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5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피겨 장군’ 김예림(단국대)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
김예림은 5일 프랑스 앙제에서 열린 2022-202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시니어 그랑프리 3차 대회 ‘그랑프리 드 프랑스’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점수(TES) 62.82점, 예술점수(PCS) 65.01점, 감점 2점, 합계 125.83점을 받아 쇼트프로그램 점수(68.93점)를 합한 총점 194.76점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2021년 미국 힙합 스타 트래비스 스콧의 콘서트 장에서 5만 관중 광란 8명 압사
2021년 IMF때 집 나간 후 사망 처리된 여성, 24년만에 가족 상봉, 실종선고 취소 청구
2015년 히딩크, 첫 방북… 평양 풋살구장 착공
거스 히딩크(69·네덜란드) 전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감독이 5일 북한을 방문했다. 그의 첫 방북이다.
거스히딩크재단은 “히딩크 전 감독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풋살축구장인 ‘드림필드’ 건립을 위해 2박 3일 일정으로 평양에 간다”고 밝혔다. 히딩크 전 감독은 재단 관계자 등과 함께 5일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으로 가 드림필드 착공식에 참석했다.
그는 지난 9월 ‘통일나눔펀드’에 동참하며 “사계절 사용 가능한 드림필드에 태양열을 이용한 라이트를 설치하면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북한 어린이들도 축구를 할 수 있다”며 “북한 축구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했었다. 거스히딩크재단은 2007년 충주를 시작으로 포항·수원·전주 등 국내 13곳에 시각장애인과 어린이를 위한 풋살축구장인 드림필드를 만들었다
2014년 경북 봉화에서 탱크로리 뒤집어져 황산 2천ℓ 누출 낙동강 물고기 떼죽음
2013년 국무회의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청구안 제출
2012년 미검증부품 사용 사실 드러나 원전 영광 5ㆍ6호기 가동 중단
2010년 '미술사학계 거목(巨木)' 진홍섭 전 교수 별세
미술사학계 거목인 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92) 전 이화여대 교수가 2010년 11월 5일 별세했다.
1918년 개성에서 출생한 고인은 개성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明治)대 정경학부를 마쳤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장으로 일하던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 선생을 사사했다. 이때 함께 배운 황수영 전 동국대 교수, 고(故)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함께 미술사학계의 '개성 3인방'으로 해방 후 한국미술사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1946년 김재원 박사가 이끌던 국립박물관에 투신, 1962년까지 재직하며 개성분관장과 경주분관장을 역임했다. 1963년 이화여대 교수로 옮겨 박물관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신라에서 매우 드문 벽화고분인 경북 영주 어숙묘를 발굴했다.
퇴임 뒤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동아대 교수 및 문화재위원장을 지냈다. 1998∼2000년 연세대 용재석좌교수로 고령에도 학구열을 불태웠다.
그는 1세대 미술사학자답게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다. 저서 '한국미술사자료집성'(전 7권)은 기념비적인 업적이며, '한국불교미술' '한국석조미술' '한국의 불상' '삼국시대 미술문화' 등은 한국미술사 필독서로 꼽힌다. 은관문화훈장, 학술원상, 월간미술대상, 용재석좌교수상,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을 받았다.
2008년 '쥐라기 공원'의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 사망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이 2008년 11월 5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지병인 암으로 사망했다.
1942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란 크라이튼은 하버드대학 인류학과 의대를 졸업했으나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나섰다.
크라이튼은 데뷔작 ‘터미널 맨’을 시작으로 ‘13번째 전사’ ‘타임 라인’ ‘안드로메다의 위기’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출세작 ‘쥐라기 공원’을 포함한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 3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총 1억 권 이상 팔렸다. 또한 11994년부터 2006년까지 의대를 졸업한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미국 NBC 방송 인기 의학드라마 ‘ER’ 시리즈를 집필하였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컴퓨터 하드 디스크에서 발견된 ‘해적의 시대’가 그의 유작이다.
2007년 중미 카리브해역 허리케인 노엘 강타 사망 130명 이재민 100만명
2005년 원로 동양화가 박원수씨 별세
2005년 제12차 남북이산가족상봉
2002년 `국민통합21` 창당, 정몽준의원을 대통령후보와 당대표로 추대
2000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 '일본 구석기 유적 날조' 보도
일본 전기 구석기시대 유물의 연대를 70만년전으로 끌어 올려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발굴 성과가 공명심에 눈이 먼 고고학자의 날조극으로 밝혀졌다. 마이니치 신문은 2000년 11월 5일 미야기현 쓰키다테초(築館町)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 발굴 현장에서 발굴 조사단장인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ㆍ50)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 몰래 석기를 땅에 묻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공개했다.
