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조선인 비행사가 될 뻔했던 사람, 김경규(金景圭) (1)
신식비행기 내선(新式飛行機 來鮮)
후다루만 칠십마력 비행기
8월 8일 의용비행회원이 가지고 온다
<매일신보> 1918년 7월 9일자
제국의용비행회(帝國義勇飛行會)의 천상중위(川上中尉)가 조선 각지에서 크게 비행을 시험할 계획으로 목하 준비중인데 최근 동경으로부터 온 통신을 본즉 상주(上州)에 제일 가는 부자 중택방랑(中澤芳郞, 나카자와 요시로)씨가 돈을 대어 제조하는 묘의호(妙義號) '푸알만'식 칠십마력의 비행기는
금월 십사일에 준공되겠으므로 십오일 동경에서 처녀비행을 행하고 십육일경에는 동회 회원과 서로 이끌어 조선으로 향하여 출발하기로 경정하였다 하며 동회 부회장 상촌소장(上村少將) 중택씨외 이명은 육일 오후에 동경을 떠나 팔일 경성에 도착하여 제반 시찰과 비행준비를 행한다 하며
근두(觔斗, 공중제비의 뜻) 비행가(飛行家) 도선(渡鮮)
금회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일본에 다만 한 명되는 자반뒤집기 비행가 서출(西出)씨는 금월 이일 제국의용비행회에 입회하였으므로 묘의호와 한 가지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 각지에서 동씨 독특의 묘기를 행한다 하며
비행학교(飛行學校)에 조선인학생(朝鮮人學生)
네 사람이 모두 좋은 성적
별항 천상중위가 교관이 된 제국비행학교에는 조선사람 네 명이 입학하여 목하 자동차와 비행기의 조종설계 기술 등을 공부하는 중인데 일반 성적이 양호하며 조선사람의 비행술연구는 이로써 처음이라 항공술 발달상에 경사로운 일이며 생도의 씨명은 경성부 마포 김경규(金景奎), 평양부 아청리 이시은(李時殷), 동 임흥호(任興鎬), 동 수옥리 박준근(朴俊根) 제씨더라.
대구(大邱)의 일청년(一靑年) 비행가(飛行家) 되기를 지원함
<매일신보> 1919년 1월 30일자
대구부 상정(大邱府 上町) 사십구번지 최영화(崔榮華) 방에 정운주(鄭雲柱) 십구세된 청년은 대판자동차학교에서 졸업하고 지금 조선에 돌아와서 있는 중인데 일찍이 비행가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작년 가을 경북 제2회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을 즈음에 민간비행가 산현풍삼랑(山縣豊三郞, 야마카타 토요사부로)씨가 대구에서 비행하는 것을 보고 비행가 되기를 결심하고 "비행가가 되어서 국가를 위하여 한 목숨을 바치겠다"하는 편지를 동경 모씨에게 보내고 비행학교에 입학하기를 주선하여 달라고 의뢰하였더라.
[사설(社說)] 김경규군(金景圭君)의 전도(前途)를 축(祝)함
<매일신보> 1919년 5월 30일자
