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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깊은 강 ▒ 무주 남대천 ▒ 반딧불이 태어나는 싱싱한 물줄기 |
비가 오건, 바람이 사납건 뭐 어떠랴 하며 길을 나섰다. 강 취재를 차일피일 미루며 뭉그적거리던 중이었다. 사람을 아예 궈삶겠다는 투로 야박하게 쏟아져 내리는 뙤약볕이 징그러워 만사가 귀찮았다. 복날이 가까워졌다고, 구탕에 소주가 참하지 않겠느냐고,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가 전화통 속에서 솔깃하게 속닥거렸지만, 애견가 대열에 들어간 게 언젠데 그러는고, 하며 뿌리치고 지내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비바람 거친 날 집을 나서게 되었던 거다. 태풍 ‘카이악’이라는 게 북상하는 중이라고 했다. 거 이름이 어째 좀 불길하다, 하지만 아서라, 카악 소리나게 소동을 부릴 생각일랑 냅두고 모쪼록 얌전히 스쳐 가는 게 어떻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빗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인데 내심 적잖이 흡족했다. 비와 바람의 협찬만큼 그럴싸한 여행의 반려가 다시 있으랴. 세상에는 비 오는 날이면 반드시 어딘가 싸돌아다니게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뭐 그 비슷한 증세(?)가 있는 거다. 이번 강 여행의 목적지는 전북 무주의 남대천(南大川). 무주 읍내에 닿은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식당에 들러 보리밥 한 그릇을 시켜먹은 뒤 읍내 풍경을 구경했다. 전주 한벽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호남의 삼한(三寒)에 꼽힌다는 강변 누각 한풍루(寒風樓)에 오르자 남대천과 읍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읍을 관통하는 남대천은 빗물의 세례 덕에 벌써 싯누렇게 변색된 채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쏜살같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무슨 구경거리가 되는 양 몇몇 사람들이 다리 난간에 들러붙어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게 보였다. 예전에 몇 차례 드나들며 느낀 무주의 인상은 아주 핼쑥했다. 깊은 산간지구가 대체로 그렇듯 산 덩어리들이 영토의 8할을 점거한 무주의 읍내 풍색 역시 파리하고 피로해 보였다.
그런데 시방의 경치를 보자니까 접때의 궁색이 엔간히 씻겨나간 걸 알 수 있었다. 지난 97년, 덕유산 기슭에서 치러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준비하면서 여기저기 고치고 꾸미고 다듬은 덕택인 것 같았다. 최근 마무리된 남대천 수변(水邊) 공원도 공들인 흔적이 뚜렷했다. ‘자연의 나라, 무주’ ‘반딧불이가 사는 청정지역’ ‘2010년 동계 올림픽을 준비하는 무주’ 따위의 과시적 전시적 문구를 새긴 깃발들이 곳곳에 내걸려 펄럭거렸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겉모습에서는 전에 없던 활기가 엿보였다. 남대천은 무주 서남단에 자리한 무풍면(茂豊面)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설천면(雪川面)의 나제통문(羅濟通門) 근방에서 구천동(九千洞) 계류를 받아들인 다음 서행(西行)을 거듭, 무주 읍내를 가로지른 뒤 곧장 금강 본류로 뛰어든다. 이런 줄거리를 염두에 두고 우선 덕유산 구천동 계곡을 찾아들었다. 통쾌한 계곡물 소리 굵은 장대비가 날장구 두드려대듯 한바탕 소란을 떨더니 슬며시 그치고 가는 비가 바람에 흩날리었다. 빗물로 세수한 초목들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따라 몸을 흔들어 온 숲이, 온 산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들려오던 계곡물 소리는 다가갈수록 점차 볼륨이 높아졌다. 여름 휴가철이 시작됐지만 태풍 때문인 듯 행락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배낭을 짊어진 위로 노란 비옷을 걸쳐 입어 이상한 모양새들이 된 한 떼의 사람들이 빗속에 웅기중기 늘어서서 더 올라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저 아래 상가지구의 영업집에서 쿵쿵짝 쿵쿵짝 끈질기게 울리던 음악소리는 아스라이 멀어지는 중이었고. 15년 전 이맘때, 구천동 계곡에서 하루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구천동 기억을 아무리 헤치고 들춰보아도 도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완전한 기억의 마모, 추억의 증발. 이것은 노쇠의 증거인가, 세월의 장난인가. 당시 함께 했던 사람의 영롱하게 빛났을 언어들과 향기로웠을 숨결의 기억들조차 망각의 늪 속에 침몰해버린 걸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머루처럼 검고 깊었던 그녀의 눈빛이 기억의 영사막에 희미하게 투사되었는데. 