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달라도 철저하게 다른 그,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그, 존재 자체로 고통이요 십자가인 그, 웬수가 따로 없는 그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대대적으로, 혁신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시켜보고자 노력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를 고통과 십자가의 대상에서 ‘연구 대상’으로 바꿔보고자 노력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언행, 이쪽에서 원하지 않는 언행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는 그 앞에서 분노하고 좌절만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서점에 가셔서 인간의 심리, 인간의 행동의 이해에 길잡이가 되어주는 양서를 한 권 구입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관계의 대가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그를 바라볼 때, 나와 분리된 별개의 그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를 내 일부요 나와 하나인 우리라고 여겨보십시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도 어려운 관계로 인해 힘겨워하는 우리를 향해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오 복음 5장 44~45절)
요즘 개인적으로 참 난감한 문제 앞에서 많은 생각과 묵상들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용서하기 힘든 상황 앞에서, 결국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일이 어떻게 전개되든 상관없이 일단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자. 매일 아침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구원을 위한 지향을 두고 미사를 봉헌하자.”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예수님 시선의 폭은 좁디 좁은 우리들이 안목과는 정말이지 천지차이입니다.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인내롭고 지혜로운지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이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오 복음 5장 45~46절)
사랑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참 요구가 많으신 분입니다. 때로 너무 지나칠 정도입니다. 솔직히 원수가 내게 끼친 해악을 큰 마음 먹고 참는 일은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가 내게 안긴 상처를 털어버리는 일 역시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사랑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과 축복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정신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 정신, 주님 마음이 우리 영혼 안에 깃들게 될 때, 그분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 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특유의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인간 세상 안에 악(惡)이 종식될수는 없지만 악은 누군가의 진정한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됩니다. 원수 사랑이 가능해진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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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말로만 겸손할 수 있을까?>
요즘 겸손하게 살려고 조금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안 됩니다. 워낙 몸에 밴 것이 있고 또 신자들도 기본적으로 사제에게 너무 많은 공경을 주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신 분이 일어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는 앉아서 듣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저도 일어섰습니다.
이전엔 이런 것이 참 버릇없는 것임을 느끼지도 못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세속적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또 제 자신을 높은 지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옷을 가난하게 입기가 힘들고 검소하게 먹거나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신자들의 정성을 거부하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에 무조건 받으니 풍요가 하늘을 찌릅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면 마냥 부럽습니다. 하지만 선뜻 그런 삶을 본받기가 어렵습니다. 몸이 불편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겸손은 해야겠는데 몸으로는 하지 못하고 말로만 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몸이 불편해지지 않으면서도 겸손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자신의 왕비 이제벨을 잘 통제하지 못하여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 왕에게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어 나무라십니다. 그와 온 집안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아합 왕은 재빠르게 회개합니다. 제 옷을 찢고 자루 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갑니다. 자루 옷을 입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닙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기분이 좋으신 듯 엘리야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자신을 낮추면 하느님께서 그를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인정해드려야 그분께서도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이런 면에서 겸손이 영성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합 왕이 자신을 낮추는 방식은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는 것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역시 겸손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육체가 교만인데 육체를 배불리면서 겸손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를 높이고 상대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내 자신을 낮추고 내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리 말로 겸손한 척 하더라도 위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겸손할수록 육체는 수고하고 있어야합니다.