아(我) 동경지국(東京支局)의 특전(特電)은 경성부 마포(京城府 麻浦) 사백십사번지(番地) 김병성(金炳星)씨의 삼남(三男) 김경규(金景圭) 군이 민간비행가(民間飛行家) 반소금태랑(飯沼金太郞, 이이누마 킨타로)씨의 추천(推薦)에 의(依)하여 군마현(群馬縣) 태전정(太田町) 중도해군대위(中島海軍大尉) 경영(經營)의 비행학교(飛行學校)에 내(來) 6월부터 연습생(練習生)으로 입학(入學)하게 되었음을 보래(報來)하였도다. 피(彼)는 목하(目下) 소택비행협회(所澤飛行協會)에서 항공술(航空術)을 연구중(硏究中)인데 기(其) 연구(硏究)의 열심(熱心)함은 가경(可驚)할 바이 유(有)하고 비행가(飛行家)로 확실(確實)히 천재적 기능(天才的 技能)이 유(有)하다 칭찬할 바 오인(吾人)은 차보(此報)를 접(接)하고 불각흔연(不覺欣然)히 규쾌(규快)하였노라. 종래(從來) 아조선인(我朝鮮人)의 내지(內地)에 유학(遊學)할 자(者)로 의학(醫學), 회화(繪畵), 음악(音樂) 등의 방면(方面)에서 기 천재(其 天才)가 인정(認定)되어 장래(將來)에 촉망(囑望)된 자(者)도 불소(不少)하여 대(大)히 인의(人義)를 강(强)케한 바가 유(有)하였도다. 금우(今又) 신시대(新時代)의 요구(要求)인 항공계(航空界)에 차 천재(此 天才)를 득(得)하였음은 조선(朝鮮)을 위(爲)하여 장우(將又)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을 위(爲)하여 무상(無上)의 보(寶)를 획득(獲得)한 감(感)이 불무(不無)하도다. ...... (중략) ...... 아동양(我東洋)에 재(在)한 항공계(航空界)의 진부(振否)는 동양영원(東洋永遠)의 평화(平和)의 상(上)에 관(關)함이 파(頗)히 심대(甚大)함이 유(有)한 바 동양(東洋)에 국(國)을 성(成)한 자(者)의 일각(一刻)이라도 망각(忘却)치 못할 중대문제(重大問題)이라. 연이(然而) 지나(支那)의 현상(現狀)이 여사(如斯)하고 제국(帝國)이 유독(唯獨) 차(此)의 진보발달(進步發達)에 노력(努力)치 아니치 못할지니 제국(帝國)의 담하(擔荷)가 역대(亦大)하다 위(謂)할지오. 종(從)하여 차(此)의 완성(完成)을 기(期)하기까지는 상(尙) 기다(幾多)의 희생(犧牲)을 출(出)하기에 지(至)할 바로 진실(眞實)로 용기(勇氣)와 담력(膽力)을 유(有)한 비행가(飛行家)의 출래(出來)를 대(待)하기 간절(懇切)한데 차시(此時)를 당(當)하여 아(我)의 경애(敬愛)하는 김경규군(金景圭君)은 결연(決然) 분기(奮起)하여 지(志)를 항공계(航空界)에 치(致)하여 동양비행계(東洋飛行界)의 중임(重任)을 양견(兩肩)에 담(擔)하는 개(慨)를 시(示)하니 오인(吾人)이 경축(慶祝)치 아니하랴 한들 ○가득호(可得乎)아. 김경군(金景圭君)의 차거(此擧)는 조선(朝鮮)을 위(爲)하여 가족과(可足誇)요 (又) 아제국항공계(我帝國航空界)의 지보(至寶)라 위(謂)할지라. 건전(健全)하다. 김경규군(金景圭君)이여. 군(君)의 임(任)이 중(重)하도다. 익익분려노력(益益奮勵努力)하여 사계(斯界)를 위(爲)하여 세계(世界)의 용패자(勇覇者)됨을 기(期)하라. 일언(一言)으로써 군(君)의 전도(前途)를 축(祝)하노라.
