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집에 놓으라고 지인이 흔들의자 두 개를 보내왔다.
새로 타일을 깐 뒷마당에 그 의자를 놓으니 원래부터 있었던 나무들과 잘 어울렸다. 둥근 야외용 탁자를 옆에 놓았다. 그 의자에 앉아 차도 마시고 책도 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는데 벌써 가슴 벅차게 행복이 밀려왔다. 행복은 참 가까이 있다. 뒷마당으로 향하는 거실 창에 서서 흔들의자를 바라만 본다. 선뜻 가서 앉아 보지 못하고 서 있다. 그곳에 앉는 것이 낯설다. 아직은 저런 의자에 앉아 흔들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어 선뜻가서 앉을 수가 없다. ‘뭐 잠깐 앉아 바람이나 쐬자는 건데’
다른 생각이 입을 삐죽이며 고지식한 남편 바라보는 나이 어린 아내같이 통통 나선다.
미련을 못 버리고 서서 쳐다만 본다. 저기 앉아서 노닥거리는 사이 해야 할 일을 놓쳐서 예상하지 못한 큰일을 당할 것만 같다. 아직 앉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벌써 불안해진다. 노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 닦달한다. 무엇인가 할 일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고.
‘그래도 이젠 조금 쉬어도 되지!’
이번엔 산에서 도를 닦은 노인네 같은 생각이 불쑥 나와 불안한 마음을 책망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냐고. 인생은 그래도 흘러가고 그러지 않아도 흘러간다고. 무엇을 중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못을 박는다. 나의 망설임에 더 기다리지 못하고 바람이 슬쩍 의자를 치고 지나간다. 의자가 앞뒤로 흔들거리며 나를 부른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나는 아직도 그냥 서 있다. 흔들의자를 보면 뜨개질하는 노인이 생각이 난다.
난롯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남아도는 시간을 실과 함께 한없이 엮어가는 외로운 노인. 본인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 내고 나서 끝자락에 남겨지는 노후의 삶. 하루를 더 분주하게 했던 아이들은 각자의 삶을 향해 떠나가고, 부모가 살아온 것처럼 그들도 바쁜 삶의 소용돌이 안에서 한없이 달리고 있다. 그래서 더욱 외로운 노인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것도 없는 하루의 긴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던 날의 기억만 붙들고 살아간다. 이제 나도 그런 노후의 삶을 시작하는 것인가?
남들이 다 뛰어다니며 살아가니 나도 함께 뛰었던 삶.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지불해야 할 청구서들도 줄줄이 서 있었다. 시민권을 취득해도 늘 따라다니는 남의 나라 사람이라는 호칭.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바쁘게 살아 냈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이 땅에 조금이라도 단단한 기반을 마련해 주고 싶어서, 남보다 더 많이 일하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아이들은 결혼해서 각자의 삶을 시작하고 그들이 떠난 빈 둥지만큼 할 일이 줄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갑자기 늘어난 시간에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한다.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어도 되나?
잔바람에 의자는 아직도 흔들흔들 한다. 그래 한번 앉아 보자. 살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이 상쾌하다. 습기가 적당히 섞여 있는 햇볕이 따스하게 어깨에 내려앉는다. 조심스럽게 흔들의자에 엉덩이를 걸쳐 본다.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는 의자를 두 손으로 잡아 더 깊이 들어가 앉는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머리도 뉘인다. 눈을 가만히 감았다. 하늘로 높게 솟은 나무 위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내려온다. 바람이 다시 와서 나뭇가지에게 가벼운 인사를 한다. 나뭇잎들이 아이들의 환호성처럼 소란스럽게 바람에게 답례를 한다. 나의 볼에도 바람이 인사를 한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한다. 쉽지 않은 삶을 잘 살아 냈다고. 이제 이 정도의 호사는 누려도 되니 마음을 놓고 즐기라고 속삭인다.
바람의 속삭임에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진다. 가까이 있는 이 행복을 가슴 가득 담아 보기로 한다.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제일 좋아하는 커피잔을 꺼내 향 좋은 커피를 골라 내린다. 냉동고에 아껴 두었던 티라무스 한 조각을 꺼내 예쁜 접시에 담아 다시 뒷마당으로 나갔다. 탁자 위에 커피와 티라무스 접시를 올려놓고, 반갑다고 고갯짓하는 흔들의자에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털썩 앉는다. 사뭇 당당해진 자신에게 만족하며 나에게 주어진 여유에 젖어 든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윽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한 입 베어 문 달콤한 티라무스가 씁쓸한 커피의 뒷맛을 마무리해 준다. 행복하다. 그래 이제 이 정도의 행복은 누려보자. 뿌려지는 햇살이 나무가 드리운 그늘에서 빠져나와 나의 얼굴에 오래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