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방한
2022년 북한 장거리 탄도미시일 신형 ICBM 화성-17형 발사
북한은 오후 9시35분쯤부터 9시49분쯤까지 황해북도 곡산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3발을 발사했다. 미사일 비행거리는 약 490㎞, 고도는 약 130㎞, 속도는 약 마하 6(음속 6배)으로 탐지됐다.
앞서 이날 오전 7시40분쯤 평양 순안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발, 오전 8시39분쯤 평남 개천 일대에서 SRBM 2발을 쏘고 다시 무력 시위를 이어간 것이다. 또한 밤11시45분에는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였다
2021년 요소수 품절로 구입하지 못해 차량 운행중단 등 대란
2020년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 트럼프 재선 실패
11월 3일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선거인단 306명을 확보해 공화당 후보로 232명을 확보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제치고 당선을 확정 지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 패배한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에 이어 28년 만에 재선에 실패한 현역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규모 선거 사기”가 있었다면서 여러 법적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이든 당선인은 내년 1월 6일 상·하원 합동회의 비준을 받은 뒤 1월 20일 취임할 예정이다.
2015년 한국계 마크 김, 미국 버지니아주(州) 하원의원 4선 성공
한국계인 마크 김(49) 미국 버지니아주(州) 하원의원이 4선에 성공했다. 민주당 소속인 그는 3일 열린 지방의회 선거에서 한인 밀집 지역인 버지니아주 하원 제35지구에서 단독 입후보해 9099표(94.9%)를 얻었다.
김 의원은 인터뷰에서 “한인과 이민자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공약했다”며 “한인 도움 없이는 4선 고지를 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한인들이 저를 모델로 삼아 야망을 크게 갖고 미국 정치에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인 아버지가 베트남에 교회를 세워 1975년 공산화 전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이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호주로 피신했고, 나중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정착했다.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공사판부터 쇼핑센터 카트 정리까지 다양한 부업을 한 그는 UC 어바인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후 UC 해스팅스 법대를 마쳤다. 2001년부터 법률 고문으로 리처드 더빈 연방상원 의원을 7년간 도운 그는 통신회사 부사장을 맡으면서 의회를 떠났다. 하지만 2009년 버지니아주 하원 선거에 도전해 공화당 후보를 간발 차이로 이긴 후 4선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2015년 “사담 후세인, 대량 살상 무기(WMD) 보유” 허위 정보 제공한 찰라비 사망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 살상 무기(WMD)를 보유했다는 허위 정보를 제공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을 줬던 이라크 정치인 아마드 압델 하디 찰라비(71)가 3일 사망했다. CNN은 이날 찰라비가 바그다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친미 성향의 시아파 정치인이었던 그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 나선 미국에 “후세인 정권이 WMD를 숨긴 곳을 알고 있는 과학자가 수천명이 넘는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다음 해인 2004년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011년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통일부총리 별세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과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권오기(權五琦·79)씨가 3일 오전 4시 30분 별세했다.
경북 안동서 태어난 고인은 경북고,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경향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 동아일보로 옮겨 도쿄·워싱턴 특파원, 동아방송 보도담당 부국장을 거쳐 1977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다. 이후 주필, 부사장을 거쳐 1993년 사장에 취임, 그해 4월부터 조간 체제로 바뀐 동아일보의 변화와 쇄신을 지휘했다.
고인은 1995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통일부총리로 발탁됐다. 2년 2개월 부총리를 지내면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탈북자 지원이었다. 1997년 '탈북자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 제정에 기여했다. 또 탈북자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북한이탈주민대책협의회'를 설치했다. 판문점 '자유의 집'과 인도지원국 및 통일교육원을 만들어 업무를 체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서재필기념재단 이사장, 21세기평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언론과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저서로는 '현대사 주역들이 말하는 정치 증언'과 일본 아사히신문의 와카미야 요시부미 논설주간과 함께 펴낸 대담집 '한국과 일본국'이 있다. 2004년 고재욱기념언론상을 받았다.
