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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행 스크랩 금관가야-김해를 보다 2. 허황옥(許黃玉)-수로왕비릉
돌장승 추천 0 조회 14 08.04.30 13: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금관가야-김해를 보다 2. 허황옥(許黃玉)-수로왕비릉

 

수로왕릉을 소개하기 전에 굳이 수로왕비 허황옥을 소개하는 것이 이상스러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와 본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금방 알게 된다.

 

구지봉의 옆에 있어야 맞을 것 같은 수로왕의 안식처는 여기서 부터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고

이곳에는 대신 수로왕비인 허황옥의 능이 있는 것이다.

 

 (사진의 중앙 부분, 소나무숲이 엷은 곳에 조그맣게 보이는 봉분이 허황옥의 릉이다.)

 

수로왕의 탄강 신화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것이 바로 허황옥과의 혼인 이야기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수로왕은 구간(九干)이 그들의 자녀 중 가장 좋은 처녀와의 결혼을 간청하자 

그것을 만류하고 자신의 배필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정할 것이라 하고 

바다를 통해 가야에 도착한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혼인을 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와 금관성조에 실려 있는데 

원문과 번역을 이 글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참고로 올려 두니

관심이 있으시거나 필요하신 분은 참조하시기 바란다.

 

허황옥은 수로왕과의 첫날 밤에 자신의 출신에 대하여 '아유타국의 공주'라고 밝히는데

이 아유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몇 분의 학자의 중요한 연구 결과가 있다.

그 첫째가  아유타-아요디아라는 지명과 수로왕의 능 정문-수로왕비릉이 아님-의 쌍어문(雙魚紋)을 추적해서

허황옥이 인도의 아요디야 또는 아요디야의 식민지로 현재 태국의 메콩강 유역의 아요디야 출신이라는

 이종기님의 연구 결과이고(1970년에 발표),

또 다른 연구 결과는 허황옥의 능비의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글에 착안하여

쌍어문과 보주라는 지명을 찾아 인도의 아요디야 출신의 한 집단이 중국 사천성 보주 지방에서

정착했다가 다시 한반도의 김해로 이동하게 된다는 한양대학교 김병모 박사의 연구이다.

그 외에도 많은 설들이 있는 것 같다.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문)

 

다음, 네이버,야후등 검색엔진에서 삼국유사, 허황옥, 아유타등을 검색하면

많은 내용들의 글들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만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면 사진으로 수로왕비 허황옥의 능을 돌아본다...

 

 

 

 

 

 

 

 

 

 

 

 (구지봉으로 통한 문) 문 너머가 구지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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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부분 발췌(수로왕 붕어까지... )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今略而載之)

