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012.4.29. 시편 23:1-6)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지난 금요일 몇분 형제들과 푸른초장 봄의 캠퍼스를 거닐었습니다. 지나치는 학생양들을 바라보며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시편 23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23편은 시편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즐겨하며 사랑하며 읽는 장입니다. 피곤하고 지친 세상 길을 살아가면서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힘이 솟고 은혜가 넘칩니다. 얼어붙은 마음이 서서히 열리고, 심령이 뜨거워지면서 어느새 우리 영혼은 목자 예수님을 따라 시냇가 푸른 초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육체도 홀 가벼워지고, 인생에 내가 가장 행복한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자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던 자였지만 하나님을 목자로 만나서 푸른 초장에 양 떼처럼 풍요로움을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시편 23: 공동번역)
1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2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네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네 원수를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곁에 살으리이다.
이 시를 읽다보면 마치 내 자신이 시편의 주인공인 것처럼 내가 주님의 양인 것처럼 생각되며 참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많은 관계중에서 예수님과 우리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였을까요? 소를 모든 목동도 있고, 돼지 치는 목동도 있고, 말을 모는 카우보이도 있는데 말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삶의 방식이 다른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있습니다. 사자, 범, 늑대처럼 상대방을 공경하여 쓰러트리고 이기는 동물이 있고, 열심히 일함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소나, 말, 사슴 등 초식동물이 있습니다. 표범과 같은 짐승들은 힘이 있지만 자신이 병들게 되면 굶어죽게 됩니다. 또 초식동물들은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지만 늘 방어를 하며 불안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양이란 동물은 초식을 하는 동물이면서 또 다릅니다. 자기를 보호할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소처럼 방어용 뿔도 없고, 사슴처럼 날쌔게 다리도 없고, 어리석어서 왔던 길도 못 찾습니다. 그런데 양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목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약하지만 목자가 보호하고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장 안전하고 그러면서 평안히 살 수 있는 동물이 양입니다. 주님을 보시고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그런 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양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떻게 하면 다윗처럼 우리도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자 같이 강한 자가되어 다른 사람과 경쟁이서 이기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소처럼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여 돈도 많이 벌고 재산도 모르려 고 합니다. 그런다고 부족함이 없나요? 100평 아파트에 산다고 잠이 잘 옵니까? 아는 집사님 으리으리한 아파트에 들어갔는데 곰짝 못하고 누워있는 사람을 보며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고 합니다. 높은 권력을 잡고, 재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 평안합니까? 사람은 아이러니 하게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부족함을 느끼고,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힘을 가질수록 불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소유가 많다고 부족함이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 3:19을 보면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하였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처럼 하나님이 없이 세상 재물이나 소유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그겁니다. 사자같이 살고 소같이 살아도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결국 똑같이 늙고 병들고 죽게 됩니다. 죽을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인생 스스로는 자신의 장래도 생명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오히려 양 같은 존재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야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편 34:10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0). 오늘 시편 35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첫째,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다윗은 목자를 따르는 양이 부족함이 없는 이유를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이신다는 것은 풍족한 삶의 표현입니다. 양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면 놀고 쉴 수 있습니다. 맹수들도 사냥을 해서 배가 부르면 잠을 잡니다. 주변에 많은 사슴과 소들이 있어도 잡아먹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편하고 먹을 양식이 충만하면 “내 영혼아 편히 쉬자”합니다. 그러면 쉬고 놀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나 전쟁터같은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놀고 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근심걱정이 놔주지를 않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래서 현재는 많이 있어도 계속 쉬지 않고 일합니다. 놀아도 쉬어도 편하지가 않습니다. 즐거워하는 것 같아도 속에는 걱정이 따릅니다. 어떤 사람은 잠도 편히 못 잡니다. “잘 자요” 해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몇십 년 동안 자기가 태어난 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서를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2:22-23)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창조하셨나이다. 내가 당신 품에 돌아오기까지는 내 영혼이 안식할 수 없었나이다. " 그렇습니다. 편안히 쉴 수 있는 것은 마음이지 육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믿음이 있어야 쉴 수 있습니다. 양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이유? 목자가 우리를 돌보고 있다는 믿음! 어린아이들이 근심 없이 뛰어놀고 잘 잘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돌보고 있는 엄마가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인생도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는 믿음이 있을 때 잘 놀고 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국보다 일찍 복지 정책을 잘 쓴 선진국들이 지금 마약 섹스 높은 자살률, 실업률로 국가가 무너저내리고 있습니다. 복지가 사람의 육신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아닙니다. 영혼이 쉴 수 있는 목자가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영혼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영혼들을 피곤한 세상에서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는 영혼의 목자이십니다. 길 잃은 영혼들은 목자를 만날 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너의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면 무엇이 염려가 되겠습니까? 제가 참으로 부족한 자입니다. 하나님 맡겨주신 교회도 잘 섬기지 못했고, 붙여주신 양떼들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많이 못해도 잘 쉬고 놀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너무나 아름답고 목가적인 시를 썼지만 그의 삶 역시 그렇게 평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쫒기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며 도피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삶은 적들 가운데 둘러 쌓였습니다.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시가 너무나 아름다운 이유는 환경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이 시는 오히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다윗의 깊은 영성과 믿음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적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와중에서도, 주리고 목마른 상황에서도 오히려 목자 되신 여호와를 바라보며 ‘산성 되신 하나님’, ‘방패 되신 하나님’, ‘요새 되신 하나님…’. 그의 영혼은 전쟁 속에서도 오히려 평화를 누릴 수 있었고, 푸른 초장에 누어 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모시는 살면 이렇게 역경 속에서도 영혼이 편히 쉴 수 있습니다.
둘째, 나를 안위([安危)하시나이다.
