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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당시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은 전처와의 이혼소송 중이었다. 전처와 조회장 양측이 내세우는 위자료 액수가 너무나도 달라서 소송은 1년이 넘도록 진행되었고 이혼소송과 별거중에 조회장은 정윤희씨를 만났다. 정윤희씨와 조규영회장의 관계를 알아챈 조회장의 전처는 정윤희씨가 유명인임을 이용 언론화시켰고 간통죄로 고소하게 된다. 몇달 후, 법원은 정윤희씨를 무죄판결하지만 여배우로써 그러한 스캔들은 치명적이었다. 조회장은 결국 이혼소송에서 전처가 요구하는 만큼의 위자료를 배상하고 정윤희와 결혼에 성공하엮다.
1984년 결혼한 정윤희씨는 2007년 현재까지 조규영회장과의 평범한 결혼생활을 지속하고 있으며, 조회장과 전처 사이의 두 자녀, 그리고 본인과 조회장 사이의 자녀, 모두 세 자녀를 키우며 주부로써 살고 있다. 정윤희씨의 이러한 스캔들은 유명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언론폭력의 희생자가 된 좋은 예다. 조규영회장의 전처는 정윤희씨의 영화배우 인생을 희생시킴으로써 거액의 위자료를 챙겼고, 본인이 낳은 아이들의 양육권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이혼하였다. 이후로 정윤희씨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계속해 왔고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20년 넘도록 거주하며 아이들 키우는 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최근 유지인씨가 컴백하고 장미희씨 역시 꾸준히 활동을 하면서 정윤희씨의 컴백여부를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데...정윤희씨 본인은 컴백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데뮈 당시의 잡지기사...
불의의 사고로 막내아들 떠나보낸 정윤희의 안타까운 사연 레이디경향|입력 2012.01.10 10:22
영화배우 정윤희(1954~ 경남 통영시, 혜화여고졸, 만 57세)의 막내아들이 미국 유학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부모는 먼저 떠난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라고 했던가. 애지중지 아끼던 아들을 아직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어머니는 현재 미국에 머물며 슬픔을 추스르고 있다고 한다.
차마 믿기 힘든, 애지중지하던 아들의 사망 소식
지난 11월 24일, 미국 한인 인터넷 신문 '유코피아'는 한 한국인 유학생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사립 명문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 재학 중이던 한인 학생이 의문사 했다는 것. 이후 이 한국인 학생이 은퇴한 배우 정윤희(57)의 아들 조 모군(22)으로 밝혀지며 큰 파장이 일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 11월 22일(현지 시각)로, 조군은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급성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한인 타운 근처 할리우드장로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측은 조군이 급성폐렴으로 입원했으나, 당일 밤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국에서는 사인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병원 측으로부터 조군의 시신을 넘겨받아 부검을 실시했고, 1차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이 약물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 발표에 따르면 조군은 약물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 증세가 나타난 것이며, 타살이나 자살의 흔적은 전혀 없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소 측은 이 약물이 어떤 종류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추가로 독극물 검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검사 결과가 도출되기까지는 4주에서 6주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숨진 조군은 1970, 8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끌었던 배우 정윤희와 중견 건설업체인 중앙건설을 운영하는 조규영 회장의 2남 1녀 중 막내아들로, 두 사람이 결혼 후 5년 만에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당시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은퇴한 정윤희는 조 회장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1남 1녀를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 1989년 뒤늦게 조군을 낳았다.
어릴 때부터 잘생긴 외모와 영특한 머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는 조군은 부부의 큰 자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2년 국내 유명 영재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떠난 조군은 로스앤젤레스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인 하버드-웨스트레이크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인디애나주립대를 거쳐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 진학한 수재로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영재로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을 만큼 영리하고 눈에 띄는 아이였으며, 성격도 차분하고 착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척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따라서 조군이 한국에서 생활하던 시절 그를 알고 지낸 주변인들은 갑작스러운 조군의 죽음을 두고 놀랍고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군의 어린 시절, 학원에서 그를 가르쳤다는 한 네티즌은 조군에 대해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진중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라며 "예의 바르고 성격도 착해서 다른 선생님들도 칭찬을 많이 했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라고 회상했다. 또 "집중력이 뛰어나고 특별한 면모를 보며 진작부터 '영재교육'을 권하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현재 그녀의 가족이 살고 있는 압구정동 모 아파트. 20년 넘게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얻은 아들이었던 만큼 조군에 대한 부모의 애착도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부모가 다 그러하겠지만 두 사람은 애지중지 조군을 아꼈고, 특히 정윤희는 연예계 은퇴 후 가정 살림과 내조에만 전념하면서 세 자녀의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고 알려졌다.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던 최고의 여배우로서의 삶을 내려놓은 그녀는 수더분한 이미지로 다른 학부형들과도 잘 어울렸고 이웃과도 다정하게 지냈다고. 그러나 출중한 외모 때문에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는 것이 학부형 정윤희를 기억하는 이들의 공통된 평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의 인생
1970, 80년대 최고의 스타로 손꼽혔던 정윤희(丁允姬)는 유지인, 장미희와 함께 '신(新)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한국 영화계를 이끌었다. 짙은 눈썹과 동그랗고 큰 눈,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잘 조화된 빼어난 외모를 자랑했던 그녀는 1975년 21세의 나이에 우연히 영화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이후 각종 CF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TBC-TV의 간판 프로그램 '쇼쇼쇼'의 MC를 맡아 주목을 받았다.
