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컬럼]
ㅡ 광대패와 각설이 타령 ㅡ
글쓴이: 최창주 석좌교수
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 부회장
한국예술비평가협회 부회장(평론가)
사) 한국생활연극협회 고문
대한민국 문화독립군 총연합회장(대문총)
전 세종문화회관 뮤지컬 기획담당(실장)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학과장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대행
한국전통문화는 국가적으로 큰 자산이라고 하면서 현실적으로 외면당하고 있다.
그래서 매주 화요일은 필자가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강조하는 날이다.
지난 30여년은 서양뮤지컬로 밥을 먹었고, 20년의 세월은 한예종교수로서 봉직하며 삶을 이어왔다.
한예종 현직에 있을 때도 매주 화요일이면, 원형의 수업과 구시대와 현대의 만남을 강조한 창작 작업을 해왔다. 강의는 했지만 그 내용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쉬어 자료로 남기고 싶다.
재직시 처음엔 연희과 외에 음악과, 무용과, 본부 교양선택과목 등 16시간을 담당했는데, 보직자가 강의를 너무 많이 하니 줄이라고 해서 기본 9시간만 하고, 학과장 직책을 충실히 하며, 창작연희극(뮤지컬) 기획, 제작까지 했다.
일본의 가부끼(歌舞伎)가 현대(피아노)와 만남으로 관객의 눈높이에 맞게 그 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 진행하고 있다. 만약 탈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춤을 춘다면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한예종 교수들이 일본의 노(能)극장에서 초청공연을 받아 필자도 탈춤 원형 공연을 했다.
현재 근원적인 모양의 뜻을 지닌 원형原形/源形은,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을 지닌 전형典型과 함께 쓰이고 있다. 단어풀이만 되풀이하는 문화재청의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문화재청이 아니라 기 예능청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래서 후배 제자들에게 원형과 창작을 구분해서 지도해주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행위는 대면이어야 한다.
지금 비대면은 형식적인데, 코로나 기간동안 오히려 많은 것이 정리, 정립이 되고 있다. 필자만 그런지 모르겠다.
한예종 현직 교수로 있을 때도 이론을 강조했지만, 실기학교이기에 저학년에게 필수과목인 우리 것을 이론적으로 강조했다. 반면에 고학년에게는 서양 뮤지컬과 한국연희극과 마케팅! 콘텐츠 등, 특히 뮤지컬 작품의 기획ㆍ제작에 대해 강의를 통해 이론과 실기를 강조한 바 있다.
지난 컬럼때는 마당극과 무대극을 제시한 바 있다. 무대와 마당, 우리에겐 짜여진 무대보다는 자유로운 마당이 더 살겁다. 혹 영화에서 뜨락이나 대청마루, 또는 궁궐에서 악사들이 연주에 무희들이 경쾌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곧 대청마루나 정자(궁정)에 앙반들이 앉아서 ~ 청산리 벽계수야 ㅡ 시조를 하다가 너무 심심하니까~ 여보게 최진사! 자네 종놈이 소리를 잘 한다지? 한번 불러보게나! ~
여봐라 게 없느냐?
쇠뚝이가 예! 부르셨습니까? 가서 말뚝이 좀 불러오거라! 쇠뚝이가 논 농사를 짖고 있는 말뚝이에게 ㅡ 말뚝아! 말뚝아! 주인 영감이 빨리 오라네!
말뚝이: (정자에 앉아 있는 주인과 양반들에게)
예! 부르셨습니까,
양 반: 너! 뒷간(便所)에 가다가 보니
사랑방에서 들은 소리! 그거 한번 해봐라!
말뚝이:(말뚝이와 부친이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면서 놀부 심술타령을 했던 소리다.)
ㅡ 똥누는 놈 주저 앉처 애 밴 부인 뱃똥차고 미나리 깡에 소몰아 넣고 고추밭에 말 달려ㅡ (생략) 스토리가 있는 해학(諧謔: 설명적: 우스꽝스런 말)과 풍자(諷刺:행위적:비웃음 비판)적인 소리를 듣고 양반들은 즐기면서 수고 했다고 댓가로 동전 한 잎을 던져 주고 좋아했다. 그래서 기ㆍ예능보유자가 탄생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름이 고귀하면 귀신이 잡아간다고 해서 말뚝이, 쇠뚝이, 개똥이, 소똥이, 먹쇠 등 이름을 어른들이 지어주었다.
