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사무엘하 19:31-39】(새번역)
31 그 때에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도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왕이 요단강을 건너는 일을 도우려고, 요단 강 가에 이르렀다.
32 바르실래는 아주 늙은 사람으로, 나이가 여든 살이나 되었다. 그는 큰 부자 였으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왕에게 음식을 공급하였다.
33 왕이 바르실래에게 말하였다. "노인께서는 나와 함께 건너가시지요. 나와 같이 가시면 내가 잘 대접하겠습니다."
34 그러나 바르실래는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얼마나 더 오래 산다고, 임금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습니까?
35 제 나이가 지금 여든입니다. 제가 이 나이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어떻게 가릴 줄 알겠습니까? 이 종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신들, 그 맛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노래하는 남녀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들, 제가 이 나이에 잘 알아듣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종이 높으신 임금님께 다시 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36 이 종은 임금님을 모시고 요단 강을 건너려는 것 뿐인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이러한 상을 저에게 베푸시려고 하십니까?
37 부디 이 종을 돌아가게 하셔서, 고향 마을에 있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곁에서 죽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대신에 이 종의 아들 김함이 여기에 있으니, 그가 높으신 임금님을 따라가게 하시고, 임금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에게 잘 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38 그러자 왕이 약속하였다. "물론, 내가 김함을 데리고 가겠소. 그리고 노인께서 보시기에 만족하도록, 내가 그에게 잘 대하여 주겠고, 또 나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드리겠소."
39 드디어 온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넜고, 왕도 건너갔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복을 빌어 주니, 바르실래가 자기의 고장으로 돌아갔다.
【말씀 선포】
한국의 대표 명문가문에는 조선 최고의 부자로 통했던 경주 최부자집이 빠질 수 없습니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시조인 경주 최씨 가문은 조선 중기(1600년 초반)부터 후기(1900년 중반)까지 12대에 걸쳐 300년 동안 막대한 부를 유지했습니다. 부자가 삼대를 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최씨 가문은 12대에 걸쳐 부를 유지하면서도 이웃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최 부잣집이 이처럼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훈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씨 가문의 가훈은
첫 번째는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사는 가장 낮은 관직으로 명예직에 가까운 벼슬입니다. 최부잣집 후손들은 부잣집이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고위관직을 지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부자는 공부는 열심히 하되 벼슬 욕심은 버리라 합니다. 아마도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자칫하다가 정치에 휩쓸려 역모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가문을 위해 벼슬 욕심을 내지 말라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두 번째는 1년에 1만 섬 이상 재산은 모으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소작농들은 일년 농사를 지어 소출의 일정부분을 소작료와 지대로 지주에게 바쳤습니다. 조선시대에 소작료는 소출의 절반까지 납부하는 경우가 있었고 지대는 10%정도로 소작료와 지대를 합치면 약 60%를 지주에게 바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따라서 최부자 집도 소작농들에게 소작료와 지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훈에 혹시라도 논밭을 구매하더라도 모든 수입의 합계가 1만 섬 이상을 넘지 않아야 했음으로 소작농들이 부담이 줄어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최부자네 소작농들은 다른 지주의 소작농들에 비해 훨씬 적은 소작료와 지대를 부담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부자네가 논밭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담이 덜어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는 것입니다.
흉년에 굶주린 서민들이 헐값에 전답을 내어 놓을 때 그것을 사들이는 것은 백성들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최씨 가문은 시장 에서 물건을 사더라도 떨이상품을 구매하지 않았고, 매일 아침 가장 좋은 물건을 깎지 않고 구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인들이 가장 좋은 물건을 아침 일찍 최부자집으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조치로 남의 불행을 이용하지 않고 상생을 실천하는 가문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손님이든지 잘 대접하고 집을 떠날 때는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과메기 1손(두 마리)과 하루 양식을 들려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부자 집 사랑채에는 매일 거의 100여명의 손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는 사방 100리(약40km)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경주에서 40km이내라 하면 북쪽으로는 영천과 포항, 서쪽은 대구 경산, 남쪽으로는 울산, 울주를 포함하는 엄청난 면적입니다. 일개 가문에서 감당할 수 있는 면적이 아니지만 최부자 가문은 이 가훈을 철저히 준수하였습니다.
