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에세이(18)】
부활한 공업축제 / 김잠출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주변의 풍경이 모두 달라졌다. 새싹이 내뿜는 기운과 꽃들을 보면서 처음 마주한 듯 신세계를 본 듯 환호했는데 그 시간은 짧았다. 이젠 싱그러운 잎과 물오른 가지, 한층 요염하고 더욱 풍만해진 꽃들과 마주한다. 접시꽃은 탱탱해졌고 능소화는 담 너머 얼굴을 내밀고 누구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때죽나무는 뎅그렁 종소리를 낼 것 같은 하얀 종들을 매달았다.
시간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변화를 가져다준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도 변해야 한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올 것이고 나는 또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공업축제’ 부활하다
1998년 4월, 울산MBC 창사 30주년 특집 방송을 맡았다. 외지인 비율이 80%를 넘는 시기였던 만큼 울산의 속살을 알려주고 애향심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에 타이틀을 <울산을 아십니까 - 100문 100답>으로 정했다. 울산의 역사와 문화, 상징물을 소개하며 퀴즈를 내고 전문가와 관계자들이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가장 먼저 공업탑과 공업축제를 다뤘다. 취재 과정에서 울산의 상징인 ‘공업탑’을 설계한 조각가 박칠성 씨를 찾아내 인터뷰했다. 그때까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공업탑에 얽힌 사연과 의미를 전한 것은 큰 보람이었다. 나중에 박 씨는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고 울산시 명예시민이 되었다.
울산은 1962년 공업지구로 지정됐고 박 씨의 아이디어로 '울산공업센터 건립 기념탑'(공업탑)을 건립했다. 박 씨가 설계를 맡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인구 목표 50만 명을 뜻하는 5개의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세계평화를 상징하는 지구본을 떠받든 형태이다. 울산이 세계로 뻗어나가 공업 한국의 새 역사를 창조하고자 했던 시민의 염원을 반영한 작품이다.
박 씨는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으로 1949년 평양 미술대학 조각과를 졸업하고 월남 후 1953년 속초 수복 기념탑(모자상), 1962년 부산직할시 승격 기념탑, 1973년 면암 최익현 동상 등을 제작했다.
공업탑은 울산의 정신, 조국 근대화의 염원, 대한민국의 경제부흥을 위한 각오들이 담겨 있다. 1960년대 이러한 공업탑 정신을 구현하고자 마련한 것이 ’공업축제‘였다. 울산의 대표 축제였던 ’공업축제‘가 사라진 지 35년 만에 올 6월 부활했다. 공업축제는 1967년 4월20일 시작해 이듬해부터 6월1일 개최하다가 1980년대 들어 공업이란 단어가 공해를 연상시킨다며 1987년 20회를 끝으로 사라졌던 울산의 큰 잔치였다. 새로 선보인 화려한 드론 쇼 불꽃놀이와 시민들의 퍼레이드가 장관이었다. 산업도시 울산의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외부 관광객 숫자에 연연하기보다 시민이 주인 되고 시민들이 즐기는 축제를 표방한 목표를 제대로 살렸다.
원래 공업축제는 울산만의 축제가 아니었다. 범국가적 성격의 축제였다. 제1회 공업축제의 취지문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공업도시로서의 울산은 이미 하나의 청사진을 벗어나 발전하는 한국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 차원에서 보다 넓은 웅지와 용기를 가다듬어 다시 풍요한 민주사회의 건설이 약속된 제2단계의 자립경 제 개발작업을 성공리에 매듭짓기 위해 제1회 울산공업축제의 막을 올립니다.’
