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 앤드루스 부부(Mr and Mrs Andrews), 1750년경, 캔버스에 유채, 69.8×119.4cm
불쑥 나온 말 “오래도 살았다”
“벌써 75년이라, 오래도 살았다.”
“누구 말이에요?”
“나 이야기야.”
“아니, 아버지는 별 말씀도…."
광복절 아침 식탁에 앉으면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무심코 나온 제 말끝에 자연히 계속된 딸아이와의 대화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 살았다”는 말을 아이들 앞에서 해본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니,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 살았다”는 말에는 어딘지 부정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듯해 애써 피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애비가 갑자기 “오래 살았다”는 말을 하니 딸아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광복절 아침에는 이 말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튀어나왔습니다.
75년 전, 일본의 패전으로 노예생활 같은 군 복무에서 풀려나 수많은 동포의 귀국 꿈을 앗아간 현해탄을 건너 구사일생으로 부모님이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때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한마디였습니다.
그때 부모님이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일은 제 일생에서 가장 뜻있는 효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적이고 죽음으로 연결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인 징병(徵兵) 1기생에 해당하는 제가 소집되어 용산부대에 입대한 것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이 임박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던 1945년 3월이었습니다.
4주의 기본훈련이 끝나고 배치된 곳은 일본군이 연전연패(連戰連敗)하던 남방이 아니라 후방인 도쿄(東京) 북쪽의 시골 마을에 신설된 부대였습니다. 고향 집에 소식을 보내라는 명령과 군사우편엽서 한 장을 받고, 언제 배달될지 모르지만 우선 일선에 배치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아시겠지 하고 일본어 편지를 썼습니다.
시골 마을 공회당을 고쳐 급조한 병사에서 우리 조선인 신병 30여 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7~8명의 일본인 고참 군인과 ‘농경부대(農耕部隊)’라는 생소한 부대 이름이었습니다. 광복 후 발간된 일본 단행본에 의하면, 일본 패전 5개월 전에 노동력이 필요해 급조한 특수 목적 부대로 일본 본토에 다섯 소대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명색이 군 부대라면서 무기라고는 목총 한 자루도 없고 대신 낫, 곡괭이, 삽 등 노동 기구만이 주로 농촌 출신인 우리 신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 많은 신병들 중에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본군이 필요했던 것은 오직 우리들의 노동력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착 다음 날부터 훈련이 아닌 고된 노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 용어로 ‘타코쓰보(문어 항아리)’라는 1인용 참호(塹壕)를 파는 일이 주요 임무였습니다. 농지가 아닌 야산 비슷한 땅이어서 참호 만들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농촌 출신 신병들은 생소한 일본말 호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사훈련보다 이 노동이 훨씬 마음 편하다고 했습니다. 저와 광주(光州) 출신의 신병 한사람이 통역을 맡았지만 그렇다고 노동을 면제받지는 못했습니다. 한 1주일 지나니 온몸이 피로의 극에 달해 하루는 아침 조례 시간에 실신하여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일본군 상관들의 설명은 없었지만, 이 참호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를 미군의 이 지역 상륙에 대비하기 위한 것임은 누구 눈에도 뻔하였습니다. 당시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은 거의 끝나 일본군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전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3월과 5월 두 차례의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 일본의 주요 도시는 미군의 B29 폭격기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제공권을 거의 확보한 연합군은 전투기를 동원하여 일반 시민의 생활까지 위협했습니다. 우리도 작업 도중 몇 번 기총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이런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왔으니 부모님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도 반세기가 넘어 저도 모르게 “오래 살았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다만 이 말의 약간 부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평소에는 애써 이 말 하기를 조심했을 뿐입니다.
아이들도 세배 때의 인사말에 “오래 사세요”라는 표현에 “건강하게”라는 말을 꼭 붙여 사용할 정도로 신경을 쓰는 나이입니다. 일반인이 이 말을 쓸 때도 퍽 조심하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5~6년 전 외손자의 대학 졸업기념 전시회 참관하러 가족들과 대전에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역전에서 택시를 타는데 운전기사가 저를 보고 “90세 되셨지요?” 하고 제 나이를 정확하게 맞혔습니다. “해병대 출신인 우리 아버지가 금년 90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철도기관사가 되는 것을 꿈꾸어 오던 외손자는 군 복무를 마친 뒤 4년 전 철도기관사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 교외를 다니는 지하철과 열차의 기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가 어려운 취직 시험에 합격했을 때 저는 “오래 산 보람이 있다”고 정말 기뻐했습니다.
