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 2004년 6월 28일
미국, 이라크에 주권이양
2004년 6월 28일 바그다드에서 치러진
이라크 주권이양식에서 미 군정의 폴 브
리머 최고행정관(오른쪽)이 마흐디 알
마흐무드(왼쪽) 이라크 대법원장에게
주권 이양 서류들을 건네고 있다. 이라크
임시정부의 이야드 알라위 총리(가운데).
미국에서 이라크로의 주권 이양식이
당초 일정을 이틀 앞당긴 2004년 6월
28일 오전 10시26분(현지시각), 삼엄한
경비 속에서 바그다드 도심에 위치한 옛
과도통치위원회(IGC) 본부에서 은밀히
치러졌다.폴 브리머 연합군 임시행정처
(CPA) 최고행정관은 이날 주권이양과
관련된 법률문서를 가지 알 야와르 임시
정부 대통령에게 공식 인계하고 서명식
을 가졌다.
이로써 지난해4월9일 수도 바그다드
함락으로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정권이
붕괴되면서 미군 주도 연합군의 점령
통치가 시작된 지1년2개월19일 만에
이라크는 다시 주권국가가 됐다. 연합군
은 이날 후세인과 측근들의 사법적 관할
권도 이라크 법무부에 넘겼다고 아랍어
위성방송 알 자지라가 전했다.
미 군정 당국과 이라크 임시정부가 당초
예정일을 이틀 앞당겨 전격적으로 주권
이양 행사를 가진 것에 대해 당초 예정일
에 맞춰 감행될 저항세력들의 대규모
테러공격을 피하고 이라크 안정화를
조기 실현하려는 포석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한편, 아랍어 위성방송 알 아라비야 등에
서는 ‘미국이 권력이양을 서두르는 목적
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폭력
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임시정부에 실어
주기 위한 조치”라는 전문가의 분석을
소개하기도 했다.
▶2020년 오늘,#신규확진자 62명.
#코로나19 '1천만명'…지구촌 엄습한 #재확산 공포
누적 확진자, 미국 250만명으로 최다...브라질 123만명
'확산→봉쇄→완화→재확산→봉쇄' #악순환 되풀이 가능성
#교회 #집단감염 여파…#신규확진자 사흘만에 다시 50명대로.
왕성교회 집단감염 여파 전날보다 51명↑
27일 0시 기준 누적 확진자 1만2653명
지역발생 31명·해외유입 20명
26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서울 관악구 #왕성교회에 설치된 임시 선별진료소에서 교인들이 검체 채취를 받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연합뉴스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02814?cds=news_edit
▶2010년 ‘시계산업 구세주’
스와치 하이예크 회장 별세
패션 시계의 대명사, 스와치를 만든 니컬러스 하이예크(Hayek·82) 스와치그룹 회장이 2010년 6월 28일 회사 사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1980년대 스위스 시계산업이 값싼 아시아 제품에 밀려 위기를 맞았을 때, 패션 소품 개념의 스와치 시계를 창안, ‘스위스 시계산업의 구세주’로 불렸다.
1928년 레바논에서 태어나 7살 때 가족과 스위스로 이주했다. 프랑스 리옹 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대 초 취리히에서 경영컨설턴트 회사(하이예크 엔지니어링)를 설립해 네슬레·지멘스 등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자문했다. 1980년대 스위스 시계산업이 아시아의 공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할 때, 그는 저가품과 고급품의 생산 이원화를 주장하며, 스위스 대형 시계회사 SMH를 인수했다. 그는 플라스틱 줄과 수정진동자(쿼츠)를 적용, 패션 소품 개념의 가볍고 싼 스와치 시계를 개발해 스위스 시계산업을 되살렸다.
이후 스와치의 성공에 힘입어 오메가·론진 등 19개 시계 브랜드를 가진 스와치그룹으로 성장시켰다. 현재 스와치그룹의 연 매출액은 55억 달러에 이른다.
▶2009년 온두라스 군부 쿠데타…
셀라야 대통령 추방돼
온두라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군인 10여명이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한 2009년 6월 28일 새벽 마누엘 셀라야(Zelaya) 대통령을 체포해 국외로 추방했다. 셀라야 대통령이 현재 코스타리카에 머물며 망명을 요청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이날 코스타리카 TV 방송에 나와 자신은 파자마를 입은 상태로 납치당했으며 이는 명백한 쿠데타라고 말했다.
온두라스 의회는 곧이어 쿠데타로 축출된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의 후임에 로베르토 미첼레티 국회의장을 확정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의회는 이날 셀레야 대통령이 “그동안 헌법과 법을 반복적으로 위반한 것은 물론 헌법기관들의 명령과 판결들을 무시하는 등 분명히 직권남용을 했다”면서 만장일치로 탄핵을 결의했다. 의회는 또 대통령 유고시에는 의회 의장이 계승한다는 헌법에 따라 미첼레티 의장을 후임 대통령으로 확정하고 “새 지도자는 오는 2010년 1월27일까지 셀레야의 잔여임기를 수행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집권 자유당을 포함한 여야 정치권은 셀라야 대통령이 대법원과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권연장을 염두에 둔 개헌 국민투표를 강행하려 하자 탄핵을 경고했다.
온두라스는 국토면적이 11만2천492㎢로 중미에서는 니카라과에 이어 2번째로 큰 국가로 꼽히고 있다. 인구는 750만명으로 북쪽과 서쪽으로는 과테말라에 접해있고 남서쪽에는 엘살바도르, 남동쪽에는 니카라과가 있다.
미-중미자유무혁협정(CAFTA)에 참여하고 있는 온두라스는 빈곤층이 80%에 이르는 등 중미에서도 가난한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커피와 바나나가 중요 수출품이며 지난 10년 동안 농업중심의 산업을 다양화하는 정책에 따라 섬유와 광산 산업에 외자를 적극 유치해 왔다.
온드라스라는 국가명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지난 1502년 처음으로 현재의 온두라스 지역을 발견한 뒤 연안의 수심이 깊다(hondo)는 의미에서 온두라스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2009년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
유현목 감독 타계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 유현목(兪賢穆) 감독이 2009년 6월 28일 낮 12시30분 고양시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4세.