2007년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국가 비상사태 선포 파키스탄 정국 혼란
2006년 학생의날이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변경
2005년 국산김치 16개 제품에서 기생충알 검출
2004년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자 전락원 회장 별세
파라다이스 그룹 창업자인 전락원(田樂園·77) 회장이 3일 오전 3시30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고(故) 전락원 회장은 1927년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개척교회 목사였던 전주부(田周富) 목사의 2남5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965년 운수업을 거쳐 오림포스관광호텔 사장에 오르면서 관광산업에 처음 뛰어들었다. 지난 68년 워커힐호텔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세운 뒤 호텔사업과 제조·건설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현재의 파라다이스 그룹을 이뤘다.
지난 89년에는 파라다이스그룹 안에 케냐 총영사관을 개설하는 등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민간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외화 해외 밀반출과 워커힐 카지노를 통한 세금 포탈 혐의로 지난 93년 검찰에 수배됐고, 실형을 받은 뒤 구속되기도 했다.
고인은 최근 몇 년 동안 주요 지분을 장남인 전필립(田必立·44) 파라다이스 부회장 등 친인척과 비영리법인에 넘겼으며, 자신은 올 연 초 계원학원 이사장을 맡는 등 교육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2004년 조지 W 부시, 존 케리 누르고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재선
2002년 터키 이슬람계 정당 80년만에 단독 집권
2002년11월3일 실시된 터키 총선에서 이슬람계 정당인 ‘정의발전당’이 압승을 거뒀다.
개표 결과 정의발전당은 34%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고, 중도좌파 계열의 공화인민당은 19%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뷜렌트 에체비트(Ecevit) 총리의 민주좌익당을 비롯한 나머지 정당들은 모두 원내 진입에 필요한 최소 득표율인 10%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초반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80년 만에 이슬람계 정당으로는 처음으로 정의발전당이 과반수 의석(총 550석 중 최소한 350석)을 차지하게 됐다.
에체비트 총리가 이끌던 집권 연정내 3개 정당들의 참패는, 2차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에 처한 터키 국민들이 등을 돌린 탓으로 분석됐다. 터키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10억달러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지원 받았었다.
정의발전당은 이슬람 정치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주축이 돼 2001년 창당됐으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Erdogan) 당수가 이끌고 있다. 그러나 에르도안 당수는 1999년 ‘이슬람 선동’ 혐의로 복역한 전력 때문에 이번 총선에는 출마가 금지됐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정의발전당은 이슬람 색채를 씻어내기 위해 터키의 전통적인 세속주의 유지와 유럽연합(EU) 가입 지지, IMF와의 공조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군부를 포함한 기존 제도권과 서방국가들은 과격한 이슬람주의에 근거한 정책 전환 가능성을 우려했다.
2002년 세계최대게임대회 `월드사이버게임즈` 한국종합 1위
2000년 공군 KT-1 기본훈련기 1호기 출하
2000년 채권은행단, 삼성쌍용차 등 29개 부실기업의 청산-법정관리 발표
1998년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한국인 신호범(미국명 폴 신) 당선
19살때 한국을 떠났던 가난한 소년 신호범(62·미국명 폴 신)씨가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신씨는 1998년 11월 3일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에서 백인이 93%에 달하는 보수적인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로서, 또 동양계로서는 처음으로 상원의원이 됐다.
그는 4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한때 행방불명된 뒤로, 1950년 서울 영등포 일대에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 생활을 했다. 주한미군 군의관이던 양아버지 레이 폴 박사는 유난히 검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고, 소년은 1953년 양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난 뒤 이민절차를 밟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많은 어려움을 딛고 신씨는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다. 워싱턴 대학에서 동아시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69년 대학강의를 시작하면서 월급을 받게 되자, 1972년부터 6년에 걸쳐, 1950년 생존을 확인한 친아버지와 계모, 그리고 이복동생 5명을 차례로 데려왔다. 그후 주지사의 무역자문역할을 하던 중 1992년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노력 끝에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영광을 안았다.
