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기 주담대’ 막차 쏠림 혼란
“제도 바뀌기 전에 막차 타야 합니다.” “막히기 전에 서두르세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이처럼 대출을 부추기는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백 년 대출’로도 불리는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얘기다. 지난달부터 상품을 출시했던 시중은행들이 갑자기 가입 연령을 제한하거나 아예 판매 중단을 예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절판 위기에 소비자들이 몰리면서 최근 1주 사이에 1조 원 가까이 불어났다.
▷출시 두 달이 채 안 된 상품이 철퇴를 맞은 것은 최근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증가의 원인으로 50년 만기 주담대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가계대출 잔액은 4월부터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증가했다. 금융당국은 50년 만기 주담대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이 된다고 봤다. DSR 규제에 따라 연간 원리금 상환액이 연소득의 40%를 넘을 수 없는데, 만기가 길어지면 원리금 규모가 줄어 대출 한도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50년 만기 주담대는 사실 현 정부의 작품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국정과제로 검토해 지난해 5월 민생안정 프로젝트의 방안으로 제시했다. 고금리 시기 차주들의 원리금 부담을 덜어주고 대출 규제로 끊어졌던 주거 사다리를 다시 연결한다는 취지였다. 지난해 8월 한국주택금융공사가 50년 만기의 보금자리론과 적격대출을 출시했고, 올해 1월 또 50년 만기 특례보금자리론을 내놨다. 이에 은행들도 정부 기조에 맞춰 초장기 대출 상품을 내놨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부가 은행 탓을 하니 은행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정부가 50년 만기 주담대의 가입 연령을 ‘만 34세’ 등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중장년층들은 역차별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생애 최초 주택마련 가구주 연령은 대략 38∼40세다. 해외에서도 50∼60년 초장기 주담대가 많지만 나이로 가입을 제한하는 건 일본, 싱가포르 등을 제외하면 드물다. 50년 만기가 문제라면 40년 만기도 마찬가지다. 40세의 50년 대출은 안 되고, 50세의 40년 대출은 된다면 형평성에 맞지 않다.
▷사실 가계대출을 키운 주범은 정부다. 올해 들어 정부의 연이은 부동산 규제 완화와 특례보금자리론 등 정책대출 상품 출시가 부동산 매수 심리에 군불을 지폈다. 특례보금자리론은 출시 반년 만에 31조 원이 몰리며 가계대출 확대를 주도했다. 금융당국은 ‘상생금융’을 내세우며 시중은행에 대출금리를 낮추라고 압박했다. 기준금리를 올리며 긴축에 나선 한국은행과 엇박자를 낸 것이다. 최근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대출 태도가 느슨해진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느슨했던 건 오히려 금융당국이 아닌가.
김재영 논설위원
“당국 장려한 ‘50년 주담대’, 빚 주범이라니” 은행 혼란
금융권, 당국 ‘오락가락 행보’ 비판
금리 상승기에 취약차주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출시됐던 50년 만기의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이 은행권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 상품이 대출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등 부작용이 커지자 금융당국이 가계빚 억제를 위해 은행권에 대출 억제를 압박하고 있어서다.
은행들이 당국의 압박에 50년 주담대를 중단하려 하면서 이를 통해 내 집 마련을 계획했던 소비자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은행 창구에는 ‘막차’를 타려는 대출자들이 몰리면서 대출 잔액은 7일(영업일 기준) 만에 1조 원 가까이 불어났다. 금융당국의 ‘갈지(之)자’ 행보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 가계 빚 주범 몰린 50년 만기 주담대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DGB대구은행은 다음 달부터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의 만기 기한을 40년으로 단축할 예정이다. NH농협은행은 2조 원의 한도가 소진됐다는 이유로 이달 말까지만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을 판매한다. BNK경남은행도 관련 상품 판매를 28일부터 중단한다. 올해 초 가장 먼저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을 내놨던 Sh수협은행은 이달 내 가입 연령을 만 34세로 제한할 방침이다.
최근 은행권이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을 축소하는 건 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우회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금융당국의 우려 때문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16일 50년 만기 주담대의 연령 제한 가능성에 대해 “공감하며 보고 있다”며 “어떤 연령대에서 어떤 목적으로 쓰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봐야 어느 정도까지는 용인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조금 더 타이트하게 관리돼야 한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소비자 입장에서 만기가 늘면 대출 한도는 높아지고 은행에 매달 갚아야 할 원리금은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당국은 향후 근로소득을 기대하기 어려운 60대까지 받을 수 있는 50년 만기 주담대가 DSR 규제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중 신한은행 외에는 이 상품의 연령 제한이 없는 상황이다.
● 초장기 권하더니… 소비자 혼란 가중
초장기 주담대는 금융당국이 고금리 시기 대출자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권장해온 상품이다. 금융당국은 “금리인상기에 취약차주의 월 상환액을 줄여주겠다”며 2021년 2월 40년 만기의 보금자리론을 도입했다. 지난해 6월엔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 출시도 승인할 것이라 예고했다. 그 결과 올 1월 수협은행을 시작으로 지난달 초엔 시중은행까지 잇달아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을 도입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초장기 주담대 상품은 금융당국이 장려한 것인데, 가계부채가 늘어나니 이제 와서 은행들만 몰아붙이고 있다”고 했다.
금융당국의 입장 변화에 혼란은 고스란히 금융소비자들의 몫이 됐다. 이 상품으로 최근 대출을 받은 직장인 A 씨는 “은행에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다음 달부터 대출이 중단된다고 해서 최대한 빨리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면서 “주변에도 빨리 받으라고 권하고 있다”고 했다. 가계 빚 급증의 주범이 50년 만기 주담대라는 당국의 지적에도 막바지 대출에 탑승하려는 소비자들이 대거 은행으로 몰렸다. 5대 은행이 취급하고 있는 관련 상품의 잔액은 이달 21일 기준 2조4945억 원으로 7일 전(영업일 기준)보다 66.0%(9915억 원) 불어났다.
이 같은 혼란은 금융당국이 이르면 이달 말 50년 주담대 상품 관련 개선책을 내놓을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은 당초 시사했던 연령제한 대신 생애주기별로 소득을 따져 해당 상품에 대한 대출을 내주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권과 최종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면서 “시장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개선책을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
황성호 기자, 김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