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노을 시낭송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문학 게시판 스크랩 시가 선이 되고 선이 시가 되다/ 이도흠
사피엔스 추천 1 조회 22 12.01.17 16: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가 선이 되고 선이 시가 되다 / 이도흠
이도흠 한양대 교수
이도흠 한양대 교수
1. 시가 선이 되는 길

시는 상투성에 대한 반역이다
시는 상투성에 대한 반역이다. 길섶에 홀로 핀 들국화를 외롭다고 노래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여인으로부터 구애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금붕어 없는 어항이요, 팥 없는 찐빵이요” 식으로 쓰여 있는데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 여인을 만나러 달려가겠는가? 정반대일 것이다. 이 편지가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들국화를 ‘화엄’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한 송이 들국화 속에서 중중무진의 세계를 보기도 하고, 꽃 술 안에 우주 삼라만상을 담고 있음을 새삼 인식하기도 하고, 한 송이 꽃이 지나는 구름, 뿌리에 깃들여 사는 박테리아에서 지구 반대편의 미물에 이르기까지 온 누리의 온 것들과 깊은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동자승 하나
    배꼽 환히 드러내놓고
    알몸으로 와선 중이다

    따가운 햇볕도 배고픔도
    다 눌러 베고서

나병춘의 시 〈호박〉의 전문이다. 호박으로 못난 여자나 마음씨 좋은 농부를 노래했다면 이 시도 상투적인 진술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호박에서 동자승을 본다. 여름 햇볕에 알몸을 드러낸 아직 푸른 기가 남아 있는 호박은 와선 중인 동자승이다. 다른 과일이나 채소처럼 특별히 화려한 색상을 띠거나 별스런 영양이나 맛을 간직하여, 사람을 부르는 것도, 돈을 챙기는 것도, 갈채와 환호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기에, 그저 아무렇게나 밭둑에 널브러져 있다가 자신을 소멸시켜 죽이 되고 나물이 되어 조용히 사람들의 살이 되기에 그는 스님 중에서도 천진무구한 동자승이다. 남의 시선도, 남의 평가도 개의치 않기에 배꼽마저 드러내놓고 와선 중이다.

여름 땡볕이 몹시 따가울 터인데 이를 오히려 자신을 익게 하는 수행으로 여긴다. 허기도 지련만 이 또한 체념한 채 물욕에서 떠나 선정을 한다. 그리하여 충분히 익은 몸을 아낌없이 남에게 바치니 호박이야말로 보살이다. 그리 고행을 통하여 자신을 완성하여 남을 완성시키려 하니 호박은 바로 부처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게송이 있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간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으리.”

시는 창작의 장에서만 선과 통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읽기의 장에서도 선과 통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풀〉 전문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등에 나타난 김수영의 참여 시론과 저항적 성격, 60년대의 한국 상황이라는 사회적 맥락과 대비하여 역사주의적으로 해독하면 풀은 ‘민중’과 유사성을 갖는다. 풀이 민중이라면 바람은 지배층을 의미한다. 자연히 눕는 것은 시련을 받고 억압당하는 것을, 일어나는 것은 이 시련과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실천을 하는 것으로, 우는 것은 불행을, 웃는 것은 이를 극복한 것으로 의미를 전이한다. “날이 흐리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민중에게 어려운 상황임”을 가리킨다.

이 시 텍스트에서 현실은 흐린 날이며 비를 몰아와 풀을 눕히고 울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조국 근대화의 기치 속에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억압당하고 소외당하는 민중의 실상을 풀과 바람과 비와 하늘의 비유를 통하여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이 시가 끝났다면 이 시는 KAPF 계열의 시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는 형식에서 민요조의 동시의 율격을 취하고 있다. 반복의 경쾌한 리듬 속에 현재형의 서술어를 취하여 시가 걷는 발길은 가볍지만 그에 담긴 무게는 만만치 않은 느낌을 준다. 내용에서는 현실을 반영한 것을 넘어서고 있다. 거울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프리즘은 빛이란 현실을 굴절시켜 무지개―작품―로 만든다. 그러기에 좋은 작품일수록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서서 굴절시킨다. 이 시에서 굴절상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이다.

