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로도 없이 폐허가 된
인화(寅火) 돈대
인화(寅火) 돈대에 관한
안내문
인화돈대에서 바라본
별립산(좌)과 교동대교(우)
인화돈대에서 바라본
교동대교와
사진 중앙에 보이는 석모도 상주산
인화돈대에서 바라본
석모도 상주산(좌)과 교동도(우)
[인화돈대~무태돈대]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별립산
[인화돈대~무태돈대]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교동대교
조선 숙종 5년에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쌓은
여러 돈대들 중 하나인
무태돈대
무태돈대에 관한
안내문
무태돈대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화도 덕산, 국수산, 석모도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상주산
무태돈대에서 바라본
석모도 상주산(좌)과 교동도 화개산(우)
무태돈대에서 바라본
교동도(좌)와 교동대교(우)
무태돈대의 총구멍을 통해 바라본
석모도 상주산
무태돈대의 내부 모습
창후항에서 바라본
석모도 상주산(좌)과 교동도 화개산(우)
창후항에서 바라본
별립산
[창후항~신화유스호스텔]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별립산
[창후항~신화유스호스텔]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신화유스호스텔(좌)과 별립산(우)
신화유스호스텔
신화유스호스텔
[신화유스호스텔~별립산]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별립산 정상부의 공군부대(좌)와 별립산 정상(우)
[신화유스호스텔~별립산]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화도 덕산, 석모도, 창후항
[신화유스호스텔~별립산]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석모도 상주산(좌)과 교동도(우)
[신화유스호스텔~별립산]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교동도, 교동대교, 인화돈대
별립산(399m) 정상 표지석 옆의
이성수 등산 배낭
별립산(399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화도의 고려산, 혈구산, 진강산, 마니산, 덕산, 국수산, 석모도
별립산(399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화도의 덕산, 국수산, 석모도의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상주산
별립산(399m) 정상에서 바라본
석모도(좌)와 교동도(우)
별립산(399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강화도의
(좌로부터) 고려산, 혈구산, 진강산
별립산(399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좌로부터) 강화도의 진강산, 마니산, 덕산, 국수산, 석모도의 해명산
별립산(399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좌로부터) 강화도의 덕산, 국수산, 석모도의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별립산(399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석모도 상주산
별립산(399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교동도 화개산
별립산(399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납골당 시설인 민들레 추모원
별립산(399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화도의 진강산, 마니산, 덕산, 국수산, 석모도의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별립산~신화유스호스텔] 구간
하산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석모도 상주산(좌)과 교동도 화개산(우)
[별립산~신화유스호스텔] 구간
하산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교동도 화개산(좌)과 교동대교(우)
[별립산~신화유스호스텔] 구간
하산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신화유스호스텔(앞)과 교동도 화개산(뒤)
다시 돌아온
신화유스호스텔
신화유스호스텔
聖클라라수도회 강화수도원의
입구에 있는
표지
聖클라라수도회 강화수도원
[聖클라라수도회 강화수도원~망월돈대]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별립산
2024년03월21일(목요일) 강화도 [인화돈대&무태돈대&별립산&강화나들길 제 16코스] 탐방기 탐방지 : 강화도 [인화돈대&무태돈대&별립산&강화나들길 제 16코스] 탐방코스 : [인화성 입구 버스 정류장~(0.8km)~인화돈대~(2.2km)~무태돈대~(0.4km)~창후항~(1.0km)~신화유스호스텔~(1.9km)~별립산~(1.9km)~신화유스호스텔~(0.3km)~聖클라라수도회 강화수도원~(3.8km)~망월돈대~(2.4km)~계룡돈대~(2.2km)~해누리공원~(0.6km)~삼암돈대~(2.1km)~망양돈대~(1.0km)~강화 함상공원~(0.6km)~외포리 버스 정류장] (21.2km) 탐방일 : 2024년03월21일(목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하점면 : 최저기온 영하 2도C, 최고기온 9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6시간12분 소요) 09:18~09:39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합정역 6번 