10월 27일 70만년전의 석기가 발굴됐다고 대서특필되기 5일전인 10월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그는 마이니치신문의 취재에 대해 "마(魔)가 끼었다"며 이 유적에서 올해 발견된 6개 유구(遺構)와 유물 31점 중 27점을 모두 날조했다고 시인했다. 또 홋카이도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에서 그해 발굴된 석기 29점 모두가 자신의 석기 수집품을 묻은 것이었다고 실토했다.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1992년 8월 목초지 개간을 위해 파헤친 가미타카모리의 구릉에서 석기를 발견한 이래 1993년부터 이곳에서 40만년전, 50만년전, 60만년전의 석기를 잇달아 발굴, 일본 최고(最古) 석기 기록을 연례행사처럼 경신해 왔다.
1998년 조치훈 명인, 세계최연소-세계최단지로 1,000승 달성
조치훈 9단이 1998년 11월5일 제23기 일본 명인전 방어전 7번기 제6국에서 왕리청 9단을 제압하고 1000승을 거두었다
이날 승리로 통산전적 1000승 465패 4무를 기록한 그는 일본 3대 기전인 기성전과 명인전, 본인방전을 3년연속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조치훈은 6살 때 일본으로 떠나 13세에 프로생활을 시작해 일본 바둑사상 최연소 입단 최연소 9단 등 최강의 자리를 굳혔다
1998년 국제천문연맹, 아마추어 천문가 이태형씨가 국내서 첫 발견한 소행성 공식 인정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부설 천문대는 1998년 11월 5일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이태형 사무국장이 1998년 9월 경기도 연천에서 발견한 소행성이 아직 발견된 적이 없는 새로운 소행성임을 국제천문연맹(IAU)으로부터 공식 인정받았다"고 발표했다.
소행성은 화성과 목성 등 행성사이에 있는 작은 규모의 행성으로,이미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수천개씩 발견했으나,국내에서는 처음이었다. 국제천문연맹은 이씨가 발견한 소행성에 대해 `1998 SG5`라는 임시명칭을 부여했다. `1998 SG5`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17등급의 밝기로 21cm 반사망원경과 천체관측용 디지털 카메라에 의해 촬영됐다.
이씨는 2001년 4월 국제천문연맹으로부터 소행성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 소행성 이름을 `통일`로 명명했다. 이로써 우리말로 된 별이름은 일본 동경천문대 후루카와 기이치로 교수가 붙인 `관륵`(1977년 발견)과 `나`(1995년 발견), 일본 아마추어 천문가인 와타나베 가즈오씨의 `세종`(1996년 발견)에 이어 네 번째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직접 발견해서 붙인 우리말 이름 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씨는 서울대 화학과 2학년때 학내 서클인 아마추어천문학회에 가입, 별밤을 관측하면서 별에 미쳤다. 그후 천문대가 주최한 천체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에선 자타가 인정하는 제1의 아마추어 천문가로 성장했다. 이씨는 아마추어 천문가로 김영사의 초기 베스트셀러였던 `재미있는 별자리여행`, `별밤 365일`,`쉽게 찾는 우리 별자리` 등 별자리 관련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
1997년 영국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 사망
철학자이며 정치 사상사가로서 20세기 사상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이사야 벌린 경이 1997년 11월 5일 밤 8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1909년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출생, 10세 때인 1919년 러시아혁명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 뒤 옥스퍼드대학 코퍼스크리스티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32년부터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쳤으며 월프슨대학의 학장을 지냈다. 그는 특히 1분에 4백 단어 이상을 구사하는 말의 속도를 자랑하면서도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명료하게 전달, 청중들을 매료시키는 달변가로도 유명하다.
자유주의자이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벌린 경은 자유주의 및 전체주의적 사상들의 발전을 고찰하고 르네상스 및 계몽주의 사상가와 오페라, 러시아문학 등에 관한 글을 주로 썼다. 그의 유작으로는 1939년 저술한 카를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비롯해 에세이 ‘고슴도치와 여우’(1953년) ‘1940년의 처칠’(1964년) 등이 있다
1996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재선
1996년 민속학자 김두하 옹 별세
재야 민속학자 김두하 옹이 1996년 11월 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였다. 김 옹이 우리 학계에서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던 장승 연구를 집대성함으로 장승과 벅수가 다르다는 사실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장승’이란 신라, 고려 시대에 왕이 사찰에 토지를 하사한데 감사하는 뜻에서 승려들이 절 입구에 왕의 장수를 기원하며 세운 장생비(長生碑)에서 유래한다. 장승은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10리 길마다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세운 이정표역할을 했다.
