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라면 인과의 법칙을 믿어라.
꽃은 화려하게 피어있으면서도, 나는 화려하다고 자랑하는 마음도 없어.
하룻밤 새 떨어져 버려도, 꽃 자신은 떨어졌다고 해서 아까워하는 생각도 없어. 무심하다 그 말이야.
그런데 사람은 피어있을 때는 그렇게 곱다고 야단하다가, 꽃이 지면 아까워한다. 그 말이야.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은 돈이 잘 벌리거나, 높은 자리에 영전하거나 하면
온통 집안에 경사가 났다고 좋아하고 야단이다가, 재수가 없어서 살림이 망했거나
높은 자리에서 파면당하거나 하면, 그냥 밥을 못 먹고 잠을 못 자고 그렇게 속을 상한다.
그러니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식물인 저 꽃만도 못하다는 고인의 게송이 있습니다.
방금 조실스님(전강 스님) 녹음 법문을 통해서
활구(活句) 참선법 최상승법에 대한 간곡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조실스님 법문 한 대목만 들으면 사실 오늘 무슨 더한 법문을 들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불교 가운데는 참선이 제일 수승(殊勝)한 법이고 참선 가운데도 활구(活句) 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 하는데
가장 지름길, 활구 참선을 해나가는 데는 화두, 공안을 참구(參究)해서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기의 마음자리를 깨달아버려.
화두 하나만 제대로 참구(參究)할 줄 알면 그것이 바로 참선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화두 참구 법에 대해서 항상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화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이론, 지식, 분별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기 때문에 화두를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부처님 교리로 온갖 지식과 상식을 동원해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그래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사용하지 않고 이 공안을 참구(參究)해.
그것이 참 천하의 간단하고도 쉬운데 실제로 해나가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하고 있고 따지고 있다. 그 말이야.
그래-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으면 바로 깨달은 게 아닌가, 스스로 착각을 하고, 그런 경우가 왕왕 있어.
참선은 죽비치고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야.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심지어는 속이 상할 때도 하고, 슬플 때도 하고, 기쁠 때도 하는 것이야.
견색비간색(見色非揀色)이요,
색성불시성(色聲不是聲)이라.
온갖 색을 봐도 색에 관여하지 않고,
온갖 소리를 듣되 소리에도 이끌리지 않는다.
색성불의처(色聲不疑處)면,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라.
온갖 색과 소리에 의심 없는 곳이
바로 그곳이 법왕의 성에 도착한 곳이다.
우리 중생은 눈으로 온갖 색상을 보면 거기에 끌려가 분별심이 일어나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무슨 소리를 들으면 칭찬하는 소리, 욕하는 소리, 새소리, 음악 소리,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서 분별심을 내고, 짜증을 내고, 때로는 기쁜 마음을 내고, 슬픈 마음을 낸다.
수행하는 사람은 보되 끌려가지 말고 ‘이 뭣 고’ 온갖 소리를 듣되 집착하지 아니하고
소리를 듣자마자 ‘이 뭣 고’ 화두를 거각(擧却) 한다.
황벽(黃檗) 스님께 여쭙기를
“어떤 것이 계급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입니까?”
계급이라 하는 것은 소리를 듣거나 색상을 눈으로 보거나 우리의 眼, 耳, 鼻, 舌, 身, 意를 통해서
色, 聲, 香, 味, 觸, 法 육진(六塵)을 상대할 때 좋은 소리, 나쁜 소리, 온갖 차별 경계를 계급이라 하는 것이야.
일체 차별 경계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물었어. 황벽 스님께서 이르기를
“다만, 종일 밥을 먹되 한 톨의 쌀도 씹은 바가 없고, 종일 걸어가되 한 조각 땅도 밟은 바가 없다.”
쌀을 씹지 않는다는 말은 밥을 먹되 맛이 있다, 없다, 질다, 되다.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면 벌써 쌀을 씹고 있는 거야.
깨닫지 못한 경계에서는 화두의단(話頭疑團)만 독로(獨露)-하도록 종일 걸어가되 한쪽의 땅도 밟지를 않아.
어떻게 걸어가는데 땅을 밟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밟고 걸어가되 땅이 평평하다 어쩐다는 분별심이 일어나질 않아.
이러할 때 내라 하는 생각, 내가 걸어간다는 생각, 내가 밥을 먹고 있다는 생각, 인아상(人我相)이야
종일토록 일체 사물에 여의지 아니하고, 여의지 않되 일체 경계에 현혹되지 않는다.
이것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 해. 소리가 시끄럽다고 해서 귀를 막고,
모양이 보기 싫다고 해서 눈을 막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귀를 열어놓되 보되 본 바가 없고,
듣되 들은 바가 없고,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 독로(獨露) 하게 잡도리를 해나가는 것이야.
