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로또에 맞아 몇 백억 원이 당첨되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도 이제 부자가 되었으니 부자 흉내를 내려고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강남 아파트를 사고 비싼 스포츠카를 사고 럭셔리 명품으로 도배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상류사회에 진입하는 것은 실패할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로또를 맞거나 땅이 수용되어 부자가 된 졸부는 결국 상류사회에서 왕따를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류사회는 돈만 많다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그들만의 불문율이 있기 때문이다.
브루외디((Pierre Bourdieu)는 각 계급간에 '구별짓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계급을 뛰어넘으려면 경제적 자본 이외에도 세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1. 문화자본(capital culturel)
2. 학벌자본(capital scolaire)
3.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
이렇게 세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1. 문화자본(capital culturel)
우선 상류사회에서 문화자본이란 얼마나 문화와 예술에 대해 조예가 깊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것은 음악, 미술, 스포츠 등을 망라한다.
경박하고 무식한 트로트가 아니라 리스트, 파가니니, 슈베르트, 모짜르트 등은 알아야 한다.
전시회장에서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 얘기는 할 줄 알아야 한다.
골프, 승마와 같은 고급스포츠를 즐길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문화자본이라는 것이 잘 보면 19세기 브루주아가 돈을 벌어 즐기던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부르주아가 지금의 자본가 계급이 된 것이다.
따라서 상류사회는 그 당시 유행했던 예술품을 수집하고 음악을 들으며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다.
2. 학벌자본(capital scolaire)
한국에서는 스카이와 같은 명문대를 졸업하면 학력자본이 생긴다.
정확히는 학력자본이 아니라 학벌자본이다.
학력은 대학교를 나왔냐? 대학원을 나왔냐? 이지만 학벌은 명문대를 학부로 졸업했느냐로 따진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법학과를 동시에 나와 지금은 60대 정도가 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하는 얘기가 자기가 경제학과 동창회를 가면 웬만한 사람은 대기업 사장, 상무이고 법학과 동문회를 가면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이라고 한다.
즉 학벌이 좋으면 생기는 것이 바로 학벌자본이다.
3.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은 문화자본과 학벌자본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바로 사회관계자본이다.
의대를 들어가면 의사친구가 생기고 로스쿨에 들어가면 변호사, 판검사 친구가 생기는 것이 바로 사회관계자본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자본이 있다고 상류사회로 가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자본 이외에 위의 세 가지 자본을 더해야 그제서야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자본을 획득하려면 최소한 20년~30년이 걸린다.
벼락부자는 결국 자신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니 이 세가지 자본을 가지려는 노력을 해야 겨우 자식 대에서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그래서 로또 맞은 벼락부자는 자식들을 명문대 보내려 고액과외를 시키고 유학을 보내는 것이다.
경제적 자본이 있다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학벌자본이기 때문이다.
즉 학벌자본,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이 상류사회로 들어가는 진입장벽인 셈이다.
그러나 세 가지 자본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자본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스카이를 나오고 대기업 임원이 되어도 결국 돈이 없다면 상류사회에서는 고급 노예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계급은 어떻게 나뉠까?
1. 상류층
2. 중산층
3. 하류층
이렇게 3가지로 나뉜다.
하류층은 중산층이 되려 노력하고 중산층은 상류층이 되려 노력한다.
그렇다면 하류층, 중산층, 상류층의 불문율을 알아보자.
불문율
1. 돈
가끔 해외토픽 등을 보면 로또를 맞아 몇 백억이 생긴 벼락부자가 몇 년 뒤에는 쫄딱 망해서 거지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곤한다.
왜 그럴까?
하류층은 '돈이 생기면 나눠갖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큰 돈을 벌어보지 못했다.
따라서 운용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그 돈을 이웃들에게 나눠주어 자신이 어려워졌을 때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형제, 자매, 친척들에게 아파트, 자동차 등을 사준다 그리고 돈을 펑펑 써버리고 결국은 몇 년 안 가서 거지가 된다.
하류층이 돈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원시공산사회와 같다.
원시인들은 냉장고가 없었다.
따라서 이웃이 냉장고다.
그래서 사냥을 해서 사슴을 잡아왔다면 이웃들에게 나눠 주어 이웃집 배에 저장시킨다.
왜냐하면 어차피 큰 사슴을 다 먹을 수 없고 놔두면 썩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냥을 못한 날이나 늙어서 사냥을 할 수 없을 때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그것이 원시공산사회의 경제논리다.
돈은 몸으로만 벌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태도가 생긴다.
그러나 중산층과 상류층은 다르다.
신석기 혁명은 농업혁명이다.