[0982b22] 開闢之後。此地未有邦國之號。亦無君臣之稱。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是酋長領總[14]百姓凡一百戶。七萬五千人。多以自都山野。鑿井而飲耕田而食。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所居北龜旨(是巒之稱若[15]十朋伏之狀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眾庶二三百人集會於此。有如人音。隱其形而發其音曰。此有人否。九干等云。吾徒在。又曰。吾所在為何。對云龜旨也。又曰。皇天所以命我者。御是處。惟新家邦。為君后。為茲故降矣。爾等須掘頂撮士歌之云。龜何龜何。首其現也。若不現也。燔灼而喫也。以之蹈舞。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九干等如其言。咸忻而歌舞。未幾仰而觀之。唯紫繩自天垂而著地。尋繩之下。乃見紅幅裹金合子。開而視之。有黃金卵六圓如日者。眾人悉皆驚喜。俱伸百拜。尋還。裹著抱持而歸我刀家窴榻上。其眾各散。過浹辰。翌日平明眾庶復相聚集開合。而六卵化為童子。容貌甚偉。仍坐於床。眾庶拜賀。盡恭敬止。日日而大。踰十餘晨昏。身長九尺則殷之天乙。顏如龍焉則漢之高祖。眉之八彩則有唐之高。眼之重瞳則有虞之舜。其於月望日即位也。始現故諱首露。或云首陵(首陵是崩後也)。國稱大駕洛。又稱伽耶國。即六伽耶之一也。餘五人各歸為五伽耶主。東以黃山江。西南以海。西北以地理山。東北以伽耶山南而為國尾。俾創假宮而入御。但要質儉。茅茨不剪。土階三尺。二年癸卯春正月。王若曰。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宮之南新沓坪(是古來閑田。新耕作故云也。乃俗文也)四望山嶽。顧左右曰此地狹小如蓼葉然而秀異。可為十六羅漢住地。何況自一成三。自三成七。七聖住地。固合于是。托土開疆。終然允臧歟。築置一千五百步周迴羅城。宮禁殿宇。及諸有司屋宇。虎庫倉廩之地。事訖還宮。遍徵國內丁壯人夫工匠。以其月二十日資始金陽。暨三月十日役畢。其宮闕屋舍。候農隙而作之。經始于厥年十月。逮甲辰二月而成。涓吉辰御新宮。理萬機而懃庶務。忽有夏國含達王之夫人妊娠。彌月生卵。卵化為人。名曰脫解。從海而來。身長三尺。頭圓一尺。悅焉詣闕。語於王云。我欲奪王之位。故來耳。王答曰。天命我俾即于位。將令安中國而綏下民。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又不敢以吾國吾民。付囑於汝。解云。若爾可爭其術。王曰可也。俄頃之間。解化為鷹。王化為鷲。又解化為雀。王化為鸇。于此際也。寸陰未移。解本身。王亦復然。解乃伏膺曰。僕也適於角術之場。鷹之[1]鷲。雀之於鸇。獲免焉。此蓋聖人惡殺之仁而然乎。僕之與王。爭位良難。便拜辭而出。到麟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2]木道而行。王竊恐滯留謀亂。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解奔入雞林地界。舟師盡還。事記所載多異[3]與新羅。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九干等朝謁之次獻言曰。大王降靈已來。好仇未得。請臣等所有處女絕好者。選入宮闈。俾為伉儷王曰。朕降于茲天命也。配朕而作后。亦天之命。卿等無慮。遂命留天干押輕舟。持駿馬。到望山島立待。申命神鬼干就乘(望山島。京南島嶼也。乘。輦下國也)。忽自海之西南隅。掛緋帆。張茜旗。而指乎北。留天等先舉火於島上。則競渡下陸。爭奔而來。神鬼望之。走入闕奏之。上聞欣欣。尋遣九干等。整蘭橈。揚桂楫而迎之。旋欲陪入內。王后乃曰。我[4]與等素昧平生焉。敢輕忽相隨而去。留天等返達后之語。王然之。率有司動蹕。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山邊設幔殿祗候。王后於山外別浦津頭。維舟登陸。憩於高嶠。解所著綾為贄。遺于山靈也。其[5]地侍從媵臣二員。名曰申輔趙匡。其妻二人。號慕貞慕良。或臧獲并計二十餘口。所齎錦繡綾羅。衣裳疋段。金銀珠玉。瓊[6][王*反]服玩器。不可勝記。王后漸近行在。上出迎之。同入帷宮。媵臣已下眾人。就階下而見之即退。上命有司。引媵臣夫妻曰。人各以一房安置。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給之以蘭液蕙醑。寢之以文茵彩薦。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多以軍夫遴集而護之。於是王與后共在御國寢。從容語王曰。妾是阿踰陀國公主也。姓許名黃玉。年二八矣。在本國時。今年五月中。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爺孃一昨夢中。同見皇天上帝。謂曰。駕洛國元君首露者。天所降而俾御大寶。乃神乃聖。惟其人乎。且以新[7]家邦。未定匹偶。卿等須遣公主而配之。言訖升天。形開之後。上帝之言。其猶在耳。於此而忽辭親向彼乎。往矣。妾也浮海遐尋於[8]蒸[來-(木-┴)+(來-┴+一)]。移天敻赴於蟠桃。螓首敢叨龍顏是近。王答曰。朕生而頗聖。先知公主自遠而屆。下臣有納妃之請。不敢從焉。今也淑質自臻。眇躬多幸。遂以合歡。兩過清宵。一經白晝。於是遂還來船。篙工楫師共十有五人。各賜糧粳米十碩。布三十疋。令歸本國。八月一日迴鑾。與后同輦。媵臣夫妻齊鏕並駕。其漢肆雜物。感使乘載。徐徐入闕。時銅壺欲午。王后爰處中宮。賜媵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餘外從者以賓館。一坐二十餘間。酌定人數。區別安置。日給豐羨。其所載珍物。藏於內庫。以為王后四時之費。一日上語臣下曰。九干等俱為庶僚之長。其位與名。皆是宵人野夫之號。頓非簪履職位之稱。儻化外傳聞。必有嗤笑之恥。遂改我刀為我躬。汝刀為汝諧。彼刀為彼藏。五[9]方為五常。留水留天之名。不動上字。改[10]下字留功留[11]德。改為神道。五天改為五能。神鬼之音不易。改訓為臣貴。取雞林職儀。置角干阿叱干級干之秩。其下官僚。以周判漢儀而分定之。斯所以革古鼎新設官分職之道歟。於是乎理國齊家。愛民如子。其教不肅而威。其政不嚴而理。況與王后而居也。比如天之有地。日之有月。陽之有陰。其功也塗山翼夏。唐煖興嬌。頻年有夢得熊羆之兆。誕生太子居登公。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后崩。壽一百五十七。國人如嘆坤崩。葬於龜旨東北塢。遂[12]欲忘子愛下民之惠。因號初來下纜渡頭村曰主浦村。解綾高岡曰綾峴。茜旗行入海涯曰旗出邊。媵臣泉府卿申輔宗正監趙匡等到國三十年。後各產二女焉。夫與婦踰一二年而[打-丁+勉]信也。其餘臧獲之輩。自來七八年間。未有茲子生。唯抱懷土之悲。皆首丘而沒。所舍賓館。圓其無人。元君乃每歌鰥枕。悲嘆良多。隔二五歲。以獻帝[13]立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殂落。壽一百五十八歲矣。國中之人若亡天。只悲慟甚於后崩之日。遂於闕之艮方平地。造立殯宮。高一丈。周三百步而葬之。號首陵王廟也。