3년 전, 동네 외과병원에서 젊은 물리치료사가 의사의 처방전을 보면서 “1924년생이시네요. 정말 오래 사셨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탄복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부정적인 분위기는 조금도 못 느꼈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장성해 독립해 나갔고 한때 걱정했던 저의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오직 코로나19 바이러스 소동으로 그나마 누렸던 조그마한 자유가 제한되어 아쉽습니다. 1년에 두세 번 가족들과 휴가여행을 즐기고, 가족 생일엔 근처 호텔이나 식당에서 회식을 하는 조그마한 즐거움도 지금 삼가고 있습니다.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소동은 단시일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앞날이 많이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좋은 세상 다 봤다’는 시쳇말이 한층 더 실감 있게 느껴집니다.
제가 회원으로 있는 어느 인터넷 카페에 최근 서울대 의대 모 교수의 ‘죽음학’ 강의를 소개하는 글이 있어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딸아이가 유튜브에서 이 교수의 강의 두 편을 찾아주어 그것도 보았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글을 수년 전 일본 잡지에서 읽은 기억도 있습니다.
저의 선친은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만, 저는 이름만 불교도이고 건강할 때 1년에 두세 번 절을 찾을 정도였습니다. 어릴 적에 불교의 지옥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무서워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는 “오래 살았다”는 말을 아이들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나이여서 터놓고 죽음 문제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옮겨온 글] / 출처; 2020년 09월 07일 (월) 00:00:05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황경춘(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왕실 여성을 위해 출발한 궁궐, 창경궁
[신병주의 역사유적탐방]
조선시대 궁궐 중 왕실 여성들과 가장 인연이 깊은 궁궐은 어디일까. 바로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성종 연간에 처음 지어졌다. 창경궁을 지은 곳에는 원래 태종이 거처한 수강궁이 있었다. 태종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세종이 부왕을 위해 지은 곳이 수강궁이다. 1482년(성종 13) 성종은 수강궁을 확장,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이 된 후에도 생존해 계시는 왕실의 세 대비, 세조의 비 정희왕후,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위한 처소를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있음에도 창경궁을 건설한 데는 왕실의 여성 어른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강궁은 1485년 창경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창경궁의 명정전 영역
창경궁의 정전(正殿)인 명정전이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만들어진 것도, 이곳을 왕실 여인들의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지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창경궁의 각 건물은 사극 속 주인공들과 깊은 인연이 있다. 경춘전이 대표적이다. 경춘전에서 제일 먼저 생활했던 여인은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다. 그녀는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아내로, 남편이 요절하여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대신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는 여성을 위한 지침서인 ‘내훈’을 저술했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도 경춘전에서 거처하였다. 사극에서 장희빈의 라이벌로 자주 등장하는 인현왕후는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왕비의 자리에서 폐출되고 복위되는 등 정치적 파란을 겪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왕비의 자리로 복위한 후 경춘전에서 생활하다가, 1701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도 경춘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혜경궁과 경춘전의 인연은 세자빈 간택을 받은 것에서 시작되며, 이곳에서 정조를 낳기도 했다. 혜경궁이 노후의 시간을 경춘전에서 보내며 집필한 책이 바로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한중록’이다. 왕실 여성들의 향기가 남아 있는 창경궁을 찾아보기를 바란다.
[옮겨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신병주(건국대 교수・사학) / 2020-09-04 22:33:15
900일 지옥서 살아난 레닌그라드
[금주의 역사 / 9월7~13일]
1941년 9월8일 시작된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고작 한 도시를 두고 20세기의 현대무기가 총동원되다시피 한 공방전이 2년 반이나 이어졌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다.
1453년에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 성이 오스만튀르크 군의 유치한 대포에 두 달을 버티지 못했다.
그 무대가 레닌그라드라는 점도 공교롭다.