1997년 시인 김요섭씨 별세
시인이자 예술원 회원인 김요섭(71)씨가 1997년 11월 3일 별세했다. 시인은 빛의 조화에서 시의 광맥을 찾아온 `빛의 시인`이자 동심이 지닌 위대한 꿈과 가능성을 가꾸어온 `한국의 안데르센`으로 불려왔다. 김씨는 맑고 투명한 이미지의 시인으로 불렸다. 그는 눈이 녹는 풍경을 보면서 해맑은 이미지로 자연의 음악을 그려내는 시인이었다. 또 격정적 언어를 멀리하고 차분하게 세밀한 이미지의 구성물을 빚어내는 것이 시라고 믿었다.
함북 나남 출신으로 1941년 열넷의 어린 나이에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개넘어 선생`이 당선돼 처음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1947년 `아동문학의 계급성을 인정하라`는 북한정권의 강압적 요구를 거부하며 청진교원대 재학중 월남했으며 같은해 동인지 `죽순`에 시 `수풀에서`를 발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57년 동화작가인 마해송 강소천씨와 함께 `어린이헌장` 제정에 참여하고 한국동화작가협회를 발족시켰다. `동화는 현대 최고의 예술형식이며 순수문학`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동화집 `날아다니는 코끼리` `깊은 밤 별들이 울리는 종` `푸른 머리의 사나이` 등을 통해 동심의 세계를 완숙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체중` `달과 기계` `빛과의 관계` `은빛의 신` `빛의 뿌리` 등의 시집도 남겼다.
소천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펜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쌓았고, 1993년부터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1995년 작곡가 윤이상 독일에서 사망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씨가 1995년 11월 3일 폐렴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그는 살아있을 당시 이미 세계음악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였지만, 정작 고국인 한국에서는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아래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통영에도 끝내 가보지 못한 비극적 운명의 사나이였다.
1931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이웃 청년으로부터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접하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 아버지의 뜻도 거역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그였다. 1935년 도일해 일본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다. 1946년~56년까지 고향 통영과 부산, 서울 등에서 교사와 강사생활을 했다.
그는 일제 때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6·25때 부산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등 음악가로서뿐 아니라 동포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긴 애국자였다. 그러나 1956년 프랑스대를 거쳐 독일에 유학한 후 11년째 되던 1967년, 베를린 거주 유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대거 북한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강제 귀국당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71년 독일로 귀화했다.
오늘날 그는 한국과 동양정신을 서양음악에 접목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굳히게 된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오페라 ‘심청(1972년)’을 비롯,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나비의 꿈’ 등 1백50여 편이 있다. 한국에서의 작곡활동은 지금까지 동요와 가곡 정도가 알려져 있다.
1989년 대불산업기지 착공
1989년 공업용 우지로 라면-마가린 등을 제조한 5개업체 대표 10명 구속(공업용 우지 파동)
1984년 충남 보령 덕수탄광 지하 갱 가스폭발 사망 5명 부상 3명
1984년 11년 만에 학생의 날 부활
그래도 우리가 희망과 앞날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젊은 학도(學徒)들일 것입니다.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 국회 본회의.
윤택중(尹宅重) 의원은 학생의 날 (11월 3일) 제정을 건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딛고 나라를 재건할 미래의 기둥은 학생들이고, 그들에게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정신을 상기시켜야 한다는 취지. 광주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194개교 5만4000여 명이 참여한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시위였다.
이 회의에서는 기념일 명칭에 대한 짧은 토론이 있었다.
학생의 날이란 명칭이 너무 평범하고 일반적이다.
좀 길더라도 학생항일운동기념일 이라고 분명히 규정하자.
학생의 날의 의미는 전 민족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항일이란 말을 영원토록 쓸 수 있느냐도 생각해야 한다.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은 표결에 부치면서 역사적으로 전 민족이 기념할 만한 날, 학생 본심(本心)으로는 영원히 잊지 못할 날, 학생의 날을 제정하자는 것 이라고 말했다.
