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
1990년 개관 이래 지역사회의 정보, 평생교육, 문화전달자로서 꾸준히 성장발전하고 있으며,
특성화 주제인 부산의 역사와 향취가 묻어 있는 향토자료를 비롯하여 디지털자료,
학술전문·교양도서 등 28만 여권에 이르는 폭넓은 장서를 소장하여 평새교육 기반 조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기, 21세기의 키워드는 정보와 문화입니다.
누가 더 많은 정보를 보다 빠르게 획득하여 문화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가에 따라서
삶의 질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 위치
도서관 식당
부산민주공원
1999년 문을 연 민주공원은 부산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부산시로부터 수탁·운영하고 있다.
그간 민주공원은 부산시민의 민주항쟁 정신을 기리고, 시민과 청소년·아동들의 민주주의 교육,
문화예술 향유, 휴식공간으로서 활용하며.
상설전시실을 비롯하여 주제별·시기별로 다양한 전시·체험 프로그램과 대중문화행사는 물론,
전망대와 다양한 들꽃 등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면서 삶을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조성목적 및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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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우고 오늘의 우리를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고,우리가 무엇을 진행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해 온 4.19 민주 혁명과 부마 민주항쟁 및 6월항쟁으로 이어져 부산 시민의 숭고한 민주 희생 정신을 기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민주공원]을 조성하고, 이를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시민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아울러 민주화의 산실인 부산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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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과거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기림과 아울러 현재와 미래를 향하여 인간의
기본권과 행복추구권을 구현하는 인류 보편의 가치인 민주주의를 표상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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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인간 존엄과 민주화 노력에 진력한 시민과 지역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삶의 질의 향상을 추구하는 부산시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부산시내 멀리에서도 바라볼 수 있고,
시민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일제하 항일투쟁으로부터 4·19 민주혁명, 부마민주항쟁, 6월항쟁으로 이어 내려오는 부 산시민의 민족성과
민주성을 상징하는조형물을 설치하여 민주공원으로서의 상징성을 높이며, 민주항쟁과 관련한
각종 유물, 조형물, 시, 그림, 사진으로 전시 배치하여 살아있는 역사의 공간으로 조성한다. 전시실, 공연실, 야외공연장 등을 계획하여 항쟁의 정신을 오늘에 실현하는 각종 시화전, 사진전시회, 강연회,
토론회, 문화공연, 영화제 등을 개최하여 문화와 학술 활동의 전당으로 조성한다. 연구실, 자료실 등을 두어 부산지역의 항쟁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사회를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도록 한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을 기념할 수 있는 조형물 등의 역사성을 강조하여 시민들 뿐만 아니라,
부산을 찾는 외래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을 수 있도록 한다. 산 정상에 설치하는 민주공원인 만큼 주변 자연과의 친화성을 가져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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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부산 민주 공원 |
위 치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산10-4번지 일원 <중앙공원 안> |
부지면적 |
20,337㎡ <6,152평> |
건축규모 |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5,278㎡ <1,600평> |
시설내용 |
-상징 조형물 : “민주의 횃불” -1층 <중극장 : 419석, 소극장 : 116석> -2층 <사무실, 연구실, 자료실, 휴게실, 매점, 상설전시실> -3층 <기획전시실, 전산실, 식당> -야외 공연장 -연못, 야외광장, 일주도로, 수목원, 야생초화류공원(한국화) 등 휴식 공간 (고난의 장, 추념의 장, 염원의 장, 정의의 장) |
사 업 비 |
160억 원(국비 80억 원, 시비 80억 원) |
사업기간 |
1996. 7 ~ 1999. 10 |
개 관 |
199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20주년 기념일) |
사업주체 |
부산민주공원 조성 범시민추진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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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
8 |
본회 이사회에서 부마민주항쟁 기념탑, 기념관, 기념공원 조성 사업의 추진을 결의함 (재정 계획 - 국비, 시비, 모금 등으로 약 200억 원 예상) |
9~12 |
부산시장 면담 통해 공원 조성을위한 부지 할애 요청 |
96' |
1~4 |
부산일보/국제신문/부산매일신문/KBS/MBC/PSB/CBS /BBS 등 부산지역 언론사를 방문하여 시민모금사업을 공동으로 추진 할 것을 합의 (사)부산민주항쟁 기념사업회와 부산시 간에 간담회와 의견 조율 통해 (사)부산민주항쟁 기념사업회 와 부산시가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키로 하고 '부산민주공원 조성 범시민추진위’를 구성키로 함.