1925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한 유현목 감독은 46년 월남한 후, 전쟁 중 아버지와 동생을 폭격에 잃고, 대학(동국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실존주의에 깊이 빠졌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6·25 전후 격변하는 한국 사회상을 담고 있으나, 그 표현방식은 매우 담담하고 지적이었다. 1956년 영화 ‘교차로’로 데뷔했으나, 한국의 작가주의 시대를 연 유 감독의 대표작은 주로 리얼리즘 소설이 원작이다. 이런 유의 영화가 원작에 비해 깊이가 떨어지는 반면, 감독의 영화는 원작의 잔상을 더욱 오래 남게 했다.
전후(戰後) 흔들리는 한국사회를 생생하게 그린 ‘오발탄’(1961·이범석 원작), 사회부적응자 소시민의 삶을 비교적 따스하게 묘사한 ‘잉여인간’(64·손창섭 원작), 이데올로기에 파멸되는 화가 지망생이 주인공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69·유치진 원작), 아기장수 설화를 바탕으로 민초의 생명력을 그린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78·최인훈 원작), 빨치산 가족의 반목과 화해를 그인 ‘장마’(79·윤흥길 원작) 등이 그런 영화들이다.
“조물주의 오발탄”이라는 대사로 유명한 ‘오발탄’은 미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으나,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송철호가 택시를 타고 “가자, 가자”하는 대목이 “북으로 가자는 것이냐”는 정권의 의심을 받아 상영중지됐다. 그는 또 ‘순교자’(65·김은국 원작) ‘사람의 아들’(81·이문열 원작)을 통해 신의 문제를 접하는 인간의 고민을 다뤘다. 칠순에 찍은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한 소년의 성장기인 ‘말미잘’(1995).
유현목 감독은 또 철저히 현실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한 장면을 길게 찍는 롱테이크, 앞 장면이 사라지면서 다음 장면이 이어지는 식의 오버랩 등 영화형식에 대한 실험도 잊지 않았다. 1990년 동국대 예술대학장으로 퇴임했고, 이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명예교수를 맡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감독의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키로 했고, 영화계는 고인의 장례를 대한민국 영화인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2003년 서기7세기 추정의
마애불상 발견
▶2001년 미국 항소법원, 마이크로소프
트(MS)의 분할명령은 무효라고 판결
미국 항소법원이 2001년 6월 28일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을 명령한 하급법원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 재판부가 이 사건을 재심리하도록 돌려보냈다.
MS사는 2000년 6월 미 법원으로부터 컴퓨터 운영체제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며 향후 연방과 각 주의 반독점법 위반을 방지하기 위해 회사를 두 개 그룹으로 분할하라는 판결을 받았었다. 항소법원은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불법적으로 윈도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해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판결 내용은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 심리를 담당할 판사가 적절한 제재 조치를 결정하도록 했다. 재판부는 특히 판결 과정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시하며 "사건을 맡은 토머스 잭슨(Thomas Jackson) 판사의 태도가 재판 절차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으며, 사법제도의 완전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로운 법적 조치를 숙의할 수 있도록 사건을 돌려보낸다"며 "새로운 재판부가 사건을 맡아 재심리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MS사는 2월 연방항소법원에서 잭슨 판사의 판결이 회사와 최고경영자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처벌을 목적으로 내려졌다고 주장했었다. 한편 이번 판결로 MS의 주가는 한때 전날 대비 5.7%까지 폭등해 나스닥시장에서 거래가 정지되기도 했다.
▶2000년 ‘요도호’ 납치범,
범행 30년 만에 일본으로 송환
일본항공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했던 일본 적군파 간부 다나카 요시미(51)씨가 28일 범행 30년만에 일본으로 송환됐다. 태국 정부로부터 신병을 인도받은 일본 경찰은 이날 새벽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다나카씨를 강도상해·감금 등의 혐의로 체포·수감했다.
1970년 일본도로 무장한 8명의 다른 적군파 단원과 함께 ‘요도호’를 납치했던 그는 김포공항을 거쳐 북한에 망명,국제 경찰조직의 추적을 받아왔다. 다나카씨는 지난 96년 캄보디아에서 체포돼 위조달러 사용혐의로 태국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왔으며, 일본정부 요청에 따라 이날 신병이 인도됐다.
그는 그동안 유럽·동남아 등에서 활동해왔으나 활동 내용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다나카는 27일 방콕 공항에서 일본 기자들에게 “비행기 납치는 일본정부의 미국 추종 일변도 자세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어쨌든 일본 국민에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를 포함한 요도호 범인들은 평양 교외에서 공동생활을 해왔으며 8명이 일본인 여성과 결혼, 18명의 자녀를 낳았다. 북한에는 범인그룹 중 4명이 생존해 있었으며, 이들은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일본 귀국 의사를 밝혔다.
▶1998년 김정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선거 후보자로 선출
▶1995년 미국 여배우 ‘라나 터너’ 사망
▶1993년 미스코리아 선발 부정사건
▶1991년 코메콘, 42년 만에 공식해체
1991년 6월 28일 동유럽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공식 해체됐다. 1947년 미국이 마셜 플랜(유럽부흥계획)을 제안했을 때 동유럽 여러나라가 동요함에 따라 1949년 1월 25일 소련 주도하에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 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동유럽공산권국가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창립됐었다.
1991년 6월 28일, 동유럽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공식 해체됐다.
1960년대 이후 코메콘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눈부신 발전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제체제협력으로부터 경제통합으로 활동형태를 바꾸었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변혁은 코메콘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고 1990년 1월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개최된 코메콘 10개국 지도자회의에서 종래의 엄격한 중앙경제계획에서 시장중심의 무역제도로의 전환을 결정하였고, 1991년 6월 제46차 총회에서는 모든 조약과 문서를 취소시키고 기구해체 의정서에 정식 서명했다.
▶1980년 정부, 컬러TV 방영방식을 NTSC식(미국식)으로 결정
▶1979년 제5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최(일본 동경)
▶1979년 석유수출국기구(OPEC),
기준유가 59%인상
▶1977년 외무부, 김형욱사건 청와대
도청사건과 관련 미국에 항의각서 전달
▶1976년 세이셸이
영국의 통치로부터 독립
▶1976년 실론 독립. 국가명을
스리랑카로 명명
▶1974년 해경 초계정,
북한 함정에 피침
▶1967년 지리학자 육지수 사망
▶1966년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
일리야 대통령 실각
▶1962년 이준구, 미 워싱턴에 태권도장 개관
미국에서 ‘그랜드 마스터 리’로 통하는 이준구(1931~)에 대한 미국 내 이미지는 크게 세 가지다. 신비한 동양무술을 하는 근육질의 스포츠맨, 어린이를 대상으로 도덕교육을 펼치는 자원봉사자, 그리고 미국 정치계에 친구가 많은 아시아인이다.