이처럼, 열차 뒤로 꽁무니를 빼는 쓸쓸한 풍경들 같이 정든 기억들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사랑의 기쁨과 영광은 초라한 전설로 바뀐다. 그러고서도 생의 여행은 계속된다. 덧없는 나날들이여, 허무한 여행의 기억이여……. 한낮이지만 산길은 으슴푸레했다. 키 크고 몸집 비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채 서로서로 몸을 비벼대고 있었으므로. 그 무성한 나무들의 차양 아래에서 그래도 계곡은 눈부시게 희었다. 허여멀쑥한 바윗덩이들, 그리고 그 사이를 하얗게 부서지며 들끓으며 튀어 오르는 장쾌한 포말들……. 비 내리는 날의 구천동 계곡은 호방하고 통쾌한 멋을 마음껏 뽐내었다. 속이 후련했다. 항아리 박살나는 듯한 소리로 귓전에 와 닿는 급류의 음악 역시 시원하고 개운했다. 옛날 덕유산 사자(獅子)가 목욕을 즐긴 곳이라는 사자담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비파를 타며 놀았다는 비파담에서, 금포탄에서, 청류계에서, 명경담에서, 발길을 붙들어매는 이 숱한 가경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트이고 청소한 듯 귓속이 쾌청했다. 빗줄기는 계속 변덕을 떨어댔다. 삽시에 비가 멎어 계곡 저 위로 산 안개가 뭉싯뭉싯 퍼져오르는가 하면, 금방 흐벅진 먹구름이 덮치면서 중국집 나무젓가락만큼이나 굵다란 빗줄기가 탕탕 쏟아져 내렸다. 비가 그치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 계곡 옆 소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가만 보니 비가 거세질 때면 사람들은 계곡의 바윗장 아래에 가재처럼 납작하게 끼어 잠시 비를 피하다가 빗발이 약해지면 다시 오솔길 위로 나서곤 했다. 잔뜩 물이 불어 위험한 계곡의 너럭바위 위에 판을 벌이고 우산을 쓴 채 부지런히 소주잔을 돌리는 패들도 눈에 띄었다. 비 내리는 산사(山寺)에서 빗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의 현란한 삼중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시종 호젓하고 고요했다. 구천폭포 백련담 이속대를 지나자 길의 끝에서 백련사(白蓮寺)가 나그네를 맞아 주었다. 안개비의 휘장을 걷고 경내에 들어서자 산사의 은은한 향취가 온몸으로 스미었다.
신라 때 창건된 천년고찰 백련사는 과거 덕유산의 은성했던 불교 시대를 대변하는 유서 깊은 절집이다. 불교의 꽃이 만발했던 옛날, 덕유산 일대엔 9천명쯤의 수도승들이 버글거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구천동 계곡의 이름이 유래한 것인데, 백련사는 이 같은 과거의 화려한 이력을 싣고 특유의 사풍(寺風)을 견지해왔다. 비록 지금은 신축 당우 일색일망정 고찰(古刹)다운 내밀한 운치가 녹아 흐르는 거다. 가는 비 내리는 산사의 적막에 심취해 한동안을 머물다가 하늘 한 구석에 시커먼 먹구름이 다시 번지는 걸 바라보며 하산을 서둘러 구천동을 빠져 나왔다. 이튿날도 아침부터 비가 추적거렸다. 이따금 하늘 한 모서리가 비죽 열리어 햇살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면 비 젖은 숲과 길과 강물가에 눈부신 빛의 파편들이 튀어 올라 그지없이 밝고 영롱했다. 덕유산 북쪽 기슭을 여행한 구천동 계류는 설천면 소천리 나제통문((羅濟通門) 부근에 이르러 무풍면 쪽에서 달려나온 개울과 만나 제법 실팍한 물줄기를 이룬다. 여기에서부터 무주읍 대차리까지 60여 리에 이르는 물길이 남대천이다.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석모산(石帽山)의 석벽(石壁)에 구멍을 뚫어 동서를 연결한 교통로. 양국의 접경지였으므로 툭하면 이곳에서 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나제통문 아래의 파리소(沼)는 삼국 시대의 전쟁 때 이곳 개울의 시체더미에 들끓었던 파리떼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까지 나제통문의 이쪽과 저쪽이 서로 다른 풍속, 풍기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무풍면이나 설천면이나 무주 땅이긴 마찬가지이지만 사투리도 기질도 생활 습속도 표나도록 다르니까 말이다. 역사 속에 생성된 향토색의 강렬함과 지속성을 알아차릴 수 있는 현장인 셈이다. 한껏 불어난 남대천 강물은 쿵쿵 기세를 높이어 거침없이 흘러나갔다. 반딧불이 사는 청정 수역 들판 사이를, 산과 산 사이를, 마을과 마을 사이를. 강 따라 연달아 이어지는 강변 마을들은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포근하고 평온해 보였다. 위압적으로 너무 거창하지도, 그렇다고 옹색하거나 빈약하지도 않은 규모의 남대천 물굽이가 마을들을 가로지를 때마다 거기에 완성도 높은 자연의 작품다운 조화와 균형이 저절로 이뤄지고 있었다. 절묘해서 아찔한 구천동 계곡의 풍치에 비하면 한결 평범하고 따분한 경관일 수 있지만 자연 속에 묻힌, 사람 사는 마을의 온기와 생기가 강변에 흘러 넘쳤다.