‘벅수’는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이 복을 비는 의미로 마을 입구에 세운 것으로, 흔히 장승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 벅수임을 김 옹은 오랜 조사 끝에 밝혀냈다. 김 옹은 이어 일반적으로 장승으로 통하는 이 벅수의 기능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 창궐했던 천연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의원을 찾지 못하던 서민들이 세운 것임을 확인했다.
1995년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재 창설
세계 각국의 공산당들이 1995년 11월 5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모임을 갖고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재창설했다고 불가리아 공산당 기관지 두마가 이튿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번 회의에 프랑스와 독일, 브라질, 인도, 신유고연방 등 모두 29개국에서 공산당대표들이 참여했다고 전하고 불가리아 사회당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스파소프가 새로운 코민테른의 사무총장으로 피선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당을 갖고 있는 북한과 베트남, 중국은 초청장을 받고도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제3인터내셔널로도 지칭되는 코민테른은 1,2차 세계대전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촉진시켰으며 의심 많은 스탈린이 다수의 코민테른 지도자들을 숙청한 뒤 1943년 해체됐었다.
1993년 프랑스, 독일, 벨기에 군으로 구성된 유럽통합군 창설
1991년 필리핀 태풍`셀마`로 사상최악의 홍수 5,400명 사망 2,046명. 실종
1991년 영국 언론재벌 총수 맥스웰 사망
영국의 미러그룹 신문과 맥스웰 커뮤니케이션사 회장인 대재벌 총수 로버트 맥스웰(68)이 1991년 11월 5일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의 그랜드 카나리섬 앞바다에서 사망했다. 맥스웰은 이날 새벽 휴가 중이던 이 곳에서 자신의 소유 요트인 `레이디 기스레인호`를 타고 있던 중 실종되었다가 오후에 수색대에 의해 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1923년 체코에서 출생한 맥스웰은 2차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고 혼자 프랑스로 탈출한 뒤 체코여단의 일원으로 반나치 투쟁에 참여했다. 그 뒤 종전 직전 영국군에 가담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맥스웰이 출판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지난 1951년. 과학기술전문지를 발행하는 퍼가먼 프레스를 설립해 수천억원대의 대규모 출판사로 키워냈다. 사업이 번창하자 일간지에도 손을 대 런던 데일리뉴스와 스코틀랜드 데일리뉴스 등을 인수했다. 그 뒤 1981년에 영국 최고의 권위지인 더 타임스를 인수하려 했으나 루퍼트 머독에게 좌절을 겪었다. 1984년에는 데일리 미러를 사들여 발행부수 3백만부의 최대 신문으로 만들었다. 1990년에는 유럽 7개국에서 영어로 발행되는 주간신문 유러피안지를 펴냈으며 1991년에는 파업으로 고전을 겪고 있던 뉴욕의 데일리 뉴스지를 사들여 언론재벌로서의 재력을 과시했다.
1991년 고당 조만식선생 국립묘지에 안장
1989년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사망
20세기 최고의 피아노 연주가로 추앙받았던 소련 태생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1989년 11월 5일 뉴욕의 자택서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심장마비였다.
마치 3개의 손이 연주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정확한 터치와 격정적 연주기교로 88개의 건반으로 오케스트라의 마력을 만들어내는 `피아노 음악의 전설`로 불리던 그는 1904년 키예프에서 출생했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6세때부터 피아노 수업을 시작, 17세때 데뷔연주를 한 그는 19세때부터 연주회를 열어 혁명으로 몰락한 가족을 부양했다.
21세 되던 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러시아를 떠나 서방으로 망명, 그후 60여년간 세계를 누비며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호로비츠 생전의 마지막 공식연주는 1987년 봄 베를린, 함부르크, 암스테르담에서 있었고, 1986년에는 61년간 떠나 있던 고국 소련에서 감동적인 무대를 열어 `고국연주`의 소원을 이루었다.