고전미와 청순미를 두루 갖춘 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녀는 영화계와 방송가를 활보하며 다양한 작품을 통해 당대 유명한 남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췄고, 캐스팅 '0순위' 배우로 독보적인 활약을 보여줬다. 뛰어난 외모만큼이나 안정된 연기력을 선보이며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2년 연속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982년에는 영화 '사랑하는 사람아'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여자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정윤희가 돌연 모든 활동을 접고 연예계를 떠난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지인의 소개로 여덟 살 연상인 중앙건설 조규영(1946~, 중앙건설대표이사)) 회장을 만나게 됐고 사랑을 키우게 된 것.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조 회장은 전부인과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유부남 신분이었고, 결국 두 사람은 간통 혐의로 구속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1)1984년 12월 제주도 신혼여행 중 남편과의 달콤한 한때. 2)1980년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연예인들이 함께 모인 간담회에 참석한 정윤희. 3)1988년 7월 14일에 열린 '스타의 광장' 행사에서 영화배우 이대근, 이영하와 함께. 4)1983년 전성기 시절, 제22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유지인과 함께 노래하는 모습.
두 사람이 함께 집에서 잠을 자다가 조 회장의 전부인의 급습으로 발각돼 경찰에 연행된 사건은 온갖 신문과 방송을 떠들썩하게 장식한 '빅뉴스'였다. 조 회장의 전부인이 고소를 취하하면서 풀려난 두 사람은 조 회장이 정식으로 이혼한 지 4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리며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결혼과 함께 그녀는 연예계를 완전히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은퇴 이후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팬들과, 함께 일하고자 하는 영화·방송 제작진들이 수많은 러브콜을 보냈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의 삶을 살았다. 1993년 한 광고에 잠깐 등장한 것과 1995년 토크쇼를 통한 전화 인터뷰, 그리고 2000년 초반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정윤희 영화주간'에 참석한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특히 지난해 9월, MBC-TV에서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카페 정윤희'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방영하면서 큰 화제를 모은 적이 있으나, 이때 역시 출연 대신 '아직까지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계시다니,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자필 편지만을 남겼다.
철저하게 대중을 떠나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는 항간의 소문과 우려와는 달리 모범적이고 행복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평탄하게 생활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에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게 되면서 크나큰 충격과 상심에 휩싸여 있는 상태다. 황망한 사고에 비통해하고 있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자택에 찾아가봤지만 끝내 만나지는 못했고, 잠시 귀국한 친척을 통해 그녀가 현재 미국에 머무르며 주변 정리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가족의 집에는 가끔 주변 지인들만 드나들고 있는 상태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라도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 슬픔의 깊이를 함부로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리라는 것만큼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부디 그녀가 이 커다란 아픔을 가슴에 잘 묻고 다독거릴 수 있게 되길, 위로를 담아 바라본다. <글 / 이연우 기자 , 사진 박동민, 경향신문 포토뱅크>
음반도 취입했다...1집
아티스트 : 정윤희
Tracks Side B
1. 목마른 소녀 (작사:최인호 작곡:이정화)
2집 - 가르쳐 주세요 (LP 79)
1. 가르쳐 주세요 7. 그대는 모르리
당시에 시대가 그랬던것이라 영화가 이렇다. 애마부인 계열의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모나미 왕자파스... 모나미볼펜 광고 사진..
정윤희씨 아들 사망원인은.... 급성폐렴증세로 사망했다고 해요.
여배우 정윤희의 아들이 미국 명문대 재학 중 돌연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사망한 조용민 씨는 정윤희와 남편 조규명 씨의 막내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립 명문 대학인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다고 해요. 일각에서는 조용민씨가 술과 함께 마약을 과다 복용, 급성 폐렴증세와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숨겼다고 보도했지만 마약 복용 사실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하네요.
정윤희는 1970~8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끌었던 대표적 배우인데요.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고,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 36편의 영화와 4편의 드라마에 출연했고, 제20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1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고 해요. 전 부인이 정윤희를 간통으로 고소하면서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기도 했다네요. 주위에선 얼마나 가겠냐고 비아냥 거렸지만 아들을 낳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지속해왔는데요. 이번에 막내 아들의 죽음이란 엄청난 슬픔을 당하게 됐다고 하네요.
정윤희에게는 2남1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규영 회장의 전처소생의 장남와 장녀가 있고, 이번에 의문사 한 아들 차남 용민군은 정윤희가 직접 낳은 아들이라고 해요. 본인의 방송출연 및 얼굴노출이 시댁식구들과 마찰의 요인으로 작용할까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하며 2남 1녀의 세 자녀와 함께 오붓한 가정을 일궜다는데요.이번 일로 많이 힘들어 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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