이준구는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1946년 서울로 올라와 동성중학에 다니며 서울 견지동 청도관에서 태권도에 입문했다. 당시에는 ‘태권도’라는 말이 없었고 가라테의 한자인 ‘당수’ 혹은 ‘공수도’로 불렸다. 태권도 동작 역시 가라테와 흡사했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육군 소장 최홍희가 만든 후 널리 보급되었다.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1957년 11월 21일이었다. 이후 텍사스주립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는 한편 1958년 4월 대학 내에 ‘코리아 가라테’라는 이름으로 태권도 클럽을 열었다. 당시 미국에는 태권도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다행히 처음부터 170명의 회원이 몰려온 덕에 학비는 해결되었다.
텍사스에 있으면서도 항상 워싱턴 진출을 꿈꾸던 이준구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62년 5월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국방부 직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러 갔다가 대학 마지막 한 학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워싱턴에 눌러앉은 것이다.
이준구는 1962년 6월 28일 워싱턴에 ‘준 리 태권도’ 도장을 열었다. ‘워싱턴포스트’지에 광고를 냈더니 120명이 몰려왔다. 그는 태권도를 배우면 체력 단련은 물론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잘하고 가족과도 화목하게 지내게 된다고 홍보했다. 실제로 이준구의 태권도 도장에서는 청소년들이 검은 띠를 따려면 우등생이어야 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며 인성교육이 되어 있어야 하는 등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이러한 교육적인 요소들은 미국 사회의 학부모들에게 인상적으로 비쳤다.
이준구는 1967년 워싱턴의 TV에 태권도 광고도 시작했다. 1969년부터 1980년까지는 당시 워싱턴에 있는 5개의 TV채널에 하루도 빠짐없이 한군데씩 돌아가며 광고를 했다. 아이들이 “Nobody Bothers Me!(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어!)”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끝나는 광고는 큰 히트를 쳤다. 이후 워싱턴에서 ‘준 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 이준구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 때 ‘세기의 무술인’에, 2000년 3월 2일에는 미 법무부 이민국이 선정한 ‘가장 성공한 이민 200명’에 선정되었다.
이준구는 레이건 대통령 때는 교육고문,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는 체육고문을 역임했다. 아들 부시 대통령 때는 백악관 직속 아시아·태평양정책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003년 6월 28일은 워싱턴 시장에 의해 ‘준 리의 날’로 선포되었는데, 6월 28일은 41년 전 이준구가 워싱턴에 처음 태권도장을 연 날이다.
▶1958년 제6회 스웨덴월드컵서
브라질 우승, 펠레 일약 스타로 부상
1958년 6월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6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주최국 스웨덴을 5대2로 이기고 우승했다. 이날 브라질 승리의 원동력은 신장 168cm, 체중 67kg의 17세 소년 펠레였다. 가히 이번 스웨덴월드컵은 훗날 ‘축구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펠레를 위한 대회였다. 수줍음 잘 타는 앳된 얼굴의 17세 소년 펠레는 등번호 ‘10’을 달고, 프랑스전 해트트릭과 결승전 2골 등 6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에 첫 줄리메컵을 안겼다.
특히 이날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그가 뽑아낸 골은 역대 최고의 골 장면으로 남아 있다. 왼쪽 사이드에서 올라온 센터링을 정확한 트래핑으로 수비 한명을 제친 뒤, 다시 수비 머리 위로 공을 띄운 후 돌아 들어가 발리슛으로 넣은 골은 신기(神技)에 가까웠고, 상대편이던 스웨덴 관중의 기립박수까지 쏟아져 나왔다.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스시멘토(Edison Arantes do Nascimento)가 본명인 그는 브라질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빈민가에서 태어났지만 축구공 하나로 명예와 부를 얻었다. 펠레(Pele)는 '진주'라는 뜻의 애칭이다. 펠레는 13세에 브라질 프로축구 산토스에 입단한 이래 1363경기에 출전해 1281골을 뽑아내며 축구 황제로 군림했지만, 따뜻한 인간미로 더욱 사랑받았다.
브라질은 이후 1971년 7월 18일 펠레가 은퇴하기 전까지 62년 칠레월드컵, 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우승해 ‘3회 우승한 나라가 영구 보유한다’는 FIFA의 규약에 따라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게 됐다.
1958년 스웨덴월드컵 결승전에서 화려
한 플레이를 선보이고 있는 17세의 펠레
제6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의 펠레
브라질에서 펠레는 ‘황제(O Rei)’를 의미하는 대명사다. 펠레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로서 무려 세 차례나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이는 동 대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20년의 현역 생활 동안 성공시킨 득점만 해도 무려 1,280골. 197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마리오 자갈로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펠레는 곧 축구이고, 축구는 곧 펠레다.
17세 천재소년의 등장
펠레가 친정팀 산토스에서 데뷔 무대를 가진 것은 1956년 9월로, 당시 펠레의 나이는 만 15세에 불과했다. 이듬 해 정식 1군 멤버로 승격한 펠레는 16세의 나이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그 해 7월에는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A매치 데뷔전까지 치렀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펠레는 이미 브라질을 대표하는 스타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펠레는 1958년 대회 당시 처음부터 주전 공격수가 아니었다. 훗날 AC 밀란의 전설로 추앙받게 되는 조세 알타피니, 그리고 간판 골잡이 바바 등의 벽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라질 국민들은 대부분이 17세 소년 펠레의 편이었다. 특히 브라질이 잉글랜드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졸전 끝에 0-0 무승부를 기록하자 언론 및 여론은 펠레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페올라 감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펠레는 소련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통해 월드컵 데뷔전을 치렀고, 웨일즈와의 8강전에서는 대회 역사상 최연소 나이(17세 239일)로 첫 득점까지 성공시켰다. 펠레의 활약은 프랑스와의 4강전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프랑스 수비진을 헤집고 다닌 펠레는 대회 역사상 최연소 나이(17세 244일)로 해트트릭을 달성했고, 이에 힘입어 브라질은 프랑스를 5-2로 누르고 결승으로 향했다.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펠레의 활약은 계속됐다. 질풍 같은 스피드와 현란한 개인기, 완벽한 볼 컨트롤에 이은 슈팅으로 개최국 스웨덴 홈팬들을 경탄시킨 펠레는 두 골을 연거푸 터뜨리며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펠레라는 17세 영웅을 탄생시키며 감격의 첫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은 이후 역대 최고의 황금기를 열어 젖히게 된다.
