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데쉴러 집터 (인천 중구 신포로39번길 42, 송학동 2가 18)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 재정책임자 데쉴러(David W. Deshler)가 인천에서 최초로 일본식 정원을 갖춘 양옥을 짓고 살았던 집터이다
(그 집이 아름다워 고종황제가 구입하려고도 했다는 말이 있다)
♤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는 생소하겠지만 운산광산이라 하여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 있는 금광으로, 많은 양의 금을 본 미국인들이 '노! 터치, 노! 터치'를 연발하여 이를 들은 광부들이 '노다지, 노다지'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그곳을 운영했던 회사다
그의 집은 데쉴러가 1905년 이후 중국 북경의 록펠러재단에서 1922년까지 구매대행업을 하는 동안 '우로꼬'라는 일본식 요리점(요정)으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영화 제작자 최철(탤런트 최불암씨의 부친)이 살았다
(최불암은 이집에 살 때 신흥초등학교를 다녔다)
한국전쟁 후에는 제일교회에서 다비다모자원으로 사용하다가,
1957년 인성여자중학교로 신축되었으나
그 건물마저 1978년 헐리고 인성초등학교가 들어서 운동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이민을 주선하기 시작해서 1905년 해외 이민이 전면 금지되기까지 총 7,500여 명의 한국인을 해외로 이민 시켜 커미션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데쉴러는 1923년 북경에서 나가사끼로 가 일본인 부인과 함께 만년을 보냈으며, 1927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요코하마 야마테 공원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10여년 전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갤릭호는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배는 당시 121명의 한인 이민단을 태우고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그래서 갤릭호가 출한한 1902년 12월22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공식 이민의 시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이민을 떠나는 한인들에게는 하와이 이민자 여행권(여권)이 들려 있었다
유민원에서 발행한 여행권은 왼쪽에 국한문 혼용으로, 오른쪽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다
이 여행권에는 '대한제국(大韓帝國) 해외여행장 (海外旅行章)', '유민원총재지장(綏民院總裁之章)' 이라는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모오스 집터 (인천 중구 신포로39번길 42, 송학동 2가 18-1)
지금은 주차장이 되었지만 모오스(James R. Morse)가 살던 집터이다(1898년경 지은 걸로 추정된다)
모오스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기도 하고 또 노다지로 유명한 운산금광을 운영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일본인들을 제치고 철도부설권을 따내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자금난(?)에 결국은 일본인에게 사업권을 넘기고 말았다
모오스의 집은 일제시대 때에는 일본인 기자 今井省三이 살다가 이후에는 곽상훈의원이 산 적이 있다
몇년 전까지 개인주택으로 있다가 현재는 인성학교 주차장에 포함이 되고 말았다
♤ 곽상훈(郭尙勳, 1896. 10. 21 ~ 1980. 1. 19)
3.1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이후 신간회, 상해 한인청년동맹 등 여러 단체에 가담해 활약하였다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되고,1949년 반민특위 위원으로 특위 검찰차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5선(1대~5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4,5대 국회에서 는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민주당 최고 위원이 되었으며, 1960년 6월 일시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였다
이어 제5대 국회에서 의장이 되었으나 5.16쿠데타 로 그만 두고 군사정권이 주는 감투는 거절하고 야인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이후 1972년 유신 체제에 참여하여 육영재단 이사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야당 동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인천경찰서 터 (인천시 중구 홍예문로 34, 송학동 3가 6)
우리나라에서 일본 경찰이 업무를 시작한 것은 개항지에 영사관이 설치되면서 그 안에 경찰서를 둔 것이 시초이다
인천에는 개항에 대비하여 1882년 4월에 인천이 일본 영사관을 설치하고 같은 해 일본은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거류민의 보호를 목적으로 1883년 영사관 구내 임시청사에 부속 경찰서를 처음 설치하였다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이사청 경찰로 개칭하였고 인원도 76명으로 늘어났고, 1907년 7월에는 한국경시청에 소속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부터는 경무총감부에 속하였고, 1919년 경기도 경찰부 관할이 되었다
강제 병합이후 지속적인 인천의 인구증가와 시가지 확대로 경찰업무가 급증하면서 1923년 5월 1일 이곳(중구 송학동 3가 6)에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해방때까지 20여 년간 고등계가 앞장서서 갖은 악행으로 선조들의 피와 눈물을 한없이 짜낸 곳이기도 하다
지나가기 조차 꺼리고 지겹고 무서운 곳이었는데 해방후에도 어쩔수 없이 계속 사용하다가 1978년 항동(중부경찰서로 개명)으로 신축이전 하였다