각설이타령은 품바타령, 장타령이라고 한다. 각설이타령은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밥얻어 먹기가 미안하여 소리로 보답하다보니, 자연히 그 소리에 민요풍이 실리게 된 거지들만의 장기이다. 긴 사설로 구걸하는 장타령이다 보니, 여기에 숫자풀이, 투전풀이, 화투뒤풀이, 인문학적인 국문풀이 등 대부분이 말풀이로 되어 있다. 가사내용이 1부터 10까지 풀어낸 것으로 이때 10을 화투에서 장이라 한다. 그래서 장타령이라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길게 타령조로 풀어내기 때문에 장타령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50년대 지질이도 못살던 시절 어김없이 찾아와 긴 사설을 깡통(밥그릇)을 두드리며 메나리조로 제끼던 모습이 선하다. 그 처절함 속엔 풍자와 은유법이 구성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세월이 좋아지면서 어느새 각설이타령이 예능화되어 여기저기서 연행하는 이들이 늘었다. 사설이 꼭 정해져 있는게 아니기에 사설 내용과 부르는 唱調도 변할 수밖에 없다.
어! 씨구 씨구(식구食口:밥을 얻어 먹으러 왔다의 뜻) 들어왔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품바! 픔바! ㅡ 그래서 "품바" 라고도 하며 악기가 없어 나무나 돌, 입방구(구두로 악기 멜로디를 내는 것: 전통 비트박스?)반주를 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사람들의 생활과 그 지역을 소개하는 광고주 노릇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잘 이끌기 위해 목청과 몸짓이 매우 중요하다.
옛날에는 고구마, 감자 등으로 먹고 살았지 서민들이 돈은 구경을 못할 때었다. 새경(한해 동안 머슴에게 대가로 주는 월급) 이라고 해서 1년 내내 일해보았자 보리 한 가마 정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부모들은 깡통에다 돈을 받는 것보다 봉투에다 월급 받는 면面서기를 부모들은 원할 수밖에 없다. 각설이는 족보가 없다. 죄인도 얼굴은 숯(숱)으로 까막게 칠을 해서 유배를 보냈고, 있어도 가문의 영광을 위해 기록도 없지만, 있으면 삭제했을 것이다.
정승판서 자제도 돈 한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래저래 모두 서글픈 시절의 얘기다.
예술은 상대를 끌어들여야 돈 벌고 힛트치는 세상으로 변한 지금, 세월이 흘러 국제화ㆍ세계화시대에 동ㆍ서양이 함께 가자고 하는데---ㅡ
무대 얘기를 해본다.
서양의 공연예술도 처음에는 윈형무대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만이 가질 수 있던 독특하고 특색있고 운치있는 자연의 무대가 있었다. 바로 산대(山臺)였다.
산대놀이의 산대는 규모와 형태에 따라 대산대(大山臺), 예산대(曳山臺) 등으로 불렸으며, 오산鰲山이라는 명칭도 있다. 백제금동항로에도 산대의 모습과 봉래산의 제일봉, 형상을 본 따 선산(仙山)과 같다고 산봉우리와 꽃과 나무, 정자, 사람이 밀거나 기계장치에 의하여 조작시킬 수 있는 조형물을 설치했던 것이 그림(사진 자료 참고)에 그대로 있다. 그만큼 가치있는 무대였다는 예증이다.
1487년 조선을 방문한 董越의 <朝鮮賦>에 보면, 광화문 앞에서 鰲山을 벌리는 대목이 보인다. 그 뒤 영조1년 또한 무악제 홍제동으로부터 무악재로 넘어오는 사신을 영접할 때, 모화관慕華館에서 산대놀이를 하는 그림이 있다. 이름하여 아극돈阿克敦(1685~1756)의 <奉使圖>이다.
이 그림은 20장짜리 화첩으로, 제 7폭엔 모화관에서 벌린 산대놀이 장면이 있다. 바퀴가 달린 거대한 曵山臺(小山臺) 뒤에서 밀고 있는 사람의 모습과 광대들의 연행 장면이 그것이다. 여기엔 가설무대인 채붕! 그리고 예인들이 맨땅에서 마당 공연하는 모습과 서민들의 구경 모습들이 실감나게 스케치되어 있다.
자료부족으로 감히 상상도 못했던 그 근원의 뿌리를 한 외국인의 기록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이 중 대산대의 연행장면 공연은 경기도 수원에서 초청하여 한예종 연희학과에서 시연한 바 있다.
이로보아 이제 지금 늦었다고 해도 우리 것을 하나하나 복원할 필요성이 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우리 경기도 광주의 조성자 줄타기 등 등의 복원도 필요하다.
현재 전통문화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달라져 유랑예인집단의 곡목들이 제도적으로 바뀌어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있다.
