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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부터 “삶”의 바탕을 다져야지요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촛불,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삶 전체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말이지요. 그러니 읽어야 하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겠고, 고통도 당해보면서 끝내 깨달아내야만 하는 겁니다. 왜냐면 그 모두가 삶이기 때문입니다.
-- 크리슈나무르티
[이제는 원문도 사라져버렸군요. 그리 잘된 번역이 아니라 해도 이어가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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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5] “삶”에 대한 준비도 안 시키고..
다 늙어빠진 인간들이야 더 가능성 없는 일이지요?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오죽했으면 ‘노탐’이라는 말도 다 있겠습니까? 저승까지 가져 가겠다고요?
얼마 전에 “통찰”에 대해 하신 말씀이 참 난감했습니다만, 저렇게 밋밋하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그저 ‘단백’하게만 들리겠습니까? 더구나 그게 “삶”에 대한 말씀이고, 역시 ‘전체’를 보라고, “전체를 이해하라”고 하시는데 말씀이지요.
‘전체’라면 역시 “통찰”과 이어지는 거 아닐까 합니다만 그게 “삶”이라면, 아무래도 인간으로서 다들 평생을 당하기만 하는 이 ‘생각’의 속성이랄까, 기능이랄까, 시쳇말로 ‘적폐’랄까.. 그게 가장 문제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구조적인 “적폐”보다는 거의 ‘운명’처럼 되어버려서 아예 ‘청산’할 마음도 못먹어보는 게 바로 이 ‘생각하는 능력,’ 그 “적폐” 아닙니까.
문득, “생각의 적폐”라니, 좀 생소하군요. 잠시만 따지고 보면 그게, 삼천리금수강산 방방곡곡 지천으로 널린 저 ‘친일파 적폐’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고 훨씬 더 극악한 폐단이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 존재를 거덜내버리는 “적폐”니까, 그 무엇보다도 먼저 처리 · 정리 · 청산해야 할 일생일대의 ‘대사’지요. “심리”적으로 수백만 년도 더 되게, “삶”에 훨씬 더 심각하고 절박하게 쌓인, 가장 암적인 현상이 바로 ‘생각’이라는 거 아닙니까!
처음 하는 소리도 아닙니다만, “인생이 고해”인 까닭이 바로 이 ‘생각’ 때문이지요. 너무 자주 하는 말이라서 식상하실 듯.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누구랄 거 없이 판판이 다 당하기만 할 뿐이니까, 안 당하는 사람은 귀해서 약에 쓸래도 없으니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줄줄이 문제지요. 평생토록 바로 그거 하나를 못 풀고 질질 끌려가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라는 것마저, 그저 ‘일종의 서비스업’으로 전락하고 만 거고요. 그마저 효용이 다 됐다니까..
물론 본문 말씀이야, “삶”이라는 그 전체를 누리고 살면서 기어이 깨달아내란 말씀이겠습니다만, 다들 질퍽하거나 바짝 말랐거나 간에, 어느 한 군데 푹우 빠지거나 꽁꽁 묶이는 꼴로 살아들 가지만, 그리고 그게 직업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삶” 자체를 대하는 자세만은 저렇게 ‘전체’를 보라고, ‘전체’를 이해하라시는 거지요. 그거 아니면, “인생”에 답도 없고, “인류”에게는 길도 없다는 좀 아득한, 아주 까마득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더러 ‘인류’씩이나 생각합니까만.
그냥 속세를 떠나서 산속에 움막 짓고 산다거나, 저잣거리에서라도 어디 골방에 처박혀서 한세상 보내버리겠다 하면, 이런 거 저런 거, 달리 그 뭐가 필요하단 말이겠습니까. 그러나 절대로 ‘그건 아니다!’ 그런 말씀이기도 한 거지요? ‘나’에 휘둘리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게 세상 요지경들 아닙니까. 그런 거기 여기서 최소한도나마 그 무슨 ‘지성’이 작동할 터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없다면, 우리가 무슨 ‘양심’이나 ‘상식’이니, 더는 ‘사람’이니 ‘시스템’이니 들먹이지도 않겠지요.
실제로 그런 게 좀 모자라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그런 꼴의 사회, 그런 꼴의 국가와 민족도 가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도 그 나라들은, 그 민족 그 백성들은 더 피곤하게 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당장 우리한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씩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들이 배워가거나 말거나 그들 하기 나름이겠지요.
우선은 내 ‘사회’가 문제고 더는 내 ‘자신’이 문제입니다. 거기서도 늙은이들보다는 아직 채 인생 시작도 안 한, 저 창창한 젊은이들이 문제지요. 아마도 사회가 건강하자면 무슨 사회원로니 하는 인간들보다는, 정작 그 사회를 떠받치는 세대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런 그들이 글쎄, 나날이 주눅들어가는 세태래서야 쓰겠습니까.
