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창작교실 8기-후 8차시 합평작 (10월 7일 용)
1. 운명을 거스르다/남경수2
서울에 대학원 시험을 치러 가기 전날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내일 아침에 시험 치러 간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내일 비행기 안 뜨면 어떻게 할 거냐고 했다. 아니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비행기가 안 뜰 리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고 다른 대안이 없어서 마음이 좀 불편했다. 버스표는 예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드디어 시험 치는 날 아침. 불안한 마음에 좀 일찍 일어났다. 날씨는 여전히 화창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울산 공항에 전화를 했다.
“오늘 서울 가는 7시 30분 비행기 뜨나요?”
“7시 30분 비행기는 안 뜹니다. 김포공항에 안개가 짙어서 못 갑니다”
하늘이 노랬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방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교 진학도 내가 원하는 데로 가지 못했다. 교대에 들어와서도 음악교육과나 미술교육과를 가고 싶었는데 이과 출신은 지원이 안 된다고 해서 못 갔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나니 공부하지 않은 후회가 많았다. 다시 한번 원 없이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꿈꿨다.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으나 짧은 한자 실력에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을 공부하는 심리학으로 바꾸었다. ‘나’라는 인간을 알고 싶기도 했고 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한을 풀고 싶어 대학원은 서울로 정했다. 학교 근무를 마치고 나면 도서관에 가서 밤늦게 까지 공부했다. 오늘 드디어 그 시험을 치러 가는데 이 기회도 막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어떻게 해서라도 서울로 가서 시험을 치르고 말리라.
버스로는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서 김해공항에 알아보니 9시 30분 비행기가 있었다. 시험 시간에 얼추 맞을 것 같았다. 아니 안 맞아도 무조건 가야 한다. 주머니에 현금도 별로 없었다. 카드 한 장과 신분증만 들고 택시를 탔다.
“아저씨, 서울에 시험 치러 가는데 김해공항에서 9시 30분 비행기 타야 합니다. 택시비는 공항 가서 찾아 드릴게요”
기사님께 신분증 맡겼다. 그 친절한 기사 아저씨도 나의 간절함 마음을 받아주었다. 그때부터 차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운명을 바꾸리라.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의지가 불타올랐다.
공항에 도착해서 돈을 찾아 택시비를 드리고 비행기에 정신없이 탑승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다시 지하철로 갈아타고 역에 내려서는 시험장까지 택시를 탔다. 시험장 문을 거의 닫을 때 도착해서 겨우 시험장엔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안달복달 하며 급하게 온 나머지 시험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했다.
첫 시험에 떨어졌다. 그래도 그 경험이 도움을 되어서 다음 해에는 미리 전날 서울에 가서 잠을 자고 안정적으로 시험을 치고 합격하게 되었다.
당락에 상관없이 그날 서울에 올라가서 시험을 친 것, 그 자체에 나는 만족했다. 아무도 나를 가로막을 순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을 할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준비가 미흡해서 일어난 일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비장했는지 웃음이 난다. 뭔가 계속 내 의지가 꺾여진다고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작은 일을 확대해석한 감이 있지만 그땐 그런 마음이었다.
2. 나의 화양연화/장미1
1. ‘화양연화(花樣年華)’ 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이란 뜻이다. 항상 마음 속 한 편에 잭팟이 터지는 정점을 꿈꿔왔다. 내 이름처럼 활짝 피어오를 순간을 늘 고대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내가 정의하는 ‘꽃 피우는 순간’ 이란 무엇이기에 이토록 신기루 같이 여겨지는 걸까?
2.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모습을 이미 이뤘다. 벌써 몇 권의 책을 낸 작가 언니,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 고액 연봉을 받는 친구 등……. 내가 이루고 싶거나 소속되고 싶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부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3. 나도 20대 때, 화양연화의 순간을 위해 여기 저기 도전을 많이 했었다. 늘 작가를 꿈꿔 와서 당장 서울로 가 작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왕이면 책을 내는 작가 보단 ‘이름난’ 드라마 작가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아 ‘방송 작가’ 일을 했다. 치과위생사로 일할 때도 일반 의원은 시시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대학 병원’ 쯤 되어야 한다며 계약직만 남아있는 자리라도 들어갔다. 용의 꼬리라도 되고 싶었다. 나만의 대기업 소속인 것이다. 그렇게 들어간 병원은 출근이 편도 한 시간에 온갖 잡무를 맡았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면 그 고단함이 금세 사르르 녹곤 했다. 소속한 곳의 이름이 곧 나라는 환상이 있었다.
4.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보면 차별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 속에 있다 보면 꼭 내가 모차르트 옆 ‘살리에리’ 가 된 기분이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지만 자신은 그 이상을 뛰어 넘지 못해 질투와 비루함을 느끼는 살리에리 말이다. 나도 정직원의 일원으로 일하고 싶은데 그들만 갖고 있는 소속감이 샘났다. 20대의 나는 늘 열등감과 시기(猜忌)로 점철되어 있었다.