만장일치 가결.
그러나 그날 은 20년 만에 공식적으로 잊혀졌다.
1973년 정부가 53개 정부 기념일을 26개로 간소화하면서 학생의 날을 폐지한 것.
야당 의원들은 미묘한 한일관계를 감안한 굴욕적 배려 아니냐
학생운동을 근원적으로 규제하기 위한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 고 따졌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그날의 항일독립정신은 3․1절에 묶어서 반영하고, 민족주의적 정의와 애국심은 4․19혁명 기념일에 되새기면 된다 는 희한한 통폐합 논리를 폈다.
학생의 날은 1984년에야 부활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킨 영향이 컸다.
그 제정 이유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항일독립운동과 반탁, 반공 그리고 6․25 참전과 반독재의 최일선에서 민족정기를 드높였던 우리의 학생들은 민족의 희망이요 나라의 동량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해 11월 3일 11년 만에 다시 맞은 학생의 날 풍경은 어땠을까.
당시 동아일보 사회면을 들춰 보니….
서울시경찰청은 부활된 학생의 날을 맞아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돼 전 경찰병력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경찰은 3만여 명의 경찰력을 총동원해 가두시위자는 모두 연행토록 지시했다.
1983년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발견(도산 안창호선생 장녀집서)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 만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기미독립선언서에서 한국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언했다.
첫머리에 언급한 비장한 호소도 독립선언서의 일부다.
그러나 기미독립선언서는 아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선포한 2·8독립선언문도 아니다.
여성들이 주도한 독립선언서가 1919년 작성됐다는 사실이다.
“슬프고 억울하다”며 비통한 심정으로 시작되는 이 글은 바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다.
이 선언서는 1983년 11월 3일 도산 안창호 선생 장녀인 안수산 씨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집에서 뒤늦게 발견됐다.
한지(가로 49cm, 세로 31cm)에 붓으로 1350자를 써 내려갔다.
선언서 끝에 단기 4252년(서기 1919년) 2월과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 작성자 8명의 이름을 분명히 밝혔다.
3·1운동 즈음 국내외서 선포된 독립선언서 중 발견된 것만 20종이 넘지만 여성이 주도한 독립선언서는 이 선언서가 유일하다.
다른 선언서는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문으로 썼지만 이 선언서만은 순 한글로 썼다.
2007.11.1 위암 장지연상을 받은 대표적 한국 여성사 연구자인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는 이 선언서가 중국 지린(吉林) 성에서 작성됐으며 작성자는 근대 교육을 받은 기독교계 젊은 여성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성도 상무(尙武) 정신으로 남자들과 함께 독립투쟁의 대열에 나서야 하며 여성의 역량은 용기와 고매한 지식을 가진 영웅호걸을 능가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 선언문은 독립운동 당시 여성의 역할을 짐작게 한다.
박 전 교수는 3·1운동이야말로 남녀 성차를 완전히 극복해 하나로 단결된 민족운동이라 평한다.
여성들은 방방곡곡 시위에서 용기 있고 위대한 민족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3·1운동의 주역 중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은 유관순 열사 정도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고 믿는 분들께 도쿄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준비하며 독립사상 고취 웅변대회 열었을 때 여자친목회 회원 황에스터(1892∼1971)가 남긴 말을 전한다.
“여러분!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겁니까?
수레바퀴는 혼자서 달리지 못합니다!”
1982년 미해군, 5번째 원자력 항공모함 건조착수
1982년 삼성그룹, 조선호텔 및 주변부지 매입
1982년 영국 역사학자 E.H.카 사망
E.H.카(1892~1982)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후 영국 외무부 소속 공무원(1916~1936)으로 활동했다. 외무부 시절 방대한 양의 소련 정부 자료를 소화해야 했던 그는 자료 더미에서 필요한 정보를 추려내는 경험을 통해 소련 전문 사학자가 갖춰야 할 심층지식을 쌓았다.
