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리를 보다 - 퓌센, 프랑크푸르트, 쾰른,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패전을 딛고 다시 태어난 나라 독일 (3)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1. 16. 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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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리를 보다
퓌센, 프랑크푸르트, 쾰른,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패전을 딛고 다시 태어난 나라 독일 (3)
1 퓌센 –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 가까이에 위치한 ‘낭만 가도(街道)’의 도시.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가 지은 노이슈반슈타인 성(城)이 있다.
2 프랑크푸르트 – 은행의 도시, 괴테의 도시. 라인 강의 지류인 마인 강 하류에 있다. 본래 이름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을 줄여 프랑크푸르트라고 부른다.
3 쾰른 – 본에서 북서쪽으로 34㎞ 정도 떨어진 라인 강 왼쪽 기슭에 있다. 유럽 주요 교역로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중세에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4 하이델베르크 – 독일의 최초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가 있어 학문의 도시로 불린다. 하이델베르크 성과 철학자의 길이 유명하다.
5 베를린 – 독일의 수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 베를린으로 분리되었다가 1989년 다시 합쳐졌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네. 로테에 대한 감정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니까.”
우리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열정을 단 한 번이라도 바친 일이 있었던가. 탈출구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의 손길이 닿은 권총에 키스하고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자살의 이유가 명쾌하다. 이상적인 여성으로 여겼던 로테가 없으니 자신의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을 통해 독일의 진짜 모습을 본다. 문학, 철학, 음악의 정점을 본다. 정점을 향하는 독일이기에 극단적인 전쟁의 흐름에 빠지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괴테를, 하이델베르크에서 칸트와 헤겔을, 본에서 베토벤을 만나 보자. 열정을 가진 자들이 있던 도시는 충만하다. 먼저 독일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독일 음악사 여행부터 시작해 보자.
서양의 근대 음악사는 독일 음악사
“영어는 사업의 언어고 프랑스어는 사교의 언어이며, 이탈리아어는 음악의 언어다. 그리고 독일어는 싸움의 언어다!”라는 말이 있다. 독일의 근현대사가 사실상 전쟁의 역사였기 때문에 그런 편견이 있는지도 모른다.
독일어가 싸움의 언어라는 말이 어색하게도 서양 근대 음악의 역사는 독일 음악의 역사나 다름없다. 독일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의 이탈리아 음악과는 달리 웅장하고 우렁차다.
1685년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과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작곡한 바흐가 독일에서 태어났다. 놀랍게도 같은 해에 태어난 헨델과 바흐는 노년에 들어 똑같이 눈이 멀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청각이지 시각이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상수시 궁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철학과 예술을 좋아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이곳에서 철학자, 음악가, 문인들과 자주 교류했다.
어릴 적부터 플루트를 즐겨 연주한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1747년 5월 상수시 궁전에 바흐를 초대해 자신이 제시한 주제에 맞추어 6성의 푸가를 즉흥적으로 연주해 줄 것을 부탁했다. 왕의 주제로 즉흥 연주를 할 자신이 없었던 바흐는 자신이 선택한 주제로 6성 푸가를 연주하였다. 호평을 받았으나 왕의 청을 완벽히 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바흐는 라이프치히에 돌아오자마자 왕이 제시한 주제가 담긴 [음악의 헌정]을 완성했고, 동판에 인쇄해 프리드리히 2세에게 헌정했다.
1756년에는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756년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하여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그 땅을 되찾기 위해 7년 전쟁을 벌인 해이기도 했다.
1770년에는 고전파 양식의 기틀을 마련한 베토벤이 라인 강변의 도시 본에서 태어났다. 베토벤의 가장 큰 업적은 성악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던 기악을 최고의 위치로 부상시킨 데 있다. 베토벤이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인 곡이 [교향곡 9번(합창 교향곡)]의 4악장이다. 유럽 연합(EU)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공식 찬가로 채택했다.
1813년 작센 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바그너는 새로운 교향악적 오페라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네 편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겐의 반지]는 ‘총체 예술’이라는 그의 음악적 사고를 잘 드러낸 기념비적 작품이다.
독일 가곡의 역사가 곧 예술가곡의 역사일 정도로 독일의 가곡은 유명하다. 가곡이란 시와 음악이 결합한 음악의 한 양식이다. 베토벤의 [아델라이데], 브람스의 [자장가] 등이 모두 독일 가곡이다.
자, 이제는 딱딱한 독일어가 ‘싸움의 언어’라는 편견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노이슈반슈타인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바그너의 음악은 ‘백조의 성’으로 불리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탄생하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백조의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낭만 가도’라는 뜻을 지닌 르만티셰슈트라세의 종점 퓌센은 뮌헨에서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퓌센에 들어서면 ‘로맨틱’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라도 하듯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디즈니랜드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신데렐라 성은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본떠 만든 것이다.
바이에른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퓌센은 과거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15세기에는 이탈리아와 무역을 하여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바이에른 왕국 제3대 국왕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트비히 2세는 수도 뮌헨에서 태어나 호엔슈반가우 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이에른 왕국(1806~1918)은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을 통일해 수립한 독일 제국(1871~1918)의 영방들 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서재에 그려져 있는 [탄호이저]의 모험담.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한 루트비히 2세는 오페라에 담긴 게르만 민족 신화와 어울리는 성을 꿈꿨다. 그래서 노이슈반슈타인 성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백조의 호수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성 내부에는 [로엔그린]의 전설과 [탄호이저]의 모험담이 그려져 있다.
건축 공사는 1869년에 시작됐다. 깎아지른 절벽에 성을 짓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최고의 건축 기술과 천문학적 자금을 동원하여 17년이란 세월이 걸린 끝에 동화보다도 더 동화 같은 세계가 만들어졌다. 정작 루트비히 2세는 성이 완성되기 3개월 전 미치광이로 몰려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의문을 죽음을 맞았다. 그 호수에는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를 남겨준 루트비히 2세를 기념하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