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章 武林 三英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도깨비처럼 바위 위에 껑충 뛰어 올랐다.
사방을 찾아 헤매던 신권금강은 깜짝 놀랐다.
신권금강이 바위 위를 쳐다보니 바위 위에 올라 선 사람은 팔짱을 끼고 떡 버티고 서서 그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누더기 같은 헝겊으로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옷이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그 위풍이 당당하게 보일 뿐 아니라, 그 태연한 모습이 사방의 공기를 위압하는 듯하였다.
신권금강은
『네가 바로 그 수레를 몰던 놈이구나?』
복면을 한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면서
『신권금강, 네 이름을 밝혀라!』
신권금강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넌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르고 있다니!』
복면의 사나이는 두 눈을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소리를 높여
『신권금강! 이름을 대라니까!』
신권금강은 다시 하늘을 쳐다보면서 미친 듯이 껄껄대고 웃더니
『황방륜(黃方倫)이다. 알았니?』
복면의 사나이는 머리를 흔들면서
『못 들었다!』
태연하게 말하는 복면의 사나이를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신권금강은
『저놈이 미치니 나도 미친 사람이 되겠는걸!』
혼자 중얼거리면서
『넌 일부러 나를 골리려 드는구나?』
복면의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쑥 이렇게 뇌까린다.
『뭐라고?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어린 녀석이 입은 살아서……』
이 말을 듣자 신권금강 황방륜의 화는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욕을 하면서 몸을 비틀더니 날카로운 장풍을 일으켜서 복면의 사나이를 쳐 간다.
그의 왼손은 창날 같고 오른손은 부채같이 움직여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다.
복면의 사나이는 고의로 광태(狂態)를 부리면서 신권금강의 화가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도록 만든다.
복면의 사나이는 공격을 이러 저리 피하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있었다.
---내 어떤 초식(招式)을 써야 좋을까? 계속해서 피하기만 해야 되나? 공격을 해야 옳으냐? 능소간운을 쓸까? 횡비도강(橫飛渡江)을 써야 옳은가? 아니면 백괘도(白掛圖)냐? 됐다. 삼분불양(三分拂揚)을 쓰기로 하자!
그는 두 발을 지면에 못 박은 듯이 우뚝 서더니 상반신을 좌우로 요동시켰다.
이때 신권금강은 재빨리 몸을 왼쪽으로 한 번 꺾으면서 그의 왼쪽 손가락 두 개와 오른손으로 일 장 번개같이 복면의 사나이를 쳤으나
『휘익---』
하는 소리가 들렸을 뿐, 공격의 화살은 모두 빗나갔고, 신권금강은 바위에서 몸의 중심을 잃고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신권금강은 마음속으로 움칫하면서
---도대체 이 자식은 누구일까? 나는 분명히 저놈이 마차를 몰던 놈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복면의 사나이는 이때 몸을 번뜩하면서 적을 맞을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두 눈을 번쩍거리며 얼굴을 들었다.
복면위로 번뜩이는 눈매가 날카로와진다.
---이번에는 내가 어떤 초식을 써야 옳은가? 사부께서 말씀하시기를 적을 자세히 모를 때는 먼저 그가 어느 파인지 알아내서 이기는 법을 생각하라 하셨는데 이번에는 내가 어떤 초식을 써야 옳으냐?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왼손을 휘둘러 날카로운 솜씨로 일 장을 치는데, 그 몸이 한 바퀴 뺑 돌면서 오른손이 옆으로 스쳐 지나가니, 그 자세야말로 지금까지 구경도 못하였던 몸매였다.
이 일초를 맞은 신권금강은 깜짝 놀라면서 몸을 뒤로 빼며 하포비난(荷蒲飛鸞)의 수를 써서 반격의 태세를 갖추었다.
복면의 사나이는 굳이 이를 쫓지 않으며 두 손을 늘어뜨린 채로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한다.
(이 놈이 하포비난의 술법을 쓰는 것을 보니, 아마도 화산(華山) 숭래(崇來) 원강(元江) 三파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으나, 다시 일초를 시험하여 보자.)
그러자, 그는 앞으로 몸을 숙여 열 손가락을 뻗히면서 신권금강을 찍어 나간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대붕전시(大鵬展翅)의 초식이다.
그러나 신권금강은 아주 노련한 검객.
큰 소리로 기합을 지르면서 연달아 삼장을 쳐 들어갔다.
복면의 사나이는 궁지에 몰리면서 세 발을 물러나고서야 가까스로 신권금강의 검초를 피할 수가 있었다.