러시아혁명과 이후 소련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보고 심지어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 체제가 지니는 효율성을 인정하면서 서서히 왼쪽으로 기울었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분류하자면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준마르크스주의자’ 정도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를 ‘부르주아 역사학자’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후 ‘더 타임스’지 부편집장(1941~1946)을 거쳐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53년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부임했다.
역사가로서 그의 최대 업적은 1950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해 1958년에 완간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1917~1929)’다. 또한 그는 ‘도스토옙스키전’(1931)을 비롯 ‘낭만적 망명가들’(1933), ‘마르크스전’(1934), ‘바쿠닌전’(1937) 등의 전기를 통해 19세기 유럽 지성사 연구에도 일가를 이뤘다.
1980년 입법회의,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의결
1980년 전남 황간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남 완도군 횡간도 거주 어민이 괴한 3명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전원 사살. 피해(사망 1명, 부상 6명)
1980년 군사재판, 김대중에 사형선고
‘5·17계엄확대조치’와 함께 ‘사회불안조성 및 학생-노조소요의 배후조정’ 혐의로 연행된 김대중은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기소돼 1980년 8월 14일 첫 공판에 이어 9월 17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1980년 11월 3일 항소심공판에서도 원심대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와 함께 연행된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고은태(고은), 김상현, 이신범, 이해찬 등도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당시 민주세력의 지지를 받던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거짓임이 나중에 밝혀졌으며 후에 모두 사면 복권됐다
1979년 박정희대통령 국장
1978년 소련-베트남 우호조약조인
1978년 도미니카 연방,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8년 중국-베트남 전면전 돌입
1976년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 당선
1976년 동해에 풍랑 408명 사망 실종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1970년대 대왕코너는 대형 화재의 온상이었다. 1972년, 1974년, 1975년 세 차례나 화재가 발생, 많은 인명피해가 났기 때문이다. 1974년 11월 3일 새벽. 서울 청량리 대왕코너(현 롯대백화점) 6층 타임나이트클럽에서 200여명의 손님들이 몸을 흔들고 있을 때, 갑자기 팬티 차림의 한 여인이 “불이야”를 소리치면서 클럽 복도로 뛰쳐나왔다.
새벽 2시47분에 같은 층 브라운호텔 복도 천장에서 전기합선으로 일어난 불이 어느새 호텔방과 나이트클럽으로 번진 것이다. 전기가 나가자 ‘키스 타임’이라며 반기는 손님도 있었다. 곧 화재 사실을 알게 된 손님들이 피신하려 하자 클럽 종업원들은 “술값을 내라”며 입구를 막았고, 하나밖에 없는 회전식 출입문은 문 양쪽으로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려 이미 출구가 아니었다. 모두 88명이 숨지고 35명이 부상해, 1971년 165명이 사망한 대연각호텔 화재에 이어 두 번째 대형 화재로 기록됐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사망
1970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 취임
1970년 11월 3일, 칠레 대통령에 취임한 살바도르 아옌데는 자유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오른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세 차례 낙선 끝에 다시 출마한 그해 선거도 사회당·공산당 등 6개 정당이 연합한 ‘인민연합’의 통일후보로 나서지 않았다면 당선과는 무관했을 상황이었다. 단일후보를 내지 못한 우익의 분열도 그를 도왔다.
그러나 과반수에 미달하는 33.6%를 득표,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헌법규정을 따라야 했다. 국회의 동의를 얻은 아옌데는 곧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소득 재분배를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하층민이야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자본가와 지주들은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미국 소유의 세계 최대 구리광산을 몰수한 것은 그의 결정적 패착이었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미국이 CIA를 동원, 경제위기를 조장하고 군부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내부에서도 노선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렸다.
1973년의 총선에서 과반수 지지를 확인한 아옌데는 돌파구를 신임투표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투표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던 1973년 9월 11일 새벽. 피노체트의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계획을 무산시켰다. 아옌데는 “칠레 만세! 노동자 만세!”를 외치며 대통령 관저에서 죽음을 맞았다.