이 텍스트는 이 구절을 통하여 현실을 굴절시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당시 정권의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와 정책의 위력을 인정하면서도 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총칼을 가진 그들보다 더욱 건강하고 그래서 언제인가 그들을 누르고 일어서서 새로운 세상을 맞을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라고 현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이 비전은 현실과 유리된 환상이 아니라 구체성을 갖는 비전이다. 이 시는 60년대에 군사독재자들에 의해 강요된 조국 근대화의 기치 속에서 자유를 억압당한 민중들이 지금 현재의 삶은 곤고하지만 그들의 건강성과 생명력, 강인함을 바탕으로 언제인가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란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뿐일까?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시인이 6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임을 상기하며 이 텍스트에서 존재론적 가치를 지향하여 존재론적으로 해독한다. 이 시를 존재론적으로 해독할 때 ‘풀’은 ‘여러 시련과 장애를 만나 흔들리고 방황하는 인간존재이거나 작가 자신’이다. 자연히 ‘비’는 ‘인간존재에게 고통을 주는 외적 조건이나 고통, 죽음, 불안’ 등이다. ‘바람’은 이를 야기하는 ‘세계(의 횡포)’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풀과 같이 나약하면서도 실존을 향하여 지난한 몸부림을 치는 인간 존재를 풀을 통하여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눕고 우는 것은 존재의 숙명론적 불안이나 고통이다. 이 속에서도 인간 존재는 강인한 의지를 갖고 실존을 모색한다.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해독하면 ‘풀’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 남근에게 갖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여성’이다. ‘비’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 또는 남근의 폭력과 야만’을, ‘동풍’은 ‘이를 야기하는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뜻한다. 이럴 때 이 노래는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남성들의 폭력과 야만으로 갖은 시련을 당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강함, 자궁의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지향적이며 생산적인 힘으로 일어나 웃을―새로운 세계를 창조할―것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해독하면 ‘풀’은 ‘제국주의 세력에게 수탈과 억압을 당하고 있는 제3세계(민중)’이다. ‘비’는 ‘제3세계에 가해지는 제국주의의 수탈과 억압’을, ‘동풍’은 ‘이를 야기하는 제국주의(세력)’를 뜻한다. 이럴 때 이 노래는 제3세계 민중들이 제국주의 중심적인 세계 체제 속에서 제국주의의 수탈과 억압으로 갖은 시련을 당하고 있지만 제3세계의 건강함과 생산적인 힘으로 일어나 웃을―새로운 세계를 창조할―것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근대적 세계관을 반대하고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 또는 불교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독자들은 근대의 패러다임인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패러다임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이 시를 능동 대 수동, 울음 대 웃음, 누움 대 일어남의 대립을 ‘더 큰 누움’으로 아우르는 것으로 해독한다. 첫 연이 바람에 휘둘리는 수동적 존재로서 풀을 말하고 있다면 둘째 연에서는 바람보다 더 능동적인 존재로서 풀을 노래하고 있다. 능동과 수동, 강함과 약함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면 마지막 구에선 아예 풀뿌리까지 눕고 있다.