다시 본 공업축제는 5060세대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2030세대들을 위한 즐길 거리를 준비해 울산의 현재와 미래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4천여 명이 참여한 개막식과 퍼레이드가 하이라이트였다. 1천여 명의 시민들이 공업탑에서 출발해 시청을 지나 태화강국가정원까지 약 3㎞를 2시간가량 행진했다. 행렬은 1㎞에 달했다. 노동계와 다문화, 팔각회, 78연합회 등 다양한 계층이 행진에 참여했다. 첨단의 미래 자동차까지 등장해 시민들은 화려한 눈요기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울산은 대한민국 산업수도이다. 공업이나 산업도시란 표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 도시다. 한때 급할시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전 세계 압축성장의 모델인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도시가 울산이다. 울산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울산이 잘 살아야 대한민국이 성장하고 울산의 부가 곧 한국의 경제 규모라 할 수 있다. 국세 징수 비율이나 항구별 수출 규모, 지역별 총생산량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부활한 울산 공업축제! 산업도시 울산을 재조명하고 도시브랜드를 강화하는 동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나아가 시민화합과 관광상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성공적인 지역축제로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내 이름은 울산 큰애기
‘울산’이라면 대개 고래를 떠올리지만, 실제 마스코트는 따로 있다. ‘울산 큰애기’라는 여성이다. 큰애기란 말은 시집 안 간 시누이를 올케가 부를 때 쓰는 울산 방언이다. ‘처녀’ ‘아(애)기씨’라고도 한다. ‘울산 큰애기’는 통통한 볼에 단발머리, 빨간 원피스에 커다란 머리핀을 꽂고 있다. 나이는 20대. 성별은 여성으로 성격은 유쾌 발랄하다. 직업은 울산 중구청 공무원으로 최근 8급에서 7급으로 승진했다. 요즘 말로 ‘공주공주’한 인테리어를 한 번듯한 집도 가졌다. 간식인 ‘쫀드기’를 무척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팬 사인회까지 할 정도로 '팬덤'을 지닌 스타이다.
'보여주기식'으로 만든 흔한 캐릭터가 아니라 일본 구마모토(熊本)현 구마몬처럼 제대로 입소문 나며 인기를 끌고 있는 울산의 대표 상징이다. 1965년 가수 김상희가 발표한 노래 '울산 큰애기'에서 착안해 2017년에 만들었다. 다른 지역은 수달·고양이·용 등 동물이나 특산물을 형상화하지만, 울산은 '사람'을 내세워 차별화했다.
울산 큰애기의 고향인 중구 반구동은 쌀농사, 과일 농사가 잘돼 궁핍하던 시절에도 상대적으로 경제 형편이 좋았다. 이곳 처녀들은 유난히 피부가 곱고 성품이 상냥해 당시 울총들(울산 총각, 홀로 객지 생활하던 기업체 남성 근무자들)이 많은 호감을 표했다.
왕의 곤충-비단벌레
1990년에 개봉된 영화 '미이라'에는 곤충이 무서운 무기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벽에 박힌 보석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운 곤충이었는데 갑자기 살아나 악당의 살을 파먹는다. 수천, 수만 마리가 떼를 지어 덤비니 '최종병기-곤충'이라 할만하다.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 나오는 상상의 곤충은 지금도 살아 있다. 딱정벌레의 일종으로 화려한 색의 날개를 지닌 비단벌레다. 마치 단청을 보는 듯 영롱한 빛을 내는 날개를 가졌다. 비단벌레의 날개는 신비로운 금녹색의 껍질과 적색의 세로줄로 된 살아있는 보석이다. 이 곤충의 날개로 값진 보물을 장식했던 문화는 우리나라 1,600년전 역사에 이미 있었다.
황남대총은 경주 왕릉 중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1973년 이 황남대총을 발굴했을 때 화려한 금관보다 더 눈길을 끈 유물이 있었다. 바로 말안장 뒷가리개였다. 금빛과 녹색의 영롱한 빛깔을 띤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했다. 1,600년의 세월을 견디고 본래의 색깔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이 보물은 사진 몇 장만 남기고 바로 상자 속에 갇혀버렸다. 비단벌레 날개 빛의 변색을 막기 위해서 글리세린으로 처리한 뒤였다. 그 후 세상에 더 이상 드러나지 않았고 사람들도 비단벌레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박물관 상자 속에서 잠들고 있던 황남대총의 말안장 장식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세상에 나온 것은 지난 2006년 4월이었다. 울산MBC(다큐 천년 불사(不死)의 꿈, 비단벌레)가 경주의 전통 금속 공예가인 최광웅 씨와 함께 복원했다. 장식에 필요한 비단벌레 1,000여 마리는 일본 시즈오카현에 사는 아시자와씨가 기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멸종위기종이어서 채집할 수 없었지만 17년 동안 비단벌레 양식을 해온 아시자와씨가 유물 복원 소식을 듣고 무상으로 내놨다. 복원된 비단벌레 장식 마구는 경주를 비롯한 전국 전시를 마치고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다.