신권금강의 일격을 받고 뒤로 후퇴한 복면의 사나이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까닭은
---그가 운룡삼현(雲龍三現)의 초식을 써서 나의 초식을 막는 것을 보니, 그는 분명히 화산파가 아니면 숭래파임에 틀림없으나 다시 한 초식을 써서 그를 시험하여 보자---
그는 손과 팔을 움직이지 않고 두어 걸음 과감하게 앞으로 나가면서 왼다리를 번쩍 들어 그의 공손혈(公孫穴)을 힘껏 걷어차면서 오른손을 뒤집어 장풍으로 그를 쳤다.
신권금강은 왼손을 펴면서 앞으로 나오며 운학의 공격을 막는다.
복면의 사나이는 두 걸음을 물러서면서
『너는 화산파로구나!』
『그렇다면 어쩌겠다는 거냐?』
하며 그는 손으로 살수(殺手)를 펴나가니 실로 그의 내공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복면의 사나이는 도리어 이상한 초식을 써서 신권금강의 공격을 기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복면의 사나이는 피로한 빛도 보이지 않고 여유만만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신법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일진일퇴의 공격과 수비가 十초(招)를 지났건만 복면의 사나이는 손쓰는 방법이 부드러워지고 일거수, 일투족이 절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 절묘한 복면의 사나이의 신법을 견디어 온 신권금강은 마음속으로
---이 놈이 누구일까? 그의 신법은 햇병아리 같으면서도 초식에 있어서는 절묘하기 한이 없으니 강호에서는 이 황방륜의 위명이 떨치고 있는데 설마하니 이 햇병아리 하나쯤이야 수습 못하겠는가?
생각을 하던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손바닥에 더욱 힘을 주니 장풍은 태산준령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힘을 나타낸다.
그러나 복면의 사나이의 장력도 그와 비례하여 강하여지고 초식도 빠르기 이를 데 없다.
복면의 사나이는 비록 상대방의 장력이 강하여짐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의 솜씨에는 조금도 영향을 받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그를 죽여야 한다는 살의가 점점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갑자기
『이봐, 우리 손을 멈추고 싸움을 거두자!』
이 말을 들은 황방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지금에 와서 어찌 손을 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잇달아 주먹으로 세 번을 후려 갈겼으나, 복면의 사나이는 세 방을 후퇴하면서 용하게 피하여 나간다.
『신권금강, 우리 싸우지 말자니까!』
그러나 황방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전의 十배의 공력을 더하여 쳐 들어갔다.
복면의 사나이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듯이 눈을 지그시 감는가 했더니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신권금강을 쳤다.
『펑!』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까무러치게 놀라는 여인의 비명 소리와 함께 황방륜이 비명을 지르더니 그의 몸은 공중으로 솟아올라 열대여섯 자 밖에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싱겁게 숨을 거두어 버렸다.
운학은 객주 집에 앉았다. 그는 단숨에 다섯 잔의 황주(黃酒)를 마셨다.
그의 마음은 지금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었다. 그의 눈은 심한 번뇌를 안고 식탁 위의 시뻘건 덜 삶아진 돼지 고깃덩이를 멀거니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는 멍하니 두 팔을 뻗고, 자기 손을 들여다보았다.
거칠고 두터운 피부!
넓적하고 큰 손바닥!
그는 손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니 심한 피비린내가 자기의 코를 찌른다.
『아!』
하며 그는 긴 한숨을 쉰다.
『내가 너무 심하게 손을 썼군!』
홀로 중얼거리면서 여전히 술상 위의 뻘건 돼지고기를 노려보고 앉아 있다.
객주 집은 별로 손님이 없었고, 구석진 자리에 두 사람의 표사가 왈가왈부하며 떠들어대는 소리가 운학의 생각을 끊어버린다.
『…여봐, 무림삼영(武林三英) 중 한 사람이 맞아 죽었다네…』
『여보게, 자네는 누가 이 큰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나?』
이 대화를 들은 운학은 마음이 선뜻함을 느꼈다.
그는 무림삼영의 삼영이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리에서 전방(棧房)에서 무림삼영이란 말은 자주 들어왔었기에 더욱 귀가 번쩍 하였다.
두 사람이 계속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을 들어보니, 무림삼영이란, 무림 중에서도 공인(共認)하는 나이 어린 고수(高手)인 것 같았다.
운학은 참지 못하고 표사의 앞으로 다가서면서
『노형, 말씀 좀 물읍시다. 무림삼영이란 누구를 말씀하는 거요?』
『이 친구 촌놈이로군!』
하며 둘이서 껄껄거리고 웃더니
『그것은 무예의 술법이 아주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은 철필수가(鐵筆秀士) 정작(程綽)이요, 다음은 추운비(追雲狒) 나적우(羅廸宇)요. 셋째로 나이 어린 신권금강(神拳金剛) 황방륜(黃方倫)이지……』
이 설명이 끝이 나자, 운학은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푸른 광채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운학은 황방륜이 무림삼영 중의 한 사람이란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운학은 기쁜지 두려운지 자기의 감정이 갈피를 잡지 못함을 느꼈다.
