곳은 가슴 부분이라 할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업의 작용과 본성을 빛이라 했을때
자신의 업이 작용할 때,
밖에서 안으로 (6근과 6식) 향하는 모든 것을 가슴에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을 가슴에서 업이 작용한다.
그리고 이 업들이 점차 사라짐으로 업이 다른 것과 부딪치지 않으므로
가슴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다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슴이 편안하다는 말을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수행하여 업이 점차 사라져 마음이 열리면 중단전이 열렸다하고,
우리의 본성을 빛이라 했을 때, 가슴에 맑고 깨끗한 은백색이 있어.
중단전이 열리면 가슴에서 은백색의 그 빛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알게 모르게 가슴을 중심으로 온몸으로, 온몸에서 밖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니. 이 육체에 있어.
생명의 중심은 중단전에 있고, 기운의 중심은 하단전에 있다.
밖의 기운을 자신의 육체 안으로 기를 축적하여, 하단전에 기운이 축적되고 하단전이 열렸다 하여,
하단전에서 빛이 나지 않는 것 역시,
몸을 양초 촛불에 비유하여 볼 때,
불꽃이 아니라 양초에 있어 육체에 있어 에너지의 공급원이기 때문이며,
지혜 즉 살아가는 방법은 빛을 밝히는 부분, 촛불에 있어 밝히는 부분이고
육체에 있어 머리 상단전에 있다 할 것이다.
이는 양초의 촛불에 있어.
심지의 핵심은 은백색에 있고,
육체에 있어 심지의 핵심은 가슴 중단전에 있고,
양초 촛불을 밝히는 빛은 붉으스름하나 파란색에 있는 것과 같이,
상단전이 열리면 파란색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 했을 때, 그 지혜의 빛은 머리 상단전에서 난다할 것이다.
지혜란 어둔 것을 밝게 비추어 아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어둠을 밝힌다는 것이다.
자신을 자세하게 관찰해 보라 그려러면 알 수 있다.
누가 뭐라 했을 때 아니면 어떤 일에 있어서, 밖에서 안으로 향할 때 즉 받아들이고 느낄 때, 절대로 머리로 맨 먼저 느끼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맨 먼저 받아들이는 곳이 마음이다.
마음을 가슴이라며 가슴에서 받아드려 가슴에서 작용을 일으켜,
즉 마음 작용을 일으켜 머리로 전달하여 머리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여,
다시 가슴으로(마음으로) 작용을 일으켜 업을 통하여, 또는 어떤 몸짓으로 나타낸다.
이렇듯 모든 안팎의 작용에 있어. 밖의 모든 작용이 안으로 가슴(마음)으로 모였다가,
안의 모든 작용이 다시 가슴 (마음)에서 밖을 향해 퍼져나가는 것이다.
밖에서 작용 (62)하여 안 가슴 (마음)으로 오는 길 (6처)을 하나하나 알면,
안에서 작용하여 밖으로 가는 길을 하나하나 알 수 있고,
안에서 작용하는 맨 처음의 마음작용을 알 수 있고,
마음작용의 실체를 알 수 있으며, 그 전달 체계를 알 수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6근과 6식 6처를 아는 것이 될 것이고,
오온의 실체를 아는 것이 되고,
마음을 아는 것이 될 것이며, 마음의 본성 자신의 본 성품을 아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실체를 알고 알면 얽매이지 않는 것과 같이,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하나 아는 것 밝혀가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며 수행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안으로 진리를 구할 것이고, 밖으로 흩어져서 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꺼져가는 등불,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촛불같은 등불의 심지에 기운을 모아 에너지를 보내고,
그 에너지로 등불을 더욱 밝게 밝히는 가운데,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등불을 찾고.
그 등불로 업으로 인한 무명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며, 무명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어줍잖게 마음을 설명했는데.....
마음을 설명함에 있어 끝이 없다.
세상 안팎의 모든 작용이 마음작용인 만큼....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마음에 있고, 그 많은 법문이 다 마음작용을 설명한 것처럼...
2000. 01. 05. 580 칠통 조규일
첫댓글
천도의식 인트라망 천도글들 몸통청소등의 글들에 대해 이전 글이지만 이대로 읽고 할 수 있는 것들 하면 제게 필요한 것인지요?
칠통 조규일 선사님:
하면 너무 좋다고 들립니다. 그것이 정도라고 합니다. 바른 것이라고요.
그래서 공부하려 정리했습니다.
글을 모아 정리함으로 필요하실 때 도움이 된다면 좋고 감사하겠습니다.
2024. 01. 07 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