남악, 솔치, 지전, 길산, 장백……. 남대천변에 주렁주렁 매달린 마을들은 쌍둥이들처럼 비슷한 꼴에 비슷한 태깔을 하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보초를 서는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와 그 아래의 평상, 구멍가게 하나와 노인들이 장기를 두거나 오수(午睡)를 즐기는 경로당, 호박넝쿨 휘늘어진 돌담길, 그리고 강변 백사장 둘레의 푸른 소나무 숲……. 유별날 것도, 특별히 빼어날 것도 없는 이 소박한 풍경 안에서 강변 사람들의 범연한 일상이 영위되고 있는 것이다. 강이 베푸는 유형 무형의 은전에 기대어. 그런데, 근래 들어 남대천변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곤충 하나가 무주 남대천의 이름 값을 한껏 높게 하는 뜻밖의 현상을 감상하고 있다. 바로 반딧불이라는 생물이다. 개똥벌레라고도 부르는 이 곤충은 원래 각다귀만큼이나 흔한 물체였으나 공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멸종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 비운의 반딧불이가 남대천에 건재하는 게 아닌가. 무주군은 설천면 무항에서 나림에 이르는 남대천 일원을 반딧불이 보호구역으로 정한 채 해마다 6월이면 ‘반딧불이 축제’를 펼쳐 외부에 남대천의 청정성을 광고하고 있다. 6월부터 9월까지, 눈에 불을 키고 짝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꽁무니에 불을 매달고 밤하늘을 누비어 구애 활동을 하는 반딧불이는, 그리하여 남대천의 쌩쌩한 건강을 과시하는 상징물로 부상했다. 이 희귀한 밤의 발광체를 구경하기 위해 아이들을 앞세우고 남대천을 찾아드는 외지의 여행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남대천을 따라 내려와 다시 무주 읍내에 발길을 들인 하오. 빗속에서 오일장이 파장을 맞고 있었다. 인파가 복닥거리는, 강둑 바로 아래의 장터에 끼여들자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시골장에만 들어서면 힘이 솟아나는 것은 왜일까. 시골장의 찌글텅한 대폿집이, 시장통에 가득한 소란과 야단법석이, 봇짐 아낙의 악착과 우울이 하염없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왜일까. 아무려나, 얼기설기 천막을 두른 목로에 들러 탁주를 한 잔 마시고 장을 구경하는 중에, 여행 막바지의 그 희미한 취기가 전신을 감도는 중에, 마음은 고요한 강물처럼 평온했다. 다시 강둑에 올라가 내려다 본 남대천 물굽이는, 빗물의 희롱에 취해, 발정한 짐승처럼 씩씩거리며 흐르고 있었고. <글 박원식 기자 사진 서준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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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산들이 쏟아낸 푸른 물줄기 무주 남대천은 덕유산(1614m), 민주지산(1241.7m), 적상산(1029.2m), 삼도봉(1177m) 같은 덩치 큰 산들에서 배출된 계류들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금강의 지천이다. 그래 수역의 곳곳에 깊고 묘한 계곡들이 많다. 덕유산 구천동 계곡은 일찌감치 널리 알려진 명승지. 나제통문을 1경으로 해서 차례차례 이름을 지어 붙인 구천동 33경은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행락객이 많고 관광단지도 거대 규모라서 호젓한 맛은 떨어지지만 종합야영장이나 오토캠프장 같은 시설들이 훌륭하다. 남대천과 합류하는 적상천이 굴러 나오는 적상산 구역도 볼거리가 많다. 층암절벽이 사면을 둘러싼 이 산은 화려한 가을 단풍이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적상(赤裳)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의 정상부 분지에 있는 무주양수발전소의 상부 댐인 산정호수는 매우 이채롭다. 원래 이 호수 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약간 옮겨 앉은 고찰 안국사(安國寺)도 유서 있는 절 집.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史庫)를 수호하기 위해 쌓은 적상산성도 눈길을 끌며, 적상계곡의 송대와 천일폭포도 장쾌하다. 나제통문 부근에서 비로소 강의 모습을 띠는 남대천의 여름철 명물은 단연 반딧불이. 천연기념물 제322호인 반딧불이가 남대천에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깨끗한 환경과 다슬기 덕이다. 무주군은 반딧불이 유충의 먹이인 이 강의 다슬기 채취를 규제하고 있다. 한여름 밤, 자녀들과 함께 남대천변에서 반딧불이를 탐사한다면 최상의 생태 여행이 될 듯. 1자, 6자 붙은 날에 구경할 수 있는 무주읍 오일장도 산간 재래 시장의 맛과 정취를 만끽케 하고. 가볼 만한 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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