부상과 시련을 이겨내고
1958년 월드컵 우승 이후 펠레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4년 뒤 1962년 월드컵이 개막되기 직전까지 4시즌 연속으로 리그 득점왕에 오른 펠레는 레알 마드리드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고 있었다. 디 스테파노마저 부상으로 쓰러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1962년 대회가 펠레의 독무대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 팀을 2-0 승리로 이끈 펠레는 가볍게 워밍업을 끝마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체코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펠레는 더 이상 1962년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고, 2연패 전선에 비상이 걸린 브라질 역시 위기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다. 펠레 없이 우승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브라질에는 또 한 명의 축구영웅 가린샤가 있었다. 신예 아마리우두가 펠레의 빈자리를 기대 이상으로 메웠다는 점도 브라질에겐 커다란 힘으로 다가왔다. 펠레는 이러한 동료들의 활약을 벤치에서 묵묵히 지켜봐야 했지만, 우승이 확정된 직후에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대회 2연패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찌 됐든 펠레는 가린샤, 디디, 바바, 자갈로 등과 함께 월드컵 2연패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펠레는 1966년 대회에서 다시 한 번 부상으로 쓰러진 후 월드컵이란 무대 자체에 회의감을 느껴야 했다. 유럽 선수들의 거친 태클과 반칙은 이미 도를 넘어서고 있었고, 이에 부상을 당한 펠레는 브라질의 치욕적인 조별리그 탈락을 막아낼 수 없었다. 1966년 대회에서 시련을 겪은 펠레는 “두 번 다시 월드컵에 참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는 길을 택했다.
만약 펠레가 자신이 내린 결정을 변덕스럽게 번복하지 않았다면 ‘역대 최고의 선수’ 칭호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들의 계속되는 대표팀 복귀 운동에 떠밀려 대표팀으로 복귀한 펠레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1970년 월드컵에 참가했고, 이 대회에서 MVP 및 우승을 동시에 차지하며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썼다. 펠레는 이 1970년 월드컵 우승을 통해 진정한 축구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펠레, 자이르지뉴, 토스탕, 히벨리누, 제르손 등이 이끄는 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은 ‘황금의 5중주’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아름다운 개인기와 패스웍으로 중무장한 브라질은 체코와의 첫 경기부터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최고의 경기를 선보였고, 전문가들로부터 100점 만점에 100점을 받았다. 이 대회의 브라질은 아직까지도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추앙받고 있다. 1970년 월드컵 우승 이후 펠레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 때는 정확히 1971년 7월 18일이었고, 펠레의 나이는 만으로 30세에 불과했다. 브라질 국민들은 1974년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펠레 복귀운동’을 벌였지만 이번에는 마음씨 좋은 펠레도 팬들의 요구를 한사코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펠레를 잃은 브라질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에 밀려 4위에 머물러야 했다. 조용히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난 펠레는 ‘축구 불모지’ 미국으로 진출하여 3년을 보낸 뒤 1977년 37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전지전능한 축구황제
펠레가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 혹은 축구황제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비단 우승 및 득점 기록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년 시절의 펠레를 산토스 팀으로 스카우트 했던 브리투 단장은 “펠레는 17세 때 이미 완성된 선수였다.”고 회고했으며, 실제로 펠레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라는 스포츠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였다.
전성기 시절의 펠레는 100m를 10초대에 주파할 정도로 발이 빨랐고, 상대 선수를 농락하는 개인기 또한 다른 브라질 선수들 이상으로 탁월했다. 그러나 펠레가 갖고 있는 진정한 재능은 경기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 그리고 동료 선수들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팀 플레이 능력이었다. 펠레는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동시에 위대한 플레이메이커이기도 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펠레는 완벽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펠레는 어떤 각도, 어떤 위치, 어떤 자세로도 오른발과 왼발을 가리지 않고 정확한 슈팅을 구사할 수 있었다. 171cm의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헤딩슛에 매우 능했으며, 그림 같은 오버헤드킥이나 장거리 프리킥으로도 자주 골을 넣었다. 마라도나에 비해 역동성이나 폭발력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볼을 신체의 일부처럼 다루는 컨트롤 능력은 도리어 한 수 위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이름에 얽힌 뒷이야기
펠레의 본명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Edson Arantes Do Nascimento)이며, 어린 시절에는 이를 줄여 ‘에드손’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는 펠레의 아버지가 발명가 에디슨(Edison)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라는 뜻에서 붙여준 뜻 깊은 이름이다. 그럼에도 에드손이라는 소년이 ‘펠레’라는 의미 불명의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분명하지 않다. 심지어 펠레 본인조차 그 이유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펠레 스스로의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이 이름은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골키퍼 빌레(Bile)의 이름에서부터 유래한 듯하다. 소년 시절의 펠레가 ‘빌레’를 ‘펠레’로 잘못 발음한 것이 이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 유래가 어찌 됐든 오늘날에 이르러 펠레라는 이름은 축구황제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펠레 본인도 이 이름을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라 표현하고 있다.
▶1956년 폴란드 포즈난에서 반공의거,
반소(反蘇) 봉기
▶1954년 주은래, 네루의 평화 5원칙 발표
▶1952년 국회 김성수 부통령
신변에 낭설, 공보처에서 부정성명
▶1950년 한강 인도교 폭파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한강대교(인도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한강대교(인도교)는 폭파됐지만 한강철교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 조선인민군은 약간의 보수공사 후 빠르게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1950년 북한 공산군 서울 점령
▶1950년 독립운동가 이붕해 사망 -
일본왕 히로히토 암살을 시도
▶1950년 공산주의 운동가 이주하 처형
▶1948년 코민포름, 유고 공산당 제명
1948년 6월 28일 코민포름이 체코 공산당 기관지에 티토 중심의 유고공산당을 비난하며 유고공산당을 제명했다.
