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영국대사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19길 24, 정동 4)
1884년(고종 21년) 5월에 당시 주일 영국공사였던 조지 애슈턴이 당시 100파운드를 주고 신헌 부자의 가옥(정동 4번지)을 사들이고 그곳에 총영사관을 차렸다
그러나 서양인들에게 한옥 생활은 매우 낯설고 불편했으므로 새로 양옥을 짓기로 하고, 1890년 (고종 27년) 5월에 한옥을 철거하고 서양식 건물을 짓는 공사를 시작하여 1891년 5월에 준공했다
공사관 주변으로 성공회 성당인 장림교회(성공회 서울대성당)와 성베드로 병원, 수녀원이 들어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는 에밀리(Emily)로, 영국 성공회 선교부에서 간호사업을 위하여 1891년에 선교간호사로 파견되어 왔으며, 1892년에는 의사 윌스(Wiles)의 도움으로 정동에 소규모의 병원과 여자들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뒷날 성베드로병원으로 알려졌다]
1890~1892년 지어진 건물을 그대로 쓰면서 주변에 다른 건물을 증축하는 방식으로 전통을 지켜왔다
빨간 벽돌 건물인 관저의 나이는 올해 118살이다
♤ 인천 영국영사관
영국은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인천 개항장에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1882년 일본이 첫 스타트를 끊었고, 1884년 영국이 중구 북성동, 현재의 올림포스 호텔 자리에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 대사관 뒷길
1959년 영국대사관(1957년 주한영국대사관으로 승격)에게 임대된지 58년만인 2017년 8월 30일 100m의 길을 열었다
대사관 후문에 새겨진 글씨 "Honi soit qui mal y pense(호니 소잇 퀄리페어 펜스 - 생각이 사악한 자에게 재난이 있으라)"와 "Dieu et mon droit(듀 에 몽드르 - 신과 나의 권리)"는 불어이다
옛날 영국 왕실에서는 불어(외교언어)를 사용하였고, 일반 평민은 영어(생활언어)를 사용하였다
이 문장은 리처드 1세 시대(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영국 군주제의 상징이다
콜린 크룩스(Colin Crooks) 신임 주한영국대사 는 2018~2021년 평양 주재 영국대사로 근무한 뒤 올해(2022년) 2월부터 서울 주재 영국대사로 부임한 색다른 이력을 가졌다
서울엔 1995~1999년, 평양엔 2008년 이미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어뿐 아니라 조선어는 물론 문화까지 습득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1999년 방한 당시 실무를 관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한반도와 인연이 깊어 결혼도 한국 여성과 해서 슬하에 자녀가 2명이다
선원전 터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83, 정동 1-8)
선원전은 조선시대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봉안하던 곳으로 대한제국 건국 당시인 1897년경 현재의 덕수궁 중심영역인 포덕문 안쪽에 건립되었으나, 1900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되어 1901년 영성문 서쪽에 새로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빈전(殯殿)인 흥덕전(興德殿 - 일반인의 빈소와 같은 곳으로 운구될 때까지 약 5개월간 사용), 혼전(魂殿)인 흥복전(興福殿 - 장례 후에 약 27개월에 걸쳐 의례를 진행), 진전(眞殿)인 선원전 (璿源殿 - 왕실이 사적으로 역대 어진을 모시던)의 전각 등이 있었다
또한 영성문 동쪽(현 덕수초등학교 자리)에는 순종의 비(妃) 순명황후의 혼전인 의효전(懿孝殿) 도 있었다
(당시 선원전영역은 워낙 넓어 영성문대궐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영성문대궐에는 지금의 덕수궁길은 없었다
대한제국이 소멸하고 고종이 승하한 이듬해인 1920년 선원전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남북으로 신작로(현 덕수초교 - 구세군 구간)를 개설하였다
이로써 선원전은 1900년 덕수궁 대화재로 현 위치에 건립된 지 20년 만에 헐려 창덕궁으로 옮겨지고 만다
이 길은 덕수궁과 미국대사관 사이에 돌담을 쌓고 조성된 길과 연결되면서 덕수궁길이 되었다
선원전 영역이 해체되면서 그 자리에는 학교가 들어섰다
1922년 흥덕전, 흥복전이 있던 곳에 일본인 여학교 인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들어섰다가 해방 후 폐쇄되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 1908년 4월 1일 종로구 도렴동에 한성고등여학교 로 설립)가 1945년 10월 15일 이전해 와 1988년 2월 9일 개포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43년간 있었으니 선원전영역(20년간 존속)보다 경기여고가 이곳에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진전인 선원전이 있던 곳에는 일제강점기 (1930년대)에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 건립되어 나라 잃은 슬픔을 더하게 하는 곳이 되었다
해방 후 미 군정기(軍政期)를 거치면서 미 대사관에 편입되어 부(副)대사관 관저 등으로 사용되어 일반 국민들은 알 수 없는 감춰진 공간이었으나, 2018년 고종의길을 조성하면서 개방되었다
의효전 터에는 1912년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가 설치되는데, 1935년 남녀공학으로 바뀌고 명칭도 덕수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어 현재 덕수초등학교 로 이어지고 있다
학교시설이 들어선 후 획지분할매각을 통해 잘려나간 땅에는 1927년 경성방송국(현 조선일보 미술관 일대),
