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5일(금)
* 시작 기도
주님...
밤새도록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습니다.
이는 마치 세상의 죄악을 보시는 우리 주님의 눈물인 듯 얼마나 그 심령이 아프시면 이렇게 많이 우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죄악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쏟아진 그 비를 주님의 보혈 삼아 나의 죄악상을 회개합니다.
더 이상 주님과 멀어질 수 없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주님의 영원한 품에 품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거룩한 불구자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영적 하루살이가 되기 원합니다.
이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고후 5:1-10
제목 :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인 내세는 이 땅에서 영생의 사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나의 묵상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의 육신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에 들어갈 것을 압니다.
그것은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는 육신으로 이 땅에 있으면서 갖은 고난과 박해로 탄식하지만 하늘의 집으로 덧입기를 고대합니다.
이렇게 하늘의 집으로 덧입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로 보이지 않기 위함입니다.
육신의 장막을 입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과 같이 신음을 하는 이유는 벌거벗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집으로 덧입기 위함입니다.
사망은 생명에 삼킴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부터 이것을 이루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보증해 주시는 동안은 비록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비록 주님을 직접 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대로 행하지 않고 오직 영의 눈으로 보는 것 곧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장막을 떠나 늘 주님과 함께 있기를 진정으로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장막에 있든지 아니면 이 장막을 벗고 주님과 함께 있든지 늘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기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세(來世)인 것 같다.
이 땅에서의 삶이 어찌 되었든 죽음의 순간을 다 두려워하며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유족들은 고인에 대해서 ‘이 땅에서 좋은 일 많이 하셨으니까 아마 좋은 데 가셨을 거야.’라며 자기들끼리 덕담을 나누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곳이 어디인지 잘은 모르지만 죽음 이후 곧 사후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내세관에 입각하여 그런 말들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내세관은 사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막연하게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라는 그들의 바람이나 생각 그리고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인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런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한결 같은 바람이 있다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든지 상관없이 ‘나는 생전에 교회에 다녔으니까’, ‘또는 예수를 믿었으니까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갈 거야.’ 라는 믿음 반 신념 반, 섞인 내세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무튼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 믿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남들 보기에 보란듯하고 성공한 인생으로 살다가 죽어서는 반드시 천국에 가야한다는 믿음이 아닌 신념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육신의 장막이 벗겨지는 날 곧 죽는 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나라는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하늘의 집이다.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 나라를 일컬어 하늘의 집, 거할 처소, 나 있는 곳, 아버지 집, 아버지 품, 거할 곳, 거할 성읍 등 다양한 표현으로 적어놓았다(요 14장, 시 107편 등).
그런데 이 땅에서의 삶은 근심과 탄식이 끊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직 구속 받지 못한 이 몸뚱아리 때문이다.
이 몸뚱아리가 끊임없이 아담의 본성 안에 있는 옛 사람의 사주를 받아서 죄의 몸을 지배하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옛 사람은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우리 육신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죄의 자리로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 바로 옛 사람의 속성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근심과 탄식을 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속사람과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는 옛 사람이 끊임없이 싸우는 것에 대한 탄식이요 근심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갈등조차도 없다.
조금 있다면 그저 세상적인 양심으로 인하여 잠시 고민할 뿐이지, 이렇게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탄식과 근심까지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내 안에 이런 갈등 곧 죄와 싸우려는 마음으로 살면서도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넘어지고 나면 이런 탄식과 근심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죄에 맥없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한탄하는 마음으로 차라리 죄가 없는 하나님 나라로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갈 수 있지,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됐든지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
우리 믿는 자들의 고민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다.
영생은 이 땅에서부터 누려야 할 천국이며 그런 자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역시 본문 8절에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을 간절하게 바란다.’고 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있든지 육신의 장막을 벗고 그 나라에 가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신부요 주님은 신랑이기에 신부 된 자로써 신랑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만큼 신랑을 기쁘게 하는 일이 있겠는가?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가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예표되는 솔로몬의 아가서는 그의 사랑하는 여인 술람미와 함께 사랑의 교제와 사귐을 갖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교제의 자리를 신랑은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 2:10-1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이 장면은 술람미 연인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연인 솔로몬 왕이 한 말을 되뇌이는 장면이다.
이는 서로가 정말 사랑하는 아름다운 교제와 사랑의 사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영생인 것이다.
지금 현재의 삶에서 사랑한다는 주님과 이런 사랑의 교제가 없다면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 이전에 이 땅에서부터 주님과 누리는 사랑의 교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요 17:3).
본문에서 육신의 장막을 입고 있는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이 탄식과 근심을 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벗는다는 것은 구속되지 못한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힘으로 영생을 얻어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덧입을 수가 없고 오히려 벌거벗겨질 뿐이다.
곧 청함은 받았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주인이 쫓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마 22:11-12)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여기서 예복이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이다.
이 옷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입혀주신 가죽옷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옷을 말한다.
이 옷을 입지 않은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따라서 예복은 무엇인가?
보혈의 옷인 예복이 곧 복음이요 이는 십자가와 무덤과 부활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복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곧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와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며 나 또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나 자신을 못 박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되며 주님의 살아나심과 연합하여 나 또한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신앙은 곧 삶이다.
신앙과 삶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는 말이다.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는가?
그런데 이 땅에서는 그에 대한 투자(?)를 전혀 하지 않는다.
여기서 투자란 썩어질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썩지 아니할 주의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나는 이 진리를 모른 채 그저 육신으로 행하는 어떤 헌신적인 일이나 봉사를 주의 일로 보았다.
그러나 주의 일이란 복음을 가지고 먼저 주님과 함께하는 사귐이며 또한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존재이다.
거기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몸으로 행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가?, 착하고 선한 일을 했는가?,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죄의 몸 곧 죽을 몸을 쳐서 말씀 앞에 얼마나 복종했는가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나는 전혀 주님의 뜻도 알지 못하고 주의 일을 한다고 설쳐댔던 자, 곧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고백한다.
이런 내가 주님의 은혜로 복음을 알게 되고 주님과 함께 날마다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영생을 맛보고 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간다.
나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오직 십자가 보혈의 옷인 예복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신다.
이 자리가 바로 참된 예배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죽어서 천국에 가려는 마음은 간절하나 이 땅에서 신앙생활은 옛 사람이 이끄는 대로 그저 막연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알지만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 보응을 오해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일, 착한 일을 하여 주님께 도장을 받으려고 애썼던 우매무지한 자가 여기 있나이다.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며 날마다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게 하시되 주의 사랑을 덧입고 교제와 사귐이 있는 영생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신앙과 삶이 따로가 아님을 아오니 믿음이 막연해지지 않게 하시고 구체적이고 실재가 되며 주님의 현존 앞에서 더 깊은 사랑의 교제가 있게 하옵소서.
하늘의 기쁨으로 땅의 모든 고통을 삼키며 어떠한 고난이라도 넉넉히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복음으로 덧입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