1988년 학술단체협의회 창립
1986년 김대중씨,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권출마를 포기하겠다고 선언
1984년 태풍 애그니스호 필리핀 강타 사망 584명 실종 449명 이재민 20만명
1984년 다니엘 오르테, 니카라과 대통령선거 당선
니카라과 대통령선거에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의 오르테가 국가재건평의회 의장이 1984년 11월 5일 임기 6년의 산디니스타 정권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르테가는 쿠바의 카스트로와 함께 중남미에서 좌익정권을 지켜왔던 혁명투사. 소모사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혁명에 경도됐다. 15세때 미대사관에 투석, 체포된 후 수차례 투옥됐으며 산디니스타의 자금조달을 위해 은행을 습격하다 검거된 후 쿠바로 망명했다. 지난 1979년 불과 34세의 나이로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린 후 국가재건평의회 의장을 맡아 권력을 장악했다.
오르테가의 전면 부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미국은 1980년대 중남미에서 공산주의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해 경제봉쇄와 콘트라 반군지원을 통해 오르테가 정권의 기반을 흔들어 왔다. 결국 1990년 선거에서 비올레타 차모르에 패해 대통령직을 이양해야 했다.
1982년 자원관리법안 국회제출
1981년 정부, 제2제철 광양만에 건설키로 확정
1980년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공포
1980년 한국-바누아트 국교 수립
1980년 레이건 미대통령 당선
1979년 이란, 대(對)미 우호조약 파기 선언
1978년 한국-투발루 국교 수립
1977년 양양 낙산사 해수관세음보살 입상 점안
1974년 일본 거점 간첩단 사건
1974년 제1회 세계식량회의 로마서 개막
세계적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연합이 주최하는 각국 각료급대표에 의한 회의가 개막됐다. 1973년 9월 국제연합 총회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H.키신저가 제창했다. 1974년 11월 5일부터 16일까지 12일간에 걸쳐 약 130개국, 2000여명 가량의 대표가 로마에 모인 가운데 개최됐다.
회의에서는 국제농업개발기금, 세계식량이사회, 세계식량정보시스템 등의 새 기구 설치 외에 세계적 규모의 식량비축, 식량원조로서 1000만톤의 곡물을 보증하기 위한 원조국의 노력 등이 결의됐다.
회의 최종일에는 식량증산과 공정한 분배, 해양자원의 개발, 개발도상국의 식량증산을 도모하기 위한 선진국의 기술, 재정상의 원조 등을 요점으로 하는 행동선언이 채택됐다.
1973년 미국의 고생물학자 로머 사망
1970년 춘천호(의암댐)서 나룻배 전복
1970년 11월 5일 오후 2시10분경 강원도 춘성군 사면 금산1구 춘천호(의암댐)에서 춘성군과 춘천을 오가는 나룻배 금산2호(9톤)가 전복, 승객 59명중 31명이 익사했다.
사고는 금산리를 떠난 금산2호가 의암호 중간 중도 새마을 나루터에 배를 대었다가 다시 떠나려고 나루터에서 2m쯤 떨어진 수심 3m되는 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던 중 일어났다. 방향을 바꾼 순간, 사람틈에 태웠던 소 2마리가 배설물을 쏟아놓자 사람들이 이를 피해 왼쪽으로 몰렸고 소도 함께 왼쪽으로 밀리는 바람에 배가 순식간에 뒤집히고 말았다.
대책본부는 대책회의를 열어 장례비조로 1구당 우선 10만원과 쌀 1가마를 지급하고 보상금문제는 장례식이 끝난 뒤 유족측과 협의해서 지급했다
1966년 휴 헤프너의 `플레이 보이`왕국 공개
1962년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고
1961년 미국 국제개발처(AID) 발족
1960년 미국 슬랩스틱 희극의 아버지 마크 세넷 사망
1958년 이승만대통령 월남방문
1956년 유엔, 중동경찰군제 창설 결의
1951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 파견
1949년 한국, 유엔식량농업기구 가입
1945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결성
1944년 프랑스의 생물학자 알렉시 카렐 사망. 혈관봉합술 발달 공로로 1912년 노벨의학상 수상
1940년 에콰도르 대통령 롤도스 아길레라 출생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최초로 대통령에 3선
1937년 조선중앙일보 폐간
1926년 11월에 중외일보가 창간되면서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주도해 온 민간지 신문시장에 3파전이 형성됐다. 중외일보는 1931년 11월에 문패를 중앙일보로 바꾸고 1933년 2월에는 소유권을 여운형 손으로 넘겼다.