5. 결혼하며 끝난 줄 알았던 열등감을 남편에게서도 계속 느꼈다. 남편의 사내(社內) 승진이나 업무 관련 자격증 취득조차도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저 영광들 내 것이었어야 했는데… 내가 칭송 받았어야 했는데…….’ 라며 질투했다. 세상의 모든 칭찬은 내 것이어야 한다 생각했다. 내 손에 쥐어진 것들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인생 최고의 순간이 오지 않았다며 목말라 했다. 현실이 아닐수록 내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더욱 가고 싶었다.
6. 가정을 꾸리고 나니 계획한 일에 자꾸 제동(制動)이 걸렸다. 하는 일과 가정 일에 계속 변수가 생겼다. 아직 아이가 어리다보니 자주 아팠다. 병원에 뛰어 다니고, 간호하느라 하루가 다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의 걱정보다는 일이 또 방해 받는다는 데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무래도 종일 일해야 하는 남편보다는 내가 좀 더 아이를 봐야 했다. 그러다 보면 목표한 일들이 자꾸 밀려났다. 그에 대한 스트레스는 결국 남편에게 향했다. 아이가 다 나아갈 즈음엔 꼭 남편과도 크게 싸웠다.
7. 한 번은 나의 히스테리를 받아주던 남편이 말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부디 가정을 1순위로 둬달라고 말이다.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돈은 안 벌어도 되니 차라리 가정에 충실해 달라 했다. 간곡한 남편의 말에도 내 귀에는 마치 ‘둘 다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으면 일찌감치 관둬라.’ 내지는 ‘푼 돈 벌면서 생색 내지 마라.’로 들렸다. 남편은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웬 자격지심이냐 했다. ‘자격지심’ 이란 단어에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더욱 버럭 했다. 그게 아니란 뜻으로 거세게 ‘내 뜻이 맞지?’ 하며 남편을 몰아 세웠다. 이 문제로 몇 년 동안 지리멸렬한 싸움을 해왔다. 그 정도로 모두가 날 방해하는 요소 같았다.
8. 문득 되돌아보니 열심을 빙자해 자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젠 화양연화의 순간을 재정립 하고 싶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 보았다. 이를 위해 ‘글이 쓰고 싶었던 마음’ 은 왜 ‘유명한 작가 되는 것’으로 목적이 바뀌었는지, ‘내 시간을 유의미하게 쓰고 싶어’ 시작했던 논술 선생의 일을 이젠 ‘최다 수강생 수를 자랑하고 싶어’ 졌는지, ‘가정의 보탬’이 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왜 남편보다 더 벌어서 ‘남편의 기를 꺾고 가정 내에서 군림하고 싶어졌는지’ 를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9. 동기는 안 그랬는데 목적이 변해 갔던 게 이유였다. 좋은 동기로 시작한 일들을 이상하게 빚어갔다. 시작은 깨끗했는데 그 과정에 불순물이 많이 들어갔다. 사실 생각해 보면 진정 행복했던 순간이 꼭 남들에게 인정받을 때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내 이름이 알려지고, 추앙을 받으려고 안달이 나 있다.
10. 더 내면의 근원적인 동기를 떠올려 보았다. 어렸을 적, 부끄럼이 많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기를 너무 싫어했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글이었다. 글은 실수한 말을 지우고 고칠 수가 있었다. 글 속에서는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좋았다. 그게 글을 쓰게 된 동기였다. 그러다 조금씩 상도 받게 되고, 사람들에게 글 잘 쓰는 사람으로 통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을 어느새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염원하던 순간이 자주 오지 않아 감질이 났던 걸까? 그래서 더 갈망하게 됐을까?
11. 옛날에 한 할머니를 만났던 게 떠올랐다. 본인은 국내 유수(有數)의 여대를 나와 어느 학교의 교장직을 역임했었고, 현재는 퇴임했다 했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같은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매번 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사실 제 3자가 보기엔 그 이야기들은 더 이상 관심도 가지 않고, 듣는 것도 질렸다. 한편으론 회상에 젖은 눈빛이 안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 역시도 이렇게 지내다간 이 노인처럼 영광의 순간만 좇다 끝날 것 같았다. 마치 찬란했던 과거만 그리는 퇴역한 군인 같이 말이다.
12. 이젠 빛나고픈 미래를 좇기 보단 현재를 살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타인의 인정이 아닌, 무얼 하든 내가 주체가 되기로 했다. 나답게 아름다울 수 있는 공간에서 행복함을 그리며 그 순간을 활짝 피우고 싶다. 아니면 만개하진 않아도 조금이라도 꽃망울을 열었으면 좋겠다. 그 꽃이 작약이나 장미처럼 화려하고 크지 않아도 된다. 이름 모를 꽃이라도 괜찮다. 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행복을 느끼는 그 순간이 중요하니 말이다.