출구로 나옴 [21분 소요] 09:39~09:45 합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09:45~11:09 3000번 버스를 타고 합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로 이동 [1시간 24분 소요] 11:09~11:40 강화터미널 정류장에서 인화성 입구 정류장으로 가는 18번 버스 승차 대기 11:40~12:12 18번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정류장에서 인화성 입구 정류장으로 이동 [32분 소요] 12:12~12:25 인천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에 있는 인화성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982 번지에 있는 인화돈대로 이동 [접근로도 없이 폐허가 된 인화(寅火)돈대 소재지 :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982 인화돈대는 강화도의 서북단, 교동대교의 강화도 쪽 양사면 인화리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다. 인화리의 인(寅)은 범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근 해안에 인화석(寅火石), 곧 범바위가 있어 지어진 동네이름이다. 이 작은 섬마을에는 조선시대 교동으로 건너는 배가 이용하던 인화나루가 있었는데, 연산군과 광해군이 교동 유배지로 들어갈 때 거쳐간 유서 깊은 나루이다. 해안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인화돈대는 숙종 5년(1679) 강화에 최초로 48개 돈대들이 들어설 때 축조된 돈대 중 하나로, 북쪽으로 광암-구등곶-작성-초루돈대, 그리고 남쪽의 무태돈대와 함께 인화보 소속이었다. 인화보는 인화돈대 아래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주택지 개발 등으로 훼손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 돈대들을 쌓을 때 들어간 석재들은 부근의 별립산(別立山)에서 조달한 것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하점면과 양사면 사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별립산은 해발 399m로 강화 6대 산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강도지>에 "강화부 서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립(別立)'이라는 산 이름은 강화도의 다른 산들과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산 전체적으로 바위가 많고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준호산(竣虎山)이라는 별칭도 있다. 이 산 북쪽으로는 교동대교로 이어지는 48번 국도가 지나간다. 인화돈대의 형태는 원형이며, 크기는 98보, 44성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가퀴라고도 불리는 성첩은 성곽 위에 몸을 숨길 만한 나지막한 담(여장)을 쌓고 총안으로 사격을 하게 만든 방어시설이다. 인화돈대의 실측조사에서는 실제 둘레가 130m로 나온 것을 보면 규모가 있었던 돈대 축에 든다. 예전에는 돈대 아래로는 범바위와 당집이 있었고, 하단부 능선에는 연백군 망향비와 누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민가 주택단지 조성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또한 돈대의 석재들도 거의 유실되어 포좌가 몇 개가 있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돈대의 가장자리 기단 석축도 군데군데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며, 주변에 면석이 드물게 보이기는 하지만, 철저히 훼손되어 원형을 그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게다가 무슨 영문인지, 누가 버린 것인지 이런 언덕배기에 상당량의 생활 쓰레기들이 유입되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유적지를 훼손하면 처벌된다는 안내판의 경고가 무색할 지경이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인화보는 인화돈대의 상급부대 단위로, 인화돈과 같은 지역에 주둔했다는 뜻이다. 보통 강화의 54개 돈대들은 강화부 영문 직할 돈 6개 외에는 모두 지방군 단위인 진(鎭)이나 보(堡)에 소속되어 운영되었는데, 대대급인 진이 중대급인 보보다 규모가 좀 크지만 상하관계가 아니라 각기 독립된 부대였다. 그래도 전망 하나만은 어느 돈대에 못지않아, 강화해협의 물길과 멀리 교동대교와 교동도, 석모도가 한눈에 보인다. 이 해협을 지나는 배라면 한 척이라도 인화돈대의 감시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돈대 아래쪽에는 민간의 주택지 개발로 접근로마저 다 지워져 버려서, 비탈과 풀더미를 헤치며 돈대로 올라가야 하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대를 복원할 의지만 있다면 복원이 불가능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돈문 문터와 포좌자리 같은 것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더이상 훼손되기 전에 복원을 서두를 필요가 있어 보인다.] 12:25~12:55 사진촬영 후 집에서 준비해 간 음식으로 간식 12:55~13:28 인천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산 151-4 번지에 있는 무태돈대로 이동 [무태돈대(無殆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창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 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창후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해안을 따라 직사각형으로 길게 쌓았다.