703년 표트르1세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려 서쪽 끝의 늪지대인 그곳에 ‘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의 수도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서방 국가들이 혁명을 좌절시키려 하자 페테르스부르크가 위험해졌다. 이에 러시아는 모스크바로 재천도 했고 1924년 레닌이 죽자 도시 이름도 레닌그라드로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1차 대전 시기에 화를 당할 뻔했던 이 도시가 2차 대전에 화를 당한 것이다.
혁명 당시 걱정했던 대로 이 도시는 공격에 너무 취약한 지형이었다. 도시의 서쪽과 동쪽은 바다와 호수가 있고 북쪽은 육지지만 당시 적국이었던 핀란드와의 접경이었다. 그곳을 남쪽에서 밀고 간 독일군은 도시 점령이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는 축하연을 준비하고 ‘아돌프스부르크(Adolfsburg)’라는 새 도시 이름까지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는 400만의 사상자를 내면서, 그리고 주민들은 인육까지 먹어가면서 버티었다.
그래서 결국 포위를 푼 독일군은 우선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나아가서는 대소 전쟁에서, 그리고 2차 대전에서 졌다. 소련은 지옥도 같이 돼버린 이 도시에서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됐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며 해골의 미소를 지었다.
[옮겨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양평(언론인) / 2020-09-06 22:10:53
중국집의 이상한 중국어
[문화] 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중국 음식점의 메뉴판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이 발견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자 돌림인 깐풍기, 라조기, 유린기와 ‘육’자 돌림인 탕수육, 라조육 등이다. 뭔가 관련이 있으니 이런 돌림자를 쓰는 것일 텐데 각각의 소리를 생각해 보면 조금 의아해진다. 게다가 기스면, 유산슬, 난자완스 등에 다다르면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깐풍기’는 아무래도 중국어 냄새가 난다. 한자로는 ‘乾烹鷄(건팽계)’니 한국식도 아니고 규범에 따라 읽으면 ‘간펑지’니 중국식도 아니다. ‘기’자 돌림은 닭을 주재료로 하는데 ‘鷄’의 중국어 표준발음은 ‘지(ji)’인데 어찌 된 일인지 죄다 ‘기’다. 중국 산둥(山東)이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다 보니 산둥 출신 화교가 많은 까닭이다. 이들이 닭요리를 메뉴에 올리면서 자신들의 방언으로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중식당의 중국어 일부는 산둥 말이다.
‘육’은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한 것인데 중국식 발음으로는 ‘러우(rou)’가 돼야 하니 역시 이상하다. 아니 ‘탕수육’ 자체가 우리는 ‘糖水肉(당수육)’으로 쓰고 중국에서는 ‘糖醋肉(당초육)’으로 쓰니 발음도 한자도 다 제멋대로다. 유산슬은 실처럼 채를 쳐 만들었다는 뜻의 ‘溜三絲(유삼사)’이다. 마지막 글자의 중국식 발음은 ‘스’인데 중국 일부 지역의 발음 습관이 반영돼 ‘슬’이 됐다.
닭고기 육수에 면과 가늘게 채를 썬 재료가 들어가는 기스면은 ‘鷄絲麵(계사면)’이다. 첫 글자는 산둥식으로 읽고 두 번째 글자는 유산슬과 같은 글자인데 ‘스’로 읽는다. 마지막 글자는 우리의 한자음대로 읽는다.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산둥 방언의 ‘짬뽕’이 중식당의 음식 이름인 것이다. 이상하다거나 엉터리라고 탓할 일이 아니다. 흔히 ‘중국집’이라 하지만 오래전부터 이 땅에 터를 잡고 ‘우리 음식’을 만들고 팔아온 결과일 뿐이다.
[옮겨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한성우(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2020년 09월 04일(金)
옥잠화
맑은 이슬이 맺히는 ‘백로(白露)’
[이효성의 절기 에세이]
'가을 햇볕 한 줌은 나락 한 섬' 가을 정취는 익어가고
봉숭아 꽃물 손톱에 남으면 소녀들 '첫사랑의 설레움'
오늘(9월 7일)은 절기상 풀잎에 맑은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white dew)가 시작되는 날이다. 밤에 기온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기에 포함돼 있는 수증기가 엉겨 풀잎에 이슬로 맺힌다. 아침과 저녁으로는 서늘하거나 차가운 기운이 돌고 한낮에도 선선한 바람이 분다. 여치를 비롯한 풀벌레 소리는 계속되지만 매미 소리는 현저히 준다. 대기는 맑고 하늘은 높은 초가을의 전형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갈수록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코발트 빛으로 변해가고 높아만 진다. 느티나무 잎에서는 점점 초록색이 가시면서 노란색이 드러나고 담쟁이덩쿨과 벚나무, 회양목, 화살나무 등의 잎 가운데 붉게 단풍이 든다. 나무들의 잎에서 변색이 일어나 가을의 정취가 완연해진다.