13. 노상 가던 길에 피어있는 꽃들도 아무 노력 없이 빚어진 것들이 아닌데 자꾸만 놓치며 지나쳤다. 이제부터 나의 화양연화는 저 작아 보이지만 무수히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이다. 작은 순간들이 모여 하나하나의 꽃망울을 터트린 저 꽃들 말이다. 반짝이는 짧은 점 같은 순간이 아니다. 늘 곁에 있었던 모든 일상의 선상(線上)들, 앞으로 이것이 나의 화양연화이다.
3. 문학 단상/ 박희곤(2)
1 책을 읽지 않는 세상에서 문학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어불성설인가? 특히 시를 읽지 않는 세상에 시인이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은 문학이 가지는 자기성찰과 자기연민에 빠져 지속적으로 자기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일반적으로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변화를 겪으며 발전해 왔다. 그것은 문학이 사회의 흐름 속에서 변화가 없었다거나 현실문제와 고립된 채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문학은 모더니즘을 견인하는데 가장 강력한 힘이었고 사회현상을 탐구하고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 한다는 것이다.
2 문학은 인간이 가진 문자라는 도구를 가지고 실제적인 기능을 다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특징인 디지털 문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문학이 가지는 역할을 충실히 해 주고 있다고 본다. 특히 문학은 사회문화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때로는 새로운 문화형성을 주도 하기도 했다. 이것은 현 우리사회에 인문학이 대두되고 인기가 있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문학자체의 흥미보다는 입시위주의 선호도에서 그 명맥을 유지 해 왔다. 입시시험을 위해서 시를 외우고 수필학습을 하는가 하면 문학경시대회에 나가기 위한 학습도 한 부문을 차지하기도 했다.
3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고 베이붐 세대가 은퇴한 지금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실천해 간다는 것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이다. 그것은 파크골프 라든지 사이클 동호회, 등산 동호회, 댄스크럽 동우회, 임영웅 펜클럽,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등 이다. 이른모임 중에서도 특히 시니어문학은 노년기에 다시 시작하는 한국사람들의 문학문화를 새롭게 창조하고 주도 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4 이것은 한국문학의 한 장르에서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문학수업을 듣고 글을 쓰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70세 전.후로 주축을 이루며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특별한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이 시대의 노년층들은 젊은 시절 호구지책으로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에서 보낸 후 늦깎이로 자기가 꿈꾸었던 희망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노년층이 인구수가 많다는 것도 있지만 뒤늦게 문학수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아닐수 없다.
5 그러나 대부분 문학을 한다는 것은 젊은 사람이나 시니어 할 것 없이 그들은 종이을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고 또는 컴퓨터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한없이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글을 쓰는 동안 자기 자신이 행복하고 치유 받는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즉 자기만족에 열광하는 것이다.
6 오히려 그보다 설득력 있는 공통점은 등단한 작가이던 등단하지 않은 작가이든 무엇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인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특히 수필은 스스로의 자기고백에서 자신 스스로 마음에 치유를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인해 글들을 습관적으로 시나 수필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7 필자는 시로 등단한지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수필로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쓰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필을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왜 시나 수필을 쓰려고 하십니까" 하는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시나 수필을 쓰는 일이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이 꿈이었다는 게 그들의 공통적인 대답이다. 나는 그냥 글 쓰지 마십시오. 글을 쓰고 사는 일은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냥 글을 좋아하고 그냥 좋은 독자가 되어 사시는 일이 훨씬 편합니다"라고 건방지게 말하곤 했다.
8 돌이켜보면 나는 등단하기 전 틈틈히 시 쓰고 전공서적을 편찬하고 주 업무인 병원 수술업무를 하는 일이 전혀 편안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퇴직하고 몇 년을 공부하며 어쩌다가 등단을 하게 되어서 좋았던 점은 문학책을 마음껏 읽고 보면서 살수 있다는 것 하고 지인들이 시인되었다고 좋아 해주는 정도이다.
9 수필가나 시인을 꿈꾸는 사람은 누구나 등단을 하면 여러 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시집을 내고 수필집을 내고 독자들의 알아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오랜 습작기간과 노력을 거쳐 등단을 하게 되지만 아주 특출하게 주목을 받고 유명한 신인이 아닌 이상 원고 청탁은 아예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지방에서는 아예 발표할 지면조차도 없다.