1928년 구세군 본영 등이 자리잡게 되어 선원전 영역 해체를 촉진하는 역할과 함께 이후 정동의 공간적 변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구세군 본영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130, 정동 1-23)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의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부인 캐서린 부스 (Catherine Booth)가 창설한 기독교 교단이다
산업혁명으로 급증한 실업자와 빈민들에게 선교와 구호의 노력을 중심으로 하였다
1878년 이후 구세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남자와 여자 모두 군복을 입고 계급과 군기를 제작하여 군대와 유사한 조직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재 세계 131개국에서 사회 약자를 위한 구세군 의 활동이 진행 중이다)
구세군의 구성은 교회를 의미하는 ‘영문’과 사회복지단체, 병원, 학교 등 사회사업 시설로 이루어진다
개신교회 목사 지위에 해당하는 책임자는 사관으로 명하며 각 지역 지휘관은 지방장관, 구세군의 최고 책임자는 사령관 등으로 호칭한다
(사관이 되기 위해서는 2년간의 사관학교 훈련을 받고, 그 후 5년 과정의 연구 과정을 마쳐야 한다)
자선냄비는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Joseph McFee)가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부둣가에 커다란 솥 냄비 걸고 난민과 빈민을 위한 모금 운동(‘이 냄비를 끓게 합시다’라는 구호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였다)이 시작되었다
(한국 최초로 자선냄비 모금 활동은 1928년 12월 박준섭 사관이 서울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면서 불우이웃돕기를 시작으로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 구세군 중앙회관(구세군 사관학교)
구세군대장 브램웰 부스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1928년에 완공된 것으로,
1985년까지 교역자 양성을 위한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되었으며, 1955~1981년에는 한국구세군교회 의 본부(구세군 대한본영) 건물로도 사용되었다
2003년에 서울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구세군사관학교는 1985년 과천으로, 구세군대한 본영은 2008년 충정로 100주년기념빌딩으로 각각 이전했다
♤ 정동 1928 아트센터
2019년 10월 4일 '정동 1928 아트센터'로 문화와 역사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1층 현관과 계단
2층 카페 헤이다 결혼식장
2층 북카페
컨퍼런스룸과 세미나룸 그리고 다양한 책들을 갖춘 북카페 형태이다
♤ 구세군박물관
2003년 한국구세군 선교 95주년을 기념하여 개관한 후 2019년 확장공사를 통해 테마별 전시관으로 재탄생하여 구세군의 한국선교 100여 년의 유산들과 기독교관련 자료 및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2개 층의 공간으로 구세군 선교역사관, 독립운동가 순교자관, 사회봉사 나눔관, 자선냄비 체험관, 구세군 악기전시관, 영상미디어관으로 구세군에 대한 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1897년 구세군의 남한 최초의 점자교육에 대하여
미국 여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은 1984년 평양에서 기독교인인 오석형의 딸 오봉래 (시각장애인)에게 점자교육을 하였고(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평양 맹학교 설립과 성경점자를 번역하였다
1898년 평양점자 제작과 평양의 맹인 소녀들에게 점자교육을 하였다
♤ 한국 구세군 연혁
1908년 대한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이, 대한제국에서 활동할 구세군 성직자(사관)을 양성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평동에 구세군성경대학 을 세운 것이 시초이다
1910년 2월 15일 구세군성경대학 개교(종로구 평동76)
1912년 8월 1일 구세군사관학교로 명칭 변경
1917년 5월 3일 한국최초로 여자사관학생 (여자신학생) 교육
1928년 9월 13일 서울시 중구 정동 1-23로 이전
1940년 11월 9일 구세학원으로 명칭 변경
1942년 3월 6일 구세학원 폐교(사유:신사참배 반대)
1947년 10월 15일 구세군사관학교 복교
1985년 11월 27일 경기도 과천시(중앙동 83-2)로 이전
1986년 3월 1일 구세군사관학교 인가
2014년 10월 2일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설립인가
2014년 10월 7일 구세군사관학교 폐지인가
2015년 3월 1일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개교
1938년엔 일제가 신사참배 강요하자, 28기 생도 전원이 거부하는 결의문을 작성해 항거하다 투옥 되는 탄압을 겪는다
1943년 일제 강제 폐교로 건물은 조선교학도서 회사에 임대된다
한국 전쟁 때는 북한 내무성으로 징발당한다
전쟁 참화에 여러 교인이 순교하는 등 고통의 시간 을 감내해야 했다
첫댓글 고종의 길을 걸어 보았지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고종의 길이지만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치욕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달 16일에 수명산 카페지기님 말씀하신 高宗의 길을 지나 봤습니다.
이백님의 [貞洞을 아시나요?] 시리즈물, 즐감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맨 마지막 컬러 사진 <구세군사관학교 1928>를 지난 달 10월 16일(수) 출강학교 중간고사 시험감독 후에 덕수궁 돌담길 지나 高宗의 길을 걸으며 세로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지금은 '정동 1928 아트센터'와 '구세군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군요?