양들은 본래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눕기를 거부합니다. 양들은 두려움이 없어야 안심하고 평안히 눕게 됩니다. 들개와 범의 조그만 위협의 기미가 보여도 양들은 도망치려고 합니다. 낫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도 눈치를 봅니다. 그래서 양들에게는 모든 염려로부터 보호할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을 눕게 하고, 쉬게 하고, 긴장을 풀게하고, 안심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목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곁에 있으면 안심하고 풀을 뜯고 쉴 수 있지만, 목자가 없는 양은 아무리 푸른 초장이 펼쳐져도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들도 양과 같습니다. 강한 것 같아도 내심 두려움이 많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진토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장 약한 짐승인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연약한 양처럼 두려웠습니다. 사무엘 상을 보면 사울에게 쫓기면서 얼마나 두려웠는지 요나단에게 “나와 사망과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인생은 언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릅니다. 언제 갑자기 암이 판명 나고, 갑자기 사업이 부도나고, 갑자기 죽을지 모릅니다.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ooo, ooo님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하는 중에 지난 2주 동안 부산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갑자기 앞으로 푹 쓰러지는 현상이 있어 부산 병원에 갔는데 병원 의사 선생님 말씀은 암 환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수술을 잘 하고 위기를 넘겼지만 큰 병원 가까이 살라고 하였답니다. 아들 하나 장가 보내면 평안하게 잘 살 것 같지만 인생이 그렇지가 못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겠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8). 우리가 마음 놓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것은 돈이 많아서도 건강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목자이십니다(시 121:4).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런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목자 되어주심을 찬양합니다!
프레드릭 마이어(F.B. Mey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는 인간의 깊은 슬픔을 잊게 하였고, 가난한 자를 위로했고, 낙심한 군대에 격려의 노래가 되었고, 병자의 마음을 위안케 했다. 죄수를 방문한 천사처럼 사슬을 끊고 자유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노예를 주인보다 더 자유롭게 하였다. 순례자의 노래가 되며 마지막 하나님 품으로 날아가는 영원한 음악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안위(몸을 편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함)하십니다.
셋째,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다윗은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친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로 인한 만족과 즐거움을 노래한 시편 23편의 절정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까지 평안할 수 있는 영적 만족을 허락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이러한 의인의 즐거움과 만족은 오직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자의 특권입니다. 여러분도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있나요?? 세상은 전쟁과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테러도 그치지 않습니다. 갑자기 휴식을 취하다가 죽기도 합니다. 본의 아니게 사고를 당합니다. 매일매일 신문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험악한 인생행로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원수를 만나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여유를 가지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까?
다윗 자신도 지나온 날에 원수의 공격을 받아 쫓기면서 상처를 입은 때가 많았습니다. 광야에서 부엉이와 같이 밤을 새우는 고독을 느꼈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신하의 반역,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며 배신감을 느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고, 넘치는 은혜로 채우셨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생애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을 따랐습니다. 그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시를 썼습니다. 지극히 천한 이새의 아들을 이 영화로운 왕의 자리까지 수 없는 원수들의 손에서 지켜주시고 그 때마다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사람은 원수에 둘러쌓여 살아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즐겁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즐거움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쁨도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그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을 통과했다 할지라도 결과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다윗은 "내가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하였고,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 119:143)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되 즐거운 마음으로 믿었고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다윗성으로 들어을 때 그는 너무 기쁜 마음에서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여호와의 앞에서 어린아이 마냥 뛰놀며 춤추는 다윗을 미갈이 창으로 처다보다가 업신여길 때도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앞에 한 것이라 저가 네 아비와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6:21).
여러분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참고 인내하며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며 사는 날 동안 즐거움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넷 째,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푸른 초장에 눕고 쉴만한 물가가 있어도 양은 우리로 돌아가야 참 쉼을 얻습니다. 성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참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아무리 즐거운 여행이라 할지라도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보호하심도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만 참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도 나그네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회상하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주셨기에 온갖 시련의 험한 계곡을 지나온 것임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지나온 날을 회상하며 현 세상이 영원히 살아야 할 집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화려한 궁궐도 영원히 살 곳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돌아가 영원히 살아야 할 아버지 집을 바라보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어린 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슴을 고향 삼고, 먹고 놀고 안식을 얻고 잠을 잡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성전을 어머니로 삼고 거기에 삶의 중심을 삼고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아버지 집으로 여기며 어릴 때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삼킬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집을 바라보는 다윗도 예수님도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여호와의 집을 내 집으로 삼고 참 평안과 즐거움과 안식을 얻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화려하게 꾸미고 살아도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온갖 부요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따듯이 맞이해 줄 집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날 자기를 맞이할 아버지 집이 없고 오직 사망의 컴컴함이 기다리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반면 언제나 자신을 기다리는 맞아주는 따스한 가정이 있는 사람, 죽어도 영원히 거할 아버지 집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어렵고 힘들지만 제자의 길을 걸어온 제자들에게 이런 유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2).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안심하십시오. 하늘에 영원히 거할 집이 있습니다. 돈이 없고 나이는 50이 넘고 해놓은 것은 없을지라도 무엇이 염려가 되겠습니까?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다윗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바다해 김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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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편안한 말씀,,,성경구절도 제가 사모한말씀들이구요...
간만의 여유로 평안을 얻고갑니다...
날마다 뭐가 그리 바쁜지요...
주6일근무에 주일,,, 오후예배후 교사교육받으면서 꾸벅꾸벅 졸았는데
목사님의 설교에 참 위안을 얻고갑니다...
잘 계시지요,,,
반가와요~덕분에 저도 잘지내고있승니다.
말쑴을사랑하시는 매일님 주님의 좋은양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