 

(번역문의 출처는 직지 프로젝트 , 번역자 :이민수님.)

 가락국기(駕洛國記) ;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 대강大康 연간年間에 김관지주사 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 3월 계욕일(계浴日)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首陵은 죽은 후의 시호諡號다)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癸卯; 4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耕作했기 때문에 신답평新畓坪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잉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잉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잉臣)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金官城婆娑石塔

[0989c26] 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昔此邑為金官國時。世祖首露王之妃許皇后名黃玉。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自西域阿踰陀國所載來。初公主承二親之命。泛海將指東。阻波神之怒。不克而還。白父王。父王命載茲塔。乃獲利涉。來泊南涯。有緋帆茜旗珠玉之美。今云主浦。初解綾於岡上處曰綾峴。茜旗初入海涯曰旗出邊。首露王聘迎之。同御國一百五十餘年。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蓋像教未至。而土人不信伏。故本記無創寺之文。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置寺於其地。又創王后寺(在阿道訥祇王之世。法興王之前)至今奉福焉。兼以鎮南倭。具見本國本記。塔方四面五層。其彫鏤甚奇。石微赤班色。其質良脆。非此方類也。本草所云點冠血為驗者是也。金官國亦名駕洛國。具載本記。讚曰

 載厭緋帆茜輕  乞靈遮莫海濤驚

 豈徒到岸扶黃玉  千古南倭遏怒鯨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金官國)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 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타國)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父王)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편하게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旗)가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

수로왕(首露王)이 황후(皇后)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질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를 세워(이것은 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탑은 모진 4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彫刻)은 매우 기묘(奇妙)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 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 말한, "닭의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 하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찬(讚)해 말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치고 왔네.

어찌 황옥(黃玉)만을 도와서 이 언덕에 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노경(怒鯨)을 막고자 함일세.

 

(첨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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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는 김 수로왕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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