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쌓은 여러 돈대들 중 하나로,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를 해안을 향해 4곳 설치해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9) 어영군 2천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병 8천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13:28~13:33 사진촬영 13:33~13:36 인천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에 있는 창후항으로 이동 [창후리 선착장은 강화도의 서북단 교동도와 마주보고 있는 별립산 하단에 위치한 작은 선착장이다. 이곳은 칠면초 군락지로 유명한데 해변에 자란 잡초들이 칠면조와 같이 색이 변한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해변 들판에 펼쳐진 잡초들은 계절마다 색을 달리해 바다와 대비되는 화려한 풍광을 자아낸다.] 13:36~13:49 인천 강화군 하점면 창후로288번길 52 번지에 있는 신화유스호스텔로 이동 [신화유스호스텔은 강화도 별립산 산자락에 위치하여 일몰의 아름다운 정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유적지를 비롯한 체험 중심의 학급별, 학년별 교육과정에 맞는 다양한 맞춤식 체험활동을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종교단체의 수양회, 관공서와 기업체의 연수, 그밖에 다양한 단체의 송년회와 단합대회 진행을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13:49~14:39 인천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560-39 번지에 있는 별립산(399m, 別立山)으로 이동 [별립산(別立山)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하점면과 양사면 사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이다(고도:399m). 강화 6대 산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강도지』에 "강화부 서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 『조선지지자료』에서 별립산(別立山)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산 사면이 하점면 창후리 · 이강리 · 양사면 인하리에 걸쳐 있다. 강화도의 다른 산들과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별립산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고 전한다. 산 정상에는 군 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바위가 많고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준호산이라는 별칭도 있다. 산의 북쪽으로 48번국도가 동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14:39~14:45 사진촬영 14:45~15:23 신화유스호스텔로 회귀 15:23~15:25 인천 강화군 하점면 창후로288번길 68 번지에 있는 聖클라라수도회 강화수도원으로 이동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라틴어: Sancta Clara Assisiensis, 1194년 7월 16일~1253년 8월 11일)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인이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따른 초창기 일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프란치스코회 전통을 따르는 여성들의 수도회인 성 클라라 수도회를 창설했으며, 그녀들의 생활 규칙을 작성했다. 이 수도회 규칙은 최초로 여성이 작성한 수도회 규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선종한 후, 그녀가 창설한 수도회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성 클라라 수도회로 이름 지어졌다. 성 클라라 수도회는 ‘가난한 자매회’ 혹은 ‘프란치스코 2회’ 등으로도 불린다. 행적 클라라의 본명은 키아라 오르페두초(Chiara Offreduccio)이며, 1194년 아시시에서 사소로소 백작 파보리노 스키피와 그의 아내 오르톨라나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깊은 신심을 지닌 여인이었던 오르톨라나는 당시 시대적으로 위협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예루살렘 등지를 순례하였다. 말년에 오르톨라나는 자신의 나머지 딸들인 아녜스와 베아트리스와 함께 클라라 수녀원에 들어갔다. 클라라는 어린 시절부터 기도 생활에 열심이었다. 