이 누움은 큰 누움이며, 큰 누움으로 인하여 모든 대립은 해소되고 화쟁(和諍)을 이루게 된다. 세계는 원래 대립이 없는데 속인이 무명에 휩싸여 대립을 설정하여 누움과 일어남을 분별하고 이것을 울음과 웃음에도 관련시킨다. 그러나 일심(一心)의 경지에서 보면 차별은 본시 없는 것이니 대립을 해소하고 하나로 돌아간다. 세계에 상존하는 모든 대립을 넘어서서 원융의 세계를 지향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좋은 시일수록 낡은 세계를 깨고 전혀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좋은 평론가일수록 낡은 코드를 깨고 남들이 읽지 못하는 의미들을 밝혀낸다. 낯익은 호박에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평범한 호박에서 부처를 보듯, 대지를 깨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는 것, ‘풀’에서 ‘민중’이나 ‘인간 존재’, ‘여성’을 보는 것을 넘어서서 화쟁의 세계를 읽어내는 것, 기존의 틀을 깨고 전혀 새로운 세계에 다다르는 것, 늘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전혀 낯설게 만드는 것, 기호학적으로 말하여 낡은 코드(code)의 틀을 깨고 새로운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 ‘기대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미의 세계에 노니는 황홀감에 떨게 하는 것―그것이 바로 시의 세계다. 이런 면에서 시는 선과 통한다.

은유,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
시가 선이 될 수 있는 것은 시가 은유를 통하여 사물의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세계에 다가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앞의 사물을 보며 무수한 연상을 떠올린다. 카오스에도 인간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질서가 내재하듯, 이 무수히 떠오르는 의미와 연상에도 질서가 있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이를 표명하는 방식은 ‘유사성(likeness or similarity)’을 근거로 하는 은유(metaphor)와 ‘인접성(contiguity)’을 바탕으로 하는 환유(metonymy)로 나누어진다.

〈일포스티노(Il Postino)〉라는 영화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칠레의 세계적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칠레 정부의 박해를 피해 이태리의 작은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대시인에게 전세계로부터 엄청난 우편물이 밀려오자 우체국장은 어부의 아들인 마리오 루오폴로를 임시 우체부로 고용한다. 여자들의 관심을 끌 궁리만 하던 이 어촌 청년은 어느 날 시인으로 변한다. 청년은 시를 통하여 마침내 꿈―이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 루소의 마음을 사로잡아 아내로 맞는 일―을 이룬다. 어느덧 많은 노동자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는 유명한 시인이 된다.

이 무지한 청년을 시인으로 변화시킨 것은 과연 무엇일까? 청년은 어느 날 편지에서 ‘메타포’란 낱말을 발견하고 20세기 최고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네루다에게 메타포(은유)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대시인으로부터 이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후 청년은 은유의 원리를 깨우치고 무슨 말이든 메타포로 전환시킨다. 자연 청년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시가 된다.

은유는 사물 사이의 유사성을 근거로 세계를 유추(類推, analogy)한 데서 기인하는 세계의 의미화다. 원래 이것은 그리스 어의 Metajora (metaphora)에서 기원한 것으로 ‘전이하다(transfer)’,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다(a carrying from one place to another)’의 뜻을 지닌 것이다. 달을 예로 들면, 둥그런 보름달에서 둥그런 모습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엄마 얼굴, 눈동자, 호수’ 등의 낱말이 떠오르고 또 달은 이런 의미로 활용된다. 그리하여 “초승달이 하늘을 지나간다.”라고 하면 일상의 언술이지만 ‘초승달’이 ‘쪽배’와 모양이 유사한 것을 바탕으로 은유의 유추를 하여 “쪽배가 은하수를 건너네.”라고 하면 시적 진술이 된다.

‘별’을 ‘천체의 일종’이라 하지 않고 ‘조국 독립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은유이다. 은유는 대개 지시적 의미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를 표명하는 것이자 유사성에 근거하여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호박-동자승”, “풀-화엄”에서 보듯, 일단 은유는 기존의 세계를 파괴한다. 세계에 대한 현재의 위상을 파괴하고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언어기호와 관련시켜 버린다.

읽는 주체는 구조적 사유를 통하여 둘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 또는 연상해 낸다. 달에서 ‘화엄’을 떠올리고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이나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은유를 통하여 달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은유는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이다. 이런 면에서 은유는 선과 통한다.