이유는 쌀이나 밀이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농업의 잉여 농산물 때문에 노예와 지배자의 계급이 생겨나고 더 많은 생산지인 농토를 빼앗으려 전쟁이 빈번해졌다.
따라서 중산층은 돈을 관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상류층은 돈을 보존하고 투자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류층은 돈을 소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 가족구성
하류층은 여성중심으로 돌아간다.
중산층은 남성중심으로 돌아가고 상류층은 돈 있는 사람중심으로 돌아간다.
왜 하류층은 여성중심일까?
하류층의 경우 결혼을 했다가 이혼하는 가정이 많다.
그러나 변호사가 필요없다.
왜냐하면 나눌 자산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재혼을 했다면 할머니 또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길러지는 경우가 많다.
재혼을 여러 번 했다면 배다른 형제들과 같이 살 수도 있다.
이 때 가족의 중심은 여성인 어머니다.
그래서 하류층의 아이가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훈육 잘 하려면 가르침을 주거나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어머니도 아이를 어떻게 훈육시켜야 할지 모른다.
따라서 체벌과 음식으로 훈육을 시킨다.
잘못하면 때리고 이후 치킨을 시켜줘 용서를 한다.
그러나 아이는 왜 맞았는지 모르니 다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문제아가 된다.
그래서 대부분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란 아이는 폭력적이 된다.
3. 음식
하류층은 '배부르게 먹었나?'가 중요하다.
중산층은 '맛이 있었나?'가 중요하다.
그러나 상류층은 '보기 좋았나?'가 중요하다.
하류층은 음식은 생존이고 중산층은 질이 중요하며 상류층은 예술적 감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대물림된다.
대물림되는 가난은 두 세대 이상이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류층에서 중산층으로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계층을 이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과 인간관계 두 가지다.
하류층에서 중산층으로 가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만 있어도 된다.
공부를 잘해 명문대 진학을 하거나 또는 전문직이 되면 된다.
어차피 육체를 쓰는 것은 똑같으나 하류층은 주로 몸을 쓰고 중산층은 주로 머리를 쓴다.
그러나 상류층으로 가려면 교육뿐 아니라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배우자와 조언자다.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계층으로 이동하려면 다른 계층의 불문율을 가르쳐주고 보여줄 배우자나 조언자가 필요한 것이다.
배우자로 예를 들면 재벌2세 딸과 결혼한 사위나 재벌2세와 결혼한 아나운서 등이 대표적이다.
계층 이동의 조언자는 학교에서 만날 수도 있고 사회에서 만날 수도 있다.
일본에서도 화승총을 제작할 때 책을 아무리 봐도 총은 만들 수 없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총을 만들었던 기술자가 와서야 총을 만들 수 있었다.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상류사회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중산층과 하류층이 상류사회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계층상승하려는 습성을 허영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산층은 돈을 벌어 명품을 사고 비싼 전세에도 강남으로 이사를 가고 번 돈의 대부분 고액과외를 쓴다.
허영이 왜 문제가 되는가?
허영은 미래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상류층이 되기 위해서는 부족한 것이 돈이다.
따라서 현재 부족한 돈을 벌어 나중에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금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는 노예, 미래는 주인이 되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논리다.
자본주의 논리는 종교의 논리와 같다.
기독교는 현재의 고통을 받는 것이 죽은 이후 천국에 가기 위함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종교 모두 미래를 위해 현재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에 포획되면 현재를 살아가는 내 삶은 주인이 아닌 노예로 살게 된다.
자본주의의 논리를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니체는 영원회귀로 극복하라 했다.
영원회귀란 현재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종교의 논리는 현재의 순간적인 고통이 지나면 죽은 다음 영원한 천국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회귀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고통은 다음 생에도 고통이 영원히 반복된다.
반대로 현재 즐겁게 살면 죽은 다음 다음 생에서도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회귀의 논리로 본다면 고통받고 살 이유가 없다.
수 십년 간을 벽만 보며 수도를 하는 면벽도사가 있었다.
그 면벽도사가 죽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수 십년을 결혼도 안 하고 벽만 보며 욕망을 억누르며 내 생을 다 바쳐 수도를 했는데 그 이유는 극락에 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만약 죽고나니 극락이 없으면 어떻하지?
내 생은 망한 것인가?
결론 : 나는 생이 반복되거나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를 믿지 않는다.
컴퓨터의 모니터처럼 툭 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다음 아무 것도 없을 수 있다.
허영을 쫓으며 돈만 버는 삶은 면벽도사와 같이 고통만 받다 망한 삶이다.
현재를 즐기자.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