- 예산법상 공사 시행처는 부산시로 하고 추진위원회 내에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사업 구상과 제반결정은 집행위에서 하도록 하고 실무 집행을 부산시에서 하기로 함. - 부지는 중앙공원 내 일원으로 확정 - 예산은 국비 100억 원 / 시비 70억 원 / 시민모금 30억 원 으로 책정 |
7 |
부산민주공원 조성 범시민추진위원회’ 발족 - 추진위원장 : 부산광역시장 문정수 - 집행위원장 : (사)부산민주항쟁 기념사업회 이사장 송기인 - 추진위원회 : 각계 인사 및 항쟁 관련자 등 428명으로 구성 |
8 |
시민모금금지법에의하여 시민 모금이 불가능하여 국비 80억 원, 시비 80억 원으로 예산 계획 편성 |
12 |
부산민주공원 조성 아이디어 공모전 개최 (50여 아이디어 접수) |
97' |
4 |
부산민주공원 설계 경기 공모 - 설계사 선정 조경 - 부산환경 콘설턴트 건축 - 경붕건축 조형물 - 엠조형 |
9 |
공사처 선정 건축토목 - 경보종합건설 조경 - 국제종합 토건 감리 - 하우엔지니어링 |
10 |
기공식과 공사 시작 |
98' |
4 |
전기 부문 공사처 선정 전기 - 수렵전기/대성종합전기공사 감리 - 상지엔지니어링 전력기술단 |
6 |
'부산민주공원 개관 준비를 위한 공청회’ 개최 '부산 민주 운동사’ 발간 (2,500부) |
12 |
전시실, 운영 프로그램, 각층 용도에 대한 기본 계획 용역 발주(아트컨설팅 서울) |
99' |
3 |
민주공원 운영과 관련한 공청회 (기념사업회 회원 대상) 민주공원 운영과 관련한 공청회 (시민사회단체 대상) |
10 |
민주공원 개관식 민주공원 개관 기념 행사 및 부마민주항쟁 20주년 |
12 |
민주공원 운영 위탁 계약 체결((사)부산민주항쟁 기념사업회) |
내부시설
민주항쟁기념관 늘펼쳐보임방은 부산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민주항쟁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그 계승과 발전을 통해 21세기 부산의 희망찬 미래와 소중한 포부를 전망하고자 꾸며진 공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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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실 관람입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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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
단체 |
1 .청소년 : 13세이상-24세이하 2. 군인 : 하사이하의 군인과 전투, 의무 경찰대원 3. 어른 : 25세이상-64세이하 4. 국가유공자 및 장애인 무료 5. 단체관람의 경우는 20명이상 |
어린이 및 노인 |
무료 |
. |
청소년 및 군인 |
100원 |
50원 |
어른 |
200원 |
100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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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민주의 뿌리 김구는 통일 조국의 건설이야말로 진정한 민족 독립이라고 여기고, 남북 분단의 고착을 막기 위해 자신을 바쳤다. 이승만정권의 부정부패에 저항하여 일어난 4?19민주항쟁은 나라의 주인이 백성임을 일깨운 항쟁이었다. 전태일의 외침은 인간 평등을 바탕으로 한 노동자의 절규였으며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 연결되는 단초를 만들었다. 문익환은 남북의 분단 현실을 타개하고자 자신의 몸을 던져 통일운동의 물꼬를 틔웠다. 2002년 6월에 발생한 두 여중생의 사망 사건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속에 촛불시위로 이어졌고,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은 시민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러한 민주의 뿌리를 자각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참된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자, 통일을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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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부산의 사람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30만 부산 사람들은 일재 잔재를 씻어 내고 질서를 회복하면서 새로운 조국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임시수도가 된 부산은 전쟁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고 자행된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목도하면서, 새로운 저항의 씨앗을 키웠다. 4.19민주항쟁과 부마민주항쟁과 6월항쟁을 거치는 동안 부산은 불의의 역사를 극복하는 저항의 선두에 서서 투쟁하였던 것이다. 이제 부산은 자갈치 시장의 활기와 부산역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의 열정을 이어받아, 효순이와 미선이 추모 촛불행진으로 나타난 이 땅의 자주적 평화통일 염원을 실현함으로써, 21세기의 중심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할 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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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의적 수십 년간의 반민주 독재 정권은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탄압을 자행하여 자유로움을 말살하였다. 이 민주의 적에 대한 저항 운동은 우리 사회에 민주 세력의 결집과 확대를 가져왔으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빚어졌다. 우리는 이 민주의 적에 대해 증거를 수집하여 진상을 밝혀내어 기록하고 알려내어 다시는 그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경계로 삼아야 한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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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민주의 탄생 지난 20세기 우리 민족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역사의 질곡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하였고, 이를 통해 민족사를 발전시켜 왔다. 일제 강점기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국가건설운동, 자주적 통일운동으로 승화된 4.19민주항쟁, 독재타도의 선두에 섰던 부마민주항쟁, 5?18민중항쟁의 십자가를 넘어 민주의 승리로 이어진 1990년대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분화 발전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작은 축소판이었다. 