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7일 끝난 청룡기 고교야구에서는 경남고가 제물포고를 3:0으로 제치고 통산 9번째 우승 고지에 올랐다. 26년 만에 청룡기 결승에 오르면서 첫 우승을 꿈꾼 제물포고는 아쉬움의 눈물을 삼켰다. 제물포고 에이스 이현호는 상원고와의 준결승에서 124구를 던지며 완봉승을 거둔 데 이어 결승에서도 완투했지만, 팀 타선의 엄호를 받지 못하면서 빛이 바랬다.
투수의 분업화와 전문화가 상식이 되면서, 연투는 고교야구에서도 쉽게 보기 어렵다. 그런 연투와 관련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이광은 연세대 감독이다. 배재고 시절인 1973년 청룡기 대회에서 이 감독은 6월 14일 광주상고와의 경기 후반에 1⅔이닝을 던진 것을 시작으로 해 6월 18일까지 5일간 59⅔이닝을 연속 투구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 기간에 상대한 타자수는 223명이며, 투구수는 697개. 게다가, 단 7실점만을 기록했다. '야구라'에서는 이광은 연세대 감독을 만나서 그의 야구인생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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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모교인 연세대 사령탑에 오른 이광은 감독은 대학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대학야구가 침체기에 빠진 것도 애교심 등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야구라 안준철)
우리 집안이 다 스포츠 집안이야.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스키 선수셨고. 내가 야구를 하게 된 것은 돌아가신 형의 영향을 받아서야. 형님 별명이 원래 갈비거든. 그만큼 말랐다는 거지. 그게 싫어서 그때만 해도 변변한 운동기구도 없었잖아. 시멘트로 역기를 만들어서 그걸 밤낮없이 들고 그러더니 73, 4년도에 미스터 코리아까지 하셨어. 누나는 유명한 농구선수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 형이 남대문에서 야구 글러브를 사가지고 와서 함께 캐치볼을 시작했어. (캐치볼 하는 동작을 취하며) 공을 던지고 잡고 하는 게 정말 재밌었어. 사실 나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다들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건 아니야. 노력형인 거지. 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경기도 거의 못 뛸 정도였으니까. 배팅볼을 던지는 게 내 역할이었지. 스피드는 없었지만, 제구력이 상당히 좋았거든. 10개 던지면 9개가 포수가 원한 곳에 딱딱 들어갔으니까.
그러다가 배명중학교 3학년 때 동대문중학교랑 연습경기를 하는데, 선발 투수로 나갔어. 만날 배팅볼만 던지다가 출세한 거지. 포수 미트만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던졌는데, 9회까지 안타를 하나도 안 맞았어. 그걸 본 감독님이 “1년 유급해서 제대로 투수 수업을 쌓자!”라고 말씀하셨어. 어떻게 할까 고민이었는데, 배재고에서 테스트 받으러 오라는 거야.
이게 후에 알게 된 거지만, 누나가 숭의여고에서 농구로 펄펄 날아다녔는데, 배재고 관계자 중에 농구를 좋아하신 분이 동생이 야구를 한다는 걸 알고 주선한 거더라고. (웃으면서) 마운드에서 공 몇 개 던지고 나니까 합격을 시켜줬는데…. 당시만 해도 배재고는 명문 고등학교였거든. 나로서는 잘 된 거지.
59⅔이닝 연속 투구의 고무팔
배재고에 가서는 처음에 투수도 보고 2루도 보고 하다가 1학년 때 부산고 하기룡이 온 거야. 불펜에서 같이 투구를 하는데, 쓱 곁눈질해서 보니까 내 볼은 볼이 아니더라고. (그때를 회상하듯이 눈을 감으면서) 그때 곰곰이 생각했지. 어차피 기룡이가 있으면 내가 던질 일은 없을 것 같았거든. 그때부터 2루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어. 간간이 투구 연습도 했지만. 그전까지 주로 투수를 하다가 2루를 보려고 하니까 이게 쉽지가 않더라고.
하루에 4, 5시간 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수비랑 타격 연습만 했어. 그렇게 하니까 2학년이 돼서는 야구선수다운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더라고. 그리고 형이 하던 체육관에서 매일같이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더니 힘도 조금씩 붙었어. (입꼬리를 올리면서) 그전까지는 정말 ‘똑딱이 타자’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담장까지 타구가 날아가는 거야. 처음에는 얼마나 신기하든지 내가 쳐놓고 내가 놀랐다니까. 만날 치면 내야를 벗어나지를 못했는데.