조선인(朝鮮人)의 비행가(飛行家)
비행가 될 만한 천재와 기능이 있는 청년
내지에서 비행을 연구중
<매일신보> 1919년 5월 30일자
경성부 마포동(麻浦洞) 사백십사번지 김병성(金炳星)씨의 삼남 김경규(金景圭)씨는 당년 이십일세의 청년인데 민간비행가 반소금태랑(飯沼金太郞, 이이누마 킨타로)씨의 추천으로 군마현(群馬縣) 태전정(太田町) 중도(中島) 해군대위의 경영하는 중도비행학교에서 오는 유월부터 연습생으로 입학을 할 터이며 김씨는 지금 소택(小澤)제국비행협회에서 오는 항공(航空)을 하는 중인데 그 연구에 열심하는 것이며 또 비행가 될 만한 천재와 기능이 확실이 있다더라. [동경전보]
신비행가(新飛行家)는 하인(何人)
마포 재산가의 셋째 아들
<매일신보> 1919년 5월 31일자
조선에서 처음으로 비행가가 된 김경규(金景圭)씨의 부친 김병성(金炳星)씨를 마포동(麻浦洞) 사백십사번지로 방문한즉 기자에게 대하여 말하여 가로대 "경규는 나의 셋째 아들인데 조선에 있을 때에 마포보성소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중학교에서 삼년이나 공부하다가 지금부터 사년전 즉 대정 5년(즉 1916년) 9월에 동경으로 건너가서
▲ 비행학교에 자동차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곧 비행을 연구하려 하였는데 불행히 그 학교가 폐지가 되매 작년 가을에 제국비행협회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제국비행협회에 입학할 때에는 미거한 자식이나마 배운 재주가 있든지 특별입학으로 일본인 한 사람과 적이 단 둘이만 입학이 되었다던가요. 귀 신보에도 보도하심과 같이 이번에 반소금태랑(飯沼金太郞, 이이누마 킨타로)의 추천으로
▲ 일본비행계에 제일류인 중도 해군대위가 경영하는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술을 연구한다는데 그 학교에서 비행기를 만드는 법까지 가르친다 하옵디다. 일전에 반소씨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자식이 열심히 공부를 한다 칭찬을 하였고 또 중도 비행학교에 추천을 하였는데 금년 내에는 졸업할 모양이라고 하였어요" 하며 씨는 기쁜 빛이 얼굴에 나타나더라. 씨는 마포에서 유수한 재산가로
▲ 이왕에 벼슬을 승지까지 하였고 아들이 오형제인데 김경규씨의 장형도 역시 동경에서 치과를 연구하는 중이라. 천성이 활발하고도 침착한 김군의 영화로운 성공을 짐지고 돌아올 날이 머지 아니하였으니 김씨 일문을 위하여 경사로울 뿐이 아니라 실로 조선의 장래 비행계를 위하여 대경사라 하겠더라.
▲ <매일신보> 1919년 6월 6일자
우리 공계(空界) 장래(將來)의 용자(勇者)
김경규군의 비행에 몸을 던질 결심은 매일신보 기사를 보고
<매일신보> 1919년 6월 6일자
조선청년비행가 김경규(金景圭)씨가 제국비행협회 반소금태랑(飯沼金太郞, 이이누마 킨타로)씨 추천으로 이번에 군마현 신전군 태전정(群馬縣 新田郡 太田町) 중도비행학교(中島飛行學校)에 입학을 하였다 함은 본보에 이미 보도하 바어니와 본사 동경지국 기자가 반소금태랑씨를 소택 일길정(所宅 日吉町)으로 방문한 후 씨는 기쁜 낯으로 기자를 맞으며 말하여 가로대 "년전부터 상촌(上村)해군소장이 교장이 되어 대삼(大森)에
▲ 제국의용비행학교를 설립하였었는데 그 학교의 부탁으로 내가 비행기의 운전을 시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김경규군은 연습생으로 그 학교에 있어 처음으로 만나보았습니다. 조선에서 비행기가 나는 것은 김군으로 처음이며 조선동포의 용감한 뜻이 갸륵하므로 아무쪼록 성공을 시키여보려고 하였더니 작년 십월에 이르러서 어떠한 사정으로
▲ 그 학교가 폐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내 힘으로 열심히 가르쳐보려는 생각으로 김군과 또 군의 동창 금천요삼(今泉堯三, 이마이즈미 교조) 군을 소택으로 데려다가 나와 기기를 같이 하며 가르쳐 보려 하였더니 비행협회에는 쓸만한 비행기가 없고 또 금년 정월 초하루날 아침부터 비행기의 고장이 생기여서 한 채의 비행기도 김군을 위하여 시험케 할 것이 없으므로 나의 뜻대로 못하는 것이 섭섭하기는 하지만은 이번에
▲ 해군기관대위 중도화구평(中島和久平, 나카지마 와쿠헤이)씨의 경영으로 중도비행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또 그 학교에는 나의 친구 좌등(佐藤) 군이 선생으로 있으므로 이에 부탁을 하여 드디어 그 학교로 두 사람을 입학시키였는데 김군이든지 금천군은 진실로 열심가이며 특히 김군의 체격은 우리의 보는 바로는 비행가 되기에 적당한 줄로 보이며 또 장래에 성공도 할 줄로 믿습니다. 김군의