그러나 은유는 고유한 중심적인 말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 달이 높이 떠서 산과 들을 비추는 짓[用]을 하는 것을 보고 달을 ‘관음보살’로 노래한다. 관음보살의 자비의 빛이 높은 귀족과 낮은 서민에게 고루 뿌려지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로 숨어 있는 달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허구이다. ‘달’의 의미가 ‘관음보살’로 되는 순간 이것은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처럼 찰나의 순간에 상투적 의미로 전락한다. 그리고 ‘관음보살’이라는 의미에 매여 있으면 달의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은유로 이루어진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에 드러난 의미(외연의미, denotation)와 숨어 있는 의미(내포의미, connotation)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이 괴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생성하도록 하여 텍스트를 살아 있게, 해독자를 자유로운 주체이게끔 하는 동시에 정작 실체로부터 분리시킨다.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새롭고 독창적인 은유라 할지라도 세계의 일부분만 드러낼 뿐이다. 세계 자체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의미는 차이에 의하여 드러나고 이 또한 세계의 부분일 뿐이며 세계를 감추는 거짓 기호이다. 은유는 세계를 드러내는 만큼 감추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현전하는 것처럼 지시한다. 그래서 ‘진여의 절대적 의미’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세계의 실체라고 파악한 것 또한 상투적인 은유에 비교해서 실체에 좀더 가까이 간 것일 뿐이지 이 또한 세계의 부분, 또는 허위일 뿐이다.

원효의 말대로 어떻게 말로 할지 알지 못하여 그렇게 불렀을 따름이다. 달을 쪽배(相)로 보든, 부활(體)로 읽든, 중개자(用)로 해독하든, 이는 모두 달이란 세계를 지시하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며 이것 모두 인간 주체가 마음[一心] 속에서 해석한 결과이다. 따라서 은유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을 뿐더러 이것이 세계의 실체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해서 전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다. 은유를 통하여 낡은 의미를 깨고 끊임없이 근원을 찾아가고 이것이 실체에 이르는 것 같지만 실은 허상인 것, 집착을 넘어 깨닫고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되는 점에서 은유는 선의 길이다.

2. 선이 시가 되는 길

사랑한다 말하면 사랑이 아니다
교(敎)가 부처님 말씀이라면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기에 교는 언어적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고 선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이를 초월한 체험으로 부처의 마음에 이르고자 한다. 교가 이것과 저것, 알고 모름의 분별을 따져 이치를 헤아린다면, 선은 분별하는 마음을 떠나 곧바로 마음 자체를 가리킨다. 교가 경전을 읽고 설법을 하여 부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선은 마음과 마음을 통해 깨달아 바로 부처가 되고자 한다.

이렇듯 선은 가르침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부처를 드러내는 일이요, 구속이 아니라 자유이다. 때문에 이론으로 따져들거나 논리로 입증하거나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답을 제시하는 스승이 있다면 그대의 적”이라고 하는 것이 선이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일체의 만법은 모두 문자와 언어인데, 문자와 언어의 相은 곧 뜻이 되지 않으므로 如實한 뜻은 문자와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이거늘,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말씀하십니까? ……일체 만법이라는 것은 세간의 말로 세운 법이다. 진여의 법은 모두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문자와 언어로는 곧 뜻을 나타낼 수 없다. 모든 법의 진실한 뜻은 일체의 언설을 끊은 것이니, 이제 부처님의 설법이 만약 문자와 언어만이라면 곧 진실한 뜻이 없을 것이요, 만약 진실한 뜻이 있다면 마땅히 문자와 언어가 아닐 것이니, 이런 까닭에 ‘어떻게 설법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元曉, 《金剛三昧經論》)

석가모니께서는 왜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을 안 하시고 꽃만 들었다 놓았다 하셨는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못한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100이라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 장문의 연서를 쓴다 해도 거기에 표현된 사랑은 7, 80밖에 되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답답하고 사랑은 저 멀리 달아난 느낌일 것이다. 이처럼 언어로는 실체에 이를 수 없다.