유랑예인집단은 우리의 전통연희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문헌적 기록이 부족했지만, 유랑예인들을 만나 정리한 심우성의 <<남사당패연구1974>>는 압권이다. 이를 계기로 나온 윤광봉의 <<유랑예인과 꼭두각시놀음(밀알)1994>>과 <<한국연희예술사(민속원)2016>>, 전경욱의 <<한국의 전통연희2003>> 손태도의 <<광대의 가창문화2004>>도 참고가 된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남사당패와 여성국극단, 여성농악대(유지화 보유자)의 사당패는 소고춤, 덧뵈기춤 등, 해당되는 사당벅구춤(社堂法鼓舞), 서도, 경기민요, 남도민요, 서도민요, 산타령 등 민요창을 연행했다. 솟대놀이도 그중의 하나이다.
광대패 솟대놀이;
솟대는 마을 공동체신앙으로 새해 풍년을 바라는 뜻으로 높이 볍시를 주머니에 넣어 높이 달아매는 장대이다. 그래서 이렇듯 높은 장대를 타고 묘기를 부리는 패들을 솟대쟁이패라 한다.
따라서 이들의 솟대타기는 솟대쟁이가 장대 위에 올라가 탈을 쓰고 재주를 부린다. 솟대쟁이는 긴 대나무로 만든 솟대 위에서 양편으로 두 가닥씩 네 가닥의 줄을 늘여놓고 그 위에서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는 사람으로, 이외에도 풍물(소리와 악기 연주), 땅재주(물구나무서기), 병신굿(지주와 머슴 2인극) 따위를 한다. 긴 대나무 장대 위에서 하기에 대광대라고도 한다. 이 광대패는 경남 합천군 초계밤마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외 광대패로 초란이패, 굿중패 등등이 있어 유랑예인집단으로 위에 제시한 모든 놀이를 구사하면서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그래서 이들은 풍물, 버나, 땅재주, 줄타기, 죽방울치기, 한량굿(1인 창무극, 배뱅이굿, 장대장네굿, 병신굿 등) 등을 연행하면서 음악은 삼현육각, 판소리, 민요창(12잡가 포함)을 했고, 얘기장사패는 홍길동전, 고대소설이나 전래동화 등을 한사람의 구연자가 이야기와 창을 곁들여 흥을 돋구었고, 초란이패는 괴상한, 이상스러운 탈을 쓰고 탈놀음, 얼른, 죽방울치기, 초란이굿 등, 비교적 폭넓은 종목의 연행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놀이들은 1930년대에 쯤 남사당패에 흡수된 것같다.
일제강점기 까지는 이러한 예능은 일제강점기까지 전승되었는데, 천민賤民들이 하는 것이라고 또 먹고 살기에도 바빠 제대로 전승이 안되었다. 얼마전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회장 김선옥)에 지원하여 진주에 복원작업을 직접 필자가 파견되어 발표하게 하고 관리한 바가 있다
이상의 각설이타령과 광대패들의 놀이문화는 천하다고 무시하지 말고 계속 보호 유지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 9조를 아십니까?
여기가 대한민국입니까?
이러한 보호유지를 위해 여기에 부합되는 문화정책을 운영해야 전통문화예술을 잇고있는 전승자의 앞길의 희망이 있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 처음에 시행령 개정안 등 지시, 발의자, 논의과정, 회의록과 참가자 등, 자문을 구했다면 누구인지, 참석자 명단 공개를 요구한 것이 2010년 문화재 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한 반론과 공개질의서였다. 무형문화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 등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자료참고 2010.7)
그래서 처음 뵙는 사람에게 헌법 제9조는? 제69조는? 대한민국은? 하며 상투적으로 필자는 질문하였다. 우리는 지금 상위법을 모셔놓고 하위법으로 운영하다보니 이 꼴이다. 따라서 문화정책부족으로 그 어느 때보다 현실 교육이 필요하다.
무형문화재는 교육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교육의 지도자와 교재 부족으로 기성인부터 초등학교까지 교육을 할 수가 없음을 알고, 나는 개인적으로 교육을 매주 화요일 강의를 강조하고 있다.
교재의 부족은 물론 이것을 하면 천민賤民으로 창피하고 천하고 등한시하던 옛 풍조가 아직도 남아서인가, 오늘날도 해외 유학생들로 하여금 기를 못펴게 하는 묘한데가 있다. 그렇다면 유랑예인으로 천대받던 그 시절과 뭐가 다른가. 다시한번 우리 모두 이러한 실정을 너무도 모르고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결재자, 전문가, 지도자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제부터다.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 사진 설명
이란문화원 전시장 해설(필자)
터키 대표(시장?) 공연 관람 후
원형 극장(서양. 한국)
산대와 솟대ㆍ낙성연도
미국공연 포스터
연희와 뮤지컬
한국문화재단 설립공연 기획
모화관 중국사진 영접행사
노能극장 한예종교수 초청공연
조송자 줄타기 복원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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