고난과 저항으로 이어진 숨가쁜 민족사의 역정 속에서 부산은 항상 선두에 서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헌신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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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4월의 청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부산에서도 4.19민주항쟁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고등학생의 시위로 시작되어, 시민들이 대거 합류한 항쟁으로 발전되었고, 이승만대통령의 하야 이후 대학과 고등학교를 포함한 학원 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한편으로 반이승만투쟁을 자주적 통일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민족문화협회를 결성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이종률은 1960년 6월 12일 결성된 민주민족청년동맹의 조직을 경북과 서울 등지로 확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국의 민주민족세력이 결집한 자주적 통일운동단체를 결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61년 2월 15일 정당 및 사회단체를 회원으로 하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중앙협의회)가 결성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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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박정희 그리고 유신 4.19민주항쟁으로 드높았던 민주의 함성과 자주통일의 열망은 이듬해인 1961년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쿠데타로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와 일본 자본에 의존한 경제개발이라는 두 기둥으로 권력을 구축하였으나, 1970년대에 냉전체제의 해체로 위기를 맞게 된 박정희는 1972년 유신을 단행하여 독재 권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유신체제는 대통령의 권한을 총통 수준으로 강화하고, 행정부에 대한 국회의 견제기능을 무력하게 하며, 민주세력의 저항에 긴급조치라는 재갈을 물리는 등, 그나마 유지되던 최소한의 민주절차와 인권을 부정하는 폭거였다. 민주세력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공작정치를 비롯한 각종 통제장치를 동원하여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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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양서협동조합 억압적인 정권은 언제나 진보적인 서적에 금서라는 딱지를 붙여,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였다. 이 때문에 진보적인 서적을 두루 읽고 지식과 양심을 교류하는 것은 권력이 만든 규범을 부정하는 것이고, 나아가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진보적인 서적을 매개로 하는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민주세력을 결집하고 확산시키려 한 양서협동조합운동은 독특한 형태의 민주화운동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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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부마민주항쟁 1970년대 말 한국사회는 동일방직사건, YH무역사건, 김영삼의원제명사건을 거치면서, 정권 말기의 폭압성과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먼저 활시위를 당긴 것은 유신 반대 분위기가 터질 듯 팽배해 있던 대학가였다. 1979년 10월 부산대에서 터져 나온 시위는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과 합세로 게릴라식 시위로 도심을 종횡무진하며 경찰의 기동력을 유린하였고, 4.19민주항쟁 이래 최대의 항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10월 18일 박정희 정권은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하여 항쟁을 진압했지만, 이미 항쟁은 마산으로 번져나간 뒤였다. 부마민주항쟁은 직접 정권을 붕괴시키지는 않았지만, 권력 내부의 격렬한 분열을 초래하여 유신의 조종(弔鐘)을 울렸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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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민주의 승리 5.18민중항쟁 이후 억누를 수 없는 민주화의 열망은 대학가를 필두로, 종교계와 학계, 전문가 집단과 노동계 등 여러 계층과 집단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로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열기는 1987년 초 박종철의 죽음을 계기로, 개헌정국을 넘어 마침내 전국적인 시민항쟁으로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 부마민주항쟁에 이어 6월항쟁에서, 다시 한번 부산은 항쟁의 정점을 주도하며, 전두환 정권의 패배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며 민주주의를 확산시켜 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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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삶 속의 민주주의 밖으로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안으로는 6월항쟁의 결과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면서, 1980년대 후반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인권, 종교, 통일, 여성, 노동, 빈민, 청년, 학생, 문화 등 각종 부문별 민주화운동 단체를 포괄하는 상설적 연합기구가 등장하였다. 부산민족민주운동연합을 계승하여 결성된 민주주의민족통일부산연합은 민중의 생존권투쟁과 민주화투쟁을 중심으로, 자주통일을 지향하며 199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부산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1999년 민주공원이 건립되어, 민주항쟁의 역사를 기리고 학습하는, 기념공간이자 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지역주민의 삶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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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민족예술운동 5.18민중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는 민족예술운동이 탄생하였다. 민족예술운동은 연희를 중심으로 음악, 문학, 미술 등 여러 장르에서 진행되었는데, 5.18민중항쟁을 비롯하여 빈부격차, 농촌문제, 노동문제, 분단과 외세문제 등이 그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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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세계 민주주의와 나 21세기는 전 지구적 정보화 시대이다. 국제연대와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는 국지적 활동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며 국경,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민주공원은 세계평화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제단체를 소개하는 장을 마련하여, 국제운동 동참과 정보 공유를 도모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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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공포와 고립의 시간들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가 죄인이 된 양심수들은 감옥 안에서도 쉬지 않고 반독재투쟁에 참여하고 교도소 내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독방은 이러한 양심수들의 교도소 내 민주화투쟁을 방해하고 탄압하는 수단으로 흔히 악용되었다. 