무지개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가지 색인가? 실제의 색은 무한하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분별하여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유럽 사람들도 근세 초까지 무지개를 네 가지나 다섯 가지로 보았다.

주황이란 언어가 없으니 빨강과 주황을 같이 본 것이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면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은 진실일까? 빨강과 주황을 더 자세하게 나누어 보는 자에게 빨강 다음의 색을 주황이라 하는 것은 허위이다. 범주를 세분하여 빨강을 ‘진한 빨강, 아주 진한 빨강, 극도로 진한 빨강’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이처럼 세계는 무한대이고 카오스인데 사람들이 그러면 이해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각자 문화적 맥락과 사고의 구조에 따라 범주를 나누어 세계를 코스모스로 바꾸었을 뿐이다.

빨강 색을 천가지, 만 가지로 나눈다 해도 실제의 빨강 색에 이를 수 없다. 범주를 나누고 또 나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범주일 뿐 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 범주에 따라 이름을 부여하니, 언어가 아무리 정교해지고 분화가 일어나도 세계 그 자체에 이를 수 없다. 그러니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늘 도가 아니며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요, 말로 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진여실체(眞如實體)가 아닌 것이다. 이성과 언어기호로는 궁극적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언어기호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인간은 언어기호에 의하여 세계를 들여다보고 표상하며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 언어기호란 비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원효의 표현대로 자성(自性)이 없이 한갓 가명에 지나지 않아 참 지혜와는 떨어져 있다. 진리란 우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환상이다. 그러니 진리의 본체란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필경공(畢竟空)에 대한 인식이 진리의 본체를 드러내는 바이다. 이처럼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하다.

지붕에 오른 뒤에는 사다리를 버려라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불가언설이고 불가사의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에 이를 것인가. 답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처럼 언어기호를 넘어서는 선정(禪定) 등의 방편을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기호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다다를 수 없다고 해서 선정으로만 이에 이르려고 한다면 수많은 언어기호로 이루어진 불경은 무엇이고 언어기호의 고정성과 동일성에 구속되어 있는 중생은 어찌 구제받을 것인가? 석가모니처럼, 내가 진정 깨달은 것을 말로 하면 왜곡이라는 생각에 강의실에 들어가서 서너 시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하늘만 쳐다보다 나온다면 학생들은 “선생님! 오늘 깨달음이 많았습니다.”라고 인사할 것인가? 한, 두 학생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나의 의무는 강의실에 모인 모든 학생들을 깨우치게 하는 데 있다. 언어 저 너머에 진리가 있음을 알고도 매일 목청이 아프도록 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언절려인 줄 알면서도 인간이 진리를 전달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는데 ‘불립(不立)’ 양 글자 역시 문자이다.”라고 지적한 사람은 《단경(壇經)》을 지은 혜능(惠能)이다.

그러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지붕(세계의 실체)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언어)를 던져 버려야 한다.”라 했다. 장자(莊子)도 《장자》 〈외물(外物)〉편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금강경(金剛經)》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에서도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라는 뜻으로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이 아닌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가(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라고 말한 것도 같은 뜻이다.

여러 성인과 현인들이 궁극적 진리가 언어 저 너머(지붕, 언덕 저 편, 물고기)에 있으면서도 인간이 이를 전달하는 것은 언어(사다리, 뗏목, 통발)밖에 없음을, 대신 언어를 방편으로 이용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른 다음에는 언어를 버리고 세계의 실체를 대할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언어가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방편이 되지만, 모든 언어가 그런 것은 아니다.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이 체험으로 보여 준다 하더라도 제자는 일단 그것을 언어로 풀어 언어의 테두리 속에서 고민을 한 다음에서야 언어의 상(相)을 넘어서서 견성체험을 한다. 간화선(看話禪)은 언어로 된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다. 그럼 언어기호가 진여실체(眞如實體)에 대한 왜곡인데 언어를 통하여 이를 드러내고 전달해야 하는 역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떤 뗏목을 써야 우리는 저 언덕 너머에 이를 수 있을까?