여운형은 중국에서 동명의 중앙일보가 발행되는데다 민족적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제호에 ‘조선’을 덧붙인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꿔 신문을 발간했다.
1934년 7월에는 이상의 시 ‘오감도’를 연재했으나 빗발치는 독자의 혹평으로 연재를 중단시켜야 했고, 1936년에는 동아일보보다 먼저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어 곤욕을 치렀다. 3명의 기자가 구속되고 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휴간중 발행허가효력이 상실돼 1937년 11월 5일 자동폐간됐다.
1926년 중외일보 창간
1926년 11월에 중외일보가 창간되면서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주도해 온 민간지 신문 시장에 3파전이 형성됐다.
중외일보는 1931년 11월에 문패를 중앙일보로 바꾸고 1933년 2월에는 소유권을 여운형 손으로 넘겼다.
여운형은 중국에서 동명의 중앙일보가 발행되는데다 민족적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제호에 ‘조선’을 덧붙인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꿔 신문을 발간했다.
1934년 7월에는 이상의 시 ‘오감도’를 연재했으나 빗발치는 독자의 혹평으로 연재를 중단시켜야 했고, 1936년에는 동아일보보다 먼저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어 곤욕을 치렀다.
3명의 기자가 구속되고 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휴간중 발행허가효력이 상실돼 1937년 11월 5일 자동폐간 됐다.
1922년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1916년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발표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아름다운 여성과 지내는 한 시간은 1분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1분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상대성이론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대답이다.
1916년 11월 5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이는 1905년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을 확장하여 일반화한 것으로, 중력(重力)을 관성력(慣性力)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 일정한 가속도를 가진 관측자들에게도 상대성원리가 성립하고, 물리법칙이 좌표계의 변환에 대하여 불변(不變)인 형식을 가지도록 체계화한 이론이다. 즉 시간 ·공간이 각각 관측자에 대하여 상대적으로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1919년 5월 29일 전세계 과학자들과 언론은 아프리카 기니만의 프린시페 섬에서 날아든 소식 하나에 들끓었다. 영국 런던 왕립학회의 일식 관측팀이 태양의 표면을 지나는 별빛이 뉴턴 물리학에 의한 계산보다 두배 더 휘어지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설마하며 의심을 받아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진실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이보다 3년전인 1916년 이날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과학학술지인 `물리학 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 "우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인 리만기하학에 의해서만 분석가능한 휜 공간" 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자 아인슈타인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의 하나로 태양 표면을 지나는 별빛이 휘는 정도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인슈타인은 하루 아침에 새로운 과학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라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상대성이론은 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현대인의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식도 바꾸어 놓았다. 공간과 시간이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운동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916년 폴란드 독립선언
1915년 불교중앙학교 설치 인가. 뒤에 혜화전문 동국대학으로 발전
1914년 독일의 생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사망
1914년 독일군, 1차 대전 중에 일어난 아프리카 최초의 `탕가 전투`에서 영국군에
대승
1914년 영국-프랑스, 對터어키 선전포고. 키프러스 합병 선언
1913년 비비안 리 인도에서 출생
1913년 11월 5일, 영화배우 비비안 리가 인도에서 태어났다. 영국으로 돌아와 배우의 꿈을 키우던 19세 때 변호사 허버트 홀만과 결혼, 아이까지 가졌으나 당대 최고의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결혼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비비안이 아직 풋내기 배우였을 때 비비안ㆍ올리비에는 함께 영화ㆍ연극에 출연하며 사랑을 키웠다. 둘다 가정이 있었으나 둘은 사랑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임을 깨닫고 동거에 들어갔다. 올리비에가 영화 ‘폭풍의 언덕’을 촬영하기 위해 헐리우드로 떠나자 비비안도 그를 쫓아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사랑을 불태웠다. 그무렵 비비안도 우연히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캐스팅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며 최고의 배우로 발돋움한다. 1940년 8월, 둘은 3년간의 동거생활을 접고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몇년간은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원래 몸이 약했던 비비안이 무리한 영화촬영으로 조울증에 빠지고 결핵까지 걸리면서 둘의 관계에도 서서히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더욱 불안정해졌고 폭음까지 일삼았다. 처음에는 아내를 위해 헌신하던 올리비에도 잦은 병치레에 지쳐 30세나 연하인 여배우 조안 플로라이트에게 마음을 돌리면서 결국 비비안을 떠나갔다. 결국 두사람은 1959년 이혼에 합의했다.