그저 마음속으로
(그가 바로? 그가?)
하며 자기가 지금 주점에 있다는 것도 잊고 중얼거리더니, 이번에 놀란 것은 두 사람의 표사였다.
『어떻게 노형은 황방륜을 알고 계십니까?』
운학은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번쩍 들고는,
『모릅니다. 난 몰라요. 그저 이름이 귀에 익어서……』
당황하는 대답을 듣고 이상하다는 듯이 서로 눈짓을 하였다.
운학은 취기가 오른 것 같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술값을 치루고 객주 집을 나왔다.
날은 벌써 저물어버린 지 오래인 듯싶었다.
멀리서 목 쉰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고, 황야의 관도 위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운학은 이 어둠의 관도를 걸으면서 옷섶을 풀어 헤치니 불타는 가슴에 찬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낮에 일어났던 일이 주마등과 같이 머리를 지나면서 재연되니, 그의 발걸음은 어느 틈엔가 신권금강이 쓰러진 그 바위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바위 위에 서서 죽어 자빠진 시체를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른 봄의 신바람은 차가왔으나, 옷깃을 파헤친 널찍한 그의 가슴패기에서는 쉴 사이 없이 식은땀 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 동안을 멍하니 서 있던 그는, 미친 듯이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아! 나는 사람을 죽였도다!』
탄식하는 그의 가슴패기는 들먹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줄기 그윽한 향기가 그의 코를 자극하며 스며들어 왔다.
한 쌍의 보드랍고 따사한 손이 가볍게 뒤에서 그 얼굴에 쓴 복면을 벗기기 시작하였다.
운학은 고개를 돌이켰다.
마치 한 쌍의 맑고 시원한 큰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한 때였다.
그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지으며 그를 다정하게 쳐다본다.
그 천진난만한 눈동자 속에는 일종의 알 수 없는 깊숙한 매력이 서려 있었다. 그나 그뿐인가, 소녀의 몸매에서 풍기는 어엿한 기품---.
운학은 마치 용기를 얻은 듯, 극히 자연스러운 듯 손을 뻗쳐 그의 조그만 손을 쥐었다.
그는 힘을 주어
『소저…… 나는 마지못해 그를 죽였소!』
말하며, 그는 소녀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소녀는 땅 위를 응시하면서, 조그만 입가에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문 듯 그녀의 눈가에는 수정같이 빛나는 눈물이 어리더니, 예쁜 보조개 위를 흘러내려 운학의 손등을 적셨다.
운학은 가슴에 참을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운학은 소녀의 손을 잡은 자기 손에 힘을 주며
『정말 마지못해 그를 죽였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그 소녀는 큰 소리로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며 운학을 쳐다보고 고개를 크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돌연,
『몰라요!』
하더니 운학의 떡 벌어진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치며 울기 시작한다.
운학은 가슴에 보드라운 명주 옷감의 감촉을 느꼈다. 그러나 소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두 팔을 운학의 등 뒤로 돌리더니, 숨이 막히도록 세차게 그를 포옹하였다.
운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으나, 소녀에 대한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 소녀는 저 사형이라는 사람에게서 빠져 나가려고 기를 썼다는데, 그 죽음을 보자마자 상심해서 우는 까닭은?
불어오는 소슬바람은 그의 비단같이 보드라운 머리카락에서 난(蘭)의 향기도 아니고 사향(麝香)의 내음도 아닌 맑은 향기를 뿜겨 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소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거둔 소녀는 상기된 볼에 살포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생끗 교태어린 모습으로 운학을 쳐다본다.
운학은 자기 자신이 아찔하여지는 것을 느끼면서 소녀의 웃음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웃어 보였다.
소녀는---
『우리 빨리 갑시다.』
하며 시선을 아래로 돌리면서 한숨을 지었다.
운학은 소녀를 안고 두 필의 말을 앞세우고 마음에 거리낌스러운 여운을 남기면서 산언덕을 내려 왔다.
그러나 운학의 심정에는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왜 저 소녀는 웃었다, 울었다, 또 슬퍼했다, 기뻐했다, 하는 것일까?
이른 봄의 해가 뜨는 시간은 빨랐다. 그들이 산 중턱에 도달하였을 때, 뒷산 봉우리에는 해가 빵끗 얼굴을 내어 밀었다.
풀섶에는 아직 이슬이 맺혀 있었으나, 발끝에 닿는 이슬방울에서 차가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운학의 품에 안긴 소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환한 밝은 날에 이렇게 나이 어린 소녀를 안고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언가 부끄럽게 느껴져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품에 안긴 소녀의 얼굴은 안정을 찾은 듯이 잠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소녀를 깨울 생각이 없었다.