‘義語非文’이라는 것은 말이 마땅히 진실한 뜻에 맞아 단지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文語非義’라는 것은 말이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이기에 진실한 뜻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은 곧 뜻의 말이며, 뜻이 없는 범부의 말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金剛三昧經論》)

들국화를 외롭다 노래하고 호박을 질박한 농부로 묘사하는 것은 별다른 감동을 주지 않는다. 이처럼 ‘문어(文語)’란 일상언어의 속성에 집착해 낱말이나 문맥에 얽매이는 세속의 말, 상투적 의미로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우리는 왜 좋은 시를 읽고 감동하는가? 우리는 그 시의 이미지와 언어를 결합하여 숨은 세계를 살짝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를 방편으로 삼아 숨은 세계의 실상을 잠시나마 엿본다. 이처럼 ‘의어(義語)’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문맥을 넘어서서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드러내는 말을 이른다. 즉 문어는 세계를 왜곡하지만, 우리는 의어를 통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고, 또 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달의 실체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달을 ‘지구의 위성’이라고 하는 데서 떠나 ‘관음보살’이나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이라 할 때 인간은 좀더 달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과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언어기호의 공성(空性)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다. 언어기호가 세계의 실상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중생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정확히 말하여 중생이 존재를 세계 자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도록 하는 방편은 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장대가 장애이지만 장대를 통하여 땅의 굴레를 넘어 잠시나마 비상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장대높이뛰기에서 장대를 이용하지 않으면 높이 뛰어오를 수 없지만, 장대를 놓아야만 하늘을 비상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하여 세계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반달’을 ‘은밀현료구성문’이라 하더라도 처음 들은 당시에나 반달에 이런 의미가 숨어 있구나 하고 탄복할 뿐, 이 의미는 상투적이 된다. 의어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실체를 밝힌 것이라 하더라도 곧 문어로 전락한다. 좋은 시가 은유나 환유를 통하여 숨은 세계를 보여 주지만 이것도 해독자들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곧 상투적 의미가 되어 다른 숨은 의미를 감춘다.

장대높이뛰기를 하여 하늘에 오른 비상을 만끽하는 것은 잠시뿐, 설사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하더라도 우주에 다다를 수는 없다. 한번 하늘에 올랐다고, 세계신기록을 달성하였다고 눌러 앉아 있어야 하는가? 기록이 새로운 장애이듯,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된다. 부브카가 혼자서 수십 차례 장대높이뛰기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듯 끊임없이 화두를, 깨달음을 해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상언어와 시적 언어의 차이는 의미의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언어가 왜곡인 줄 알면서도 언어를 방편으로 이용하여 부처의 마음에 이르려 하는 선은 문어를 버리고 의어를 택한다. 의어로 이루어진 선의 언어는 집착, 기존의 낡은 의미를 깨버리려 하면서 고도의 은유를 취하게 되고 자연스레 시가 된다.

3. 선과 시가 하나가 되다

빈배에 달빛만 싣고 돌아오다
선이 어떻게 시가 되는가? 한 공안을 은유의 원리를 통하여 분석해 보자.1)

    천 척 긴 실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막 일어나매 만 물결이 따르도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와 물고기 물지 않으니
    배에 가득 훤히 달빛 싣고 돌아오도다.2)

이 선시에서 핵심어는 물고기와 텍스트 표면에는 숨어 있으나 어부이다. 배, 달빛, 낚시 등도 중요한 어휘이나 두 낱말의 의미에 따라 달라지기에 이들은 물고기와 어부의 종속어휘이다. 어부와 물고기를 은유의 원리에 따라 의미를 찾아 위 공안을 시로 놓고 해석해 보자.