최소한.. 그나마 ‘라떼 세대’ 얘기지만,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쫘악 펴라!’ 그런 구절이나마 들려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육”이라는 게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더는 누가 젊은이들을 그런 태도로 대하기나 합니까?
기성세대 누군가는 젊은 세대에게, “기성세대를 믿지마라!” 그러더군요. ‘자기 자신도 자신을 안 믿는다.’면서 말씀입니다.
알아듣냐 마냐는 그 뒤 문제고, 우선 저런 말이나마 한번 건네 봐야 할 거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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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끄적거려놓은 건 몇 년 사이의 ‘사족’인데요, 그저 내다버리지 못 하는 ‘집착’ 때문에 달아놓은 것뿐입니다. ‘이딴 걸 왜 못 버리냐?’ 하시겠지만,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 흘낏, 읽어라도 보시라고 그대로 달아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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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1] “초혼(招魂)”쯤이라도 될까요?
“삶”을 얘기하기 위해서겠는데요, 저기서 말하는 것들 가운데 몇 개나마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게 “삶”이기 때문에 말씀이지요.
더구나 인생의 '고통'이라면 매일 당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기에 일부러 더 당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만요. 그러나 다들 저런 과정들을 피상적으로 흘리고 말 뿐입니다. 아니면 그 가운데 하나를 붙들고는 그 속에 쉽게 정체해버리곤 하는 것이지요.
젊은이들은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쉽게 정하지 말고, 정말로 인생을 바칠 만한 일이 무엇인가, 신중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겨우 하나의 나사가 되지는 말아야지요. 자존심이 아니라, 그런 자신감은 꼭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그냥 별로 의미 없이 살다 죽는다니까요. 어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저 “젊은이”들을 일으켜 세워야지요.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한다면, 그 젊은이는 일당백, 일당만, 일당오천만, 일당억보다도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름을 남긴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이를 떠나,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들이 지닌 게 ‘젊음’ 아니겠습니까? 그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왜, 어째서, “삶”에 쩨쩨하게 굴어야 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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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1]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른바, ‘선진국’ 되고 ‘강대국’ 되고 기어이 “선도국”까지 다 됐다는 나라.. 그 나라 사람들의 그 굳고도 고운 ‘마음씨’를 더 다져서는..
위에 ‘일당억’이라고까지 해놨군요. 참, 아득한 소리일 뿐입니다. ‘일당억’이라면 대한민국 젊은이 70 명만 있으면 되는 건데요. 그렇다면 이른바 ‘경제’나 ‘과학’이나 ‘기술’이나 무슨 ‘외교’ ‘국방’까지 전부 다 ‘선진국’ 잘 따라가고 있다니까, 기어이 “선도국” 될 수도 있겠습니다. 더구나 그 70 명이 “종교”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못 돼도 “홍익인간”은 저절로 되겠네요. 더 아득한 소리입니다.
문제는 젊은이 단 한 사람이라도, 모름지기 자신의 “인생”을 ‘참되게 살아보자,’ 해야 말이지요. 꼭 젊은이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 몇 사람’인들 ‘당해 내는 게’ 문제가 아니지요. 단 하루나마 “삶”을 온전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역시, 그게 쉬운 일 같으면 이런 말도 필요 없겠지만요. 그러나 사회도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렇게 “교육”시키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국가 사회 전체가 그저 ‘입신양명’만 가르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나’를 내세우라고만 가르치고 있으니, 온전한 “삶”에서 멀어질 수밖에요. 그러니 ‘고해’에 빠져서 어푸어푸 허우적거릴 수밖에 더 있습니까? 참으로 쉬운 얘기가 아니지요. 그러나 그 길 아니라면, “삶을 제대로 행복하게” 살 수가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삶”이란 ‘나’를 내세우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이게 참.. 그야말로 ‘택도 없는 소리’로 들리는 게, 저 역시 저런 말씀 한번 들어본 적도 없이 교육이랍시고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통’까지 다 당해봐야 하는 거라고 하시지마는, 그게 ‘그 너머’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이러나저러나 간에 매양 그 꼴이 저 꼴 아니겠습니까? ‘다 당해보고 기어이 넘어서라,’ 그런 말씀이겠지요. 그러나 “진리”의 말씀 단 한 마디나마, 들으려는 사람도 없는데 그 너머로 어찌 나아갈 수 있단 말이겠습니까. 더구나 이런 말씀이 삼천리금수강산에 더는 못 퍼지게 사방팔방 다 막아서고 있으니.. 남은 평생 꼭 이대로 살다 간다고 해도, 별로 의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쨌거나 가기는 가겠지만요.