10 그래서 내 돈을 들여서 자비출판을 하자니 돈이 많이 들고 할 수 있는 일은 창작지원금을 신청해 보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게 예술인 패스가 있어야 하고 수상 경력이나 게재한 작품 실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또 전국 대부분의 예술인들이 신청하는 이 사업에 원고를 보내 채택이 되는 일은 나 같은 수필습작생이나 등단기간이 짧은 신인은 해당도 자격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찌 어찌하여 신춘문예나 문학지를 통해서 등단을 하는 수필가나 시인 중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수필가나 시인으로 문학인으로 대우 받으며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11 따라서 항상 자신의 어리석음과 우매함을 깨닫고 세상과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교류하고 바라보고 함께 사는 일, 그게 수필인으로 시인으로 문학인으로써 살아가는 힘이고 문학인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만족과 자기위로인 것이다. 나이가 들어 공원이나 지하철 광장에 모여 장기나 바둑을 두고 막걸리 한잔에 하루를 보내는 것과 무료급식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 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치매예방에 특효약이요,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늙어가기 위한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새벽녘 태양이 다시 동트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안도감과 살아있다는 것에 행복해 하며 오늘도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4. 마지막 여행 / 김혜순 (1)
1. 엄마의 고향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있는 하동이다.
2. 엄마가 여든이 넘어서부터 가끔씩 정신줄을 놓을 때가 있어서 나의 집으로 모시고 왔다. 자식들 교육하고 뒷바라지하느라 고생만 하신 엄마이다. 내가 힘들더라도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모셔온 것이다.
3.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딸인, 나를 잘 기억하고 있었으나 사위를 못 알아보시는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럴 때면 서운하지 않느냐고 남편에게 물었으나 남편은 “장모님이 아프셔서 그런 것인데 내가 이해를 해야지”라며 따뜻하게 말해주었고 그 말이 힘이 되어 끝까지 엄마를 집에서 모셨다.
4. 엄마는 퇴행성관절염을 오래 앓아서 다리 힘이 약해져 잘 걷지를 못하셨다. 그 후 악화되어 서지도 못하고 앉은 자세로 방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엄마를 종종 휠체어에 태워서 바깥으로 모시고 나갔고, 시장 구경이나 사람 구경을 시켜드렸다. 엄마는 휠체어에 의존하여 산책하면서도 기분 좋아하셨다.
5. 그러다 언젠가부터 바깥 구경나가기 싫어하시고 우울한 표정으로 방안에만 앉아 계실 때가 많아졌다. 베란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하늘 구름에게 혼자 읊조리다가 눈시울을 붉히곤 하셨다.
6. 하루는 나에게 “고향으로 가고 싶어 울 동생 보고 싶어”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가고 싶은 고향에 대한 향수가 얼마나 컸으면 식사를 잘 안 하시고 슬픈 표정을 지었을까 생각해 보니 안타까웠다. 그런 줄 모르고 엄마 앞에서 “요즘 내가 직장 다니느라 바쁘다, 피곤하다”라는 불평만 쏟아놓았으니 눈치 없는 나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고향에 데려다 달라는 말을 나한테 못하고 혼자 속앓이 하셨나 보다.
7. 다른 사람들은 가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고향이지만 다리가 불편한 엄마는 갈 꿈도 못 꾸고 얼마나 낙심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8. 따로 분가해 살고 있는 오빠에게 내가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안부를 먼저 전한 후에 “엄마의 소원을 이뤄 드리자. 누구보다도 오빠와 내가 앞장서서
엄마를 모시고 고향을 찾는다면 뜻이 깊을 것 같다”라는 의견을 내었다. 오빠는 나와 성씨가 다른 이복남매이지만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업무가 바빠 상사의 눈치가 보이는데도 오빠는 휴가를 내었고 나 또한 급히 휴가원을 직장에 제출하고 여행 준비에 임했다. 연로하신 엄마의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싶어서 여행을 서둘렀던 것이다.
9. 설렘 속에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병든 노모를 모시고 집을 떠나 2박 3일 여행을 한다는 것과 걷지 못하는 엄마의 다리가 되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체구가 큰 엄마를 업거나 차에 태울 때 올리고 내리는 동작을 반복해야 하므로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10. 드디어 자동차 타고 출발하는 날, 산들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단풍잎이 마치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것 같았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달리는 차 안에서 엄마는 길가의 감나무를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르셨다. 듣고 있던 우리 남매도 따라 부르다 보니 합창이 되었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 위에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울려 퍼지고 푸른 하늘이 웃어 주었다.
11. 두 시간여 만에 하동에 도착하니 엄마의 남동생인, 외삼촌이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두 분이 얼마나 기꺼워하시는지 옆에서 보는 우리도 눈시울이 덩달아 뜨거워졌다. 첫날은 일찍 자고 이튿날은 선산에 다녀온 후 고향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보기로 하였다. 휠체어에 탄 엄마를 나와 오빠가 번갈아 가면서 밀어드렸다. 엄마는 마을 어귀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을 어귀는 감나무만 덩그러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예전과는 다르게 변해버린 모습이었다. 엄마는 당황하셨고 놀라시는 표정이었다.
