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유명한 마을 부용진(芙蓉鎭)
1949년 10월1일 베이징의 티엔안먼(天安門)에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중국인이 이제 일어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60년이 흘렀다. 대륙은 지금 대대적인 경축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한중 수교 17년. 황해를 사이에 두고 인적, 물적 교류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무너진 뒤, 1989년 처음으로 한국 땅에서 상영된 중국 영화는 1986년 제작된 '부용진'이다.
구화(古華)가 마오의 고향인 후난성 서쪽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문화대혁명 전후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을 셰진(謝晋)이 다시 영화로 만들었다.
소수민족 토가족(土家族)의 전통이 살아 있는 부용진(芙蓉鎭)은 예로부터 쌀두부가 유명하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1963년 봄, 남편 여계계(黎桂桂)와 함께 쌀두부집을 열어 돈을 번 호옥음(胡玉音).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부용진의 좁고 오래된 골목에서 이어진다.
평온한 마을에 국영음식점의 여성 경리인 이국향(李國香)이 부임하면서 정치 운동이 벌어진다. 호옥음도 우파로 분류돼 대중 모임에서 호된 비판을 받는다. 가게를 빼앗기고, 남편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한다. 결국 사상 개조를 위해 거리를 청소하는 신세로 내몰린다.
호옥음은 이미 우파로 지목돼 거리 청소를 하고 있던 진서전(秦書田)을 깊이 알게 된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빗자루를 들고 춤을 추는 등 함께 어울린다. 어느 날 호음옥이 병으로 눕자 진서전은 정성스레 간병한다.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당은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 뒤 공식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한다. 불법 결혼은 죄였다. 진서전은 10년 징역형을 받고 수감됐고, 호옥음도 3년형을 받지만 임신 중이라 투옥되지 않는다.
호옥음은 혼자 아이를 낳다가 위험한 고비를 맞지만 미곡창 주임이었던 곡연산(谷燕山)이 구해준다. 호옥음은 계속 거리 청소를 하면서 아이를 키운다. 그런 와중에 문화대혁명도 막을 내린다.
당은 호옥음에게 쌀두부집과 몰수했던 돈을 돌려준다. 그리고 호옥음의 바람대로 남편 진서전을 사면하고, 가족이 모여 살도록 해준다.
상시(湘西)의 소진(小鎭)은 영화 '부용진'의 촬영장으로 유명세를 타자 '왕촌(王村)'이란 원 이름까지 묻어 버렸다. 여기저기 골목 안에 들어선 쌀두부집은 너도나도 여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류샤오징의 이름을 따 '정통 류샤오징 쌀두부집(正宗劉曉慶米豆腐店)'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왕촌은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고 있는 세계자연유산인 장가계에서 버스 약 2시간 거리에 있다.
왕촌을 끼고 강이 흐른다. 예로부터 초촉통진(楚蜀通津), 초나라와 촉나라로 통하는 '천년 나루'다. 한 고조 5년(기원전 202년), 일찌기 유양현(酉陽縣)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통팔달 물길이 이어져 '작은 남경'이라 불릴 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교역이 활발했다. 청나라 건륭, 가경, 도광 연간에는 총 500m 정도인 돌길을 따라 크고 작은 가게가 300여채, 음식점과 객잔이 100여호에 달했고 매일 오가는 상인들이 무려 2000여명을 넘어 섰다.
지금은 옛 영화를 관광객들이 대신하고 있다. 부용진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쌀두부'를 먹는다. 마치 가래떡을 엄지 손가락만 하게 뚝뚝 잘라 놓은 듯한 모양이다.
쌀두부는 쌀을 맷돌에 갈아낸 뒤 석회수에 넣고 끓이면 된다. 몸의 열을 내려주고, 속을 편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어 여름철 간식으로 제격이다.
골목길 입구 '정절(貞節)'을 새겨 놓은 패루 옆에 있는 '정통 113호 류샤오징 쌀두부집'은 늘 많은 손님이 북적인다. 작은 탁자에 옹기종기 앉거나 그냥 선 채로 '부용진의 맛'을 즐긴다.
부용진은 토가족의 민속 풍정이 넘쳐 난다.
담배, 술 모두 전통 방식으로 만든다. 대나무통에 담겨 있는 술이 있는가 하면 '토가연(土家烟)'이란 전통 담배도 있다. 고기나 생선은 바람에 말려 내걸었고, 생강을 주원료로 만든 엿(姜糖)을 특산품이라 자랑한다.
은 세공품이 많고, 전통 비단 공예품은 알록달록 화려하기 그지없다.
먼 옛날, 토가족 마을에 '서란(西蘭)'이란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다. 이 아가씨는 '카보(?普)'라는 긴 비단을 짜는데 능했다. 그래서 토가족들은 자신들의 전통 비단 공예를 '서란카보'라 불렀다. 마흔 여덟 번이나 땀을 따 전통 모양을 냈다.
부용진의 석판가를 걷노라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다. 무너질 듯 퇴락한 조각루는 물론 이끼 낀 지붕을 이고 있는 옛 건물이 이어진다. 골목 안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관음각이 있고, 커다란 별 하나를 부조한 옛 가무청(歌舞廳)도 있다.
골목의 끝은 강으로 이어진다. 쉬엄쉬엄, 터덜터덜 걷다보면 '부용진'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성문에 닿는다. 성문 옆은 수풀이 자라고 있는 폭 42m, 총 높이 60m 가량의 2단 직벽이다. 수량이 많은 여름철이면 물안개를 일으키며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800년 토가족, 300년 마을, 100년 가옥, 1000년 돌길, 10000년 대폭포(八百年土司 三百年鳥龍寨 百年弔脚樓 千年石板街 萬年大瀑布)'란 글을 붙여 놓은 입장권 판매소가 떠오른다. 폭포 옆으론 유양궁(酉陽宮)이 보인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강을 꿈꾸고 있다. 황제를 몰아내고, 공산당이 승리한 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을 거치면서 신중국 성립 60주년을 맞았다.
부용진은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전후의 이야기로 유명해진 마을이다. 천년의 돌길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옛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그 길을 걷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