평생을 흑인들을 위해 수고한 슈바이처 박사가 밀림에서 처음으로 병원을 지을 때 한 번은 옆에 서서 구경만 하는 흑인 청년에게 서 있지만 말고 같이 일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이 흑인 청년은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 일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학생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그러나 공부를 더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하게 되었다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고생을 하려하지 않습니다.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은 낮은 사람의 몫이라고 여깁니다. 설익은 사람이고 덜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겸손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수고하지 않으려는 것 자체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몸으로도 불편해져야 합니다. 겸손하고 싶다면 말로만 겸손해지려 하지 말고 교만이 스며있는 우리 몸을 조금은 괴롭힐 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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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오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코린 4,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이 주신 계명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새로이 태어남으로써 자녀들이 되며, 그분의 새로운 창조물이요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녀로서의 권한을 받는다. 우리는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가 되는 권한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뜻하며,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 진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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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묵상
하느님의 정의는 무섭습니다. 나봇의 피를 흘리면서 포도밭을 차지한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에게 내린 하느님의 처벌은 ‘동태 복수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 임금에게 말씀하십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제벨에게 말씀하십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단식하는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자녀들이 다다라야 할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은총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용서하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미운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외면하고 피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사랑할 대상에게 한계와 조건을 설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처럼 절대적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습니까?
자신의 약점과 죄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의 증오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면서 원수를 사랑하시는 표양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인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몸소 보여 주시니 우리가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관리국장/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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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주위를 돌아보고 힘을 냅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험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 줄 것 같은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을 멀리하며, 안전지대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안전지대를 벗어나 사랑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도 힘이 없고 상처 받고 괴로워서 힘들어 하고 있는데, 원수까지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말씀은 잠시 잊고, 마음 편하게 상처 받지 않으며 지내고 싶습니다. 예전에 신학교에서 지낼 때 생각해 보면, 갈등을 겪고 상처를 주고받았던 일이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마음이 어둡습니다. 우울해집니다. 의기소침해 집니다. 그러면 밥 먹을 때도 힘이 없고, 기도할 때도 힘이 없고, 운동할 때도 힘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방에서 조용히 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되면 성당에 가서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기도하고, 수업을 듣고, 운동이나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다니다 보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신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곤 합니다. 예를 들면 식사하면서 늘 밝게 웃고 이야기 하는 신학생의 모습이나 친구들과 다정한 모습으로 산책을 하는 신학생의 모습, 그리고 몸 개그나 유머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신학생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힘없이 다니던 제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다시 한 번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위에는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힘들 때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할 힘이 없을 때, 주위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4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우리는 해를 보며 하느님의 마음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하느님의 마음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의 손에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을 희생하며 상처받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았던 교회의 성인성녀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다짐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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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은 ‘율법 실천’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주신 여러 계명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계명입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다면 율법 실천도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만일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을 때, 그 미움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누구나 쉽게 경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율법 실천을 완성하는 일은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의 일치와 사랑에 참여하는 것인데, 우리의 사랑이 완성되어야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고, 신앙생활의 목표를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처럼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율법 실천이 완성된다는 뜻이고, 신앙생활이 완전해진다는 뜻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고, 하느님의 일치와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남아 있다면 모든 것이 다 불완전해지고,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설명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원수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죄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원수’는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고, 원래 원수란 없습니다. 내가 원수처럼 여기는 그 사람도 이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여라.”라는 계명 속에 포함되는 계명이고, “아무리 원수 같더라도 이웃이니까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라는 말씀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세리들’이라는 말은 ‘죄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죄인들이나 하는 짓’은 곧 ‘죄’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라는 말씀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만, 또는 친한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하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른 민족 사람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하는 일은, 신앙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따라서 그것은 율법 실천을 완성하는 일도 아니고, 사랑을 완성하는 일도 아니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내 마음속의 악(惡)을 물리치고 선(善)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내가 마음의 평화를 얻고, 내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미움은 나를 악으로 끌어들이고, 나를 파괴합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나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꾸짖고 타이르는 것도 사랑이고,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도 사랑이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를 제시해 주신 말씀입니다.
사랑은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고, 항상 ‘지금’ 실천해야 합니다. “그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용서하고 사랑하겠다.”가 아닙니다. 회개할 수 있도록 ‘지금’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은 사랑이고 용서인데,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려고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은 그 사랑과 용서를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 이웃이 철천지원수가 되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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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용서는 가능한 일...>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갑니다. 가는 길에 어떤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래 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
그들은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그들은 물을 마시기도 하고 목욕을 합니다. 뺨음 맞은 친구가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자 때린 친구가 즉시 구해 줍니다. 늪에서 나온 친구가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돌에 새겼습니다. "오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해 주었다."