그 평화로운 잠에 빠져 있는 소녀를 깨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다시 얼마를 걸어가니, 자기가 끌러 놨던 수레가 길옆에 나가 자빠져 있었다.
요행히 마차까지 오는 동안에 만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수레를 보니, 손질을 해야만 움직일 것 같아서, 그는 소녀를 수레 안에 조용히 눕히고 나서 수레 손질을 하였다.
얼마 뒤에 운학은 마차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니
---삐이걱 덜컹!
하며 마차가 움직이자, 수레 안의 소녀는 눈을 뜨면서
『아, 여기가 어딜까?』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비로소 자기가 수레에 타고 있음을 알자, 곧 휘장을 들치고 나지막한 소리로
『여보시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운학은 마차 위에서 소매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물론 수구로 가야지요.』
소녀는 기쁘다는 듯이,
『당신은 정말 숨기기도 잘 하시는군요! 그렇게 훌륭한 무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부로 가장하니, 나는 당신이 어떤 훌륭한 고수의 제자라고 생각은 했어요! 아 참 당신의 이름은?』
『난 운학이라 합니다.』
운학은 친절하게 이름의 한문 풀이까지 하여 주었다.
『저는 요원(姚畹)이라 합니다마는 당신은 아직 당신이 어느 명문의 제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운학은 그가 즐거워하며 말하는 것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순간 사부의 생각은 머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요원에게 속이지 않고 나는 말하겠지만, 나는 사부의 성명이 무엇인지 모른답니다.』
요원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러지 말아요! 날 또 속이지 말아요.』
『나는 정말 사부의 내력을 알지 못합니다. 아가씨가 수구에 도착한 뒤에 곧……』
요원이 급히 이 말을 가로막고
『저의 언니가 수구에 있어요. 저는 빨리 언니의 집에 가야 합니다. 이제는 누가 나를 추격해도 무섭지 않습니다.』
운학은
『당신의 언니는 누구인가요?』
요원은 제법 뽐내는 것처럼
『당신은 복파보(伏波堡) 주인 요백삼(姚百森)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오직 채찍에 힘을 주어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수레가 수구에 이르자, 힘들이지 않고 복파보를 찾을 수가 있었다.
복파보는 산을 의지하고 서 있었다.
담의 높이는 서른 자가 넘어 보이고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운학은 요원을 바라보면서 수레에서 내렸다.
요원은 운학을 뒤따라 내리면서 문을 두드리니, 한 노인이 대문을 활짝 열고 나타나면서 기뻐 외치며 머리를 조아린다.
『아가씨, 돌아 오셨군요.』
요원은 노인은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운학을 향하여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멀거니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운학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자 요원은 별안간 이상한 예감을 받았다.
그는 참지 못하여,
『여보세요, 운학!』
운학의 눈은 복파보의 꼭대기에서 휘날리고 있는 깃발을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요원이 부르는 소리도 들은 체 만 체, 멀거니 깃발을 쳐다보고 서 있는 모양을 보고서는 무엇인가 무서운 예감이 드는 것 같았다.
요원은 다시 그의 옆으로 다가서면서,
『감사합니다. 다시 만납시다.』
말을 마친 요원은 미련도 없다는 듯이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린다.
옆에 서 있던 노인은 이 남루한 옷을 입은 마부에서 베푸는 요원의 태도가 마땅하지 않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운학을 노려보더니 대문을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콰당!』
하고 사납게 닫아 버렸다.
운학은 무엇인가 의문을 풀지 못한 석연치 못한 기색으로 채찍을 휘둘러 수레를 몰기 시작하니
삐걱 덜커덩---
소리를 내면서 마차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운학은 꿈의 세계에서 깨어난 듯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서 어둠이 짙어가는 지평선을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낮게 중얼거린다.
『그 깃발! 조금도 틀림없는 깃발이다. 설마 복파보가 우리 집안을 무너뜨린 곳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의 눈앞에는 요염하고 아리따운 요원의 유난히 드러나는 고운 보조개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아!』
하고 번뇌하는 가벼운 탄식이 입에서 흘러 나왔다.
『아직 열하루가 남았어. 사부께서 돌아오시면 안개에 싸인 모든 일이 밝혀지겠지?』
운학의 수레는 얼마 뒤에 복록전방에 돌아 왔다.
그의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벌떼와 같이 우르르 모여 들었으나 말 한 마디 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운학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모거산은 코와 입을 씰룩거리면서 운학을 쳐다보면서
『운학이, 갔다 오는 길에 별 일 없었나?』
운학은 목석과 같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위의 군중은 별안간 들먹거리더니 제멋대로 술렁거리며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운학은 여전히 목석같이 마차 위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모거산이,
『자네도 어제 신권금강이 분부하는 소리를 들었겠지? 등에 매화를 수놓은 옷을 입은 소녀는 바로 그의 사문(師門)을 탈출한 도범(逃犯)이야. 우리들이 바로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통보해 주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자네는 수레를 몰고 그를 도망시켜 주었으니……』
운학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 알고 있다는 표시를 한다.