3학년이 되면서 3루를 봤는데, 기룡이가 전학확인서를 못 떼 왔어. 부정 선수가 되면서 청룡기 대회에 뛸 수가 없게 된 거지. 그때 우리 야구부 총인원이 12명이었어. 기룡이가 부정선수가 되면서 11명. 지명 타자가 없던 때라서 9명이면 경기를 할 수 있으니까 한 거지만, 투수가 나밖에 없었어. 그래도 내가 기룡이처럼 힘 있게 강속구를 던지는 게 아니라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스타일이라서 팔꿈치나 어깨에 무리가 가지는 않았어. 그래서 많이 던질 수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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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역 시절 이광은은 손꼽히는 거포도 안타제조기도 아니었지만, 시쳇말로 5툴 플레이어였다. 매년 타율, 홈런, 타점, 도루 등에서 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은 MBC 시절 홈런을 치고 들어온 이광은을 환영하는 MBC 선수단. 이해창, 어우홍 감독, 신언호 등이 보인다.
1973년 청룡기 1회전 상대가 광주상고(현 동성고)였는데, 하기룡이 투타에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했어. 0:1로 뒤진 3회에 구원 등판해서 무실점 호투를 펼쳤고, 타석에서는 동점타에 역전 홈런까지. 근데 8회 1 아웃 상황에서 갑자기 광주상고 측이 부정선수라고 이의를 제기한 거야. 말썽이 생기니까 일단 신성철 감독님이 뺏거든. 그리고 내가 마운드에 올라갔어. 기룡이는 부정선수가 되어서 남은 대회에 출장금지가 됐고.
광주상고를 4:1로 이기고 2회전에 올랐는데 상대가 대건고야. 당시 대건고에 권영호, 허규옥 등이 있었는데, 엄청나게 강팀이었어. 그런 대건고를 상대로 1:0 완봉승을 거뒀어.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그리고 8강에서 중앙고를 만났는데, 연장 13회까지 하고서도 승부가 나지 않았어. 0:0으로.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다음 날 다시 열렸는데 연장 20회에 4실점 하면서 우리가 패했어. 얼마나 분하던지.
근데 그때는 패자부활전이 있었거든. 중앙고한테 패하고 나서 20분 후에 다시 대건고랑 패자부활전이 열렸어. 사실 경기 전에 감독님이 이제는 힘들 것 같으니까 그만 던지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선발투수로 조선일을 올리더라고. 첫 타자한테 2루타를 맞는 거야. 이 경기에서 지면 그때까지 던진 게 너무 아깝잖아. 그리고 나는 정말 괜찮았거든. (웃으면서) 감독님한테 내가 던지겠다고 하고 마운드에 올라갔어. 결국, 9회를 완투하며 1:0으로 이겼어.
그 다음 날 군산상고한테 연장 15회 끝에 1:2로 패하면서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지. 광주상고부터 군산상고까지 59⅔이닝을 연속 투구한 거라고 하더라. 고교야구 기록이라면서.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인데, 에이스인 기룡이 몫까지 분발해서 우승 한 번 해보자고 동료랑 의기투합이 됐거든. 육체적으로는 피곤했지만, 정신력으로 이긴 거지. 또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러웠고. 고교야구의 철완 투수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니까.
돌이켜보면, 내가 그렇게 던질 수 있었던 건 신언호라는 명포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신언호가 포수 블로킹 등도 좋았고, 어깨는 정말 강했잖아. (눈가에 국화꽃을 피우면서) 강한 어깨를 가진 포수에 제구력이 좋은 내가 배터리를 이뤘기에 김일권, 이해창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발 빠른 주자가 1루에 나가도 전혀 부담이 안 됐어. 언호가 던지라는 곳에 딱딱 던졌으니까. 그래서 연속 안타도 잘 안 맞았어. 흔히들 명포수가 10승 투수를 만든다고 하잖아. 그 말대로 신언호라는 포수가 없었다면 나도 평균자책점 5점대의 투수였을 거로 생각해.
고교 시절에 기억에 남는 투수라…. 하기룡이나 권영호, 천창호, 박상열 등 좋은 투수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한 명을 꼽는다면 ‘괴물’로 불린 에가와 스구루야. 한일 고교야구대회 2차전에 에가와가 등판했는데, 이건 칠 수 있는 볼이 아니더라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에가와 강속구와 비교하면 내 볼은 체인지업이야. 그만큼 볼이 좋았어. 그걸 중앙고 유대성이 홈런을 쳐서 우리가 1:0으로 이겼거든. 유대성이한테 “어떻게 쳤느냐?”라고 물으니까 “던지는 순간 휘둘렀는데 그게 제대로 맞았다.”라고 하더라고.
사실 에가와를 제대로 공략한 것은 대구상고 장효조 한 명뿐이었어. 그때 효조가 2학년이었는데도, 그 강속구를 밀어치고 당겨치고 자유자재로 공략했어. 그걸 보고 내가 감탄을 했지. 에가와와 견줄만한 투수를 본 게 대학교 때야. 누굴 거 같아? 맞아. 최동원이야. 동원이가 연세대 4학년 때 신입생으로 들어왔는데, 정말 볼이 좋더라고. 강속구에 낙차 큰 커브로 타자 타이밍을 완전히 뺏었어. (크게 웃으면서) 같은 팀에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던지...
첫댓글 아놔도 집에서 운동해서 무쇠팔 만들어야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