다른 친구가 의아해 하며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 위에 적었는데, 너를 구해 주었을 땐 왜 돌에다 새겼니?" 글을 쓴 친구가 말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하지 않을까?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었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새겨야 할거야!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을 미운 사람(웬수)에게도 보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최고점은 바로 미운 사람, 소위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이 저희에게는 너무나 은총위에 엄청난 은총임을 고백합니다.
“하느님, 당신이 저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느님, 벌레 같은 저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느님, 다른 것 다 없어도 좋습니다.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여 주소서.” “하느님, 다른 것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신의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있게 하여주소서.”
사랑하는 고운님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래서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고,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입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탓이옵니다..." 사랑의 최고점은? 내 탓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오늘 하루 내 자신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 모두가 편안해지는 은혜로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아이들이 넓은 성당 마당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가끔은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야들아, 너거 와 싸우노?’ 그러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씩씩대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가만있는데 자가 먼저 그랬다 아잉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해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모든 범죄들은 자연스러운 창조 질서와 관계들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분명히 죄로 인해서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깨어지고,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들은 불완전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번에 대부분의 분들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나된 목소리로 응원을 하며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분들이 기분 좋게 모여서 술자리도 더불어 가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기분 좋게 건배를 하다가 그만 유리컵이 부딪쳐서 깨져 버렸다고 합시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깨진 유리를 빨리 치우고 그 기분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진 유리를 치울 생각은 않고, ‘니가 잘못해서 깼니, 원래 깨져 있었니, 주인아줌마가 컵을 잘못 갖다 줬니,’ 하며 계속해서 따지기만 한다면, 분명 누군가가 더 화가 나서 유리컵을 하나 더 깨뜨리게 될 것이고, 그것을 누가 지나가다가 밟기라도 하면 다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악순환이 그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리기 될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누가 먼저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 깨진 유리로 인해 일그러진 그 얼굴을 펴기 위해 먼저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 번의 죄로 인해서 그 죄의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함께 하기 위해서 모인 그 시간의 의미가 이 깨진 유리로 인해 순식간에 싹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부터 누구든지 깨진 유리를 먼저 치우고 다른 컵을 가져와서 함께하는 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용서’를 통해 ‘완전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평화 방송 청취자 여러분, 깨진 컵, 우리가 먼저 치웠으면 좋겠습니다. 함께하는 이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활짝 펴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거룩한 몸으로 우리를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 모아 받아 모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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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억울한 죽음과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저지른 죄를 보셨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아합에게 전하도록 하신다.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아합은 죽어 그 피를 개가 핥을 것이며, 이즈르엘 성 밖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찢을 것이며, 그의 후손들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리라고 예언한다. 아합의 죄로 인하여 그 가문에까지 벌이 내릴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에 아합은 자신에게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
아합이 그처럼 자신의 죄를 뉘우치자 하느님께서는 그에 대한 벌을 늦추셨다. 하느님께서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모른체하지 않으신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죄인일지라도 당신께 의탁하는 이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창세기 4장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카인과 아벨은 친형제로서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자였다. 형제는 각각 자신의 소출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아들이셨다. 그러자 카인은 화가 나서 아벨을 죽였다. 이에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나타나시어 그 죄를 물으신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0-12) 하고 카인을 벌하신다.
이에 카인이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창세 4,14) 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아뢰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만들지 않으셨지만 죄를 짓는 사람을 만드셨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사람,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신 사람을 너무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당신을 거스르고 떠나간 사람까지도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돌아오너라! 극악한 반역자들아,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이사 31,6)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 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이사 55,7) 하고 부르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 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 버리리라.”(이사 43,25)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이사 65,17)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려 하신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의 죄까지도 덮어두시고 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그처럼 사랑이 크시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지닌 자유의지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면, 사랑을 거부하는 자유의지까지도 하느님은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면 받을 수가 없다.