여섯 번째는 가문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부잣집인 최부자집에 시집을 온 처자 들은 얼마나 마음이 들떴겠습니까? 그런 며느리들에게 어려운 이웃들의 고충을 알도록 일부러 비단옷을 금지하였던 것입니다.
최씨 가문의 가훈은 성경의 가르침과 유사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접하고 약자를 대변하며 그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최부자집은 이미 양심에 따라 이 땅에 정의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관아에서도 하지 못하는 일을 최씨 가문 가훈을 바탕으로 실천했으며 흉년에는 곳간 문을 열어 이웃을 구제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부자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바르실래라는 사람이며 아무런 대가 없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운 사람입니다. 세부적인 기록은 없지만 오늘 본문의 바르실래의 섬김을 통해 최부자집 이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가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르실래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의 섬김, 우리의 헌신의 자세를 다시 점검하는 귀한 시간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급하게 떠나야 했던 다윗은 후새의 도움으로 겨우 요단강을 건너감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뒤쫓아오는 압살롬의 군대와 전투에서 보호를 받을 만한 성읍인 길르앗 마하나님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초라하게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비난하며 돌과 먼지를 뿌린 이도 있을 정도로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이 났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미 전세를 기울었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는 시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다윗이 마하나님에 도착했을 때 다윗을 맞아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다윗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 바르실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바르실래는 아주 늙은 사람으로, 나이가 여든 살이나 되었다. 그는 큰 부자였으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왕에게 음식을 공급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르실래는 다윗 왕 뿐만 아니라 다윗을 따라 함께 피난 온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혼자 피난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왔기 때문에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서는 일개 족장이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음식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섬김은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르실래의 헌신에서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위험을 감수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당시 요단 서쪽은 이미 압살롬이 장악하였습니다. 삼하17:26에 보면,
이렇게 온 이스라엘과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을 쳤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을 비롯한 대적들이 바로 코앞에 있는 길르앗 땅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편을 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단입니다.
사울 왕 시절에 다윗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던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과 제사장 85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삼상 22장). 일개 족장으로 온 이스라엘을 상대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바르실래는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꼭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어 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내가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을 돕거나, 내가 도움을 주고 싶은 대로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르실래가 보여준 헌신 특징 두 번째, 조건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바르실래가 섬기는 대상을 선정하는 일에 조건이 없었습니다,
학력, 지연 어떤 정치적인 이득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바르실래는 왕궁으로 복귀하는 다윗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 정중히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르실래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절을 베푼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삶을 강조하시면서 잔치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이나 벗이나 형제나 친척들을 잔치에 초청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4:13-14에 보면,
13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14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잔치에 사람 한명 초청하는 것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원칙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바르실래의 헌신 특징 세 번째, 그의 헌신은 다윗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죽을 때까지 바르실래의 섬김을 잊지 않고 고마워했습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마하나님으로 피난와 있는 동안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에도 제일 먼저 다윗에게 달려와서 작별의 인사를 올렸습니다. 바르실래의 섬김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길 때 바르실래의 자손을 잘 보살펴부기를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7에 보면,
그러나 길르앗 사람인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서, 네 상에서 함께 먹는 식구가 되게 하여라. 그들은 내가 네 형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나를 영접해 주었다.라고 당부합니다.
당시에 왕의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는 식구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왕의 식탁에서는 왕의 최측근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핵심인물들만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유언을 잘 받들어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과 그의 형제들을 잘 돌보아 주었으며, 베들레헴의 토지일부와 저택을 김함에게 하사했습니다. 그곳이 나중에 ‘게롯김함’이 됩니다. ‘게롯’은 여관이라는 뜻입니다. 즉, 김함의 여관이라는 말입니다.‘게롯김함’이라는 말은 예레미야 41:17에도 등장합니다. 다윗 왕조가 오랜 시간 동안 김함과 그의 후손들이 베들레헴에서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400년 가까이 보호하여 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바르실래의 충성을 잊지 못해서 죽어서도 그를 돌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르실래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다윗을 섬겼으면 다윗이 그를 위해 신신당부하는 유언을 남겼을까요?
바르실래는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전심으로 다윗을 섬겼습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죠?