비난내용은 유고공산당과 지도자가 반소적이고 국가주의적이며, 계급투쟁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세력이 유고의 각 지방에서 발달하고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유고공산당은 이 비난결의를 거부했고 7월 21일 당대회에서도 거부를 재차 확인했다. 이후 코민포름과 유고공산당은 정면으로 대립, 동구권 여러나라는 유고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유고와 소련은 서로를 `적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1939년 군용자원보호법 공포
▶1921년 러시아 적군, 이만시에
집결한 한국독립군 공격(자유시사변)
▶1921년 흑하사변 발발,(소련, 무장
해제에 불응하는 흑룡강 자유시의 한국
독립단부대 습격)
#흑하사변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리라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1992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서일은 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당한 흑하(黑河)사변에 대한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41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자유시사변 (自由市事變)이라고도 불리는 흑하사변은 러시아 적군(赤軍)이 장갑차와 기관총을 앞세우고 스바보드느이시(자유시)에 주둔중인 독립군을 공격, 7백여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포로로 잡힌 우리 무장독립운동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변이었다.
1920년 독립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참패를 당한 일본은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에 나섰고 독립군들은 러시아 땅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1년 1월 중순부터 #독립군은 안전지대라고 여겨지던 자유시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반제국주의의 땅은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홍범도 #이청천 장군의 군정서를 비롯해 계열을 달리하는 수천명의 광복군이 자유시에 집결하자 항일무장투쟁의 전기가 마련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소련은 독립군을 자신들의 세력아래 두고 싶어했다. 일본으로부터는 독립군의 활동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압박을 받았다.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했다. 여기다가 러시아에 귀화해 적군 장교가 된오하묵과 빨치산을 이끌던 박일리야의 주도권 경쟁까지 끼어들었다. 사할린의용대가 무장해제를 거부하자 소련군은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독립군은 조국해방의 큰 꿈을 펴지도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죽어가야 했다.
▶1919년 베르사유 강화조약 조인
제1차대전 발발의 원인이었던 사라예보 총격사건이 있은지 만 5년째가 되는 1919년 6월 28일 오후 3시12분, 베르사유궁에서 독일대표단이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1919년 6월 28일, 독일 대표단이
프랑스 베르사유궁에서 강화조약에
서명을 하고 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모든 해외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영토의 일부를 넘겨야 했다. 이 결과 독일은 전쟁전에 비해 10% 이상이나 되는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지됐다. 육군은 10만 이하로, 해군은 보유함 10만톤 이하로 제한됐고 공군과 징병제는 금지됐다. 200억 마르크의 배상금도 결정됐다.
6월16일 조약내용이 알려지자 샤이드만 수상은 서명을 거부했고 내각은 21일 총사퇴했다. 학생들은 프랑스기를 불태우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22일 샤이드만 수상의 뒤를 이은 바우어 내각은 국민의회를 통해 조약수락을 결정했다.
▶1918년 미국 육군에 화학전부대 창설
▶1918년 소런, 대공업의 국유화 포고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피살
1914년 6월 28일, 인류에 대재앙을 예고한 두 발의 총소리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울려퍼졌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이곳에서 열린 육군 대연습 열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중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병원에 실려 갔지만 황태자비는 이미 절명했고 황태자 역시 15분 뒤 사망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를 저격한 범인 프린스프(오른쪽에서 두번째)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프린시프라는 20세 청년으로 세르비아 해방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의 멤버였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사건의 책임이 세르비아 정부에 있으므로 세르비아 국내에서 일고 있는 반오스트리아 운동을 금지하라는 요구였다.
세르비아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참전할 경우 독일도 함께 싸운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 우려한 대로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동족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러시아의 참전은 독일을 불렀고, 이는 러시아와 3국협상으로 묶여 있는 프랑스·영국의 자동개입으로 이어 졌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태자 피살은 구실에 불과했을 뿐 유럽의 강대국들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명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4년반 동안 6000만명의 젊은이가 전장에 동원돼 900만명이 전사하고 2000만명이 부상할 정도로 두발의 총성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피해는 실로 컸다.
▶1908년 터키의 청년터키당,
마베도니아 지방에서 봉기
▶1902년 미 하원, 해협운하법 가결.
미 대통령에게 파나마와 니카라과 운하
부설권을 부여
▶1902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3국동맹 제4차 갱신하여 6개년 연장
▶1873년 프랑스의 생물학자 알렉시 카렐 출생
▶1867년 근대 희곡의 혁신자 피란델로 출생 -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
▶1836년 미국의 제4대 대통령 매디슨 사망
▶1800년 조선조 22대왕 정조 승하
조선후기의 최고 군주로 꼽히는 정조(正祖)가 1800년 6월 28일 서거했다. 48세였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조선문화의 황금기를 이끈 국가 지도자였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였다.
아버지는 장헌세자로 흔히 사도세자로 불린다.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였다. 1759년 세손에 책봉돼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올랐다. 인간적인 면에서 정조만큼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농민들은 부유해지고 신해통공으로 시장은 번영했으며 신분질서는 이완되고 새 시대의 꿈을 품은, 자유롭고 발랄한 예술들이 자라났다. 이처럼 밝고 풍요로운 시대의 한 가운데 더없이 어둡고 고독한 군주, 정조가 있는 것이다. 11살때 아버지는 뒤주에 갖혀 살해되고 일평생 역겨운 어머니와 목숨을 노리는 할머니, 대화가 안되는 아내, 가증스런 정적들에게 포위되어 인생의 낙이라곤 오로지 책밖에 없었던 남자가 바로 그였다. 갖가지 사회문제가 빈발하는 근대로의 전환기에 정조는 사적인 원한을 참고 공평무사한 탕평정치를 통해 국민적 통합을 도모함으로써 오랜 당쟁을 종식시켰다.
이같은 정치적 안정위에 적서차별의 철폐, 공노비 해방을 통한 신분제도의 혁파, 과거제도의 개혁 등의 의욕적인 개혁정책으로 새 문화창달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조의 문화적 이상은 조선인의 정체성에 근거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와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한 확고한 문명국가로 요약된다.