12. 몇 십 년 만에 고향땅을 밟아서인지 동네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져 낯설어 하셨다. 엄마가 어릴 적에 같이 뛰놀았던 소꿉친구, 숙자와 덕순이를 만나고 싶다 하셔서 친구들의 집을 찾았으나 그냥 돌아 와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두 분 다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13. 슬픔에 잠긴 엄마를 무슨 말로 위로해 드려야 할지를 몰랐다. 서로 말없이 정적만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하염없이 길 따라 걸어갔다. 고향 집과 돌담, 나무와 꽃, 골목 구석까지 눈에 보이는 고향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가슴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휠체어 바퀴 아래에서 “그래도 힘내세요.”라는 소리가 났다. 고향이 그리워 찾아온 사람을 품에 안아주는 섬진강! 강가에서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을 물들일 때 우리의 마음도 붉게 달아올랐다.
14. 마지막 날 점심에는 재첩 전문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하동 재첩 국과 재첩 회 무침, 재첩 전까지 골고루 시켜서 먹었다. 엄마가 맛있다고 하시며 즐겨 드시는 것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15.‘재첩’하면 오빠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던 날이 생각난다. 그날에 오빠를 위해 재첩 국을 엄마가 직접 끓여주셨는데 오빠는 남김없이 다 먹었다. 선하게 웃는 얼굴이 엄마를 닮았고 걷는 걸음조차 엄마 모습을 닮아있었다. 엄마가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후에도 오빠는 명절엔 빠짐없이 찾아왔고 우리 남매는 친하게 지냈다. 오빠가 생겨 신이 난 나는 엄마에게 “오빠를 선물로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사이좋게 지내는 우리 남매 모습을 엄마가 보시고 기뻐하셨다.
16. 다리가 불편한 노모를 모시고 고향여행한 것도 오빠가 없었으면 가능했을까? 운전해 주고 엄마를 부축하며 업어 주었던 사람이 친아들이었기에 엄마 입장으로는 사위에게 업히는 것보다 더 편하게 여겨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내 뜻을 알고 선뜻 달려와서 동행해 주었던 오빠가 고맙다. 앞으로도 우리 남매는 자주 연락하고 배려하며 살아갈 것이다. 우애 있고 정답게 지내는 모습이 엄마에게 기쁨을 드리는 우리 남매의 선물이니까!
17. 고향에서 흙냄새를 맡으시고 가슴에 새겼던 고향 집은 지워지지 않고 엄마에게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18. 하동을 다녀온 몇 년 뒤, 어느 겨울에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우리 남매가 엄마를 모시고 다녀왔던 고향여행은 엄마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5. 경계(境界)를 지으며 /이선옥 (1)
세상은 숱한 경계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이고, 집의 담이나 울타리 등은 물리적인 경계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자연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경계가 있고, 사람과 동식물도 경계를 구분지어 집단으로 서식하지 않는가. 경계를 지키지 않으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생존이 위협 받는다.
꽃들은 때가 되어야 피고 또 질 때를 안다. 봄이면 언 땅을 뚫고 나온 복수초, 노루귀, 할미꽃 등이 연약한 싹을 틔우고 여름엔 패랭이꽃, 붓꽃, 접시꽃 등이 땡볕을 즐기며 가을이면 층꽃, 구절초, 해국 같은 꽃들이 해맑게 웃으며 계절의 질서를 지킨다. 지금은 맺어 놓은 씨앗을 지키려고 접시꽃 대궁이가 미라처럼 버티고 선 모습이 처연하다.
푸름을 자랑하던 나무들도 겨울이면 옷을 훌훌 벗고 절제 속에서 생명을 부지한다. 동물인들 계절을 거스르며 생존할 수 있을까. 철새들이 생존을 위해 수만리를 이동하고, 야생동물들이 그들의 영역을 지키려는 생존경쟁은 처절하지 않던가. 계절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일 것이다.
동식물들도 잘 지키는 경계를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이 지키지 않아 비난 받는 일이 자주 있다. 십여 년 전, 이웃집 아저씨가 자기 땅을 한 뼘이라도 더 넓히려고 마을길을 침범하여 담을 쌓은 일이 있었다. 큰 돌로 담을 짜고 비싼 나무도 심어 근사한 조경으로 폼나게 살았다. 유독 그 집 앞만 차량 교행이 곤란한 데도 태무심이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불편한 마을 사람들의 항의가 계속되었지만 십 년 넘게 버티었다. 뒷집 신축 공사가 시작되어 대형 차량의 통행이 어렵게 되자 급기야는 담을 허물었다. 담을 허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는 분해서 식식거렸다. 몇 평 더 넓은 집에서 살려고 양심을 판 그에게는 물리적인 경계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경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세상을 원만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비단 그 아저씨만의 일일까. 공기업 직원이나 국회의원들이 업무상 비밀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부동산을 늘리려다 된서리를 맞았다. 눈에 보이는 경계를 늘리려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덕의 경계를 허무는 우를 범한 것이다. 가장 저질스런 사례는 지위를 이용하여 성을 노리개로 삼는 일일지도 모른다. 상사의 명을 거역하지 못해서 억지웃음을 짓던 여인들이 죽음으로 선을 그어 놓고 떠났다. 가해자를 단죄시키고 피해자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법이란 제도로 경계를 잘 만드는 것 밖에 도리가 없으니 안타깝다.