아합은 무고한 나봇을 죽여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무고한 죽음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합의 뉘우침을 거절하지도 않으셨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사랑과 자비가 크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항상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신앙인,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바라는 신앙인, 죄에 빠졌을 때라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돌아서는 신앙인, 하느님의 사랑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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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주님께서는 내게 늘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솔직히 사제가 되기 전에는 이를 믿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내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고 왜 내게 이렇게 부족한 부분을 많이 주셨냐면서 불평불만을 많이 하였던 것이지요.
다른 친구에게만 더 많은 능력과 재주를 주신 주님께 원망을 했던 적도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후 비로소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좋은 것만 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보다 더 너그러워집니다.
언젠가 외출을 했다가 성지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성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신호만 잘 받으면 10분 내에 도착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의 차가 차선을 계속해서 바꾸면서 차량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차로 인해서 신호를 받지 못했고 몇 분의 시간을 도로에서 소비해야만 했습니다.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었기 때문에 짜증이 일었고 앞의 차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쏟아 붓고 싶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것도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예상보다 조금 늦게 성지에 도착해서 차의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지에서 내려오는 어떤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예전에 알고 지냈던 교우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만약에 신호를 제대로 받아서 일찍 도착했으면 엇갈려서 만날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저를 방해했던 차로 인해서 늦어져서 이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불평불만의 마음도 줄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보다 순간의 부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다 보니 늘 힘듭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원수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원수의 육신에 해를 입힐 수는 있겠지만 내 영혼에 더 큰 해를 입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 사랑의 주님께서 늘 좋은 것만을 주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이 명령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이 주님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을 주님께서 멍청하다고 하실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에게 분명히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은총과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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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사람에게 기회는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수많은 기회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라는 것을 모른 채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언제나 준비한 사람이 승리한다. 승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언제나 우연이라고 말하고 재수가 좋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연이나 재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찾아오지도 않는다.
매일 매 순간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집중하는 자세로 임한다면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인생에 있어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그러나 준비된 사람에게는 하루에도 세 번의 기회가 찾아 올 것이다. 그때는 그저 내 앞에 지나가는 기회를 한눈에 알아보고 꽉 잡을 수 있는 용기만 가지면 된다.
그러니 지금부터 잘 준비하자. 인생을 바꿀 기회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뿐 매 순간 찾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을 뿐이다. (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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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평화방송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내용은 성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가 많은 것은 어떤 이유인지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순교자들의 희생과 기도가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도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손자 중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올 수 있도록 유언을 하셨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었고, 동생은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염수정 추기경님, 최창무 대주교님, 손희송 주교님도 모두 교우촌 출신들이셨습니다. 성소의 증가는 가정, 본당, 교구가 삼위일체가 될 때 가능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한국교회도 성소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인데 어떤 이유인지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은 교회의 위기와 함께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교회에 자본과 물질의 파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교회가 대형화되고 있습니다. 교우촌이 사라지면서 가정에서의 기도가 사라졌습니다. 