▶1712년 프랑스 사상가 루소 출생
▶1577년 프랑스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1712), 벨기에 화가 루벤스 출생
17세기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
서양 미술사에서 ‘바로크(Baroque)’라는 말은 17세기라는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로, 그 안에 다양한 지역과 양식의 미술을 포함한다. 반면 ‘바로크적’이라는 수식어는 이 시기에 로마를 중심으로 해서 제작된 가톨릭 미술의 성격을 가리킬 때 쓰인다. 프로테스탄트의 공격에 맞선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미술, 즉 가톨릭의 위상을 회복하고 이를 선전하기 위한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미술은 웅대한 스케일, 화려한 장식, 연극적인 스펙터클을 특징으로 하는 바로크적인 미술이었다. 교황령 로마에서 시작된 이러한 미술 양식은 점차 하나의 국제 양식이 되어 유럽에 퍼졌고, 그 중심에 미술사에서 최초로 전 유럽적 명성과 성공을 얻은 화가 루벤스가 있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남유럽과 모국 플랑드르로 대표되는 북유럽 미술 전통을 종합하여, 빛나는 색채와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찬 독자적인 바로크 양식을 확립한 17세기 유럽의 대표 화가이다.
전 유럽의 화가
루벤스는 안트베르펜(Antwerpen)의 상류 부르주아 가정 출신이다. 그는 1577년, 법률가였던 부친 얀 루벤스(Jan Rubens)가 개신교 신앙에 대한 박해를 피해 이주했던 쾰른 근처 지겐(Siegen)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사망한 1587년에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루벤스는 형 필립과 함께 라틴어 학교에서 고전 교육을 받으며 가톨릭교도로 자랐다. 14살 때부터는 먼 친척이었던 풍경화가 토비아스 베르하크트(Tobias Verhaecht), 매너리즘 양식의 인물화를 그리던 아담 반 노르트(Adam van Noort), 당시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이탈리아 유학파 화가 오토 반 벤(Otto van Veen)에게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마스터로 독립을 한 지 2년 뒤인 1600년에 그는 8년간 이어질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
이탈리아로 간 그는 만토바의 공작 빈센초 곤자가(Vincenzo I Gonzaga)의 궁정에서 일하면서, 수없이 많은 모사를 통해 고대로부터 당대에 이르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산을 흡수했다. 그가 공부한 대상에는 근처 도시 베네치아에서 본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제의 그림, 바티칸의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작품, 로마에서 접한 고대 그리스 조각, 스페인에서 본 합스부르크 왕가의 컬렉션, 동시대 화가인 코레지오와 카라바조까지 포함되었다.
[인동덩굴 그늘의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 1610
캔버스에 유채, 174×143cm,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직접 보고 연구한 대가들의 영향과 타고난 재능으로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이미 명성을 얻었고,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다음해인 1609년, 플랑드르를 다스리던 (펠리프 2세의 딸) 이사벨라와 그녀의 남편 알베르토 대공의 궁정화가가 된다. 그에게는 궁정이 있던 브뤼셀이 아니라 안트베르펜에 살면서 다른 곳으로부터 주문을 받는 것이 허락되었다. 같은 해에 결혼한 루벤스는 유명한 부부 초상화를 남겼다.
[인동덩굴 그늘의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 Rubens and Isabella Brant in the Honeysuckle Bower]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에서 신혼부부는 서로의 오른손을 잡는 혼인 서약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부부의 뒤로 보이는 인동덩굴은 결혼의 행복을 상징하는 식물이다. 세련되고 품위 있는 이들의 모습은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유롭게 구사했던 여러 외국어 능력과 고전에 대한 뛰어난 학식과 교양, 능숙한 궁정 매너를 가졌던 루벤스는 정신에서는 이때부터 이미 귀족이었다. 브뤼셀 궁의 궁정 사제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교양 있는 궁정화가’라고 칭송했고, 이후 그는 유럽 전역의 왕궁을 오가며 외교관의 역할을 하여 이와 같은 자질을 십분 발휘하게 된다.
북유럽 미술은 다양한 재질로 이루어진 대상의 표면 질감 표현을 비롯한 '세부 묘사'를 통해 사실성을 확보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원근법이나 해부학과 같은 '구조'를 통해 현실을 더 정확히 재현할 수 있다고 본 이탈리아와 대조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인동덩굴 같은 상징물을 사용한 것이나 다양한 옷감의 질감을 살린 정교한 붓질은 플랑드르를 비롯한 북유럽 미술의 특징이다.
그러나 자주와 감색을 비롯한 격조 있는 채색과 설득력 있는 해부학적 구조를 가진 인물의 모습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통의 영향을 볼 수 있게 하는 면이다.
반종교개혁 가톨릭의 제단화
17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 전쟁으로 교회와 미술품들이 파손되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 루벤스는 그의 이력 초기부터 제단화를 비롯한 기독교 주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 중 벨기에 최대의 교회인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있는 두 점의 제단화 [십자가를 세움]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는 이 분야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더 친숙한 위다(Ouida)의 동화 [플랜더스의 개]에서 화가를 꿈꾸던 가난한 소년 네로가 보고 싶어하며, 이 작품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 앞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죽었던 바로 그 그림이기도 하다.
[십자가를 세움] 1610
패널에 유채, 중앙 패널 462×300cm, 안트베르펜 대성당, 벨기에
그 중 [십자가를 세움 The Raising of the Cross]은 본래 성 발부르가(St. Walburga) 교회를 위해 상인 반 데어 기스트(Cornelis van der Geest)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가,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가져갔고, 그의 몰락과 벨기에의 독립 이후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놓이게 된 작품이다.
작품의 형식은 제단에 세우는 삼면화(triptych)이다. 경첩으로 중앙 그림과 연결된 좌우측면 패널에는 뒷면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어, 닫아 놓으면 다른 장면이 보이게 된다. 이는 북유럽의 중세부터 내려오던 제단화 형식으로, 보통 때는 닫아놓고 일요일이나 특별한 축일에는 열어놓곤 했다. 이런 형식은 전통적이나, 이 경우는 크기가 이전 어떤 제단화보다 월등히 컸다. 펼친 폭이 6.4m,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래 위에 붙는 그림들과 장식을 합하면 높이가 10.7m에 달했다. 또한 그는 보통은 독립된 장면이 그려졌던 세 패널을 연결하여 한 화면처럼 사용했다. 못박힌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지는 모습을 담은 가운데 패널의 왼쪽에는 마리아와 요한, 두려움에 떠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다. 오른쪽에는 끌려오는 두 명의 죄수와 명령을 내리는 로마군 장교가 보인다.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강렬한 명암대조로 강조되고 있는 역동적인 대각선 구도이다. 이는 비대칭적으로 모여 있는 인물군과 함께, 화면에 강한 운동감을 만들어 내며 감정에 호소하는 효과가 있는 바로크 미술 특유의 요소이다. 중세 이래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던 죽은 그리스도의 고통스런 모습과 달리 이 그림의 예수는 아직 살아있다. 그런 예수의 모습과 함께 십자가를 들어올리는 장면 자체가 중세나 르네상스 그림에는 거의 없던 주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반종교개혁의 정신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다. 반종교개혁 가톨릭 미술은 고통 받는 구원자를 묘사할 때도 보다 영웅적이고 신과 같은 이미지를 필요로 했다. 마리아조차도 비슷한 장면을 묘사한 이전의 그림들에서 쓰러져 울고 있던 것과 달리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다. 중앙 패널 좌측 하단의 개나, 좌측 패널의 젖먹이는 어머니, 과도해 보이는 근육을 가진 커다란 인물은 루벤스 특유의 것으로, 그는 어떤 주제를 다루어도 화면에 생기와 낙천주의를 가득 차게 만들었다.