실의에 빠진 비비안을 마지막 연인 잭 메리발이 보살폈으나 견딜수 없는 고독과 만성 폐결핵으로 결국 1967년에 쓸쓸하게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는 생전에 그녀가 사랑했던 세 남자가 함께했다.
1913년 러시아-중국, 외몽고협정
1912년 윌슨 미국 대통령에 당선
1911년 이탈리아, 트리폴리를 합병
1911년 11월 5일 이탈리아가 오스만투르크의 영토 트리폴리에 병합을 선언했다. 9월 29일 트리폴리에 상륙한 뒤 시작된 '이탈리아-오스만투르크 전쟁'의 결과였다. '트리폴리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20세기 초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 이탈리아는 이 전쟁에서 세계 최초로 비행기 조수석에서 수류탄을 떨어뜨리는 공중폭격을 단행해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상륙 후 일주일만에 트리폴리를 점령했다.
침략의 구실은 1908년 오스만제국의 전권을 장악한 청년투르크당이 트리폴리에 사는 이탈리아인에 대해 압력을 강화했다는 것이었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침략을 늦추면 투르크 배후에 있는 독일만 이득을 취할뿐이라는 주장때문이었다.
애초에 이탈리아가 제국주의의 야심을 드러냈을때 눈독을 들일 수 있는 곳은 제한돼 있었다. 이탈리아가 1860~1870년대에 겨우 통일을 완성했을때 세계 대부분은 당시 열강이었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이미 차지한 상태였다. 뒤늦게 에티오피아를 넘보았다가 아두와전투에서 참패해 국제적인 망신을 산 이탈리아가 마지막으로 노린 곳이 당시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틀리폴리와 키레나이카였던 것이다. 현재의 리비아 땅이다.
트리폴리 병합을 선언한 뒤 곧 내륙 진출을 시도한 이탈리아는 사막의 전투부대에 막혀 전진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12년 10월 열강의 조정으로 휴전이 성립됐을 때 투르크는 결국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 영토의 상당 부분을 이탈리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1911년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경성섬유 창립
1906년 의병장 최익현, 대마도서 순국
조선말기의 의병장 면암 최익현이 1906년 11월 5일 유배지인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순국했다.
1855년 철종 6년에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수봉관, 지방관, 언관 등의 관직을 두루거쳤다. 1868년 흥선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873년 동부승지로 올라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공조참판으로 승진했다.
그 후 군부에게 잘못을 지적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나 1875년 풀려났다. 하지만 최익현은 일본과의 통상을 문제삼아 조약체결에 관한 5조의 척사소를 올려 또 다시 흑산도로 유배됐다.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격렬하게 반대하는 등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상소문을 올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전라도 순창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해 대마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단식으로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됐다. 저서로 `면암집`이 있다.
1905년 경의선 개통 기공은 1902년이다.
1904년 전독립협회원, 고종 밀지 휴대하고 미국으로
1895(조선 고종 32) 아침 저녁에 보신각 종을 쳐서 성문 열고 닫던 파루와 인정 폐지
1888년 독립운동가 이규갑 출생
1879년 영국 물리학자 맥스웰 사망
1854년 프랑스의 유기화학자 폴 사바티에 출생
1750년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 출생
1688년 영국 명예혁명
1688년 11월 5일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피를 흘리지 않고 통치자가 바뀐 혁명이었기에 명예혁명이라고 불리우게 됐다.
1685년, 가톨릭의 부활을 원한 가톨릭교도 제임스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교도가 아닌 사람의 공직 취임을 금지한 법률인 심사율을 무시하고 가톨릭교도를 관리로 뽑아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제임스2세에 대한 반감이 국민들 사이에 고조되고 있던 중,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불거졌다. 왕자가 없었던 제임스2세가 왕위를 그리스도교도인 장녀 메리에게 계승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왕자가 탄생하자 그리스도교들의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후 영국의회 토리당과 휘그당의 도움으로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 윌리엄과 메리 부처가 영국의 자유와 권리 수호를 위해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윌리엄군은 국내귀족과 지방호족들, 왕의 둘째딸 앤의 지원에 힘입어 승리했다. 결국 제임스2세는 영국으로부터 추방당했고, 윌리엄과 메리는 권리선언을 승인한 후 공동 왕위에 올랐다.
이 혁명은 17세기의 왕권과 의회의 싸움이 끝나고,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하게 한 시민혁명이었다
1605년 영국서 화약음모사건 발발, `가이포크스데이`라 불림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등, 반란 일으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