모거산은 다시
『자네, 가는 길에서 그 신권금강을 만나지 않았나?』
운학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못 만났소.』
모거산은 점잖은 소리로
『자네에게 한마디만 하겠네! 그 신권금강은 자네가 수레를 몰고 소녀와 함께 이곳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급히 자네를 뒤쫓아 갔었네! 그러나 자네에겐 요행이라고나 할까? 쫓아가는 도중에 신권금강은 딴 사람에게 죽었다네! 그렇지만 않았다면 자네는 큰 화를 입었을 것일세!』
운학이 모거산을 쳐다보며 여전히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자 모거산은 마음속으로
(이 놈이 질려서 목석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며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전방 안으로 들어갔다.
벌떼같이 모였던 사람들은 다시 술렁거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하니, 그들의 쑥덕공론도 가지각색이었다.
운학은 이 쑥덕공론을 들으면서 마차를 전방 앞에 세워 놓고 전방 안으로 들어갔다.
十日이란 날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운학은 밤에 조용히 침상에 들었다.
둘레에서는 잠자리에 들은 여러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쑥덕공론으로 쑤군거리는 많은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큰 운수가 터졌다느니……
---그는 철이 없다느니……
---그는 아름다운 소녀에게 반해서……
---그의 정체를 도대체 알 수 없다는 등……
별의별 추측과 억측이 그들의 쑥덕공론의 입가에 오르내리는 것을 듣고 운학은 씽긋이 혼자 웃어 버리고는 숨을 죽이고 침상에서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초생달이 서산에 기울어 별빛이 유난히 아름답게 빛났다.
이른 봄밤의 소슬바람은 아직 싸늘하였으나 그래도 훈기를 품고 있어 남쪽의 꽃 소식을 싣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이 적막에 싸인 거리를 조용히 걸었다. 그의 머리에는 만 가지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전장 앞으로 돌아와서 수레 위에 올라타고 눈을 조용히 감고 깊은 명상에 빠졌다.
그러자 멀리서 사람의 발걸음 소리와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와 지껄이는 소리로 봐서 四, 五명은 될 것 같았다.
마차 안에 있던 운학은 귀를 곤두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방형, 화산파의 황방륜이 죽은 것은 정말 이상하단 말야!』
『황방륜은 무림계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지만 화산파 능상(凌霜) 노파의 비전을 보지 못한 것이 서운하단 말야! 내가 작년에 그를 한 번 만난 적은 있지만……』
『듣자니까 황방륜의 죽은 모양을 보니 가장 상승(上乘)한 기공(氣功)에 의하여 살상되었다고 하던데. 내가 알기로는 지난해 변방 북쪽의 싸움에서 무림 각파의 정수(精髓)가 한 사람도 살아오지 못한 지금에 이런 상승한 기공을 부릴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 못난 생각으로서는 황방륜을 죽인 사람은 소림파의 후예가 아니면 전진파(全眞派) 청목도장(靑木道長)의 제자일 것입니다. 지난 날, 천하에서 이 절정의 기공을 날린 사람은 소림파의 천일대사와 전진파의 청목도인 두 사람 뿐이었으니까요.』
수레 속에서 이 대화를 들은 운학은 문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부 노인께서 도가(道家)의 전진도(全眞道)를 깨달은 분이었으나 설마하니 바로 사부가……
밖에서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당신들 생각해 보라니까! 공동파(崆峒派)가 사람을 보내올 수가 있었을까?』
『내, 반드시 신룡검객(神龍劍客) 하마(何摩)인 것 같은데……?』
『하마가 산을 내려와 출도한지 삼 개월이 못되어 농남 천전교(隴南 天全敎) 사대당주(四大堂主)를 연패(連敗)시켰다고 하는데, 아마도 하마는 공동파에서는 十년 내에 처음 보는 고제(高弟)일 거야!』
『하마가 힘써 천전교 백호당주의 기세를 손쉽게 꺾은 것으로 봐서 하마의 검술은 분명히 벌써 검기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은데……』
『방형께선 지나치게 겸양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구화파(九華派) 화문검(火文劍) 방평(方平)의 이름을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방평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이 싱긋이 웃으면서
『공동파 하마가 오기를 기다려 우리들은 행동을 시작합시다.』
옆에 서 있던 얼굴이 뻘건 사람이
『내가 과장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 네 사람에다 공동파의 하마가 합세하여 준다면 그 복파보가 제 아무리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 할지라도 봄날의 얼음 녹듯 저절로 녹아 버릴 것이요!』
마차 안에서 복파보의 말을 듣고 운학은 움칫하여
『이크.』
하면서 몸을 흔들었다.