생생하게 살아난 신화의 세계
루벤스는 고전 미술과 문학에 대해서도 해박하여 이와 관련된 어떤 복잡한 주제도, 손에 잡힐 듯하고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생생한 이미지로 만들어 내곤 했다. 18세기에 프랑스의 디드로는 루벤스가 상상력으로 신화 장면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고전 문헌에 기초한 신화 주제 그림은 그의 양식적 특징을 자유롭게 펼쳐 보일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1617년경
캔버스에 유채, 222×209cm,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Rape of the Daughters of Leucippus]는 아폴로도로스의 신화에 근거한 주제로, 레다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레우키포스의 딸 힐라에이라와 포이베를 납치해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등장 인물은 네 명뿐이지만 화면은 놀란 여성들의 사지 움직임, 울부짖는 말들의 다리와 갈기, 여성들을 말에 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근육질 남성의 번쩍이는 갑옷 등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에 비하면 이전에 그린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어둠 속에 갇힌 조각 같아 보인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의 회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찬란하고 풍부한 색채의 효과를 성취했다. 그는 실체로서의 색채를 발견하여, 이를 특유의 생명 충만한 관능적이고 낙천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매체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것 하나는 루벤스 특유의 인체 표현이다. 루벤스 예술의 주제가 인간의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성별, 나이,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피부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이 작품에서도 구릿빛 남성 피부와 푸른 정맥과 붉은 핏줄이 비쳐보이는 투명한 여성의 피부는 서로를 두드러지게 하며 대조된다.
그가 그린 인간은 16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렸던 보편적인 유형의 인간이 아니다. 그가 그린 육체에는 그의 취향과 감수성이 반영되어, 온통 풍만하게 부풀어 있고 건강하고 유쾌한 연극의 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과도’하다. 그가 그린 남자는 근육이 지나치게 발달되어 있고, 여자는 너무 살이 쪘고, 화면은 지나치게 번쩍이고, 춤을 추듯 운동하는 색채는 눈이 피곤할 정도로 화려하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 속 모든 것은 실물보다 크고, 현실보다 강력하다. 역설적으로 이런 점이 절대 왕정과 반종교개혁의 가톨릭 교회에 호소력을 가져 전유럽의 궁정, 교회, 저택이 그의 그림을 원하게 되었다.
루벤스는 1616년에서 21년 사이에 안트베르펜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그 일부를 작업장으로 사용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업장(bottega)과 같은 분업화된 작품 제작 시스템을 도입했다. 루벤스와 숙련된 제자, 조수의 협업이 너무나도 긴밀해서 작품에서 각자의 흔적을 구별해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당대의 기록에는 루벤스가 전부를 그린 것과 작업장에서 협업한 것을 구별해서 가격도 차이가 나게 책정했다. 보통 루벤스가 드로잉을 하고 색과 명암을 지정하면, 제자와 조수들이 유화 작업을 했고, 마지막으로 루벤스가 손을 보는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되었다. 효율적인 분업 체계와 정확하게 지켜지는 작업 시간표에 의해 그는 전유럽에서 쇄도하는 주문을 감당할 수 있었고, 루벤스의 ‘그림 공장’에서 만들어진 작품 수는 드로잉을 제외하고도 1,600여점에 달했다.
절대왕권의 신격화
루벤스의 ‘과도’함은 평범한 인간을 신화의 세계 속에 들여 놓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1621년에 그는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미망인 마리 드 메디치로부터 새로 보수한 파리의 뤽상부르궁의 회랑 하나를 자신과 남편의 일대기를 담은 24점의 거대한 회화로 장식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1622년부터 26년 사이에 제작된 이 그림을 두고 왕비의 고문은 ‘두 명의 이탈리아 화가가 10년이 걸려도 못할 일을 루벤스는 4년 만에 해냈다’며 놀라워했다.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만남] 1622~25
캔버스에 유채, 394×29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연작 중 하나인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만남 The Meeting of Marie de’ Medici and Henry Ⅳ at Lyons]은 리옹에서 예비 부부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실제로는 당시 왕이 정부와 사랑에 빠져 예비 신부에게 별 관심 없던 상태여서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했고 마리는 그런 왕을 일주일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이런 맥빠지는 일상사를 루벤스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지배자 부부의 혼인 서약 장면으로 만들었다.
그림 속에서 앙리는 올림포스의 지배자 제우스로, 마리는 그의 아내이자 결혼의 여신 헤라로 등장한다. 결혼의 신 히멘(Hymen)의 주재로 둘은 서로의 오른 손을 잡는 전통적인 결혼식의 동작을 하고 있는 중이다. 신으로 묘사하다 보니 둘의 복장은 우습게도 반라의 모습이 되었다. 헤라 옆에는 그녀의 상징물(attribute)인 공작과 전차(chariot)가, 제우스 발치에는 그의 상징물인 독수리가 있고, 제우스의 손에는 그의 무기인 번개가 불의 다발로 표시되어 있다. 화면 아래에서 도시의 성벽 모양 왕관을 쓰고 이들을 올려다보는 것은 이들이 만난 도시 리옹(Lyon)의 의인화이다. 그녀가 탄 전차는 이 도시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사자들이 끌고 있다.