최근 시골에 집을 장만했다. 맑은 공기와 바람을 마시며 하늘의 달과 별을 실컷 보고, 소쩍새와 고라니 우는 소리도 공짜로 듣고 싶어서였다. 그 대가로 치러야 하는 노동의 강도는 엄청났다. 그러나 채소를 가꾸는 일과 꽃을 보는 즐거움은 호미질과 삽질로 손발이 찧기고 손마디가 굵어지다 못해 밤마다 아리는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기에 텃밭을 가꾸고 정원을 꾸미는데 열중하는지도 모른다.
전원에 집을 짓고 난 뒤 정원이 허전할 즈음 유년의 고향산천에 지천으로 널렸던 꽃 생각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절터골 제비원추리, 샘넘어골 술패랭이, 더덕골 벌개미취, 불배기골 층꽃 등이 피어 있던 곳으로 한달음에 내달렸다.
고향 동산리(東山里)를 떠나온 지 사십 년이 지났지만, 지대가 높고 교통이 불편해서인지 개발의 바람이 비켜 갔다.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산, 들, 물이 옛 그대로이니 꽃들도 그 자리에서 웃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어린 시절 소 먹이러 다니던 반들반들하던 길은 푸새와 다복솔이 우거져 더 이상 길이 아니었다. 소가 풀을 뜯던 초원도 이름 모를 풀과 나무가 내 키를 넘겨 저절로 접근 금지구역이 되었다. 그 속에 설령 예쁜 꽃들이 웃고 있다 한들 보일 리 없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알고 지내던 사람도 꽃들도 찾을 수 없어 헛헛함을 금할 길 없었다. 살피가 사라진 들판에서 겨우 벌개미취 몇 포기를 얻어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어린 시절 고향산천에 제 멋대로 피던 야생화를 화원에서 구해 집으로 불러들였다. 정원에는 꽃에 대한 나의 사랑과 그들의 번식력이 죽이 맞아 사철 야생화가 피고 지는 소리로 난리법석이다. 야생화의 번식력이 그리 강한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인지 아닌지 구분을 못하고, 소나무 밑에도 돌 틈에도 울타리에도 마당에도 발을 뻗치는가 하면 심지어는 죽담에까지 기어올라 앉고 서고 누워서 기고만장을 부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화단에선 싸움 소리가 높아졌다. 제 때에 경계를 지어 주지 않아서 난 사단이다.
집안은 영락없는 야생의 들판 같이 보여서 강돌을 주워다 경계를 짓고 종류별로 꽃을 모아 심었다. 정원은 작고 꽃은 백여 가지가 넘으니 백 개의 꽃밭을 만들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잔디밭을 헐고 꽃밭을 최대한 넓혔다. 그래도 쉴 곳을 얻지 못해 서러워하는 꽃들은 붉은 고무통에 심었다. 그 후 꽃들은 색깔도 곱고 미소도 한층 예뻐졌다. 그런데 요즘 다시 나쁜 습성을 드러내고 있다. 앉을 자리 내주면 누울 자리 탐한다더니 남의 밭으로 쓰윽 발을 내밀거나 월장하는 놈, 남의 목을 감아쥐는 놈 등 반칙하는 행동들이 강도나 도둑 뺨칠 정도다. 언제 씨를 흘렸는지 싹을 틔운 놈들은 남의 집에서 터줏대감 행세를 하며 원주인을 구석대기로 몰아넣고 있다.
꽃들의 다툼을 보면서 부당하게 당하고도 항변조차 못한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며 살진 않았을까 반성해 본다. 다른 경계는 엄격하게 존중하는 내가 스스로 구역을 짓지 못하는 꽃들의 섞임을 찬미하며 그들의 싸움을 은근히 즐기지나 않았는지도 자문해 본다.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경계가 있다. 하물며 모양과 색깔이 분명한 꽃의 세계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요즘은 나라에도 정치인들이 서로 다투어 걱정이다. 자기들이 불법이라고 응징하던 일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일을 하고는 억울하다고 난리를 치는 세태를 보면서 도덕이나 양심의 경계가 아예 다 무너진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 배운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자중할 줄도 알 것 같은데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법을 허투루 보았다간 내가 허문 경계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다치고, 남이 경계를 허문 탓에 내가 희생될 수 있다. 자신이 경계를 허물어 자신이 당하고 마는 아이러니가 남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하리라.
접시꽃 대궁이가 쓰러지기 직전이다. 남의 영역에 씨를 쏟지 않으려 저렇게 안간힘을 쓰는 줄 미처 몰랐다. 꽃들이 남의 집을 기웃거리며 소란을 피우기 전에 조금만 일찍 관심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관리는 하지 않으면서 꽃만 탓하다니, 내년 봄엔 제 각각의 자리에 꽃씨를 뿌리고, 색깔별로 모아 제 향기를 맘껏 뿜어내도록 하련다.