마차가
『삐이걱.』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아이구! 마차 안에 누가 있군!』
운학은 마차 안에서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운학은 하는 수 없이 수레에서 성큼 밖으로 나오니 네 사람의 건장한 대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방평이 그에게로 다가서면서,
『선생이 필시 신룡검객 하형이 아니십니까? 하형께선 워낙 신룡(神龍)이라 불리시는 분이라서 얼굴을 뵈올 수 없더니, 원래 일찍부터 수레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군요. 저희들은 하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운학은 어리둥절해서 말조차 하지를 못하고 우두커니 네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만 있었다.
『본인은 점창(點蒼) 오비(吳飛)이고 이 분은 구화파(九華派)의 방평(方平)이시구……』
소개를 받는 운학이 방평이란 사람을 보니 나이는 二十 전후 밖에 보이지 않는 약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썹은 칼끝 같았고 호랑이 눈에 어깨가 떡 벌어진 용모이다.
방평은 그를 보고 가벼운 절을 하였다.
운학은 어찌 할 줄을 몰라,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답례하였다.
점창파 오비는 계속해서 옆에 서 있는 백삼(白衫)을 입은 소년을 가리키면서
『이 분은 여양파(呂梁派)의 산수서생(散手書生) 공백안(龔百安)이시오.』
공백안은 운학을 보고 목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선비 차림의 푸른 두건을 썼으며, 여섯 자가 넘어 보이는 키에 희멀끔하고 준미하게 생겼다.
『하형의 영명(英名)을 오랫동안 사모하여 왔소이다.』
운학은 별 도리가 없었다. 그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비는 다시 오른 편의 거칠게 생긴 사나이를 가리키며,
『이 분은 안탕파(雁蕩派) 철교룡(鐵蛟龍) 온가(溫嘉)이십니다. 전날, 완남(皖南)에서 크게 솜씨를 보였을 때에 맨손으로 강남 녹림(江南綠林)의 온 무인을 연패시키신 분입니다. 모두 함께 친근하게 사귀시길---』
소개를 받은 온가라는 사람이 크게 웃으면서,
『오형은 제 얼굴에 도금(鍍金)을 하지 마십시오.』
운학은 번갈아 네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니, 모두 나이는 어렸고 그들의 관자놀이에는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퍼런 힘줄이 솟아나와 있었으며 눈에 넘쳐흐르는 정기가 사람을 위압시킨다.
---이 여럿은 모두 명문의 수제자들이다. 보아하니 이들이 모두 내공 외공을 겸해 연마한 고수들이다. 허나,
그의 머리에 번개같이 복파보 석자(字)가 떠오르자 그들이 나를 하마로 알고 있는 바에야 내가 지금 하마로 행세하여 복파보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염탐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제가 노상을 걸어오려니까 어떤 사람이 신권금강이 어떤 인물에게 맞아 죽은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이번 일로 해서 무림삼영의 살아남은 두 사람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입니다.』
철교룡 온가가
『황방륜은 내가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사문의 위명을 지나치게 믿고서 떠들어대고 돌아다녔으니……』
운학은 온가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운학은 시침을 딱 떼고,
『복파보의 요백삼 보주, 이분이 상당히……』
뒷말을 무어라고 이어갈지를 몰라서 어물어물하면서 그들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구화파의 방평이
『요백삼, 이 놈이 감추고 영 나타내지 않는 것이 있단 말야. 그 놈의 무술의 실력이 어떤지 아는 사람이 없거든!』
옆에 서 있던 오비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의 공력이 탁월하며 성격이 아주 괴벽스러워서 다루기 힘들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의(義)를 중히 여기고 제물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라 하기도 하니, 여하간 좀 딴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는 사람 같소이다.』
운학은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마음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운학이 하마로서의 연기(演技)를 하자니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복파보의 비밀을 알기 위한 자기의 연기가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아서, 무엇인가 새로운 방법이 없는가 하고 모색을 하였으나 이렇다 할 묘안이 나오지를 않았다.
산수서생 공백안이,
『만약에 그 일이 우리 오파 사문의 큰일과 관계가 없다면 깊이 우리가 관계할 필요가 없을 터인데……』
운학은
『그러믄요.』
하고 말했으나 그가 말하는 「그 일」이란 무엇이냐를 알 길이 없었다.