1969년 미국, 아폴로11호 우주인 방한(암스트롱, 콜린즈, 올드린 부부)
1968년 중국 광동에 폭우 사망 3,000명
1967년 전남, 제주 고정간첩단 사건
1966년 세계반공연맹 가입
1966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도착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가 쿠바의 아바나를 출발, 소련의 모스크바, 체코의 프라하, 프랑스의 파리, 브라질의 상파울루를 경유, 볼리비아 라파스 공항에 밀입국했다. 그는 아돌프 메나라는 가명으로 입국했으며 130748번 우루과이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대머리에 검은 안경을 끼고, 어두운 색 옷에 넥타이를 맨 그는 어디로 보나 전형적인 학자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는 볼리비아의 경제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미국 연구소가 발행한 파견장까지 갖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변장을 하고 밀입국한 것은 남미 모든 정부와 미국 CIA가 그의 입국을 두려워하며 그의 초상화를 공항이나 국경 초소에 배포했기 때문이었다.
체가 볼리비아에 몰래 입국한 것은 남미 국가 중 최빈곤국인 이곳에 쿠바에서와 같은 혁명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바로 산중의 혁명 거점인 낭카우아수로 입산했다. 체는 11개월간 산속에서 게릴라 부대를 인솔하며 정부군과의 무장투쟁을 통해 쿠바에서의 경험을 살려 혁명을 시도했으나 1967년 10월 8일 전투중 총상을 입어 체포돼 이튿날인 10월 9일 사살됐다.
1964년 존슨, 제35대 미국대통령에 당선
1964년 11월 3일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에 민주당의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후보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와 윌리엄 밀러 후보를 누르고 제3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들 민주당 정·부후보는 총선거자수의 62%에 해당하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486대 52표라는 선거인단표수차로, 또한 미국50개주 중 44개주와 워싱턴.D.C의 선거인단표를 얻어 당선됐다.
존슨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유래없는 득표차로 재선돼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존슨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상대방 후보가 패배를 시인하기도 전에 공식수임성명을 발표하고 그의 압승은 단합된 국민의 요구에서 나온 선택이라고 밝혔다.
존슨 대통령은 1908년 정치가문에서 태어나 텍사스주립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생활을 하다가 대통령 루스벨트로부터 청소년대책국 텍사스주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1961년 거제도 무장공비사건
1961년 미군 H21 헬리콥터 오산기지 서방 5㎞지점 논에 추락 사망 6명
1961년 유엔사무총장 대리에 우 탄트 임명
1960년 김기영 감독 영화 ‘하녀’ 개봉
“한국 컬트영화의 창시자”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1960년 11월 3일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했다. 김 감독은 ‘하녀’를 계기로 영화 기법에 큰 변화를 드러냈다. 그동안의 사실주의를 접고 인간 내면에 도사린 마성과 성적 억압의 심리를 드러내 보이는 표현주의 영상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 감독이 제작·각본 ·감독·편집 등 1인 4역을 한 ‘하녀’는 음악교사인 가장(김진규)과 가정부(이은심) 사이에 벌어진 불륜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내(주중녀)가 친정에 가고 없는 틈을 타 가정부가 가장을 유혹해 육체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가정부를 낙태하도록 한다. 포악해진 가정부는 가장의 아들(안성기)을 계단에서 떨어뜨려 숨지게 한다. 결국 가장과 가정부는 함께 약을 먹고 동반자살하는데 가정부는 계단 위에서 죽고 가장은 아내 곁에서 죽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하녀’를 본 일부 여성 관객이 영화를 보다가 “저년 죽여라”라고 소란을 피울 만큼 충격적이었다.
이후 김 감독은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고려장’(1963) 등의 영화를 연출하며 흥행영화, 멜로영화, 전쟁영화, 괴기영화를 넘나들었다.
1971년과 1972년 각각 ‘화녀’와 ‘충녀’를 제작·각본·감독해 이른바 하녀·화녀·충녀 시리즈를 완성했다.