12세가 되던 해에 부모는 클라라가 젊고 부유한 남성과 혼인하기를 원했지만, 클라라는 18세가 될 때까지 결혼을 유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18세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들은 이후 그녀의 삶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프란치스코는 그녀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여인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구하러 갔을 때 클라라는 집에 머물렀으며, 그날 밤 모든 사람이 잠든 사이에 가출하여 프란치스코를 따라갔다. 프란치스코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검은색 튜닉과 베일로 이루어진 수도복을 주어 입도록 하였다. 클라라는 바스티아 인근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녀원에 거주했는데, 이 사실을 안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결혼을 위해 수차례 납치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클라라는 곧장 자신의 여동생 아녜스와 함께 프란치스코가 재건한 산 다미아노 성당 근처에 있는 작은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다른 여인들도 여기에 동참함으로써 산 다미아노 성당의 수녀들은 매우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 방식으로 유명해졌다. 이들 여인들은 처음에는 ‘가난한 자매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산 다미아노 성당은 클라라가 세운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본부가 되었으며, 이 성당의 이름을 따서 클라라가 생존한 시기에는 ‘산 다미아노회’로 불렸다. 산 다미아노 성당은 오랫동안 클라라회의 첫 수도원으로 여겨졌으나,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미 우골리노 데이 콘티 디 세니(훗날의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조직된 여성 수도 공동체가 이미 산 다미아노 성당에 있었으며 클라라회가 여기에 나중에 합류한 것이라고 한다. 우골리노는 클라라가 세운 수도 공동체의 명성이 높아지자 산 다미아노 성당이 그녀들의 소유가 되기를 바랐다. 산 다미아노 성당은 클라라를 따르는 수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으며, 클라라는 반론의 여지 없이 만장일치로 수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1263년 클라라가 선종한 지 10년 후에 이 공동체는 성 클라라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중을 상대로 설교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 프란치스코회 수사들과는 달리 클라라회 수녀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여인의 몸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생활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봉쇄 생활을 했다. 그녀들은 주로 손으로 하는 노동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클라라회는 잠시 동안 프란치스코가 직접 지도했다. 1215년 클라라가 산 다미아노 수녀원의 아빠티사직을 수락하였다. 아빠티사가 된 클라라는 이전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수녀회를 지도했다. 아빠티사로 선출되기 전까지 그녀는 지역 본당의 주임 신부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신앙적 권고로 작성한 더욱 엄격한 생활 양식보다는 베네딕도 규칙서에 좀 더 가까운 규칙서를 새로운 수도회에 부여하려는 고위 성직자들의 시도를 막아냈다. 프란치스코의 미덕과 생활 방식을 본받아 따라한 클라라는 이따금씩 ‘또 다른 프란치스코’(alter Franciscus)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영적 아버지로 여기며 그를 힘껏 격려하고 보조했으며, 그가 말년에 병든 후에는 1226년에 선종할 때까지 병상에서 간호하였다.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후, 클라라는 클라라회의 규모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켜 나갔으며,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 규칙을 기초로 클라라회의 규율을 정했으며 1228년 이 규율에 대한 인준을 요청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너무나 엄격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클라라는 1243년에 다시 자신이 작성한 회칙의 인준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요청했으나 마찬가지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녀는 허약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자신에게 부여된 과업을 선종할 때까지 수행했다. 프란치스코와 같이 기꺼이 가난한 삶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사상은 그녀가 직접 작성한 수도 규칙과 보헤미아의 아녜스에게 보낸 4통의 편지 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선종 이후 1253년 8월 9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Solet annuere》라는 교황 칙서를 통해 클라라가 작성한 수도 회칙을 인가하였다. 