이탈리아 체류 때부터 군주의 외교 사절 역할을 하곤 했던 루벤스는 1623년부터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도록 노력했고,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과 플랑드르 사이에 평화 협정이 맺어지도록 중재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유럽 각국의 왕과 귀족에게서 그림 주문도 많이 받았다. 자기 주장과 과시를 원하는 절대왕정과 루벤스의 과장되게 화려하며 생동감 있는 양식은 서로 잘 어울렸고, 메디치 연작에서와 같은 ‘알레고리적 의인화’라는 요소는 선전 효과를 배가시켰다.
사랑과 평화의 사절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전쟁이 없었던 해는 4년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루벤스가 활동하던 시기 유럽에는 평화가 없었다. 화가의 대부분의 활동 기간을 차지하는 1618년부터 48년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30년 전쟁에 연관되어 있었다. ‘전 세계가 나의 나라’라고 했던 루벤스는 알레고리적인 의인화라는 기법을 자신의 모국 유럽의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도 사용했다.
[전쟁의 공포] 1638
캔버스에 유채, 206×342cm, 피티 궁, 피렌체
1638년에 토스카나의 대공 페르디난트 2세가 주문하여 제작한 [전쟁의 공포 The Horrors of War]에는 피묻은 칼을 들고 전쟁터로 떠나는 전쟁의 신 마르스가 화면 중앙에 보인다. 평화시에는 닫혀 있는 야누스 신전 문이 열려 있다. 문학과 교양을 나타내는 책을 짓밟고 있는 마르스는 애인 비너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염병과 기근, 노여움이 이끄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 아래 조화의 상징인 류트는 부러지고, 풍요와 돌봄을 상징하는 아이 안은 어머니도 위협받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 누워있는 남자는 건축가의 도구를 손에 들고 있다. 전쟁으로 미술과 건축물도 파괴되고 만다는 뜻이다. 화면 왼쪽의 검은 옷을 입고 슬퍼하는 여성은 불행한 유럽의 의인화이다.
[평화의 알레고리] 1629~30
캔버스에 유채, 203.5×298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반대로 [평화의 알레고리 Allegory of Peace]에는 마르스가 물러간 자리에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고, 아이들과 표범이 함께 뛰어 노는 평화가 찾아온다는 루벤스의 이상향이 그려져 있다. 루벤스는 능력 있는 화가였고, 수완 좋은 사업가였고, 세련된 외교관이었지만 그의 임무가 항상 다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고, 죽기 전에 30년 전쟁이 끝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 1635년에 그는 스텐 성(Chateau de Steen)을 구입하여 시골로 내려갔고, 말년의 그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가족의 모습과 성 주위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 1638년경
패널에 유채, 176×83cm, 미술사박물관, 빈
[엘렌 푸르망과 그의 아이들] 1636~37,패널에 유채, 115x85cm, 루브르 박물관
1626년에 아내가 사망하고 혼자 지내던 루벤스는 53세가 된 1630년에 16세의 엘렌 푸르망(Helene Fourment)과 결혼했다. 추기경이자 왕자인 페르디난트가 그녀를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쓴 편지가 남아있을 정도로 엘렌은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이후로 루벤스가 그린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 비너스, 트로이의 헬렌, 삼미신 등 거의 모든 미인은 엘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내러티브 없이 그녀만을 독자적으로 그린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 Het Pelsken]은 그의 수많은 초상화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독특한 그림이다.
붉은 카펫 위에 서서 흘러내리는 모피 외투를 붙잡고 있는 누드의 엘렌은 전통적인 ‘정숙의 비너스(venus pudica)’ 자세를 하고 있으나, 이 경우에는 두 팔이 가슴과 음부를 가리고 있다기보다는 노출을 강조하고 있다. 모피도 몸을 가리기 보다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루벤스 특유의 유쾌한 관능성에 친밀함이 더해진 작품이다. 루벤스는 이 작품을 사적으로 가지고 있다가 죽을 때 아내에게 남겼고, 사후에도 팔지 않도록 유언을 남겼다.
[자화상] 1639
캔버스에 유채, 109.5×85cm, 미술사박물관, 빈
루벤스도 렘브란트처럼 생의 단계마다 자화상을 그렸다. 루벤스가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인 1639년의 작품은 그가 전에 그린 어떤 초상화보다 높은 격조로, 왕이나 통치자들과 능숙하게 교제하는 귀족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1624년에 스페인의 펠리프 3세가 그에게 귀족 신분을 부여했고, 1630년에는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1631년에는 펠리프 4세가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 바 있다. 지병인 통풍으로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던 오른손은 장갑 속에 감추었고, 손과 얼굴에는 병으로 인한 붉은 반점이 드러난다. 대머리였던 것으로 알려진 루벤스는 여기에서 가발을 쓰고 포즈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육체는 쇠약했지만 거의 단색조인 이 자화상에는 왕족과 같이 살았고 학식, 교양, 태도에서 군주와 동등했던 인물의 품격이 느껴진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재산이나 명성이 기울었던 적이 없고, 말년에는 그림을 주문 받거나 팔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스페인의 황제 펠리프 4세가 지은 사냥 별장 토레 드 파라다(Torreda de la Parada)를 위한 112점의 연작을 마지막으로 제작해야 했다. 황제로부터 두번째 연작을 주문 받은 1638년에는 통풍이 악화되어 작업을 할 수 없었고, 그의 나이 63세 되는 1640년에 통풍으로 인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당대에 플랑드르에서 루벤스는 독보적인 대가였고 반 다이크, 야곱 요르단스 등의 화가가 그의 기념비적 바로크 양식에 매혹되었다. 17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색채 논쟁(Querelle du coloris)에서 루벤스라는 이름은 색채를 중심으로 한 회화적인 미술의 대명사가 되었다.
고전적인 형태와 순수한 선의 우위를 주장한 푸생주의(Poussinisme)의 대척에서 회화적인 성격을 옹호한 일파가 루벤스주의(Rubenisme)로 불린 것이다. 결국 루벤스파(Rubenistes)의 우세로 프랑스 회화는 더욱 자유로워진 표현으로 가는 경향을 보였고, 이것이 18세기 와토와 부셰의 로코코 양식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에서는 루벤스가 영웅으로 받아들여졌고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말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도 각자의 입장에서 루벤스를 인정했고, 영국에서는 컨스터블이 루벤스의 풍경화에 존경을 표했다. 루벤스는 1830년에 독립한 새로운 국가 벨기에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첫댓글 오늘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역사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오늘의 역사 감사합니다~영아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