▲ 영광 있는 성공도 머지 아니하였는데 김군이 당당한 비행가 되는 날에는 나도 김군과 함께 조선의 공중에서 한번 날아보려고 생각하며 장래에는 조선에도 비행학교를 세우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직 나의 뜻을 말함에 지나지 못하거니와 정작 학교를 설립하는 날이면 조선에서 다대한 찬조를 받아야 되겠지요" 하더라. 기자는 그 길로 김경규씨를 방문한즉 김군은 유창한 일본말로 말하되 "나는 어렸을 때에 조선
▲ 매일신보에서 미국의 비행기에 관한 기사를 보고 그때부터 비행기라는 것이 매우 재미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와이'에 가서 계신 나의 삼촌이 보내인 비행기 강의록을 보고 나는 비행가가 되어 높은 공중을 날짐승과 같이 한번 내려보았으면 얼마나 즐거우랴 하고 드디여 비행가가 되려고 뜻을 세우고 대정 오년(즉 1916년)에 동경에 건너왔는데 일본말을 잘 통치 못하였으므로 위선 어학을 이태 동안이나 공부하고 그 후에는 우근전(羽根田)비행학교의 강의록, 기타
▲ 참고서를 모아 연구하다가 재작년 사월에 대삼에 있는 제국의용비행학교(帝國義勇飛行學校)에 입학하여 그 학교의 예비과를 졸업하였는데 불행히 그 학교가 작년 십월에 폐지되어 다른 학교로 전학하려던 중 마침 제국비행협회의 반소씨의 진력하신 덕분으로 이번에 중도비행학교에 입학을 하게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일층 면려를 하여 성공을 한 후에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서
▲ 반도의 공중에 장쾌히 내려보려 합니다" 하더라. 중도비행학교에서는 교장 중도 대위와 좌등 교수를 위시하여 일동이 모두 김씨의 입학한 것을 환영하며 비행계에 한 새현상이라고 기뻐함을 마지 아니하더라. [동경지국]
[사진설명] 장래에 비행가 (좌편) 김경규군과 그를 도와주는 (우편) 반소금태랑씨.
비행기추락(飛行機墜落) 위태(危殆)하였던 김경규(金景圭)
미도비행장에서 비행교관의 중상
<매일신보> 1919년 6월 17일자
조선인으로 처음 비행가 되고자 하는 경성 마포의 김경규(金景圭)씨가 비행술을 연구하는 군마현 신전군 태전정(群馬縣 新田郡 太田町) 중도대위(中島大尉)의 일본비행기제작소 부속 미도비행장(尾島飛行場)에서는 지나간 십삼일은 해군항공대로부터 복전소좌(福田少佐) 마월(馬越), 상원(桑原)의 두 대위와 및 군의장 일행 네 명이 비행장을 시찰키 위하여 왔으므로 학교교관 좌등장(佐藤章)씨는 오전 일곱시 이십분 일백이십마력기로
▲ 제일회 비행을 하고 항공대 일행은 비행장을 거쳐가고 중도대위와 함께 소택으로 향하였는데 일번 좌등씨는 제이회 비행에서 당일 제국비행협회로부터 미도비행학교에 들어간 근등호길(近藤虎吉)씨를 동승하고, 제삼회에서는 지난번 본보에 게재하였던 조선인 김경규(金景圭)씨를 동승케하고, 제사회에는 오전 열시 오십일분 연습생 주방도희(周防道喜)씨를 동승케하고 육지를 떠서 백미돌(미터)되는 공중에서
▲ 비행하는 중 발동기에 고장이 생긴 것을 알고 급속도로 내려와 이십미돌되는 공중에 얕게 왔을 때 갑자기 급각도(角度)가 되어 십일시 십분에 비행기는 전복되어 떨어지며 발동기와 함께 분쇄되고 좌등씨는 외인편 발 무릎아래가 부러지고 얼굴 기타 전신에 몇 곳이 상하였고 주방씨는 머리를 몹시 다치고 오른쪽 발뒤꿈치가 부러져서 인사불성에 이루었으므로 즉시 자동차로 의사를 불러다가
▲ 응급치료를 한 바 좌등씨는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경과가 양호하여 생명에는 관계가 없겠으나 전치되기까지는 오주간이나 된다 하며 아무리 낫더라도 병신은 될 터이요, 또 주방씨는 자기 본가로 보내어 치료케 한 바 생명이 위태하다 하며 제삼회 및 연습에 동승하였던 김경규씨가 만일 한차례만 걸러 제사회에 동승하였더면 어떠한 재액을 당하였을는지 김씨의 그날 신수는 매우 좋았다고 말하겠더라. [동경전보]
김씨의 부친은 "위험은 이미 짐작"
이에 대하여 김경규씨의 엄부되는 경성부 마포의 김병성(金炳星)의 말을 들은즉 씨는 처음에 전혀 알지 못하였다가 본사의 통지로 비로서 알았노라 하며 "경규의 무사하였다 함은 다행하나 그러나 좌등씨와 주방씨가 중상을 당함은 매우 가이없슨 일이오, 더구나 좌등씨는 경규의 선생이라 한층 더 가이없슨 마음을 금할 수 없소이다. 하여간 비행가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줄은 전부터 알았지오만은 경규의 결심이 매우 견고하고 나도 역시 그를 말리기 어려워서 허락한 일인즉 이 앞일에 대하여도 더욱 공부를 힘써하여서 아무쪼록들 위험한 일없이 좋은 비행가가 되여라 할 뿐이라"하더라.