낚시를 하다가 물고기가 물지 않기를 바라던 때가 있었다. 눈이 시도록 하늘이 푸른 가을날 호수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데 찌 위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앉는 것이 아닌가. 연록빛 호수에 초록 사이사이 붉게, 누렇게 이제 막 불타오르기 시작한 산이 담겨 있고 능선이 멋들어지게 휘어진 만곡부의 초점에 맵시 있게 위로 솟은 찌, 그 위에 다시 수평을 그리며 고추잠자리가 지나는 계절을 완상하고 있었다. 이 정경에 함뿍 빠져 나는 빨리 떡밥이 용해되어 빈 낚시가 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강가에서 고요히 낚시를 하고 있는 어부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인간이자 대상과 합일을 이룬 주체이다. 반달의 드러나고 감추는 모습이 ‘은밀현료구성문’의 은유로 나타나듯, 어부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신선의 은유를 형성한다. 낚시에 몰두한 어부는 내가 어부인지 물고기인지 그 경계를 넘어선다. 바다와 하늘, 물과 땅, 나와 물고기의 경계를 넘어설 때 낚시는 도(道)의 경지에 이른다. 이 상태가 바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니 어부는 화엄철학이요, 화엄 중에서도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요, 모든 차별을 하나로 아우른 원융(圓融)의 경지이다.

사람이 상즉상입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그는 부처이다. 어부가 부처의 은유라면, 물고기는 바다에 널려 있으며 포획을 기다리는 것이니 중생(衆生)의 은유이다. 물고기가 중생이라면 중생이 부처에 낚임은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해탈을 이룸이다. 낚시는 자비행(慈悲行)이며 배는 자비행을 이루는 방편(方便)이다. 바다는 중생이 있는 속계(俗界)이며 달빛이 있는 바다 밖은 이를 초월한 세상이다.

그럼 물고기가 물지 않음은 무슨 의미인가? 중생은 본래 청정(淸淨)하며 그들 마음 속에 이미 부처가 자리잡고 있다.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심(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일체의 중생이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3)

중생의 마음은 본래 하늘처럼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에 중생은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무명에 휩싸여 욕계(欲界), 색계(色界), 유계(有界)의 3계란 경계를 지어 세계의 실체를 바라보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이 모두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간다.4)

그러니 중생은 부처의 구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어부가 달빛만 싣고 돌아옴은 당연한 일이다. 빈배는 모든 것이 원래 공(空)함을 나타낸다. 바다와 배, 어부와 물고기, 진(眞)과 속(俗)의 경계,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공하다. 그렇게 깨닫고 보니 달빛 아래 차별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삼라만상이 빛난다. 그러니 빈배는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

어부는 배를 부리는 짓을 한다. 어부는 배를 부려서 저 언덕과 바다 건너에 사람들을 데려다 주는 이다. 그러니 어부는 ‘선지식, 지식인, 구도자’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서 물아일체에 이르니 어부는 선사(禪師)의 은유이다. 어부가 선사라면 물고기는 도, 부처의 마음이다. 물고기의 실체는 인간의 포획의 대상이란 것이다. 인간이 잡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 진리, 도(道), 진여실체, 욕망, 명예, 권력, 향락, 행복’ 등이다. 물고기는 이런 의미를 갖는다. 이 가운데 선사가 잡고자 하는 것은 도이다.

선사는 도에 이르려 하고 낚시는 도에 이르는 방편이므로 언어기호를 의미한다. 선사는 언어기호를 통하여 도에 이르려 한다. 그러나 물고기는 물지 않는다. 도는 언어 저 너머에 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물고기처럼 눈에 보이고 낚시에 낚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사람의 본성은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타고 나므로 스스로 그 지혜를 부리어 늘 관조(觀照)하기에 글자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5)

미혹한 자는 말로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마음으로 행한다.6) 천 척 낚싯줄을 드리웠음에도 물고기가 물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다. 선사는 배라는 방편을 이용하여 부처님의 마음에 이르려 하지만 언어는 방편일 뿐이다. 야보(冶父)의 《금강경송》이 《금강경》의 “법의 상(相)이라고 말한 바는 여래께서 말씀하신 즉 법의 상이 아니며 법의 상이라고 이름하는 것뿐이다.”라는 대목을 주석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여진 것임은 이 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금강경송》을 지은 야보의 입장에서는 이 뜻으로 야보송을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빈배는 그런 행위나 인식이 모두 공(空)함을 의미한다.