공백안이 얼버무리며 말하는 「그 일」 속에는 분명히 말하지 못할 「그 무엇」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그 일이란 분명히 열쇠가 되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점창파의 오비가,
『우리들이 기왕에 다 모였으니 곧 행동을 개시하는 게 어떻습니까?』
운학은 멍청하니 서 있다가 민망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산수서생이 맞장구를 치니 안탕파의 오가가
『우리 다 같이 하형의 명령을 쫓기로 합시다.』
한다.
오비는 손뼉까지 치면서,
『옳은 말씀이오!』
자기 나름대로의 결정을 지어버리니 놀란 것은 운학이다.
만약이라도 자기가 이들의 지휘자가 되어서 앞장선다면 자기의 정체는 금시에 탄로가 날 것이 분명하니 별안간 두려워져서,
『소제가 무슨 덕망과 능함이 있어서 과분하게 월권을 하겠습니까?』
구화파 방평이 펄쩍 뛰면서,
『하형께서 천전교 사대당주와 싸우시던 무공과 호기(豪氣)를 우리는 숭배하며 감복하고 있습니다.』
운학은 큰 소리로
『안 돼요. 내가 보기로는 방형께서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방평은 눈을 크게 뜨고 사양하려고 하니, 운학은,
『방형께서 물리치지 마십시오. 공연히 지나치게 사양하시다가 좋은 기회를 놓치시리라.』
이 말은 바로 방평이 하고 싶은 말이었으나 선수를 빼앗기니 방평은 어리둥절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다행히 오비가,
『방형께서 분파(分派)하여 행동을 개시하도록 명령하시오! 복파보는 높고 깊어서 측량하기 어려우니, 먼저 치밀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방평은 천성이 호탕하고 쾌활한 사람이라서, 껄껄거리며 너털웃음을 웃으며,
『소제가 감히 월권을---좋소이다. 우리 곧 파를 갈라서---』
하며 그는 옷소매에서 한 장의 낡은 지도를 꺼내 들고는
『이것은 저의 사부께서 측량하여 그리신 복파보의 지도입니다. 우리들은 이 왼쪽을 따라 담을 넘어 들어가기로 하되, 절대로 남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지도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복파보는 넓이와 둘레가 십리가 넘습니다. 공형께서는 왼쪽 담을 타 넘으셔서 바로 중앙으로 들어가시고 오형께서는 오른쪽 담을 넘어가셔서 부엌을 돌아 들어가시고, 저는 뒷문으로 화원의 정각(庭閣)을 찾아보겠습니다. 하형께서는 정문으로 쳐들어가셔서, 정당(正堂)을 통과하십시오. 오형께서는 경공을 써서 저희들의 연락을 맡아 주십시오.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한 칸(間)의 장진실(藏珍室)을 찾는 것입니다.』
계획을 듣고 있던 네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여러분께서는 다시 한 번 지도를 보시고 여러분의 진로(進路)를 익혀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이 나자 온가가,
『복파보는 이 근래까지도 사람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 지도는 어떻게 그렸을까요?』
이 말은 바로 운학이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오비는 웃으면서,
『온형! 당신 잊었구려, 방형의 사존(師尊) 남석옹(藍石翁) 백 노(白老)선배께서 건축학에 있어서는 천하일인자인데, 그까짓 복파보의 지도 한 장 못 그리시겠소?』
방평은,
『집의 사형께서 복파보 바깥에서 수차 지형을 살피시어 그리셨습니다. 복파보에는 일찍이 수없이 많은 매복(埋伏)의 변이 있었기에 이보다도 많은 출입문이 있다고 하니 우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네 사람은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자기의 진로를 기억하느라 애를 썼다.
얼마 뒤에 방평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자아, 갑시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방평은 운학을 바라보면서,
『하형, 갑시다! 그런데 당신의 칼은?』
운학은 말을 얼버무리면서,
『소제가 미처……』
몸을 재빨리 일으켰다.
그의 마음속에는 방평이 자기 정체를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그는 온 몸의 경공을 일으켜서,
『휙 휙---』
하는 소리를 내면서 방향은 아랑곳없이 앞서 가는 온가의 곁을 바람같이 지나간다.
온가는 깜짝 놀랐다.
---야아! 그 놈의 경공법이 보통이 아닌걸---
생각을 하면서 그도 재빨리 발을 놀려서 운학을 쫓았으나, 소위 하마는 벌써 오비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고 있지 않은가?
운학은 자기의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속도를 늦추어 공백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달려갔다.
운학은 달리면서도,
---이 여러 사람은 모두가 명문의 고수에는 틀림이 없는데, 도대체 이 깊은 밤에 복파보에 가서는 뭘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미리부터 약속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진짜 하마가 나타난다면 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모두가 무서운 경공법을 쓰니 그 속도는 정말 달리는 말과 같았다.
얼마를 달려가니 갑자기 지세가 높아지면서 멀리 복파보가 보이기 시작한다.