중산층화된 교회에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이 함께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세속화되면서 참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이라도 핵심교리를 꼭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제들이 모범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이태석 신부, 오웅진 신부, 김수환 추기경님과 같은 사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보다는 가난을 살아야 합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까지도 감수해야 합니다. 꽃이 되기보다는 썩어서 묻히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학교의 양성과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질문하였습니다. 30년 전에는 제도가 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열정은 가득했습니다. 지금은 제도는 정착되었지만, 열정은 예전만 못합니다. 정하상 성인은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사제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멀리 프랑스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왔습니다. 교회는 제도와 열정이 함께 해야 합니다. 조직화한 양성 이전에 학생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관심과 사랑이 함께하는 양성이 되어야 합니다. 교황청에서는 사제양성 지침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한국교회도 한국 사제 양성지침을 만들고 있습니다. 변화된 양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것입니다. 인성, 지성, 영성, 사목이 조화를 이루는 틀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기자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겠는지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약은 약국에서 팔지만 중요한 약은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약국에서 약사가 쉽게 처방을 내리고 약을 팔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 진단하여 약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약을 오용하거나 남용할 수 있어서 부작용이 생기거나,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약의 효과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정부는 의약 분리 정책을 폈고 지금은 가벼운 증상의 약 이외에는 대부분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야만 약을 구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방전을 주는 의사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으로 메마르고, 타락하여 심한 병에 걸리곤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로 ‘당근과 채찍’으로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근이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는 회개와 반성이라는 약을 먹어야만 효과가 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채찍이란 계속 반성과 회개라는 약을 먹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어제에 이어 ‘아합왕과 이자벨 왕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처방을 내렸습니다. 무서운 채찍입니다. 다행히 아합왕은 회개와 반성을 하였고 하느님께서는 용서와 자비를 베푼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에 효과가 있는 처방전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만병통치약과 같아서 ‘분노, 욕심, 교만, 이기심, 시기, 질투’와 같은 심각한 병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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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기대수준> -하늘 아버지를 닮는 것-
살아갈수록 은총보다도 죄의 심각성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큰 죄만 짓지 않고 소박하게 살 수 있어도 큰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매일미사가 그렇게도 고맙습니다. 미사중 제가 주목하는 부분이 두 곳입니다.
예전에는 미사 시작 예식과 더불어 인사 후 잠시 그날 미사를 소개하고 참회예식에 들어갔지만 얼마전부터는 인사하고 잠시 침묵한 되 곧장 참회고백의 기도를 바치며 자비송에 이어 미사를 시작합니다. 미사은총에 앞서 철저한 죄의 참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곳은 영성체전 마지막으로 죄의 용서를 청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로 깨끗해진 영혼으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 날로 정화,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자주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교회의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참으로 고맙습니다.
어제의 제1독서에 이은 오늘 제2독서도 참으로 인상깊습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요. 어제 오늘 완전히 지옥같은 장면입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 자리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불가능합니다. 다윗의 경우가 그렇고 오늘 아합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어제 제1독서 열왕기상권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던 이제벨과 아합의 천인공노할 완전범죄가 오늘 엘리야 예언자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며 죄의 결과에 대한 무자비한 심판이 선고됩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가지 못합니다.
흡사 하느님은 세상 곳곳의 사람들의 모든 행적을 살피는 CCTV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오늘 열왕기상권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 전율했습니다.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지 통절이 깨닫습니다. 서두부터 긴박감이 넘칩니다.
‘나봇이 죽은 뒤에 주님의 말씀이 티스벳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서두로부터 일사천리 아합과 이제벨의 악행에 대한 심판이 선고됩니다. 죄의 결과는 이처럼 무섭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아합은 즉각적인 참회로 일단 살아있는 동안 재앙의 심판은 유보됩니다만 그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예고하시며 사실 그대로 됩니다.
다윗의 경우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지만 이어 집안의 불행과 파란만장한 수난이 보속처럼 뒤따르지만 다윗은 끝까지 하느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보속을 충실히 수행함으로 성인이 되었습니다.
얼마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중 ‘죄를 회개한 다윗은 성인이 되었지만 부패한 솔로몬은 성인이 되지 못하였다.’라는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삶의 부패를 막아줍니다. 하여 우리는 그 유명한 다윗의 통회 시편 51장을 선물로 얻게 되었고 오늘 방금 화답송 시편을 기도로 바쳤습니다.