그토록 원하던 교황 칙서를 첨부한 자신이 만든 수도회칙을 받은 클라라는 크게 기뻐했으며, 그로부터 이틀 후인 8월 11일에 클라라는 59세의 나이에 선종했다. 클라라는 임종 직전에 여러 동정녀 순교자들을 보았다고 하며, 그녀가 본 성녀들은 대략 용을 짓밟은 성녀 마르가리타와 물동이를 든 성녀 마르타, 탑을 든 성녀 바르바라, 바퀴를 든 성녀 가타리나, 꽃을 든 성녀 도로테아였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한 성당을 짓기 위한 공사가 착수되었으며, 그동안 그녀의 시신은 산 조르지오 경당에 매장되었다. 1255년 8월 15일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클라라를 시성했다. 1260년 클라라의 이름을 딴 산타 키아라 대성당이 완공되었으며, 그 해 10월 3일에 클라라의 시신이 새로 완공된 대성당으로 옮겨져서 중앙 제대 아래에 매장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클라라의 공로를 높이 사, 1263년 가난한 자매회의 명칭을 성 클라라 수도회로 공식적으로 변경했다. 그로부터 약 600년이 지난 1872년 클라라의 유해는 산타 키아라 대성당의 지하에 새로 지어진 봉안실로 이장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1958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병이 너무나 깊어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을 때 병실의 벽에서 미사의 광경이 떠올라 보고 들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무어인 동맹군들이 아시시를 공격했을 당시 한 사제에게 부탁해 성체를 들어 보이게 한 후 그 앞에 양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물러가게 만들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러한 연유로 성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종종 그려지곤 한다. 클라라는 선종한 지 2년 후에 시성되었으며,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그녀의 축일은 8월 12일로 지정되었다. 원래 성인의 축일은 성인이 사망한 날로 지정되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8월 11일이 축일로 지정되어야 마땅하지만, 이미 해당 날짜에는 3세기 로마인 순교자들인 성 티부르시오와 성녀 수산나의 공동 축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8월 11일 다음 날짜인 8월 12일로 지정된 것이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력이 개정되어 성 티부르시오와 성녀 수산나의 기념이 빠지게 되면서 비로소 성녀 클라라의 축일은 그녀가 선종한 날짜인 8월 11일로 지정되었다. 과거에 그녀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오늘날에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는 없다.] 15:25~16:08 인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2107 번지에 있는 망월돈대(望月墩臺)로 이동 [망월돈대(望月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에 있는 돈대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1호 망월돈대 및 장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8월 1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망월돈대는 방형구조로 둘레 124m, 석벽의 높이는 180~300㎝이다. 40~120cm의 돌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성곽 위로는 흙벽돌로 낮게 쌓은 담장이 둘려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망월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진무영에서 직접 관할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 대개 돈대들이 해안가 높은 지대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망월돈대는 갯가 낮은 지대에 설치됐다. 그래도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없어 경계초소로 부족함이 없다. 남쪽으로 계룡돈대, 북쪽으로 무태돈대가 있다. 돈대와 함께 있는 장성은 고려 고종이 이곳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해안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것으로, 누각을 설치한 출입문이 6곳, 물길이 드나드는 문이 7곳 마련되어 있었다.] 16:08~16:13 사진촬영 16:13~16:42 인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 번지에 있는 계룡돈대(鷄龍墩臺)로 이동 [계룡돈대(鷄龍墩臺)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구조물.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번지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규모가 큰 군사시설을 진이라 하고 작은 것은 돈대라 하였는데,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돈대를 설치해 적군의 침입을 감시하고 직접 싸우기도 했으므로 오늘날의 초소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강화도에는 53개소의 돈대가 남아 있는데, 1679년(숙종 5)에 설치된 것이다. 