운학은 여러 사람의 경공법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았으나 모두 급히 달려오니 걸음이 차차 느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호흡을 조절하면서 오비의 후면을 바짝 쫓았다.
다섯 사람의 그림자는 나는 듯이 산석(山石)위에 뛰어 올랐다.
큰 바위를 이용하여 몸을 숨기면서 순식간에 복파보 앞에 다다랐다.
어둠 속에 우뚝 솟은 복파보의 웅장한 모습은 더욱 크고 넓게 보였다.
다섯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걸음을 멈추었다.
방평이 낮은 목소리로,
『이것이 바로 앞문입니다. 하형께서는 이리로 들어가십시오. 우리는 맡은 자리로 흩어지겠습니다.』
그는 품속에서 다섯 개의 연화통(煙火筒)을 꺼내서 나누어 주면서,
『장진실이 발견되지 않거든 일제히 앞마당에 모이시고, 강적을 만나 위험을 당하거든 연화를 터뜨리고……, 자 갑시다.』
운학은 네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자기가 맡은 자리로 흩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복파보의 담을 쳐다보았다.
이 때 갑자기 뒤에서,
『쏴아---』
하는 바람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무서운 장풍(掌風)이 운학을 습격하여 왔다.
그러나 십여 년을 두고 고심참담한 단련 끝에 이룩한 그의 신법은 이 무서운 장풍을 막는데 별로 힘들이지 않았다.
몸을 옆으로 피한 운학이 뒤를 돌아보니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한 사람이 그를 노려보고 서 있지 않은가!
그는 팔을 뒤집으면서 다시 운학을 공격한다.
그의 장풍은 칼날과 같이 매서운 것이었다.
운학은 가볍게,
『얏!』
하며 몸을 옆으로 비틀어 피했다.
복면의 사나이의 양 손에서는 계속 장풍이 쏟아져 나오면서 몸을 요동시키는가 하더니 바위 뒤로 문득 사라져 버린다.
운학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어느 틈엔가, 그의 손에는 수북한 종이 뭉치가 쥐어져 있었다.
순간에 일어난 일에 놀란 운학은 바위 뒤를 유심히 살피다가 종이를 풀어 보았다.
종이 위쪽에는 서투른 글씨로,
『잘 기억하여 두어라!』
하는 서두(序頭)가 시작되면서,
甲, 두 손을 한데 향하여라(雙手一合),
乙, 엄지손가락의 한쪽은 밖으로, 한쪽은 안으로(拇指一外一內),
丙, 서로 돌려가며 손바닥으로 쳐라(相互旋轉雙掌互擊),
丁, 입으로 답하여라. 본인은 유상산청(柳上山淸)에 끼어서 일외 일내 용을 점친다.(在下插柳上山清一外一內操心, 占龍). (작업자 주: 침사곡은 전체적으로 번역이 생경하고 맞춤법도 엉망인데... 이 부분도 좀 이상합니다. “아래로는 버드나무를 꽂고, 위로는 산이 맑네. 하나는 밖으로 하나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용(龍)을 점친다.” 정도의 뜻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운학은 이 기괴한 글을 해독하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이게 무슨 말일까? 복면의 사나이가 왜 나더러 기억하라는 것일까?』
운학은 중얼거리면서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었으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평의 일행과 헤어진 지가 무척 오래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몹시 당황하였다.
그는 종이뭉치를 다시 말아서 가슴에 품고 복파보 담 가까이로 기어갔다. 담에 이르자 그는 길게 한 입의 진기(眞氣)를 들이마시고 몸을 벽에 붙이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몸은 마치 절벽을 기어오르는 도마뱀과도 같았다. 담장 끝에 오르니 복파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는 안을 자세히 살피다가 벽을 넘어 경공법을 써서 복파보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운학은 처음부터 조심해서 몸을 썼다. 그것은 지금 사부의 이름이나, 내력조차 모르고 자기가 배운 무술이 도대체 얼마만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몰라서였다.
복파보 안에 들어선 운학은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방평의 사부가 말했다는 것처럼 사방에 펴놓은 진세는 지도에 그려진 모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운학은 일면 감탄하면서 사방을 경계하며 슬금슬금 화원을 지나갔다.
사방은 먹을 뿌린 듯이 어둡고 고요하기만 하다. 무서운 긴장이 몰려왔다.
그가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면서 한 잎의 낙엽모양으로 몸을 앞으로 몰고 나갈 때 갑자기---, 앞 뜰 바위 뒤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퍼뜩 했다.
검은 그림자는 마치 도깨비처럼 몸을 펄떡이면서 바위 앞으로 나타났다. 운학은 마음이 선뜻하여 앞으로 나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검은 그림자가 팔을 번쩍 들자 한 가닥의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니 그는 칼을 들고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