1958년 로마 교황 요한 23세 대관식
1958년 11월 3일 요한 23세가 많은 외국사신과 고위 성직자 및 25만명의 군중들이 비에 젖은 광장에서 환호하는 가운데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로마가톨릭의 제262대 교황에 올랐다. 생전에 미사의 거행과 성모 마리아를 주로 강조해 온 비오 12세가 10월 7일 사망하자, 바티칸은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추기경 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과 베니스교구의 안젤로 쥐세페 추기경이 10월 28일 새 교황에 당선됐고, 그는 요한23세의 이름을 선택했다. 교황 요한 23세는 겸손한 사제로 알려져 왔으며 나서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 추기경 시절 빈곤과 작업환경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이탈리아 공산당과 만나기도 했다.
1957년 소련, 개를 태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 발사
1956년 시리아-이란군부대 요르단에 진주
1955년 바그다드조약기구 성립(터키 이라크 영국 파키스탄 이란)
1954년 프랑스화가 앙리 마티스 사망
1953년 제1회 학생의날
기념일의 유래는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전남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박기옥 학생의 댕기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자 이에 격분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 등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간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 시발점이 됐다. 당시 일경들이 일본 학생들 편을 들어주며 한국인 학생들을 차별하자 집단 항의하기도 했다.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고, 87년 전 이날 핚생들은 항일 가두시위에 나섰고, 일경에 붙들려 구속됐다. 이후 1929년 11월 12일 2차 시위에서도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이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했다. 일본은 항일운동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언론통제까지 단행했지만, 당겨진 불씨는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듬해에는 경성과 평양, 함경도 등 국내를 넘어 간도에도 1930년 5월까지 항일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시대 때의 항일 학생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해방 후 1953년 10월 20일 국회에서 ‘학생의 날’을 정부기념일로 지정했으나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거세지자 1973년 폐지했다. 그리고 폐지 11년 만인 1984년 ‘학생의 날’이 부활했다가 2006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됐다.
1948년 김구, 미소양군 철수후 통일정부수립 요지의 담화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신문 `고대신문` 창간
1946년 일본, 재무장 포기 선언한 신헌법 공포
1945년 고당 조만식 평양서 조선민주당 결성, 당수에 피임
1945년 미국, 전시생산국 폐지
1937년 브뤼셀에서 중일전쟁에 관한 9개국회의. 일본비난선언 채택
1936년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에 재선
1936년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에 재선
1935년 필리핀공화국 수립
1929년 시인 이장희 사망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발생
일본인 학생들의 한국 여학생 희롱과 집단충돌사건이 발단이 된 광주학생운동이 1929년 11월 3일 일어났다. 광주에서 타오른 항거의 불길은 인근 전남지역에 이어 그해 12월 초에는 서울의 대규모 학생시위로 번져 갔으며 개성 인천 원산 평양 함흥 공주 등 전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돼 나갔다.
투쟁형태도 시험거부 동맹휴학 격문살포 가두시위 등 다양하게 전개됐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모두 1백94개 학교(전문학교 4곳, 중등학교 1백36곳, 보통학교 54곳)에서 학생 5만4천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은 4일전의 `나주역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전남 지역은 교통의 요지이면서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토지수탈을 쉬해 일본인 이주민들이 많아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일 학생들 사이에는 항상 갈등과 마찰의 요인이 잠복해 있었다. 나주역 사건이란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간 통학열차에서 한국인 여학생을 일본인 학생들이 희롱한 데 격분해 나주역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이 집단 충돌한 사건이다. 1953년부터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날을 기념해 매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8년 1차 대전 중 독일 수병들 킬 군항에서 반란 11월 혁명 일어남
1911년 소설가 남석(南石) 안수길 출생
1908년 미국 대통령에 태프트 당선
1903년 파나마, 콜롬비아로부터 독립
1901년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 출생
1898년 만국우편협약 비준
1893(조선 고종 30) 우리나라 첫 고딕성당인 중림동 약현성당 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