6. 나에게 주는 선물/ 권정남(1)
1. 재잘대는 새소리에 눈을 뜬다. 대나무밭에서 딱새와 박새가 아침잠을 깨운다. 익히 듣던 소리인데 더 청아하게 들리는 건 순전히 기분 탓이다.
2. 크림색 벽지에 흰색 커튼이 산뜻하다. 커튼을 젖히면 창문 너머로 뒤꼍의 대밭이 보인다. 그 아래 빈터에 보라색의 나팔꽃, 희고 앙증맞은 정구지꽃, 닭의장풀이 파랗게 피어있다. 창문 옆에 매달린 수련은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준 작품이다. 검은색 배경에 초록빛 둥근 잎 위의 하얀꽃 자태가 고고하다. 또 지인의 전시회에서 구입한 백일홍 그림 석 점도 다른 크기로 높낮이를 달리해 걸려 있다. 노랗고 붉은 꽃송이와 빛바랜 다갈색의 마른꽃잎이 누르스름한 이파리와 어우러져있다. 아련한 향수를 불러오는 소품이 있는 나만의 갤러리이다.
3. 난 나의 모든 인내심을 다해서 기다릴거야. 너와 함께 하는 걸 기대하게 되니까. 〈Consequence of Love〉란 곡이다.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Gregory Porter의 감미로운 목소리다. 내가 아침마다 새 소리 다음으로 듣는 음악이다. 난 예전부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좋았다.
4. 나의 방으로 들어설 때면 흐뭇해진다. 화장대 겸 책상은 남편이, 흙 침대와 방 분위기에 어울리는 의자는 아들이 사주었다. 텔레비전까지 놓였으니 이제 완벽한 나의 공간이다. 나는 나에게 침구세트를 선물했다. 부드러운 촉감에 가장자리의 페이즐리 무늬가 그려진 푸른색 이불과, 퀼팅자수가 촘촘한 패드도 구매했다. 결혼 전 혼수용품을 마련하던 그때처럼 설랬다. `혼수용이면 예쁘게 포장해 드릴까요?`라는 직원의 말에 속웃음을 웃었다. 나는 정말 그때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다.
5. 내가 이렇게 아침마다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된 건 나의 방을 갖고 나서부터이다. 남편과 한 방을 쓸 때 못마땅한 점이 많았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관심 분야가 달라서 나는 감질났다. 남편은 킥복싱, 낚시, ‘나는 자연인이다’, 일본 요리를 소개하며 맛보는 방송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란 프로그램 등 본인의 취향만 고집했다. 자다가 화장실 다녀온 뒤에는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곤 했다. 나는 거기서 나오는 빛과 움직임에 신경이 쓰여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날도 남편은 영화 채널에서 서부영화를 밤늦도록 보고 있었다. 나는 잠을 청해야 했는데 텔레비전 화면 조명이 방해가 되었다. `음소거 상태로 자막만 보는데 지장이 없지 않느냐`는 남편과 실랑이를 했다. 더 이상 같이 잘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섰다. 수면의 패턴이 달라서 따로 자는 것을 고심했는데 결정적으로 그 시기가 당겨졌다. 그때 아래채 빈 방이 생각났다.
6. 큰 채의 안방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채의 방으로 옮겨갔다. 드나드는 문 이외에는 책장과 옷장이 빼곡히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컴퓨터나 영화를 볼 때 쓰던 방이다. 사정은 여의찮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매트를 깔 때는 비좁아서 삐뚜름하게 펴야 할 정도로 군색스러웠다.
7. 몇 달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뚝 떨어져 누리는 평온함에 서로 익숙해져갔다. 시간에 거리낌 없이 영화나 음악, 책을 읽다 잠들 수 있어서 불편한 생활을 상쇄시킬 만큼의 해방감을 느꼈다.
8. 어느 날 산행 모임에 가져갈 고구마를 구웠는데 가방에 못다 넣어 남겨두었다. 다녀와서 보니 빈 봉지와 잔 부스러기가 구석에 떨어져있었다. 맙소사! 밤에 누워있으면 쥐 달리는 소리가 우당탕거리더라니 사라진 고구마는 놈들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쥐를 잡기 위해 쥐끈끈이를 놓았다. 군고구마 먹이로 유인하기를 여러 날 뒤에 놈이 잡혔다. 그에 대한 노이로제를 잊어갈 때쯤 방 한가운데 나타난 꼬물거리는 갓 난 새끼 쥐에 경악했다. 나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아들이 와서 치워주었다. 아들은 차마 불쌍해서 죽이지 않고 풀숲에 풀어 주었다고 했다.