죄의 결과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용감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보속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죄에 대한 최고의 보속이자 처방은 사랑뿐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 대한 답을 복음의 예수님이 줍니다. 수녀님들의 피정기간 동안 복음의 배열이 참 은혜롭습니다. 6월14일 복음중 한 대목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어 예수님은 구체적인 실례 여섯을 들면서 이들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화해하여라, 2.극기하여라, 3.아내를 버리지 마라, 4.정직하여라, 5.폭력을 포기하여라, 그리고 오늘의 6.원수를 사랑하여라.’입니다. 결국 여섯 모두는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새삼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아니라 더 열렬히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최고 보속의 행위는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바로 하느님 사랑을 닮은 일방적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 눈에 원수요 박해하는 자들이지 하느님 눈엔 분명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 다운 아가페 사랑으로 이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좋아서 친밀한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아가페 사랑으로 이들의 처신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심리적으로 좋아서, 친밀한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원수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미워하는 것은 죄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싫어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다운 사랑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아가페 사랑의 원조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바로 이런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공평무사公平無私하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집착함이 없어 이웃을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이 이렇듯 높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믿어 주시는 예수님이 고맙습니다. 하늘의 아버지와 같이 완전해 지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제시한 우리의 궁극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바로 이 말씀이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최종의 답이자 우리 영적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게, 온전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아가페 둥근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이기적 불순한 사랑을 정화하고 성화하여 당신의 아가페 사랑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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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 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구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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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파주분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대당명제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여 달리 대우하던 관행을 뒤엎고, 다 같이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 45)
사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14)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한 대상임도 깨우쳐 주십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 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 60 참조),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참조) 말입니다.
오늘, 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나요?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대체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나요? 지금 누가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 8-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하오니,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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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하느님으로부터 뽑힌 사람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 이것이 '우리의 신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커다란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일까요?
저는 '1테살5,16-18'의 말씀 안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가 복음으로 듣고 있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5-7장) 안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
오늘 복음(마태5,43-48)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것이 나의 기쁨이고, 나의 감사가 되어야 되어야 하고,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제는 매일 드리는 미사 때마다 성찬전례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혼자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이자 박해자인 우리를 조건없이 용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용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힘, 내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할 때, 내가 하느님의 모습이 될 때 할 수 있는 일(기적)입니다.
요즘 복음으로 듣고 있는 산상설교(마태5-7장)는 내가 진짜 신자인지, 가짜 신자인지? 진짜 수도자인지 가짜 수도자인지? 진짜 사제인지 가짜 사제인지를 보여주는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성찰해 보고, 독서에 나오는 야합처럼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다시 진짜가 되는,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그런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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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토커의 경우는 다르지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
지금 미움으로 가득 차 있고 원수같은 사람 때문에 힘겨운 사람을 하느님의 그 큰 품으로 제가 대신 안아주겠습니다. 얼마나 힘드세요? 위로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정의없는 사랑이 아닙니다ㆍ 냉철한 사고와 판단이 있은 후, 그것을 껴안아 주는 그런 사랑입니다. 사랑해아 한다고 무조건적으로 사랑 사랑,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과 용서는 내게서 시작되야 하고 나를 살리는 최선입니다. 원한 품고 살면 내가 죽습니다.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저도 용서가 어려워 제가 쓰러지고 온 몸이 아플정도로 힘든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지금, 내 맘에 사랑의 촛불을 켜고 날 잡아끄는 어둠을 태우며 오늘을 기쁘고 열정적으로 살다보면 원수가 내게 미치던 힘이 빠지고 사랑의 힘이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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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사랑에 전문가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불완전한 사랑의 전문가들입니다.
사랑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기에 제자신을 아프게 돌아보게 합니다.
불완전한 제 자신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제 자신 또한 누군가의 원수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청합니다.
미움과 분노 적개심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가로막는 오만과 교만을 깨닫습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온전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불완전이 있기에 완전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낮아지시는 십자가의 여정을 다시 만납니다.
낮아지는 것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과정에 충실한 것이 사랑의 본래 모습임을 믿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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