백로는 9월 초순에 들기 때문에 일반 달력상으로도 가을이다. 하지만 아직 기온은 늦여름의 영향이 남아서 낮에는 더운 편이다. 특히 북태평양 고기압이 늦게까지 한반도에 머물 때는 늦더위가 적지 않은 위세를 떨치기도 한다. 다만 그 더위가 오래 가진 못한다. 태양은 이미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지 한 달이 넘었기에 낮에는 자못 더워도 조석(朝夕)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분다. 그래서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봄 추위와 노인의 건강’이라는 같은 뜻의 ‘가을 더위와 노인의 건강’이라는 속담도 있다.
‘가을 햇볕 한 줌은 나락 한 섬’ 가을은 익어가고…
한낮 더위에도 불구하고 백로 절기는 명실상부하게 가을의 정취가 묻어나는 계절이다. 이 무렵 귀뚜라미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더 처량하고, 삽상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에 길가의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거린다. 초가을의 정취를 한껏 자아낸다. 촉각과 시각에 나타난 자연의 변화로 가을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백로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증언하는 절기다.
초가을을 손짓하는 백로를 하루 앞둔 6일 풀잎에 맑은 이슬이 맺혀 있다. / 이효성 자문위원장
가을은 결실의 계절로 주요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백로 어간이다. 백로에는 맑은 날이 이어지고, 기온도 적당하고, 한낮에는 햇볕도 뜨거워서, 곡식은 여물기에, 과일은 익어가며 단맛을 더하기에, 더없이 좋다. 백로는 벼의 출수와 수정이 끝나고 여무는 때로 벼농사의 성패를 짓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백로 안에 벼 안 팬 집에는 가지도 마라’라는 속담이 있다. 벼의 결실을 위해서는 뜨거운 햇살이 긴요해 ‘가을 햇볕 한 줌은 나락 한 섬’이라는 속담도 생겼다. 이 무렵부터 새떼로부터 영근 곡식을 지키기 위해 허수아비가 불침번을 선다.
봉숭아 꽃물 남으면 소녀들은 ‘첫사랑의 설레움’
흔히 들국화로 통칭되는 국화과의 식물 가운데 개미취와 벌개미취, 쑥부쟁이, 금불초(金佛草), 과꽃 등은 여름부터 꽃이 핀다. 하지만 구절초(九折草)와 산국(山菊) 그리고 감국(甘菊)은 백로 무렵부터 피기 시작해 10월까지 피어나는 온전한 가을꽃이다. 아녀자들은 손톱이나 발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봉숭아꽃과 잎을 백반을 함께 섞어 찧어서 손톱이나 발톱에 얹고 호박잎과 피마자잎, 또는 헝겊으로 싸서 하룻밤을 묶어두면 그곳에 봉숭아 꽃물이 연분홍색으로 곱게 든다. 그 물이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 끝에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이 있다. 소녀들은 가슴을 설레며 어서 첫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백로 무렵부터 버섯의 철이다. 산속의 죽은 밤나무나 참나무에서 자라는 자연산 표고도 이 무렵부터 딸 수 있다. 참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능이라는 버섯은 9월부터 10월까지 딸 수 있으며 백로와 추분 어간에 가장 많이 난다. 또 인삼처럼 사포닌 성분이 많아 사삼(沙蔘)이라고도 불리는 더덕도 백로 어간부터 딴다. 먹딸기라고도 불리는 까마중의 녹색 열매가 까맣게 익는데 달고 맛이 좋아 과거에는 어린아이들이 들에서 놀면서 많이 따먹었다.
[옮겨온 글] / 출처; 아시아투데이 / 이효성(아시아투데이 자문위원장, 전 방송통신위원장) / 2020. 09. 07. 05:00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스위스)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