다윗은 바르실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르실래가 원하지 않았지만 바르실래의 섬김에 감동한 다윗은 바르실래의 후손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르실래의 헌신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헌신을 본으로 삼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씩 다시 살펴보면,
첫 번째, 바르실래는 위험을 감수하며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섬겼으며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섬김의 자세를 우리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삼은 사명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혼구원을 위해 VIP를 선정하는 과정에 이러한 섬김의 자세를 적용하면 우리교회에 나오면 좋겠다는 사람을 VIP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보다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VIP로 선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VIP를 선정하였다면 VIP를 섬김에 있어 어떤 손해가 나더라도 행하여야 합니다. VIP와 관련된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지금 VIP들은‘영원한 죽음’이라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들을 섬겨서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VIP를 섬김에 있어서 어느 정도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VIP를 섬기는 것에는 시간과 노력과 재물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바르실래는 조건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섬겼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주고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주고받는 것의 대표적인 예를 하나 꼽으라면 결혼식 축의금이 빠질 수 없습니다.
작년 기준 신혼집을 제외한 결혼식 비용이 평균 약 4,00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결혼식 비용을 보면 한 숨이 절로 나오지요?
그렇다고 호화 결혼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례할 때 예식장에서 주례를 5분을 넘기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합니다.
매 1시간 간격으로 예식 올리기 때문에, 5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예식을 진행합니다.
축가, 인사, 기념사진도 찍고 다음 예식 준비도 해야 되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비싼 피로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결혼식에 들어간 비용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축의금 갈등도 벌어집니다. 인터넷에 보면 나는 축의금을 얼마 했는데 친구는 절반밖에 안 했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야지, 몇 년 전과 똑같이 축의금 내는 것이 맞느냐?... 그래서 싸우고 의절했다... 이런 사연들이 올라옵니다. 정말로 축하하는 의미로 전하는 축의금이 이제는 주면 당연히 받아야 하는 대가성 거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모일 수 있는 인원의 제한이 있을 때, 결혼식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에서 작은 결혼식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인프라와 인식이 다 따라주지 못하여 실제 작은 결혼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작은 결혼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결혼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신부 측이나 신랑 측 양가 모두 작은 결혼식에 동의하여야 진행이 가능합니다. 가족들과 신랑 신부의 친한 친구만 모여 작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본전심리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 결혼식에 축의금 낸 것이 얼마인데 나도 받아야지...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헌신을 달라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섬겨주면 이런 보상을 해주겠지? 하는 기대가 있으면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로 인해서 언젠가는 낙심하게 되고 실망하게 됩니다. 기대 수준이 높은 만큼 실망도 크게 됩니다.
세 번째, 바르실래의 헌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성도들이 VIP를 섬길 때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할 정도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VIP에게 감동이 될 때 그들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면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열려야 복음도 들립니다.
마케팅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의 하나가‘고객 감동’ 이라는 말입니다.
한때는 고객이 감동 할 때까지 서비스한다는 생각으로 고객을 응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서비스로 인해서 ‘고객이 왕이라는 갑질’이 성행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사실 마케팅에서 고객 감동을 추구하는 이유는 매출을 올리기 위한 상술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헌신은 순수하게 상대방을 살리기 위한 섬김입니다.
상대방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는 그들에게 소망을 심어주고 힘을 내도록 돕는 섬김이 성도들의 헌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르실래의 헌신을 통해서 우리의 헌신의 자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도의 헌신은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하며, 헌신을 결정했다면 어떠한 손해가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이왕이면 섬김을 받는 사람에게 감동이 되도록 섬겨야 합니다.
가슴 뭉클한 영화 같은 이야기가 교회 안에 간증으로 피어납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 누군가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간증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강팍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물질에 매어 살던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돈이 그의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삶의 주인이 돈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돈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공부하였던 세상의 모든 학문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참된 진리는 그동안 공부했던 학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섬김에 있어서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하며, 어떠한 손해가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단 하며, 이왕이면 섬김을 받는 사람에게 감동이 되도록 섬기는 헌신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바르실래의 헌신의 본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피어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된 삶을 살아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찬양】
내게 있는 향유 옥합, 돌아서지 않으리, 우물가의 여인처럼, 섬김, 충만, 당신의 그 섬김이,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예배 찬양: 38장 예수 우리 왕이여, 575장 주님께 귀한 것 드려, 213장 나의 생명드리니
첫댓글 영혼 구원을 위한 아낌없는 헌신,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것, 헌신의 열매는 하늘나라에 차곡 차곡 쌓인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