독방체험은 현재 교도소에서 운영되고 있는 독방을 재현하여, 많은 양심수들이 처했던 고난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여 보고, 오늘날 한국의 인권 실태에 대해 생각해 보는 프로그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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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열사와 나 이 땅의 자주적인 민족통일을 위해, 소외된 이들의 이웃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삶을 살며, 군사 정권에 의해 질식 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온 몸을 헌신하신 지도자들. 폭력적이고 반민족적인 독재 권력이나 불의한 권력에 의해 꽃다운 젊은 생명을 빼앗기거나, 스스로를 희생하여 권력의 부당성을 고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과 민족통일의 달성에 작은 밀알이 되고자 한 열사들. 이러한 지도자와 열사들의 실천과 헌신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는 민족사의 발전을 통한 인류사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밝은 전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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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비췸마당 비췸마당은 민주화운동 속에서 불렸던 노래들과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대표적인 노래와 애니메이션, 영상물, 다큐멘터리 등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부산의 민주화운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의 외국어도 지원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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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민주와 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아주 오랜 질문 중 하나이다. 민주주의는 ‘나’라는 개인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위한 투쟁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이다. 또 민주주의는 쟁취한 민주를 지키기 위한 항쟁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 존중받는 개인들이 구성하는 민주공동체를 부정하는 적들과 싸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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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희생자 위령탑
4.19영령 봉안소 건립과 위령탑 이설의 의의 4.19 영령들의 고귀한 정신이 역사와 교육체험의 마당으로 4.19혁명 유족과 부산 시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영령봉안소가 준공되어 4.19영령들의 고귀한
넋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마련되고, 또한 용두산공원에 있던 4.19위령탑이 이설되어 숭고한
4.19 정신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 한 자리에 마련되었음은 매우 기쁘고 반가운 일입니다.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4.19혁명 희생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부산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4.19희생자 위령탑입니다.
이러한 4.19희생자들의 의로운 민주항쟁 정신이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지고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으로 계승되어 오늘날의 우리가 있음은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2007년 6월민주항쟁 2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에 맞추어 4.19혁명 희생자 영령봉안소와 위령탑이 한 곳에
조성되어 부산 시민들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또한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로 길이 남겨줄
‘역사 체험과 교육 현장’으로 ‘4.19혁명 희생자 영령 봉안소와 위령탑’의 의의와 가치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 설치목적 : 1960년 4월 19일 혁명당시 희생자(19인) 추모 ○ 위 치 : 1962년 용두산공원 광장에 건립, 2007년 2월 15일 민주공원으로 이설 ○ 규 모 : 높이 11m, 석조 ○ 설 치 자 :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사)이 주관하여 시민들 성금으로 조성
ㆍ4.19혁명 희생자 영령봉안소 ○ 4.19광장 조성 : 2,432㎡ 부지에 4.19위령탑 이전 설치하고 영령봉안소 1개소를 건립하여 4.19광장으로 조성 ○ 봉안소 건립 : 73㎡ 규모, 희생자 및 부상자 33인 영정사진 봉안 ○ 공사기간 : 2006년 8월 18일~2007년 2월 15일
ㆍ조성 경과 2004. 10. 12 사적시설 확충사업 추진계획 수립 2004. 12. 18 자금교부 결정(15억) 2006. 8. 18 공사 착공 2007. 2. 15 공사 준공식
419혁명 희생자 위령탑
1960년 3월 15일 청년학생들은 정ㆍ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정권이 저지른 파렴치한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제히 궐기하였다.
2ㆍ28 대구학생시위, 3월~4월 18일에 이르는 부산ㆍ마산지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학생시위는
마침내 4월 19일의 ‘피의 화요일’로 치닫게 된다.
특히 4월 11일 시위도중 눈에 최루탄을 맞은 김주열 군의 사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분노의 물결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대규모 시위는 절정에 달해 마침내 경찰의 발포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부산에서는 19일 상오 경남공고, 부산상고, 데레사여중ㆍ고, 동래고교 등의 학생과 일부 대학생,
시민 등 2만여 명이 시위에 나섰고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격노한 시민들은 부산진경찰서를 점거ㆍ파괴하는 등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적 저항 앞에
사태를 무마시키려 하였으나 4월 25일 서울 각 대학 교수 259명은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화적인 가두시위를 벌였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12년 독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정신과 함께 시민의 휴식처로... 1999년 민주공원 개관에 발맞추어 '여섯번째 민족통일대동장승굿'이 이곳에서 펼쳐졌습니다.
민주공원 입구에 터를 잡고 온갖 삿된 것을 막아주고 있는 '민족통일대장부' '민족평화여장부' 두 장승은 마치 이곳 이 감히 범접하기 힘든 부산시민의 '소도'임을 선언하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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