9. 또 한 번은 손등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는데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지네가 자주 출몰했는데 물린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큰 지네가 대자리 밑에서 기어 나와 기함을 했다. 병원에 가서 해독주사를 맞고 나서야 안심했다. 몇 차례의 그런 일이 생긴 뒤 궁리 끝에 해충 퇴치기를 설치하고 나서 잠잠해졌다.
10.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한옥인 큰채와 달리 아래채는 시멘트 블록에 단열재도 쓰지않고 슬레이트를 얹어 지은 집이다. 여름의 볕과 겨울의 바람 만 막아줄 정도였다. 안이나 밖의 기온차가 별반 다르지 않아 여름과 겨울을 나기에는 여간한 고역이 아닐 수없었다. 열악한 환경은 삶의 질을 끌어내려 침울해졌다.
11. 기분 전환을 위해 변화가 필요했다. 남편과 같이 쓰던 큰 채의 빈방으로 이사를 했다. 고육지책으로 각방을 강행할 당시엔 어머님의 거처였는데 그 후 돌아가시고 나서 비어있었다. 가구를 나르고 액자를 걸기 위해 꼬꼬핀과 레일 액자걸이를 설치했다. 내방 꾸미기를 수월하게 받아들인 남편이 고마웠다.
12. 새로 집을 짓자고 할 때마다 남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속내는 조부모와 부모 형제의 추억과 손때가 묻은 이곳을 허물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매일 새집으로 이사 가는 꿈을 꾼다. 내가 나에게 줄 다음 선물을 생각하면서.
7. 층간소음/김규용1
1) 얼마 전 지하 2층 주차장에 주차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 11층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들어섰다. 아이는 12층 버튼을 누르고는 까만 눈동자를 내게로 향했다. 아이는 주저 없이 11층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렇다 답을 하자 대뜸 하는 말이 이러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갑작스레 영문도 모르고 “아니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2) 지금껏 이 아파트에 살면서 한 번도 시끄럽다고 항의를 한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마주쳐 생각지도 못한 자기의 잘못을 그것도 어린아이가 사과하여 참으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집에 들어 소파에 앉아서도 그 여운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혹여, 언제 술기운에 나도 모르게 싫은 내색을 했는지 기억을 돌려 보았지만, 생각이 나질 않았다.
3) 저녁을 먹으며 아내에게 조금 전 상황을 말했다. 아내는 엷은 웃음을 띠며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순간 우리들의 대화는 쌍둥이 아이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을 더듬게 되었다.
4)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을 때 경영부실로 인해 거래대금을 정리하지 못해, 살고 있던 아파트를 매매하여 정리하고 살던 곳보다 작은 평수 아파트를 월세로 얻어 옮기게 되었다. 아이들은 이사 간다는 단순한 이유로 들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아파트 꼭대기여서 6층 계단을 올라가게 해야 하는 아픈 내 마음을 전혀 알 수 없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5) 이사하고 한 달여가 지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아래층에는 70세 전후로 보이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낮이고 밤이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꼴을 도무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수시로 초인종을 누르며 큰소리를 내었고 특히나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간을 맞춰 기다렸다가 혼을 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더 해괴한 일은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쾅쾅 뜀을 뛰는 때도 있었다.
6) 우리는 정말 죄송합니다. 주의시키겠습니다. 라며 사정을 했다. 할아버지도 손자 손녀가 있지 않습니까? 라며 이해도 구했지만, 막무가내인 할아버지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7)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무서워 학교 가기를 두려워했다. 이사 하기 전 아파트는 1층이어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떠들었어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었다. 친구들도 곧잘 데리고 와 즐거운 시간도 보내곤 했었다. 그랬던 아이들에게 나는 너무 힘없는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8) 더는 이 아파트에 살다가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움 들었다. 우리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하여 어렵게 이사자금을 마련해 그 아파트를 벗어날 수 있었다.
9) 그 이후 우리는 위층에서 쿵쿵 시끄럽게 뛰어도 아무런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살았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10) 요즘 TV를 켜면 층간소음으로 인한 여러 사건을 접한다. 싸움이 일어나고 폭력이 난무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벌어진다. 아래층에서 위층에 복수하려 여러 가지 장비를 만든다고도 한다. 그와 반대로 위층에 사는 어린아이들이 먼저 손편지를 써서 아래층 어른들에게 미안함을 전해 아래층과 위층이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지낸다는 사연도 있기도 하지만
10) 다시 눈앞에 12층 까만 눈동자 여자아이 모습이 떠오른다. 스스럼없이 다가와 미안하다고 말했던 아이, 우리도 쌍둥이 아이들 4학년 때 아래층에 먼저 내려가 미안함을 전하고 이해를 구했더라면 그때 상황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니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11) 12층에는 까만 눈동자 여자아이와 두 살 작은 남자아이가 있다. 저녁이고 아침이고 뛰어놀며 자란다. 그 아이들을 마주치는 일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다. 뛴다고, 시끄럽다고 아무런 말 안 할 테니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먼 후일, 층간소음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꿈을 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