계룡돈대는 경상도 군위(軍威)의 어영군사(御營軍士)들이 축조한 돈대로, 강화 53돈대 중 유일하게 축조연대가 표시되어 있다. 30m×20m의 직사각형 모양이며, 한 면은 석축 높이 2m 정도에 길이가 30m이고, 3면은 석축(石築)되어 해변을 향해 정면으로 외적을 볼 수 있다. 망월(望月)돈대와 함께 직접 영문(營門)에서 관할했다. 석축 하단에 ‘강희18년 군위어영 축조(康熙十八年軍威禦營築造)’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강희 18년은 1679년이다.] 16:42~16:48 사진촬영 16:48~17:14 석모대교 근방에 있는 강화 해누리공원(인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산 170-1)으로 이동 [국수산(193m) 끝자락에 들어선 '해누리공원'은 강화군에서 운영하는 공설 장지이다. 원래 있던 공설 묘지 터에 현대식으로 새롭게 설계한 공원묘지가 들어선 것이다. 해누리공원이 들어서면서 그 뒤에 있던 석각돈대는 난데 없이 길을 빼앗겼다. 석각돈대는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산 171번지에 위치해 있다. 석각돈대에 가자면 지금의 해누리공원 근처에 있던 길을 따라서 가면 됐었다. 그런데 그 길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해누리공원을 건설하면서 길을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17:14~17:20 강화 해누리공원에 있는 전망대에서 주변 풍경을 사진촬영 17:20~17:25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 223-4 번지에 있는 삼암돈대(三岩墩臺)로 이동 [삼암돈대(三岩墩臺)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 223-4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축조한 강화 54돈대 중의 하나이다. 강화도의 서쪽 해안 중앙, 석모도(席毛島)를 마주한 곳에 설치하였다. 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이다. 강화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6) 청성부원군 김석주(金錫胄:1634~1684)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조하였다 한다. 실제로 축성을 지휘한 것은 당시의 강화유수(江華留守)였던 윤이제(尹以濟)이다. 강화돈대는 종래 53돈대로 알려졌으나, 1999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54돈대로 확인되었다. 삼암돈은 외포리 아래의 건평돈, 동으로 1.3㎞ 떨어진 망양돈, 북쪽으로 3㎞ 떨어진 석각돈과 함께 정포보(井浦堡:정포진)의 관할하에 있던 곳이다. 지형은 전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안쪽으로 약간 후퇴한 넓은 대지에 터를 잡고, 후면으로는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있다. 대략 40~120㎝ 정도의 모난돌로 축조된 석벽에는 4문의 포좌와 55개소의 치첩(雉堞)이 있었다. 포좌 내부에는 포탄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이방(耳房)을 설치하였다. 기록에 보면 축성 당시의 둘레는 91보라 했으나, 지금은 가로 22.5m, 세로 23m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북으로 출입구가 나 있으며, 외벽은 높고 내벽은 낮은 것이 특징이다. 석벽의 폭은 4m 정도이고, 내부에 방형(方形)의 화약고터가 남아 있다. 석벽은 전체적인 지형에 따라 횡줄눈의 높이를 맞추어 쌓았으며, 석재 사이에는 그랭이질을 하여 맞닿은 면을 빈틈없이 하려고 하였다. 상부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후퇴시킨 퇴물림 방식을 사용하였다. 출입구로부터 우측 40m 지점에 석조를 만들어 물을 배수시키고 토압(土壓)을 완화하려 하였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보수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7:25~17:53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 번지에 있는 망양돈대(望洋 墩臺)로 이동 [망양 돈대(望洋 墩臺)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번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강화도는 예부터 외적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에 개성, 한양 등의 중부 내륙지방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 해안방어에 각별히 힘써 왔던 곳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숙종은 이곳에 6진(鎭), 7보(堡), 9포대(砲臺), 53돈대(墩臺)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에게 강화도의 지형을 돌아보게 한 뒤 어영군(御營軍) 4,000명과 함경도·황해도·강원도에서 뽑은 승병(僧兵) 8,000을 동원해 49개의 돈대를 축조하도록 명하였다. 망양돈대도 이때 축조되었다. 