종일토록 일체 일을 여의지 아니하되 일체 경계에 현혹된 바가 없어야 자재인(自在人)이라고 한다.
우리는 완전한 자재인(自在人)이 될 수 없지만, 자꾸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또 거각하고
놓쳐버리면 챙기고 또 챙기다 보면 나중에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화두가 독로(獨露) 하게 된다.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도리 해나가면 경계에 흔들림 받지 않게 된다.
지나간, 과거도 간 곳이 없고, 현재도 집착함이 없고, 미래에 대해서도 오는 일을 생각하지 마라.
뭐 하러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앞으로 올 일을 미리 생각하고,
현재 닥쳐있는 일을 집착할 것이냐 그 말이야. 오로지 화두만을 거각(擧却) 해라.
그래-가지고 단정히 앉아서 일체 것을 다 놔버리고, 마음의 긴장도 털어버리고,
몸뚱이의 긴장도 다 털어버리고,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눈에도 힘을 주지 말고,
자못 입을 한일자로 딱 다물고, 눈은 평상으로 뜨고, 그리고서 이 뭣 고, 이 뭣 고…
‘이 뭣 고’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생각 생각을 단속해서
행(行), 주(住), 좌(坐), 와(臥), 어(語), 묵(黙), 동(動), 정(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간절히,
간절히 단속해서 의단이 독로(獨露) 하도록 하루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노력해 갈 것이라.
이 불법 문중에서 천 사람, 만 사람이 참선한다고 하지만
겨우 서너 사람 정도밖에는 도를 깨닫는 사람이 없어.
왜 그러냐? 허기는 하되,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알뜰히 노력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조금 하다가 말다가 하기때문에, 정말 도를 이루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못한다.
공부가 어려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복잡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다만 한 생각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 하다가 말고 딴생각이 나면 그리 이끌리고,
앉아서 하다가 서면 잃어버리고, 놓치자마자 챙기고 또 챙기고 해야 할 텐데,
놓치면 거기서 경계에 이끌려 버리기 때문에 그래, 정말 이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정말 여기에다가 몸과 목숨을 바쳐 정말 간절하게 해야지. 공부한답시고 그럭저럭 지내면 재앙이 닥친다.
지금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할 때 철저히 해놓지 않으면,
늙어서 병들어서 곧 죽게 될 때 그때 생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눈 한번 감으면 내생인데 그때 염라대왕한테 끌려가서 ‘참선했습니다.’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금생(今生)에 이 생사 문제를 결정코 해결해야 해.
누가 대신해서 생사윤회의 고통을 대신해 줄 사람이 어디 있겠어?
역대 조사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해-가지고 생사해탈을 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계셔.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 생사는 무상한 것이다.
어쨌든지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시간을 아껴서 정진하도록 간곡히 부탁하신 것입니다.
생사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하면, 우리의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서 생사윤회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우리의 생사윤회를 해결 짓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견색시증처(見色時證處)요
문성시증처(聞聲時證處)라
모든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 참 나를 증득(證得) 하는 때요
무슨 소리를 듣는 그때가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곳이다.
그래서 눈으로 무슨 색상을 보는 찰나가 생사 없는 진리를 증득(證得) 하는 때이기 때문에,
참선 안 하는 사람은 색상을 보는 찰나가 마왕(魔王)에게 쇠고랑 채여서 끌려가는 찰나요,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은 색상이 눈에 띄자마자. ‘이 뭣 고?’를 하기-때문에 참 나를 깨닫는 시간이다.
일체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아. 듣는 그 찰나 거기에서 소리를 따라가지 말고 이 뭣 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다그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하신 곳이고,
걸음걸음이 미륵불이 하생(下生) 하신 곳이다.
이와-같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생각, 생각 그 찰나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고,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다음 부처님으로 탄생하신다고 경전에 쓰여 있지만,
살아있는 미륵부처님은 우리가 ‘이 뭣 고’ 챙기는 그 찰나에 바로 미륵불이 탄생하신 곳이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실천해 나간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인 것이다.
목전에 모든 경계 속에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경계, 이것이 바로 자기의 얼굴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쳐다볼 때 자기 얼굴이 보이죠?
거울 속에 나타난 그 분명한 그 얼굴이 바로 자기-자신의 모습입니다.
얼굴에 화장하면 거울 속 얼굴도 화장했고, 얼굴을 찌푸리면 거울 속 얼굴도 찌푸리고.
웃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 영상도 웃고 있을 것입니다. 거울만 거울이 아니다.
이 허공계(虛空界) 동서남북 사방사유상하(四方四維上下)
시방세계에 끝없이 펼쳐있는 이 허공이 하나의 커다란 거울입니다.