다들 “인생은 고해다.” 그게 마치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되뇌이고 살아들 가는 건데.. 그게 무의식에만 깔려 있는 게 아니라, 맨날 자기 입으로 궁시렁거리는 사람도 있을 텐데.. 설령,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살다가 뭔가 힘든 상황에 부닥치면, 그저 ‘인생은 고해여!’ 하면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람 역시 ‘그려, 맞어, 인생은 고해지라..’ 하고 거들기도 하지요? 그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바로 거기서 ‘아니지라..’ “인생은 고해가 아니지라이..” 그러는 판이니, 아예, ‘안 들으려’는 거겠지요?
하지만, 역시 맨날 하는 소리라고 하실는지 몰라도, 왜, 어째서, 인간이라고 그 “삶”을 “고해”로 살아버려야 한단 말일까요? 인간 말고는, 그 “삶”을 고해로 살아버리는 존재가 또 있단 말입니까? 하필, 도대체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인간’으로 태어난 게, 왜 저다지도 이다지도 ‘천형’이란 말일까요? 그건 ‘운명’도 아니고, 더구나 “숙명”은 더 아닙니다. 이, 어찌, 너무나도 근원적인 “사실” 아니겠습니까? 최소한 젊은이들한테나마 “사실”을 말해주기라도 해야지요. 한평생, 단 한번이라도..
“삶”이란 우리들 요모냥요꼴로, 분열과 갈등과 슬픔과 두려움과 시기와 질투와 비교와 외로움과 불안과 근심과 걱정과 지위와 명예와 권력 따위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지요? 더구나 무슨 점수니 등수니 석차니 재물이니 평수·배기량·투자·투기 따위겠습니까? “삶”은 전혀 다른 영역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저런 따위들 말고는 전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삶을 ‘한껏’ 살아버려라!” 한다고 해도, 도대체 알아먹을 수조차 없는 거 아닙니까? 지금 이대로의 우리들 모습은 딱 저 수준입니다.
그러니 평생을 다 살아봤자, 그 마지막 즈음에는 다들 그다지도 허전해 한다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친구들 하나둘 먼저 떠나고, 자식들은 멀리 있어서 잘 찾아오지도 못하고, 그러구러 마누라 떠나고 남편 떠나고.. 뎅그라니 혼자 남을 판이니.. 도대체가 “삶”을 왜 꼭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고 배워야 한단 말입니까? 구태여 인생 늘그막에 다다르지 않아도, 항상 저런 따위들에게 휘둘리며 사니까, 소위 ‘종교’라고 하는 것에서는 ‘내세’를 내세운다는 거 아닙니까. 이승에서는 그냥 그렇게 살고.. 저승 갈 때나 ‘좋은 데’ 보내주겠다고요?
꼭 그렇게 살겠다면 어쩔 수도 없습니다. 누가 말리겠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대충 다 그렇게 살다 가는 것을요. 그러니 그 인생이 고해지요. 슬슬 철들 때부터 늘그막 허전할 때까지 살았다는 인생이, 그 마지막 즈음에는 황량한 들판에 바람이나 한 줄기 씽~ 불어가고 마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 말고는 이렇게 살자고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다는 말이 진짜로 틀린 말이겠습니까? “삶을 ‘한껏’ 살아버려라!” 그 말은, 인간 말고 다른 모든 생명체가 다들 꼭 그리 살아들 가고 있는 거지요.
철들기 시작할 때부터 ‘나’한테 쫓겨서는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줘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지성”이 뭔지 차츰 궁금해지고 끝내 알아내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교육”이라는 개념의 근원적인 의미겠지요? 최소한 ‘전인교육’이라면 말씀입니다. 더구나 그 이념이 “홍익인간”이라면 더 ‘닐러므삼하리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이 ‘전인교육’ 맞으며 “홍익인간”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꼰대’ 세대들이야 오로지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키워졌다고 하더라도 말씀이지요.
이러나저러나 간에, 비록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인류사 새로운 성인(聖人)” 크리슈나무르티 등장과 그 가르침에 대하여 아주 적대적인 현상이 만연하고 있지만, 이런 거 저런 거 다 넘어서는 날이 온다면, 그 또한 세계 ‘선진국’ 가운데서도 그야말로 “선도국” 위치에 자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쯤은 돼야 비로소 저 단군 할아버지 건국이념이 좀 더 빛을 발하지 않겠습니까?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 어디 쯤, 흰옷 입은 사람들,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그 고운 “홍익 마음씨..”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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