그 바다와 빈배에 달빛이 두루 어느 곳도 가리지 않고 비춘다. 그리 분별심을 떠날 때, 달빛 아래 바다와 하늘, 물고기와 나의 구분이 사라질 때, 낚시를 거두고 달빛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문득 자기 마음 속의 물고기를 찾을 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두 마리 진흙 소가 싸움하다가
    소리치며 바다로 뛰어들더니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들어가
    아무리 헤쳐도 소식이 없네

경한(景閑)의 〈우작십이송정사(又作十二頌呈似)〉이다. 그는 중국에서 임제종을 배워와 평생을 순수한 선인으로만 일관한 스님이다. 진흙으로 소를 빚었다. 그 소가 풀을 먹을 리도 없고 쟁기를 걸고 일을 할 리도 없다. 그것은 허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삼라만상을 분별하여 본다. 진흙 소는 허상인 줄 알면서도 실제 소는 허상인 줄 모른다. 실제 소도 자신이 스스로 소라 하였는가?

풀을 뜯고 되새김질하고 쟁기를 걸어 밭을 갈면 소라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분별심이 아니던가? 그리 분별하고 나누니 두 쟁론이 서로 싸운다. 아무리 싸워도 어느 것을 진리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소리치며 바다로 들어간다. 일심의 바다, 진여의 바다로 가면 모든 구별과 대립이 사라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구분도 사라진다. 과거, 현재, 미래는 사라지고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영원한 시간만 있는 것이다.

그렇듯 일심의 바다로 들어가면 선이 시이고 시가 선이다. 시를 만들고 읽는 마음이 바로 선이요, 선을 행하는 마음이 바로 시심(詩心)이다. 낡은 틀을 산산이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 때 시가 되고, 집착을 깨고 깨달음을 얻을 때 선이 된다. 시는 시인이 새로이 보고 느낀 세계를 언어를 빌어 드러내고, 선은 선사가 깨달은 바를 공안으로 함축한다.

시 텍스트를 통하여 낡은 코드를 깨고 새로운 메시지를 드러내지만 텍스트의 진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면에서 시는 공안이며, 의어(義語)를 빌어 부처의 마음을 드러내지만 영원히 다다를 수 없다는 면에서 공안이 곧 시이다. 시가 곧 상투적인 시가 되고 의어가 문어가 되듯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된다. 끊임없이 상투성에 반역을 일으킬 때 시가 생산되고 집착을 무너뜨릴 때 선이 행해진다.

이렇듯 시가 곧 선이다. 일상이 바로 선이고 도(道)듯이. 선이 곧 시이다. 도솔천이 바로 우리 발밑에 있듯이. ■

이도흠 1958년 충북 제천 출생. 현재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의상·만해 연구원 연학실장. 저서로는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한양대출판부, 1999),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푸른역사, 2000), 《설화와 역사》(공저, 집문당, 2000), 《동양철학 에세이-왜 착한 사람이 더 고통받을까》(정음문화사, 2001), 《문화변동과 인간, 그리고 문화연구》(공저, 깊은샘, 2001), 《생명에 관한 아홉 가지 에세이》(공저, 민음사, 2002), 《기호학으로 세상 읽기》(공저, 소명, 2002), 《기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공저, 소명, 2002), 논문으로 〈원효의 화쟁사상과 탈현대철학의 비교연구〉 등 40여 편 등이 있음.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