망양돈대는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의 원형으로 대포를 올리기 위한 포좌(砲座) 4개소와 치첩 40개소가 있고 윗부분에는 벽돌로 만든 성가퀴(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으로 여장 또는 성첩이라고 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주위에는 남쪽으로 3.2km 떨어진 곳에 건평 돈대(인천광역시 기념물)가 있고 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삼암돈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가 있다. 그 밖에 당시 망양돈대와 함께 축조된 돈대로는 택지·분오리돈대(이상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장곶·계룡·건평·건평·굴암·미루지·북일곶돈대(이상 인천광역시기념물), 망월·선수·화도·무태등대(이상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특히 해안에 위치한 화도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17:53~18:04 사진촬영 후 물을 마시면서 휴식 18:04~18:15 외포리 선착장을 거쳐서 인천 강화군 내가면 해안서로 855 번지에 있는 강화 함상공원으로 이동 [외포리 선착장은 강화도 외포리에 위치한 소규모 연안여객터미널로 유난히 갈매기가 많아 사진 촬영지로 소문난 명소이다. 외포리 선착장은 석모도 출입을 위한 주민과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지만 석모대교가 개통되면서 석모도 배편 운항 횟수가 줄어들자, 주문도 등 강화 부속 섬을 출입하기 위한 여객 터미널로 바뀌었다. 선착장 한편에는 외포항 젓갈 수산물 직판장이 있어 해산물과 젓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도 붐비는데 특히 서해에서 잡은 것으로 담근 새우젓이 유명해 김장철이면 많이 찾는다. 외포리 선착장 가까이 있는 석모도와 민머루 해수욕장도 둘러보기 좋은 산책과 휴식 코스이다.] [퇴역 함정 활용 ‘강화함상공원’ 14일 임시 개장 강화군, 외포리에 퇴역함정 활용한 호국·안보 관광명소 조성 유영재 기자 글로벌이코노믹 기사 등록일 : 2023-11-10 강화군이 오는 14일부터 퇴역 함정을 활용한 ‘강화함상공원’을 임시 개장한다. 강화함상공원은 내가면 외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시 개장 기간 무료로 운영한다. 강화군은 1985년 취역 이래 34년간 우리 바다를 지켜오다 2019년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퇴역 함정 ‘마산함’을 해군본부로부터 무상 대여하여, 지난해 12월 함정 해상 거치를 완료하고, 올해 함정 내부 전시 및 안전시설 개선 공사를 진행했다. 마산함은 1960t급 한국형 호위함(길이 102m, 높이 27.8m, 폭 11.5m)으로 1984년 10월 진수되어, 1985년 7월 취역한 함정이다. 국산 호위함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하였으며, 림팩(RIMPAC) 훈련에도 참여했다. 해군 최우수 포술함으로 선정되어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는 등 맹활약하다 2019년 퇴역했다. ‘강화함상공원’은 마산함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으로 재생하여, 시민들이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군함에서 해군의 생활과 각종 전투 장비를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군함 내부 공간에는 함장실, 조타실, 전투정보실, 통신 센터, 76mm 상비 탄약고 등을 재현했고, 전함 외부공간에는 76mm 함포 2문, 30mm 함포 4문, 하푼 미사일, 청상어 어뢰, 미스트랄 발사대 등을 전시하여 군함의 위용을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강화 함상공원은 △동절기(11월~2월)에는 10시~17시 △하절기(3월~10월)에는 10시~18시까지 운영하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은 휴관한다. 유천호 강화군수는 “강화함상공원은 우리 해양을 수호했던 퇴역 함정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조성한 호국․안보 체험공간으로 함정과 해군생 활에 대해 특별한 추억을 쌓기 바란다"고 말했다. 강화군은 외포 권역에 강화함상공원, 종합어시장, 어촌뉴딜300, 석모해상케이블카(민자) 등 대규모 사업이 집중 추진됨에 따라 관광 및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8:15~18:18 사진촬영 18:18~18:24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외포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8:24~18:33 외포리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47번 버스 승차 대기 18:33~18:59 47번 버스를 타고 외포리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6분 소요] 18:59~19:00 강화터미널에서 김포시에 있는 고촌역으로 가는 3000번 버스에 승차 19:00~20:01 3000번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에서 김포시에 있는 고촌역으로 이동 [1시간 1분 소요] 20:01~20:07 고촌역에서 김포공항역으로 가는 김포골드라인 전철 승차 대기 20:07~20:46 김포골드라인 전철을 타고 고촌역을 출발하여 김포공항역으로 가서 공항철도로 1차 환승하여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39분 소요] 강화도 별립산 산행지도 강화나들길 제 16코스(서해 황금 들녘길) 지도 강화도 돈대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