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MENU-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비슐라르 1,0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1987)
[작품해설]
이 시의 메뉴판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 철학자의 이름이 아주 헐값으로 매겨져 있다. 시인은 이러한 메뉴판의 형식을 통해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계량화하고 수치화하여 인식하려 하는 현대인들의 물신화(物神化) 풍조를 풍자한다. 즉 현대인들은 유명 작가나 철학자마저도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물질적이고 가치 교환적인 것으로 대체하여 그들을 마치 상품 가치를 지닌 사물로 취급한다. 시인은 이렇게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예술가와 철학자들마저도 교환 가치에 의해 평가되는 현실을 자조적이고 반어적인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이 시는 연 구분이 없는 전15행의 단연시이지만, 메뉴판 형식을 빈 10행까지의 앞부분과 한 칸 내어 쓰기로 표기되어 있는 뒤부분의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앞 단락은 커피숍의 메누판 형식을 빌어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를 비판한다. 메뉴판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은 샤를르 보들레르[프랑스 시인], 칼 샌드버그[미국 시인], 프란츠 카프카[독일 소설가], 이브몬누프와[프랑스 시인], 에리카 종[미국 여류 소설가], 가스통 바슐라르[프랑스 철학자], 이하브 핫산[미국 비평가], 제레미 리프킨[미국 문명 비평가], 위르겐 하버마스[독일 철학자] 등이다. 이들을 가격별로 나누어 보면 가격이 가장 싼 800원짜리부터 다음의 1,000원짜리, 그리고 가장 비싼 1,200원까리 세 종류가 있으며, 그중 가장 비싼 것은 철학자나 사회학자요, 가장 싼 것은 시인과 소설가이다. 시인은 이를 통해 시인에 대한 화자의 자기비하적인 인식의 일면을 드러낸다.
뒤 단락은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현대 사회에서 문학, 특히 시가 경싲되고 차별화되고 있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라는 표현은 이러한 풍조하에서도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반어적으로 보여 준다. ‘커피를 마신다’는 시행 역시 ‘삶을 노래하다’ 또는 ‘시대를 이야기하다’라는 문학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친 제가’와 함께 선택한 ‘프란츠 카프카’가 다양한 마실 거리 가운데서 가장 싸다는 것은 ‘프란츠 카프카’[문학]가 돈으로 환산된 정신적 가치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이 시는 물질 만능의 현대 사회에서 시인의 처지가 날로 그 가치를 잃어 가고 있음을 자조적으로 비판, 풍자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카프카’를 이 시의 중심 소재로 삼은 것일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 점은 카프카의 작품 활동과 관련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 카프카는 대표작인 「성(城)」에서 목적도 분명하지 않은 채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끊임없이 애쓰나 끝내 좌절하고 마는 ‘K’라는 주인공을 통해 관료사회의 경직성을 반어적으로 비판한다. 또한 중편소설 「변신(變身)」에서는 어느날 아침 한 마리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을 통하여 인간성과 대화를 상실한 현대인의 파편화(破片化)된 일상성(日常性)을 묘사한다. 그리고 장편소설 「심판(審判)」에서는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서 끝내 처향되고 마는 평범한 은행원 ‘K.요제프’를 통해 현대 산업 사회의 제도와 권력의 폭압을 비판한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을 발견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시인은 이러한 작품들을 창작한 카프카야말로 모든 존재를 상품 가치[교환가치]로 평가하는 현대인의 물신주의적 가치관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작가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은 카프카를 문학인의 대유로 끌어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시인 자신은 이 시에서 사용한 기법을 ‘인용적 묘사(引用的 描寫)’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 때의 ‘인용적 묘사’란 인용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인유(引喩)’와 비슷하지만, 인용의 출처가 모두 우리 주변에 흔한 기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기존의 역사적, 문화적 자산을 새롭게 해석하는 ‘인유’와 차이가 있다.
[작가소개]
오규원(吳圭原)
본명 : 오규옥(吳圭沃)
1941년 경상남도 밀양 출생
부산사범학교 및 동아대학교 법학과 졸업
1968년 『현대문학』에 시 「우계(雨季)의 시(詩)」, 「몇 개의 현상(現像)」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82년 제27회 현대문학상 및 연암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사랑의 기교』(1975), 『왕자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쓰여지는 서정시』(1981), 『희망 만들며 살기』(1985), 『가끔은 주목받는 생(生)이고 싶다』(1987), 『하늘 아래의 생』(1989), 『사랑의 감옥』(1991), 『꽃 피는 절망』(1995),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순례』(1997), 『한 잎의 여자』(1998),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