김경규군(金景圭君)
성공한 후에는 조선에서 비행술을 교수하겠노라
<매일신보> 1919년 7월 2일자
조선청년 비행연습생 김경규(金景圭)군이 지난달 십삼일에 미도(尾島)비행장에서 비행을 하다가 목전에 비행기가 타락하여 비행기가 중상을 당한 정경을 보았으며 한차례만 뒤늦게 탔더면 김경규군도 어찌 되었을는지 알 수 없었다 함은 이미 본보에 보도하였거니와 본사에서 김경규군에게 편지로 위문을 한 바 김군은 재작일 삼십일에 감사하다는 답장을 하고 조선청년들의 찬동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말하고 성공한 후에는 조선에 돌아와서 비행술을 교수하겠다는 포부를 말하였더라.
비행계(飛行界)의 건아(健兒)가 될 김경규군(金景圭君)의 근정(近情)
지금 미도비행장에서 연습중
훌륭한 비행가가 되겠다는 말
<매일신보> 1919년 10월 29일자
이십사일 오후 한시 이십구분 우편비행의 제일착으로 영광을 온 몸에 가득 실고 주기(洲崎)에 착륙한 좌등(佐藤)씨가 여러 사람의 환영사들에게 끌리어 내리다시피 비행기에서 내리어서 천막으로 들어간 후에 사오인 미도비행장연습생(尾島飛行場練習生)이 기계를 조사하기 위하여 비행기의 아래로 들어가기도 하고 우흐로 올라가기도 하였다. 그 중에 검정안경을 쓰고 운동모자에 비행구두를 신은 쾌활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이미 몇 번 보도한 일도 있거니와 김경규(金景圭)라고 하는 당년 이십세의 청년이니 경성에 유수한 자산가 김병성(金炳星)의 아들이니 경성에서는 별로 신교육을 받지 아니하고 구교육만 받았으나 자기의 천품을 속이지 못하는 동시에 원대한 희망을 품고 작년 구월에 제국비행협회 반소금태랑(飯沼金太郞, 이이누마 킨타로)씨의 소개로 군마현 태전정 미도비행장(群馬縣 太田町 尾島飛行場)에 들어가서 연습생으로 열심 연구중인데 근래에는 종종 단독비행을 하게 되었다. 김군은 명함을 기자에게 주면서 유창한 국어로 "나는 어쨌든지 훌륭한 비행가가 되고자 하는 결심이오. 성공을 한 뒤에는 경성에 돌아가서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크게 조선의 비행사상을 고취하여 얼마든지 나라를 위하여 공헌하려 하오" 라고 조선 유일의 장래에 희망이 많은 이 비행가는 이렇게 말을 하고 도 다시 비행기를 향하여 뛰어갔다. [주기전보]
[사진설명 : 미도비행장에서 연습하는 김경규군]
(정리 : 2006.6.24,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 김경규 비행사(연습생)에 관한 자료는 계속 정리중입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조회하여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