비단벌레는 신라 등 고대 아시아 지역에서 '왕의 곤충'으로 대접받았다. 화려한 빛깔의 날개는 왕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귀한 물건들을 장식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금동 장식과 함께 비단벌레를 이용하여 불사(不死)의 염원을 나타내기도 했다. 수많은 알을 낳고 변태를 하는 곤충의 생태를 빌려 왕의 환생을 기원한 일종의 곤충 토템이었다. 황남대총과 고구려 진파리고분의 유물과 왕비의 치마, 일본 호류사 옥충 주자가 모두 왕의 곤충으로 장식되었던 문화재들이다. 당시 사람들은 비단벌레를 사랑을 이루게 하는 일종의 미약(媚藥)으로도 여겼는데 지금의 비아그라의 원조인 셈이다. 실제 비단벌레 날개에는 최음제 성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역방송의 전통문화재 복원은 문화재청이 2008년 비단벌레를 천연기념물 496호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II급 곤충으로 지정하는데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했다. 삼국시대, 이 땅에 지천으로 살았을 비단벌레가 비로소 체계적인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변산반도와 고창 선운사 등에서 집단 서식처를 확인하기도 했다. 과학적인 보호와 개체 번식이 성공한다면 찬란했던 신라 문화재가 부활할 날이 올 것이다.
비단벌레(Chrysochroa tulgidissima Scheoenderr)는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곤충 중 가장 아름다운 딱정벌레의 일종이다. 금속성 광택이 강한 금녹색은 화려하고 영롱해 예로부터 옥충(玉蟲). 길정(吉丁) 혹은 길정충(吉丁蟲), 금화충(金花蟲)이라 불렀다.
이미 신라 상고시대에 의복이라든가, 마구(馬具)류 등지에 장식물로 애용됐는데 전문가들은 뛰어난 장식성과 함께 종교적 의미를 내포했을 것으로 해석한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불사(不死)를 향한 신라인들의 염원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마무리
'노 시니어 존'(No Senior Zone·노인 출입 금지). 64년 인생에 처음 듣는 말이다.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지난달 서울의 한 카페 출입문에 붙은 '60세 이상 어르신 출입제한' 문구를 두고 친구들도 갑론을박을 벌였다. 안내견은 환영이지만 노년층은 출입 금지하는 건데 가게 주인의 진짜 의도였을까. 진의가 잘못 전달됐고 노년층 고객들의 성희롱 발언이 발단이었음이 드러나 촌극으로 끝났지만, 뒷맛이 씁쓸했다.
최근엔 노인이란 말 대신 '어르신', '시니어', '실버', '연장자' 로 바꿔 정서적 위로를 한다지만 그게 그거다. 노친네, 노땅, 영감탱이, 틀딱이라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내가 봐도 노인들은 대개 성격이 급하고 신경질과 짜증, 화를 잘 낸다. 지하철은 무임승차하고 산책길에서도 음악을 크게 틀고 휘젓고 다닌다. 최소한의 공중도덕마저 아예 보이지 않는다. 가히 막무가내다. 어느 날 버스에서 백발의 일행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모두 등산복 차림에 낮술로 불콰해진 낯빛을 하고선 “청춘을 돌려다오.”라며 악을 써댔다. 눈총을 주니 ‘국민학교 동창회’ 갔다 오는데 봐달라고 변명했다. 老醜의 모습들이다. 추한 늙은이의 모습은 곧 老妄이나 老欲, 老獪와 다름없다.
첫댓글 비단벌레 / 사진 출처-경향신문
이렇게 화려하군요.
화려한 색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복원품 / 사진 출처 -경향신문
이겁니다
울산을 이해하는 글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