이 거울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거울입니다.
이 거울 속에는 태양도 있고, 달도 있고, 지구도 있고, 사람도 있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지가지 사람들이 그 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돌도 있고, 나무도 있고, 짐승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양들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이란 거울 속에 비쳐-져 있는 허망한 영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영상을 실다운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내의 얼굴이나 남편의 얼굴이 바로 자기의 마음 모습이 아내의 얼굴로 비추어서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달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이 없어, 자체는 밝다는 생각도 없고,
그런데 그 달을 보는 내가 기쁜 마음으로 차 있을 때는 저절로 노래가 나와,
내 마음이 슬프면 그달이 그렇게 하염없이 슬퍼서 눈물이 철철 흐른단 말이여.
그러니 그달이 어찌 나의 마음이 아니고 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내 집에 손님이 오셨을 때 내 집에 경사가 있을 때는 손님이 반갑지만,
걱정스러운 일이 있으면 반가운 손님이 와도 별로 반갑지 않다는 말이야.
그러니 어찌 그 손님에게 반갑고 반갑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아내가 남편을 볼 때도 아내의 마음이 기쁘고 흐뭇할 때는
남편을 보면 그냥 반갑고 음식도 맛있게 해 주고 싶지만, 짜증이 날 때는 반갑지 않다는 말이야.
남편은 아무 속도 모르고 하루 종일 직장에서 종일토록 일하고 피곤해서 돌아오는데
아내가 반가워하지도 않고 저녁도 그럭저럭 놔주고 만단 말이야.
남편은 까닭을 몰라. 그런데 지혜 있는 남편 같으면 아내가 속상한 일 있구나. 생각하고,
우선 밥을 먹고 아내의 말을 듣고 위안하고 하면 좋을 텐데.
종일 일하고 온 사람한테 이럴 수 있느냐 대번에 욕하고 싸움을 걸면 그냥 큰 싸움이 될 것이다.
요새는 집안마다 아들딸 교육 문제, 진학 문제로 해서 온 신경을 쓰고 걱정이 태산 같지만,
이런 문제도 허공에 자기 마음의 모습이 비친 도리를 알고서 지혜롭게 처리하고,
아들딸과 터놓고 대화해서 아들딸 마음속에 있는 문제점을 부모가 관심 깊게 파고들어서
그것을 정말 지혜롭게 처리하면 문제아도 발생 안 하고, 공부해라 안 해도 차츰차츰 공부 잘하게 되고,
나쁜 친구들하고 사귀지도 않고, 자발적으로 일찍 들어와서 공부하게 될 것이다.
정말 모든 일(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일(것)이
바로 내 마음이 비치어서 내게 돌아온 것이다. 특히 상대방의 모든 허물은 내 허물의 그림자다.
이렇게 볼 줄 알면, 많은 어려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고,
풀래야 풀 수 없는 대단히 언짢은 관계도 아주 수월하게 풀어버리고 해결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그 사람의 허물로써 미워하고 원망하고 몰아대지 아니하고,
모든 타인의 허물이 바로 내 허물이 타인을 통해서
내게 되돌아온 영상이라는 도리를 믿고 해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법만 철저히 믿기만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퍽 수월합니다.
인과법만 철저히 믿으면 법률도 필요 없고 경찰, 형사, 재판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은 먼저 인과의 법칙을 먼저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게 되면 남을 원망할 일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상대방과 원결(怨結)을 짓게 되고,
자기 자신을 점점 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꺼려-하지만 자기 마음이 편안치 못하면,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이미 지옥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자꾸 지옥에 들어가 사는 연습을 많이 해놓은 사람은
숨 끊어지자마자 연습한 대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가운데도 집은 찾아옵니다.
왜 그러냐? 날마다 집에 돌아온 연습을 했기-때문에 무의식중에도 집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지옥 가는 연습을 많이 해놓은 사람은 지옥에 가기가 아주 수월하고,
살아있을 때 천당 생활을 익힌 사람은 숨이 떨어지자마자 천당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입니다.
척추를 펴고 숨을 깊이 들어 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 내쉬면서 ‘이 뭣 고’.
속이 상하고 답답할 때일수록 오히려 이것을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 어려운 일로 인해서 더 신심이 돈독해지고
더 불법을 철저히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괴로움도 있기- 때문에
과거의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도 생사 해탈을 하기 위해서 사바세계로 오셨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에 인연을 심어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면 하나의 지혜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쇠가 불에 들어가고 물속에 들어가 쇠망치를 얻어맞지 않으면 훌륭한 쇠가 될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원망하고 포기하지 말고 당할수록 더 신심을 가다듬기를 부탁합니다.
<1989년 7월 9일, 첫째 일요 법회> -송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