인천 일본영사관 구내에 있었던 최초의 경찰서 건물과 송학동에 있었던 건물도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두 건물 모두 남아있지 않다
인천병원 터 (인천시 중구 홍예문로 39, 송학동 2가 18-1)
일본영사관이 건립되던 해(1883년) 10월에 영사관 부속 관립병원(인천 일본의원)으로 문을 열었다
1888년 인천 내 일본 거류민이 경영을 맡아 인천공립병원이 되었다가 1906년에는 일본 정부의 원조를 얻어 거류민단 인천병원으로 개칭되었다
1936년 신흥동으로 이전해 가고(현 인천보건환경 연구원) 일본 헌병대가 들어섰다(해방이 되자마자 성난 주민들이 이 일본 헌병대 건물을 때려부쉈다고 한다)
제일장로교회에서는 이 자리에 무궁화유치원, 무궁화공민학교 등을 거쳐 1961년 인성여자고등 학교를 세웠다
인천공회당과 상공회의소 터 (인천시 중구 홍예문로 40, 송학동 3가 3-7)
인천부립 공회당은 1922년 12월 16일 설립이 되었다
공연, 집회, 교육, 오락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도 인성여고의 다목적홀로 쓰이고 있다
당시 인천 공회당 건설자금은 인천부와 인천상업 회의소와 나누어 부담하였고, 그에 따라 1층은 인천상업회의소(현재 인천상공회의소)가, 2층은 공회당으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 인천상공회의소
1885년 인천객주회란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한성상업회의소가 1년전인 1884년에 출범하였는데, 인천이 바로 뒤이었다는 점을 보면, 당시 얼마나 인천의 상업이 발달했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인천 상권을 일본상인과 청나라 상인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든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단체가 바로 인천객주회였다
이후 1905년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강제로 일본인 상업회의소와 합병되어 인천상업회의소(현재 인천상공회의소)가 되었다
인천공회당 건물은 한국전쟁때 크게 파손되어 방치되었다가 후에 다시 3층 건물로 재건되어 시민관이란 이름의 공연장으로 이용되었다
후에 주안 시민회관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시민들의 사랑을 받다가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져버리고 '옛 시민회관 사거리' , '옛 시민회관 쉼터' 등의 지명만 남겨두고 있다
그 바통은 구월동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이어받았다
♤ 1939년 인천배영동지회를 인천공회당에서 결성하였다
그해 중국 천진조계에서 발생한 항일인사에 대한 인도문제를 두고 일본과 영국이 갈등을 빚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에서 친일언론들의 주도로 영국을 배척하는, 배영동지회가 각지에 결성된다
배영동지회는 대표적인 친일단체 중 하나인데, 이런 단체의 결성모임이 공회당에서 열렸다는 사실이 일제가 공회당을 전국 각지에 설치한 숨은 의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인천세무서 터 (인천시 중구 송학동 3가 3-1)
인천 최초의 세무서는 1934년 5월 1일 개설이 되었다
지금은 건물이 헐리고 주차장으로 쓰여지고 있다
개항기 시절에 신동공사(紳董公社)가 있던 곳인데, 신동공사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자치회라고 할 수 있다
1880년대 중반 쯤에 지어진 신동공사 건물은 112평의 단층의 붉은 벽돌건물이었으며 남향이었고 앞쪽으로는 넓은 뜰이 있었고 건물 뒤쪽으로 유치장과 경찰 숙소로 쓰이던 2층 건물이 있었다
1906년에는 맞은편에 부립병원이 생기고 1914년 조계지는 폐지가 되어 신동공사 회의실 건물은 부립병원 병원장 관사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부속건물은 인성여고 기숙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1934년 세무서가 들어설 때 회의실 건물과 부속건물이 사라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예문 (인천시 중구 송학동3가 8)
1883년 1월, 개항 후 바다 건너온 외국인들은 산 좋고 물 좋은 응봉산 일대에 터를 잡았다
그 산허리를 잘라 만든 석문(石門)이 홍예문(虹霓門)이다
홍예문이 건립된 지대는 인천 항구와 조선인 마을의 경계 지역으로 일본인들이 자국의 조계를 확장하기 위하여 1906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된 것이다
이로써 각국조계와 축현역, 만석동 일대가 연결되었다
여기엔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개항 후 중앙동과 신포동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은 전동과 만석동 방면으로 영역을 넓히려 했다
그 길을 내느라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암석을 무너뜨리고 중국 석수장이와 한국 노동자들이 피땀 흘리며 산을 뚫는데 3년이 걸렸다
지금도 홍예문 벽에는 쪼아내다만 거대한 암석 뿌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예문은 예쁘다
세월의 이끼로 도배된 무지개 모양 문은 이 동네의 풍치를 돋우어 준다
높이 13m의 벽을 휘감은 담쟁이덩굴은 어느 계절이든 운치가 있어 그대로 그림이 되니, 한국의 영화감독들이 '영화 배경으로 아름다운 장소'로 꼽기도 했다
무지개 문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 본다
남쪽 끄트머리 사이로 인천항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문 사이로 난 길은 인천항과 동인천을 가장 빠르게 잇는다
110여 년 동안, 이 길 사이로 수많은 사연이 스쳐 지났다
폭 6.7m로 처음 우마차가 다니던 길은, 차 한 대가 지나기에도 벅차다
한쪽에서 차가오면 다른 방향 차는 들어서지 못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 좁은 길로, 시대의 아픈 역사가 관통했다
단 1km, 오르막길로 시작해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이 길이 유독 길게 느껴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